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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17) 서울 3년 – 중앙 YMCA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8 13:58
조회
1109

[범용기] (17) 서울 3년 – 중앙 YMCA

‘만세’ 이후 3ㆍ1운동 33인과 주요 관계자들이 감옥에 가고 그 뒤에 남아 학생들과 민중과 청년들에게 이 운동을 ‘의식화’시킨 본산이 서울 중앙 YMCA였다고 하겠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민족의식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발굴하고 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했던 것이다.

이상재, 윤치호 그리고 총무 신홍우 세 분이 어울려 네 일, 내 일 없이 날마다 뭔가 하고 계셨다. 간혹 미국서 명사가 오면 강연 한번 안 할 수 없었고 그 통역은 신홍우 씨 아니면 윤치호 선생이 담당하였다. 매 주일 오후 두시에는 빠짐없이 ‘일요강좌’가 있었다. 종교적 민족적 교양 강좌였다.

이상재 영감은 무던히 익살이였던 모양이어서 많은 일화를 남기셨다. 한번은 일본 국회의원들이 민정을 살핀다호 한국에 왔었단다. 그들은 민간 원로 이상재 연감을 만나잖을 수 없었다. 그 일행의 대변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중 하나가 이상재 영감 앞에서 ‘내선일체’를 논하고 ‘일본과 조선은 결혼한 한 가정’이라고 했단다. 이상재 영감은 당장에 “그게 강간이지 결혼인가?”했다고 한다. 3ㆍ1운동 때, 이상재 영감은 그 축에 들지 않았지만 몰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경찰은 늘 불안해 했다.

한번은 종로 경찰서장이 영감을 모셔다 놓고 “영감 누구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거요?”했단다. 이상재 영감은 “독립이란 혼자 선단 말인데 혼자서 하는 거지 누구는 무슨 누구야”했단다. 성급한 일인이라 손을 뺨에 날라올려는 순간 영감은 “너희 왜놈들은 아비도 없단 말이냐? 후레자식 같은 놈!”하고 호통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 시인 변영노 씨는 한창 ‘청년’이라 Y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상재 영감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셨단다.

하루는 변영노가 무심코 종로를 거니는데 뒤에서 이상재 선생이 변영로 씨 부친 함자를 부르며 “변○○씨 야!”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돌아서면서 “왜 저더라 부친 함자를 부르십니까?”했다.

“이놈 너 변○○‘씨’ 아니야?”하고 깔깔 웃으시더라는 것이다. ‘씨’는 ‘종자’니까 ‘아들’에 해당한단 말이다.

송창근 형이 첨 서울 왔을 때 아니 이십이 되나마나였는데 YMCA에서 이상재 영감을 처음 뵜단다. ‘영감’께서 ‘바나나’ 한 가닭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시더란다. 송형은 처음 보는 과일이 뭔지도, 어떻게 먹는지도 몰라 어리둥절했다. 영감은 자기 손에 바나나를 껍질채 한입 뜯어 자시는체 했다. 송형도 그렇게 했다. ‘영감’은 깔깔 웃으시며 “저 촌놈 바나나 먹는 꼴 봐라!” 하고 놀리더라는 것이다.

어느 땐가 일요강좌에서 강연을 하시면서 “여러분도 정치를 할 줄 알아야 돼! 민족이니 나라니, 하면서 정치를 모르면 뭐가 되나. 정치라는 것은 저쪽에서 ‘장군’하면 이쪽에서 ‘멍군’할 줄 알아야 한단 말이지……”하시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에는 영감을 전담한 형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영감을 존경하고 아버지같이 모시고 싶어도 했다. 영감께서 임종하실 때 그는 진정 마감 큰절이라도 드리고 싶어 달려갔다. 영감께서는 “조선놈은 죽을 때에도 일경 입회 아래서 죽어야 하나?”하시더란다.

그는 너무 억울해서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Y는 겨울에 스팀이 돌아, 들어만 서면 훈훈한 것이 좋았다. 추운 ‘방랑 소년’인 나는 거의 매일 잡지실에 앉는다. ‘개조’니 ‘중앙공론’이나, 그 밖에도 많은 일본 잡지들이 있어서 심심찮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소년부나 청년부 회원도 아니고 사실 아무 닿는데가 없었지만 누구냐 묻는 사람도 없고, 나가라 들어가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다찌가와’(芥川龍地介)의 자살직전 작품에 아찔한 깊이를 느낀 일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는 기사가 났다. ‘역시 그랬었구나!’하고 나는 슬픈 독백을 뇌까리기도 했다.

나는 YMCA 영어 전수과 삼학년에 한 일년 다녔다. 정경옥 군도 같은 반이었고 홍병덕 씨가 교무 책임자였다. 졸업시험도 다 같이 쳤는데 발표가 없었다. 홍병덕 씨에게 따져 봤다. 성적은 첫째지만 일년내내 수업료를 안냈으니 ‘학생’이랄 수 없잖으냐는 것이었다.

Y에는 강당 입구 옆에 김은호 화백의 ‘승천하는 예수’가 걸려 셈서한 아름다움을 품기고 있었다.

어쨌든, YMCA는 무일푼의 젊은 낭인을 괄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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