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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13) 회령에서 3년 – 장가가던 이야기

범용기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30 11:09
조회
1315

[범용기] (13) 회령에서 3년 – 장가가던 이야기

나이 열일곱 정도 밖에 안되는 소년인데도 서기(주사) 어른들이 놀러나갈 때면 나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회령읍에서도 제일 찬란한 거리가 일인들이 경영하는 공창가였다. 군청 어른들은 나를 데리고 간다. 기가 약한 나는 같이 간다. 거기에는 어른들의 정부랄까, 서로 정붙이 계집이 하나씩 있었다. 그 애 방에서 술이며 요리를 청해다 먹으며 애무하다가 잔다. 그런 경우에 나도 같은 방에서 같이 먹게 한다. 그러다가 자리펼 무렵쯤이면 어떤 애기 여인이 들어와 자기방에 유인한다. 그녀는 자기 방에 가자고 나를 계획적으로 조른다. 나도 성(Sex)에 무심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내키질 않아서 기어코 뛰쳐 나오고 만다. 어쨌든 결혼 때까지 나는 숫총각이었다. 뭐 자랑삼아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이 십칠 팔세 되면 아무리 수줍어도 속으로는 춘정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사춘기’란 것은 인생의 봄철이어서 계절에서 봄 오듯 낙자없이 오는 것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 처녀를 보면 괜히 가슴이 간지러워 도둑눈을 판다.

그때 나는 집에서 백십리 떨어진 회령군청 간접세과에 고원으로 있은지 만 3년, 나이는 18세였다.

형님의 편지가 왔다. 웬일인가 했더니 우리 집에서 한 15리 떨어져 있는 회암동 장석연씨 맏따님과 혼약이 되어 음력 8월 29일에 ‘성례’(결혼식)을 하겠으니 곧 오라는 사연이었다.

날짜가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아버님과 형님 분부를 어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하라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군수에게 사연을 말하고 휴가를 얻었다. 전 직원이 축금을 걷어 장지에 정성스레 쓴 축장과 함께 쟁반에 담다 준다. 나는 한분 한분 돌아가며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것이 바로 결혼날짜 나흘 전이었다. 첫날은 40리를 걸어 행영읍 성 밖 여인숙에서 자고 다음날 80리를 걸어 갈 작정이었다. 종성과 경원 지경에 뻐친 송진산 줄거리도 넘어야 했다. 그것이 무시무시한 30리 무인지경 호랑이 넘나든다는 ‘강팔령’이다. 내게는 떠날 때부터 거기가 문제거리였다. 바로 고개 밑 5리쯤에서 소낙비가 퍼붓는다. 어느 길가 농가에서 비 멎기를 기다렸지만 산비라 구름이 겹쳐 빗줄기가 바닷 물결처럼 파상(波狀)으로 밀려온다. 할 수 없이 우비도 집어 치우고 빗 속을 마구 달렸다. 강팔령에는 오솔길과 새로 난 국도 두 길이 있다. 옛 길은 거리가 가깝지만 가파롭고 국도는 완경사지만 멀다. 나는 국도를 택했다. 오솔길에서 호랑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하두 자주 들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산에 접어들자 비는 더 거세다. 나는 단 혼자서 겁결에 숨가뿐 줄도 모르고 달렸다. 산 너머도 인가 없는 십리길이다. 우리집 앞 언덕 ‘향두막’ 앞에 왔을 때는 아주 캄캄한 밤이었다. 형님은 안절부절 앞 길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꼴로 들어오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이 글썽했다. 온 집안이 떠들썩 야단이다. 내 없는 동안에 우리 가문에 시집온 첨 보는 새댁네까지도 뛰어나와 반긴다. 형님이 그렇게까지 초조해 했던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학교 나오고 출세하기 시작한 신식 젊은이에게 눈치도 귓땜도 없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아가씨를 ‘이게 네 아내니 평생 같이 살아라’고 떠맡긴다는 어른들의 처사가 스스로도 불안했을 것이다. 그 애가 ‘항명(抗命)이라도 하면 어쩌나! 집안 망신은 어떻게 당하나!’

