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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24)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초년생(용현의 언덕)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3 15:15
조회
926

[범용기] (24)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초년생(용현의 언덕)

‘창꼴집’ 근방 오봉, 귀락 회암, 농경 등 네 동네는 극빈자도, 부자랄 사람도 없는 자작 중농들 마을이다. 그리고 소위 ‘토반’들이 사는 고장이다. 개화운동이 한 몫 볼 무렵에는 학교를 한다고 귀락동에 덩그렇게 큰 기와집을 지었다. 그리고 서울 오성중학교 졸업한 분과 간도 명동소학교에선가 가르쳤다는 분을 교사로 청빙했었다. 그러나 재정난 때문에 삼년만엔가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동네마다 한문서당이 두 셋씩 생겨서 서당 수가 열몇인가 됐다. 학교는 텅 빈 집 문짝이 떨어지고 운동장은 키다리 ‘쑥밭’이 됐다. 그런 판국에 내가 서울서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강재용 씨라는 동네 유지 한 분과 만나, “당신들이 서당을 없애고 아이들만 모아주면 내가 무료로 학교 과정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그는 그래 본다고 약속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은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용현학교에 불려 간 것이다. 용현서는 아이 10여명 갖고서도 교사 월급을 거뜬히 내는 것이었다.

용현은 두만강 하류, 서수라세 20리 쯤 상류에 있는 강가 부락이다. 모래 언덕이 강과 나란히 길게 늘여져 있고 그 언덕 안쪽을 대고 부락이 너슨너슨 몇 십호 앉아 있다. 강은 하류라 할빈의 송화강 만큼이나 넓은 것 같았다. 경원, 경흥읍만 해도 강이 세차게 굴르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가는지 안가는지 모를 정도로 그득하고 어른스럽다.

강 건너가 ‘러시아’의 ‘연해주’고 강 한가운데를 길이로 그어 국경선이라고 한다. 연해주는 허허벌판인데 풀은 있어 푸르나 인가는 한 두 채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강가에는 연해주 바람이 모래를 날려 쌓는대로 ‘사구’가 산맥을 이룬다. 높은데, 낮은데, 웅덩진데, 골짜기, 굴처럼 파진데 풀도 나무도 없지만 깨끗했다. 전신주는 반쯤 모래에 묻혀서 내 키로서도 전선을 만질 수 있었다.

나는 모래언덕을 무심코 걷는다. 누구의 두개골인지 해골바가지가 모래 언덕을 딩굴고 있었다. 턱 밑에서 부러진 것인데 형태는 멀쩡했다. 나는 손으로 모래를 깊숙하게 파고 거기 묻었다. 그리고 ‘영해사’(瑩該辭)라는 글을 적어 서울서 내는 『진생』(眞生)이란 월간지에 보냈더니 내어 주었다. 지금은 아주 잃어진 글이어서 다시 볼 수 없지만 보았자 센치멘탈한 풋내기 글이었을 것이다.

강가 풀밭에는 뱀이 유난스럽게 많다. 소낙비가 지나가고 햇빛이 쨍하게 비추일 무렵에 오솔길을 거닐려면 손에 막대기를 가져야 한다. 막대기로 길가 잡풀 섶을 건드리며 걸어야 뱀에게 물리지 않는다. 어떤 놈은 놀라서 곧장 뺑소니친다. 그러나 어떤 놈은 대가리를 치켜 들고 곤두서서 막대기 끝을 한사코 문다. 한 대 갈기면 늘어진다. 막대기로 하늘 공중에 튀겨 올리면 까맣게 치솟았다가도 ‘가속도’로 떨어진다. 아마 떨어지는 대로 뻗을 것이다.

쉬는 날이면 더 외롭다. 혼자서 언덕 기슭 모래밭에 간다. 모래가 옴폭하게 파이고 둘래가 산성처럼 둘러막힌데 있다.

몹시 안온하다. 나는 옷을 벗어 이를 잡는다. 잡는게 아니라 주워서 모래 위에 놓아주는 것이다. 해방이다, 잘 살아라!

‘이’ 이야기는 좀 징그러울 것 같다마는 오랜 나그네 생활이나 감옥, 수용소 생활 기록에서는 뺄 수 없는 화제가 된다. 이는 ‘미물’이지만 인간의 피를 나눠가는 것 때문에 그만큼 인간과 인연이 가까워진다.

나는 톨스토이 단편집 한 두 책 갖고 가서 햇살에 따끔 더운 모래 성채 속을 딩굴며 읽어본다. 읽으면 가슴이 더 소란을 피운다. 막대기로 모래벽을 부수고 발로 걷어찬다. ‘산성’은 와르르 무너진다. “망해!” 고함친다는 게 소리가 속으로 가라앉아 ‘심층’에 ‘충적도’를 편다. ‘내향발산’이랄까. 어쨌든 젊은 고민의 한 토막이였다면 구태여 이유를 캘 것도 없겠다.

사실, 나는 그러면서도 톨스토이에게서 배운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물질을 소유한다는데 대한 바른 태도를 배웠다. 그의 귀족으로서의 가문, 작가로서의 천재, 재산의 풍요, 삶에의 자유로움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요, 문화적 명성 모든 주어진 특권을 탈출, ‘야스나야 폴리야나’ 시골의 차디찬 작은 정거장 대합실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하직하는 그 마감 장면은 엄숙하다 못해 거룩하였다.

요새 우리는 ‘민중과 엘리트’란 언어를 입버릇처럼 쓴다. “그래스 루트!” 말은 쉽지! 그러나 적어도 톨스토이 정도의 각오라도 없다면 말빨이 서지 않을 것 같다.

그 동안 강재용 씨는 ‘유세’에 나섰다. 학교집이 있고 유명한 선생이 무료로 가르치겠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이들을 모으지 못해서 학교집은 ‘향도막’(상예 두는 외따른 헛간) 같이 되고 선생은 ‘수하’에 뺐겼으니 이게 무슨 창피냐 하는 것이었다. 수하란 말은 ‘강하류’란 뜻인데 ‘토반’들이 강갓 사람들을 깔보는 뜻도 품겨 있다.

일이 될 것 같으니 올라와 달라는 기별이 강재용 씨로부터 왔다. 나는 용현학교를 그만뒀다. 거의 반년만에 떠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환경이 삭막해서 서글프고 스산했었지만 차츰 아이들과도 정이 붙고 주민들과도 가까워져서 보람을 느낄 무렵이었다. 형님이 동네 당나귀를 얻어 끌고 내려와 얼마 안되는 보따리를 싣고 둘어서 걸어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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