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장공의 글

[범용기] (26)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3년생(신아산 학교에서)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3 17:46
조회
897

[범용기] (26)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3년생(신아산 학교에서)

나는 어느날, 학생 학부형 청년 원로들 모두 한 자리에 초청해 놓고 일종의 ‘데모’를 해 볼 생각이 났다. 그래서 교사회를 열고 의논했다. 하기방학 무렵에 ‘방학식’이란 이름으로 ‘학예회’를 열기로 했다. 아이들 중에서 노래, 웅변, 암송, 그림, 글씨 등등 특기대로 발표 또는 전시하게 하고 학사보고도 하고 신문화에 대한 소개도 할 작정이었다.

그날이 왔다.

원로분들이 먼 동네에서까지 많이 오셨다. 아버님도 오셨다. 청년들도 모여서 학교가 배꾹 차고 문밖에 둘러서기까지 했다.

선생들은 각기 맡은대로 보고도 하고 자기 반 학습에 대한 고안과 자랑도 했다. 그때 나는 연설을 했다.

그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희망이 무엇입니까? 국토? 정치? 경제? 권력? 아무 것도 가졌달 수 없지 않습니까? 과거를 자랑할 것입니까? 잃어버린 것을 자랑할 것입니까? 모두 부끄럽고 슬프고 못난 것 뿐이 아닙니까? 그러나 한 가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이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의 백지(白紙)입니다. 우리가 그리는대로 됩니다. 여러분이 또 이 아이들에게 아무렇게나 먹칠할 작정이십니까?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아이들 가운데서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 날지 누가 압니까? 이 아이들은 여러분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여러분 집안 아들 손자로만도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고 꽃망울이고 희망입니다. 그래서 나는 돈 한푼 받는 것 없이 벌써 3년째 이 어린이들을 가꾸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일이 이 밖에 도 무엇이 있습니까?……” 등등

나는 서울서 제일 웅변가라는 박일병 씨 김창제 씨 등 선배들의 연설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고 웅변쪼로 흥분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버님을 뵜더니 “네가 그렇게 말 잘하는 줄 몰았다. …… 나는 네가 말재주 없는 줄 알았는데 말 잘하더구나!”하며 기뻐하셨다. 아버님은 내가 늘상 입안에서 모기소리 만큼씩 말을 씹어 넘기는 게 언짢으셨던 것이다. “말 좀 들리게 똑똑히 해라”하는 나무람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걱정이 풀리신 모양이었다.

학교는 다시 좀 활기를 띠게 됐다. 생전 안내던 월사금도 가져오고 학부형회에서 ‘거마비’라고 돈도 얼마씩 선생들께 주는 것이었다.

‘만세’ 이후 ‘사이또오’ 총독은 교육에서 공사립을 평등하게 대우한다고 했다. 그 댓가로 사립하교, 밋션스쿨에서도 모두 문교부 자격증을 가진 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렸다. 그래서 숭실학교의 강봉우, 채필근, 두 분이 나이 사십인데도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는 중이었고 송창근 형도 그이들과 함께 있었다. 두 분 학비로 세 분이 공부한다고 들었다.

이 세 분은 나를 무척 아끼셨는데, 오래간만에 편지가 왔다. “그만큼 촌에서 일했으니 이제부터는 네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내용이었다.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덮어 놓고 동경에 오라는 것이다. “다들 고학하는데 넌들 못하겠냐”했다.

여비를 만들려면 월급주는 학교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마침 한 삽십리 떨어진 두만강 가 요새지인, 신아산 소학교에서 청빙이 왔다. 나는 당장 가기로 하고 그 뜻을 학부형들에게 알렸다. 학부형들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예산을 세운다. 월급을 얼마씩 드린다 하고 야단이다. 제발 ‘번의’하라고 졸른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나는 저쪽에 부임 날짜까지 통고했기에 어쩔 수 없다고 ‘번의’를 거부했다. 이제 한 육개월만 더 가르치면 졸업될 학생 오륙명은 내가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신아산 학교는 인가 맡은 사년제 소학교인데 사학년까지는 약 백명되는 학생을 교사 셋이서 복식으로 가르치게 돼 있었다. 내가 최고 학년을 맡았다. 설립자도 교장도 동네 노인 어른으로서 ‘명예’뿐이었다. 그래서 교장, 교사, 설립자 할 것 없이 실무는 내가 하고 늘상 그이들 댁에 들러 보고하고 의논도 하고 했다. 무조건 내 말대로였다.

신아산서 여섯 달 있었다. 월급도 제대로고 부수입도 얼마 있었다. 거기는 요새지요 국경 ‘보루’니만큼 경찰서, 헌병대, 그리고 군대도 한 소대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간부, 헌병장교, 육군 장교들 중에서 조선어 학습 ‘붐’이 일어났다. 성적이 좋으면 수당금도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게 조선어 강사겸 시험관이 되어 달라고 했다. 거기서 적잖은 사례금이 나왔다.

신아산 여섯 달 동안 한의겸 양의(洋醫) 대행하는 김용학 씨와 금융조합 서기로 있는 김낙현 씨를 가까운 친구로 사귀었다.

집에서는 아내를 신아산으로 보내왔다. 할 수 없이 김낙현 부부와 둘이서 두 살림 할 집을 세내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 동안에 아내가 임신했다.

어떤 매서인(성경 행상) 노인이 신아산에서 주일 예배를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는 학교 숙직실에서 내가 데리고 온 귀낙학교 솔업반 학생 오륙명과 함께 예배를 봐오던 터였지만 학교에서 또 문제 될까봐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공개 예배소가 생겼으면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예배를 인도할만한 소양도 능력도 없었다. 몇 주일 후에 아주 사그러지고 말았다.