이만저만한 조바심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결국 내가 왔다는데서 모든 ‘걱정’이 ‘환호’로 바뀐 것이다.

이튿날, 나는 아버님이 부르시는대로 장지에 잡채문을 썼다. 준비된 ‘사모각대’에 탕건과 갓까지 쓰고 동네 어른들을 예방했다. 그것이 가관식이라 했다.

혼인 날짜가 왔다. 식은 신부집에서 치룬단다. 나는 우리 집안 어느 애마가(愛馬家)가 자랑스레 기르는 흰데 푸른점 박힌 ‘청총마’를 타고 난생 처음 ‘처갓집’에로 갔다. 회암동 무연한 언덕 중턱에 맨드럼히 붙어 있는 낡은 기와집이었다. ‘장석연’이란 문패가 붙어 있다. 우리 형님 또래 나이로서 글은 모르고 평생 농사꾼으로 자란 순진한 분이었다. 그가 내 ‘장인’이란다.

후에 장(將)씨네 족보를 잠깐 드려다 보았지만, 이조 중엽에 중국 산동성에서 이민하여 충북 아산에 상륙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중국이 세도하는 ‘대국’이었기에 장씨 일족을 임군이 입궐시켜 환영하고 반열(양반계열)에 들이고 ‘아산’이란 본(本實)을 주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상민’이란 천대는 면했지만, 순 중국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성격이 무던히 ‘대륙적’이고 좀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아무리 어려워도 말없이 오래 참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결혼식이다. 색시와 부인네들은 집안에 있고 남자들은 멍석, 돗자리 등속을 깔고 앉았다. 젊은이들은 울타리 안팍에서 서성댄다.

첫 ‘프로’는 ‘전안’이다. 기러기를 드린다는 뜻이다.

그때 색시는 사잇방에 있고 창문은 열렸지만 주렴이 드리워 있다. 나는 색시방 문앞에 섬돌 밑에 꿇어 앉아 상위에 놓인 나무 기러기를 부채로 세 번 색시 쪽으로 민다. 그것이 ‘전안’이다. 기러기가 자기 짝을 찾아 접근하는 – 말하자면 워밍업일거다.

다음은 초례다. 남자의 ‘우잉’(구혼)을 받아들인 색시는 사잇방에서 윗방으로 옮겨 주렴을 걷고 바깥 뜨락에 나온다. 큰 머리에 대례복, 그만하면 미상불 ‘성장’이었다. 나는 바깥 초례장 신랑자리에 앉아 있다. 뒤에 병풍, 그리고 보료 깐 자리 앞에 빈 상 하나 놓여 있다. 맞은편에 준비된 신부 자리도 마찬가지다. ‘에스코트’하는 젊은 아내들이 신부의 면사포를 들어 앞이 보이게 한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신부의 생김새를 봤다. 키가 훤칠하고 낯이 갸름하고 콧날이 서고 … 그런 색시였다. 내가 꿈꾸던 타입과는 종류가 달랐다. 나는 맘에 꼭 든다거나 싫어 못견디겠다거나 할 것도 없는 – 그런 색시였구나! 하고 남의 일 같이 담담했다! 신부는 내 맞은편 병풍 안 자리에 앉았다. 부인들이 옆에 앉아 시중을 든다. 신부는 나를 거뜰떠 보지도 않는다. 보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읻. 신부란 시종 눈을 내리 깔고 있어야 한다니까.

