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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7) 몇 가지 토막 이야기 – 외갓집

범용기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28 09:20
조회
2737

몇 가지 토막 이야기 – 외갓집

외증조부님은 우리 증조부님과 동시대일뿐 아니라 그 성격과 업적도 비슷한데가 있었다. 걸출이어서 자수성가하여 거부가 됐다. 자손들을 장원급제 시킨다고 함경감사에게, 또는 서울 가고 오는 여비등속으로 엽전 실은 우차가 줄지어 떠나곤 했단다. 거대한 저택을 둘러 싼 엽전 곳간에서 엽전 썩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져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단다. 어쨌든 별채로 된 사랑방과 앞대문 뒷대문은 자랑스러울지 몰라도 볕 안드는 뒷곳간, 뒷 뜨락의 곰팡이 냄새는 내게도 그리 향기롭지 않았다.

내가 철들었을 무렵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모두 돌아가시고 칠순 넘으신 외삼촌댁, 다시 말해서 ‘큰 어머니’만 생존해 계셨다.

나를 한말 개화운동 편으로 이끌어 내신 분은 채규표, 채규홍-내 외종형제분이셨다. 맏형님 규표씨는 훤칠 크고 잘난 분으로서 오래 유경하시다가 주사(主事)로 법원 서기로 마감에는 전남 광주 감옥의 ‘전옥’으로 계셨다. 둘째 형님 규홍씨는 자상하고 침착한 분이어서 거창한 두집 살림과 자녀 교육과 인사관계 등등을 빈틈없이 처리하셨다. 큰 형님의 적자 ‘태석’은 의학박사로서 서울에서 개업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형님의 맏아들은 채관석 박사로서 경성제대 영문과 제1회 졸업생이다. 일제시대에는 경기 중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해방 후에는 사범대학 총장, 고대 대학원장, 총장서리 등 요직에 있었고 지금은 정년퇴직하여 수유리 산기슭 자택에서 한가한 여생을 즐긴다.

일제 말기에 ‘공출’이니 ‘부역’이니 하는 농촌이 못견디게 부데끼는 바람에 두 분 다 가산을 정리해서 서울로 옮겨 새로 주택을 장만하고 중산층으로 여생을 지내다가 맏형님은 76세에, 둘째 형님은 84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소년시절의 향동 외갓집을 맘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는 향곡선생 유허비가 있다. 춘추제향 드릴 때면 나도 참배했었고 추석 성묘 때면 형들을 따라 탑향산 꼭대기 조금 못 미쳐에 모셔진 향곡선생 선친 묘소와 향곡선생 자신의 묘소에 참배하기도 했다. 향곡선생은 선친 묘소 앞에서 삼년을 수묘했단다. 제자들도 따라가서 모시고 날마다 강의를 들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기념으로 쌓았다는 자연 석탐이 여기저기 지금도 그대로 있다. 거기가 ‘표고’로서는 그리 높은 축이랄 수 없으나 워낙 추운 지방이라 나무는 못 자라고 진귀한 화초인 고산 식물만으로 수 놓은 ‘쥬단’이 펼쳐졌다.

한참 내려와서야 가둑나무 숲이 북풍 한설과 악착같이 싸우며 살아남아 앙당지고 못 자라고 비틀어진 몸을 뻗치고 서 있다. 버림받은 백성 같으나 삶은 억세다.

선조들 제사 때면 너무 까다로웠다고 한다. 음식 차리는 부인네도 제계 목욕하고 떡치는 젊은이들도 침이 튈까봐 입에 ‘마스크’를 쓴다. 때가 갈수록 해이해지긴 했지만 우리 집안에서 보다 더 극성스레 형식적이었다. 서울에 이사하신 다음에도 제사는 지냈지만, 비좁은 대청마루에 젯상을 차려 놓으면 아낙네들 앉을 자리도 없고 바깥 뜨락은 더 형편없이 작아서 남자들은 앉도 서도 못한다. 결국 남녀 다같이 간단하고 한번 절하고 젯상을 물린다.

얼마 후에는 그것도 그만 둘 밖에 없었다. 유교의 생명은 ‘제례’도 이래서 소리없이 증발되버리는 것이 아닐까?

‘종가’를 이은 서울의 채태석 박사가 지금 향곡선생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따라 향곡선생의 ‘형식’아닌 ‘실학’이 후손에게 맥박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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