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18) 서울 3년 – 인쇄된 첫 글
[범용기] (18) 서울 3년 – 인쇄된 첫 글
당시 백부님은 서울 견지동에 한성도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겸 전무로 출판사업에 전념하셨다. ‘서울’이란 월간 종합잡지, ‘학생계’란 학생을 위한 월간지도 내셨다. ‘학생계’ 편집은 그 때 새파란 청년인 오천석 씨가 맡았고, ‘서울’은 주로 장도빈 선생이 지도 편집하시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도빈 선생은 조선역사 전공이어서 한문으로 된 조선역사 문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계셨다. 나는 그것을 정서하는 조수로 얼마 일했다. 하루는 양반세도 가문들로 조직(?)된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란 이름의 발기 취지문이 장도빈 선생에게 전달됐다. 장도빈 선생은 “아예 ‘大凍死蚊會’라고 하지!”하며 못마땅해 하셨다. 음은 같지만 뜻은 ‘크게 얼어죽은 모기들 모임’이란 제목의 논문을 써 보냈다.
아마도 내 마음 심층에 누적된 숙제를 풀어보자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 당시 중학생들은 거의 전부가 조혼의 희생자여서 연애결혼에의 동경은 더욱 절실했다. 그런데 이혼의 관문은 굳데 닫혀 열리지 않았다. 무리한 이혼이냐 억지 화해냐의 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앓기만 하는 것이었다.
가문 중심의 구식 결혼관은 어떤 개인이 다른 개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문에서 다른 가문의 사람을 자기 가문의 성원(Member)으로 데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결혼’은 두 인격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자웅(雌雄)의 동서(同棲)와 번식에 해당된다. 19세기 낭만주의에 영향된 학생으로서 이런 당면한 사태에 고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학생의 아내된 여자의 세계는 다르다. 그들은 ‘결혼’과 함께 그 운명은 숙명으로 굳어져 출구가 없어진다. 그녀는 그의 사람이요, 그 가문의 사람이다. 그 이와 그 가문에서 버림받는 순간 그녀의 삶은 무(無)가 된다. ‘이혼’이란 관문의 빗장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처지는 비극이다. 그러나 이혼당한 ‘아내’란 여인의 경우는 더 큰 비극이다. 그녀는 무너진 하늘 밑, 버림 받은 무덤 속에 산다. 그녀의 푸른 원한이 모든 삶에 서리를 끼어 얹는다. 그렇다면 위대한 미래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자기를 하늘같이 믿고 목숨같이 아끼는 한 ‘인간’을 짓밟고 내쫓고서 민족이나 국가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진짜 ‘철면피’가 아닐 수 없다. ‘이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서 민족과 나를 말하지 말라!
대략 이런 내용의 글을 써 보냈다. 이것이 그 다음호 ‘학생계’에 이등 당선작으로 발표되어 인쇄물에 실린 내 글의 ‘효시’가 됐다.
글을 써 낸다는 것은 쓴 사람이 그만큼 스스로의 삶에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경우에도 그러했다고 본다. 아무리 철없이 쓴 글이라도 그것이 무시로 나를 고발한다.
내가 결혼식 때 ‘초례’에서 받은 엄숙한 인상과 아울러 공개된 이 글이 ‘운명’같이 내 삶을 묶는다.
지금, 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모든 문화 유산의 꼬리표가 붙기 전 인간, 즉 인간이라는 그것 때문에 인정해야 하는 ‘인간’에게 무조건 부여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내 아내의 인간적 존엄, 자유, 평등을 침범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운명을 사명으로 변질시키려는 은혜의 질서에서 주님의 연민을 구할 뿐이다. 그럭 저럭 다 살은 인생이지만 이런 넉두리감은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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