동경 갈 여비쯤은 됐다. 마침 ‘히로시마’ 중학교 사학년생인 김예근 군이 겨울방학에 웅기 어머니 집에 왔다가 나 있는 데까지 찾아왔다.

그는 나더러 일본에 동행하자고 권한다. 나는 신아산 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학교에도, 공부를 이유로 사표를 냈다. 공부간다는데 만류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창꼴집’에는 안들리기로 했다.

거치장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래면 신아산 떠나는 날 신아산 친구들이 ‘송별회’랍시고 하루밤 술잔치가 융성했다. 나는 끝없는 권주(勸酒)에 곤드러졌다. 새벽녘에사 집에 와 토하고 누웠다. 다음날 밤, 나는 아내에게 많은 말을 했다. 그 무렵에 나는 이광수의 『무정』, 『유정』 등 소설을 읽었기에 거기 나오는 달콤한 용어들을 섞어가며 아내를 설득했다. 말주변 없는 나로서는 모름지기 ‘걸작’인 것 같기도 했다.

다음 날 아내는 뚱뚱해진 배를 안고 보따리를 꾸려 이고 둘어서 신아산을 떠났다. 아오지까지 같이 걸었다. 아오지 조금 지나 웅기 길과 회암 길과의 갈림목에서, 나는 웅기로, 아내는 회암동 본가로 갈라졌다. “우리 서로 돌아보지도 말고 가자”고 했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울상이 되어 아내는 걸었다.

얼마 안가서 길이 산 모퉁이를 돌아, 서로 볼 수도 없다. 삼년만에 집에 와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여기까지라도 데리고 와서 맡기고 가도 갈게지 배부른 애에게 짐을 이워 혼자 보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장모가 노발대발했다는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청산학원 졸업반 때 여름방학에 귀국하였는데 장모는 삼년전 노여움을 터뜨리려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처남들이 가로막는 바람에 장모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머니는 뭘 그런 말씀 하시려는 거요? 매부께서 그런 것쯤 몰라서 그러셨겠소? 큰 일 앞에 두고 그래야 했길래 그랬을텐데 어머님이 뭘 아신다고 그러세요? 아무 말씀 마시고 매부님 대접이나 기껏하세요!”한다. 장모는 “그래 내가 뭘 아니?”하고 화제를 돌리셨다.

어쨌든, 나는 웅기에 갔다. 그날 밤부터 폭풍우 물결이 태산같고 배도 드나들지 못한다. 날마다 비만 퍼붓는다.

나는 여관집 골방에 혼자 앉아 서울서 발간하는 잡지들을 읽으며 우울했다.

전체 966
번호제목작성자작성일추천조회
공지사항
[귀국이후] (1) 머리말 - 범용기 속편
장공 | 2019.02.14 | 추천 0 | 조회 8722
장공2019.02.1408722
공지사항
[범용기 제6권] (1601) 첫머리에
장공 | 2018.10.29 | 추천 0 | 조회 9218
장공2018.10.2909218
공지사항
[범용기 제5권] (1)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설날과 그 언저리
장공 | 2018.10.01 | 추천 0 | 조회 8804
장공2018.10.0108804
공지사항
[범용기 제4권] (1) 序章 - 글을 쓴다는 것
장공 | 2018.04.16 | 추천 0 | 조회 9415
장공2018.04.1609415
공지사항
[범용기 제3권] (1) 머리말
장공 | 2017.10.10 | 추천 0 | 조회 9835
장공2017.10.1009835
공지사항
[범용기 제2권] (1) 머리말
장공 | 2017.08.02 | 추천 0 | 조회 9733
장공2017.08.0209733
공지사항
[범용기 제1권] (1) 첫머리
changgong | 2017.06.26 | 추천 0 | 조회 11042
changgong2017.06.26011042
29
[범용기] (29) 동경 3년 – 청산학원 건축장에서
장공 | 2017.07.15 | 추천 0 | 조회 782
장공2017.07.150782
28
[범용기] (28) 동경 3년 – 근우관 생활
장공 | 2017.07.14 | 추천 0 | 조회 783
장공2017.07.140783
27
[범용기] (27) 동경 3년 – 동경에로
장공 | 2017.07.14 | 추천 0 | 조회 785
장공2017.07.140785
26
[범용기] (26)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3년생(신아산 학교에서)
장공 | 2017.07.13 | 추천 0 | 조회 897
장공2017.07.130897
25
[범용기] (25)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2년생(귀낙동 학교에서)
장공 | 2017.07.13 | 추천 0 | 조회 874
장공2017.07.130874
24
[범용기] (24)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초년생(용현의 언덕)
장공 | 2017.07.13 | 추천 0 | 조회 926
장공2017.07.130926
23
[범용기] (23)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 ‘창꼴집’에
장공 | 2017.07.08 | 추천 0 | 조회 824
장공2017.07.080824
22
[범용기] (22) 서울 3년 – 세례받고
장공 | 2017.07.08 | 추천 0 | 조회 808
장공2017.07.080808
21
[범용기] (21) 서울 3년 – 김영구의 죽음
장공 | 2017.07.08 | 추천 0 | 조회 1104
장공2017.07.0801104
20
[범용기] (20) 서울 3년 – 하숙에서 쫓겨나
장공 | 2017.07.08 | 추천 0 | 조회 948
장공2017.07.080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