초례가 시작된다. 사식은 김향장이라는 우리 집안 어른이 맡았다. 청의동자 둘이 하나는 푸른실, 하나는 붉은실, 어깨에서 늘이며 신부와 신랑사이를 오간다. 청의동자가 신랑이 신부에게 부어드리는 술 한잔 쟁반에 받혀 들고 신부에게 간다. 걸음 걸음 어깨 너머로 늘여지는 푸른실이 푸른 선을 그린다. 신랑의 잔을 받은 신부는 그 잔에 입을 댓다가 상에 놓고 자기가 준비한 쟁반에 술 한잔 손수 부어 홍실 늘인 동자에게 준다. 붉은실 늘이며 동자는 신랑에게 전한다. 이렇게 세 번 반복한다. 말하자면 ‘청실홍실’ 누리며 ‘삼배주’로 ‘天地人’ 삼재(三才)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 예식은 아주 정중하고 씸볼릭해서 결혼상대자가 맘에 들든 안들든 이 맹약을 깨뜨릴 수는 없다고 느끼었다. 나는 그때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도 믿지 않았지만, 믿은 다음에도 이 맹약은 어쩔 수 없는 구속력을 갖고 있었다. 의리가 중하기 때문이다.

식이 끝나자 신랑은 윗방에 좌정한다. 동네 청년들이 신랑을 졸른다. 그리하여 신랑을 아끼는 장모가 안절부절 톡톡한 상을 차려온다는 것이다. 신랑을 조르기도 전에 술상 돼지다리, 과실 등등이 푸짐하게 들어왔다. 그 이상 달라할 염치도 없게 됐달까? 그들은 젊잖게 내 시국담을 듣는 것으로 끝났다.

이제는 신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행사의 ‘날짜’만이 아니라 ‘시간’도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가마를 타고 나는 예의 ‘청총마’를 타고 떠났다. 신부의 옷장과 그 속에 배꾹 찬 옷감, 옷종류, 시집어른들과 친척들께 드릴 예물등속이 따로 수레에 실렸다. 나는 신나게 말을 달렸다. 천생 처음타는 말이지만, 네굽 안겨 신작로를 달리는 기분은 나쁘지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때, 젊은 아낙네들이 놀려댄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허전하고 싱거워졌다. 여인들은 신부 앞에 놓을 큰상 차리기에 바빴다.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다. 먹으라는게 아니고 보라는 거다.

얼마 후에 신부 일행이 들어온다. 갑자기 활기가 넘친다. 사돈대접, 동네어른 대접, 술과 돼지갈비 –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고 석양의 고요가 깃들인다. 가까운 집안 젊은 아낙네들만이 남는다.

신방에 든다. 신랑더러 신부의 큰 머리를 벗기란다. 하라는대로 했다. 젊은 여인들은 신부의 예복을 통상복으로 갈아 입혔다. 차려온 천들을 구경했다. 그게 빈약하면 멸시 받는다고 들었다.

‘초야’가 문제다. 신랑이 신부의 옷고름을 풀고 자리에 같이 눕는거란다. 짖궂은 젊은 여인들은 침으로 창호지를 뚫고 엿보며 깔깔댄다. 신랑이 촛불을 끄면 다들 헤어진다. 첫 밤에는 신랑이 신부 옆에 눕는다는 특권밖에 없다. 옷도 꽁공 입은 대로다. 첫날밤 첫말이 중요하단다. 나는 무슨말 해야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뭐라고 하긴 해야 한다기에 얼껼에 “나는 이제부터 공부도 해야겠고 나돌다 다니기만 할 것 같은데 당신은 집에서 어른들 모시고 식구들과 의좋게 몇해구 기다릴 수 있겠오?”

“그래야 할 것 같은데!” …… 얼껼에 나온 말이지만 오랜날 지난 오늘에는 무슨 예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신부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야 이제 이 댁 사람이고 당신 사람인데 그런걸 왜 물으시오?”한다.

사흘 후, 신부는 침실에 든다. 결국 피동적이지만 애무도 받고 몸도 맡긴다. 그래서 진짜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된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남편으로서의 ‘의리’가 전부였던 것 같이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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