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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23)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 ‘창꼴집’에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8 17:48
조회
824

[범용기] (23)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 ‘창꼴집’에

며칠 후, 하숙집 우리 방문이 덜컥 열리며 형님이 들어오셨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아무런 예고도 예측도 없었기 때문이다.

“너 데리러 왔다! 가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만성 대장염에 이질, 기침까지 겹쳐서 ‘환자’라면 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는 아랑곳없이 가지도 못하는 일본엘 간다고 외고집을 부렸다.

이런 걸 백부님이 눈치 채시고 몰래 형을 불러올린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형은 하루 서울구경을 하고 이튿날에는 간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유명하다는 한의에게 진맥시키고 육미, 팔미십전대보탕 등을 각각 두제(한제는 20첩)씩이다 지어 한짐 둘러메고 나를 데리고 떠났다. 오촌조카 희용 군도 동행했다. 일종의 ‘납치’였다. 거리에서도 내 손목을 놓치지 않았다. 기차에는 거의 부둥켜안다시피하고 올라탔다. 그리고서야 눈물이 글썽해서 말씀하신다.

“네가 그런 몸 가지고 돈 한푼 없이 어떻게 일본엘 간단 말이냐? 몸이 성해야 고학이라도 할게 아니냐? 집에 가서 보약을 장복하고 튼튼해진 담에 가더라도 가라! 내가 너를 위해 하는 일이지 네 앞을 막으려고 이러는 게냐?”하신다. 약골이면서 평생 중노동에 시달리는 형님에게 이런 걱정까지 끼친 내가 야속해진다. ‘가엾은 착한 분!’ 나는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시종 우울했다. 호지(湖地) 땅에 끌려가는 포로 같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불신자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가는 심경이었다.

경원선은 원래가 절경이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철원평야는 아직 미간지었지만, 삼방골을 누비며 ‘금수강산’을 찬탄했다. 세포에는 일인들이 목장을 차렸다지만 신통한 것 같지 않았다. 원산에서 웅기까지 배를 탔다. 풍랑이 없어서 추태는 면했다. 웅기서부터는 산넘어 집까지 팔십리를 하루에 걸어야 한다. 청학동 셋째 누님 댁에서 점심, 그리고 갈길은 계속됐다. 집 길이 가까울수록 내 맘은 무거웠다. 간혹 지나가는 인간들 – 모두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무덤 향해 비틀거리는 것 같았다.

산천은 변한 데가 없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왔다 가고 갔다 오고, ‘해 아래 새 것이란 하나도 없다’는 바로 그 고장이 여기라 느꼈다.

컴컴해서야 집에 닿았다. 부모님께 절하고 앉았지만 할 말이 별로 없다. 믿는 집안이면 예배라도 드릴텐데하고 몹시 아쉬워진다.

전 같으면 이러지는 않을 텐데! 하고 보면, 예수 믿고서 ‘비인간화’됐다는 아버님 말씀도 일리있지 않은가 싶었다.

어머니는 아프셔서 자리에 누워계셨는데 내가 돌아오자 반가워 일어나신대로 다시 눕지 않으셨다.

식구들은 모두 반가워 기뻐했다. 그런데 나만이 ‘이방인’ 기분이다.

형이 갖고 온 보약을 어머니는 매일 한 첩씩 정성껏 다려 주신다. 장작불을 부드러운 집재로 덮고 그 위에 약탕건을 놓아 왼종일 다리는 것이었다. 넉달을 장복했다. 밥맛이 나서 끼마다 한 주발을 영락없이 비운다. 대장염도 이질도 간데 없고 온 몸이 활짝 피어났다. 거의 반년 계속하고 보니 약맛이 꿀맛이다. 다 먹고서는 더 못 먹는게 아쉬웠다. 건강에 자신이 생긴다.

그럭저럭 성탄절이 됐다. 믿는 사람도 없고 교회도 없는 동네라 성탄절이 무언지도 언젠지도 모른다. 나는 백노지 한 장에다가 묽은 풀에 잠근 솜뭉치로 ‘祝賀聲聖誕’이란 네 글자를 쓰고 거기에 노란 좁쌀을 뿌려 황금색 글씨로 만들어 윗방벽에 붙였다. 벽 절반을 차지했다.

사잇방에 계신 아버님이 쓴 눈으로 보시며 ‘성탄?’ 하는 한마디를 독백(獨白)같이 뇌셨다. 예수는 ‘성인’이 아니라는 지론에서였다고 짐작된다. ‘성인’이란 언행에 과불급(過不及)이 없어야 하는데 예수는 과격한 청년이었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의 음양론(陰陽論)에 의하면 “동양은 ‘음’이고 서양은 ‘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양인은 양기가 북받쳐서 고요할 줄 모르고 살벌과 정복에 날뛴다. 그러니만큼 절제 희생 십자가 등의 교훈이 필요하다. 그것이 그들의 ‘태과’(太過, 너무 과도한)한 양기를 꺾어 포학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은 ‘음’ 즉 ‘그늘’의 사람이기 때문에 원래가 온유하고 평화하고 살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의 희생정신까지 덮어씌운다면 동양인은 더 무력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 무렵에 아버님은 <참서류>를 즐겨 읽으셨다. 그 중에서도 ‘풍수’설에 관한 서적을 즐기셨다. 경흥 ‘입북 시조’부터의 ‘선영’을 풍수설에 따라 재검토하기도 하셨다. ‘명당’이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내 태도는 냉소적이었다. 풍수설을 모르는 서양인, 일본인보다 우리가 나은게 무어냐고도 여쭈었다. 조상의 유골에서 덕보려는 심사부터 비겁하다고 형님께 대들기도 했다. 형님은 아버님 편이었다.

‘공맹지도’를 ‘정도’로 지킨다고 장담하시면서도 참서같은 ‘이단’에 끌리시는 아버님의 심경에 ‘구도자’의 여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미쳐 살피지 못했던 나에게 유한이 남는다.

하여튼 몇 달 동안은 창꼴집 체류는 나에게 ‘귀양살이’였다. 내 집(Home)이 왜 귀양살이 고장으로 됐을까?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주려 왔다”는 예수님 때문일까? ‘그렇다’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거기서도 ‘좌절’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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