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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31) 동경 3년 – 청산학원 학생(2년생)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5 15:10
조회
781

[범용기] (31) 동경 3년 – 청산학원 학생(2년생)

푼돈벌이

청산학교 ‘캠퍼스’에는 ‘하나오까야마’(花岡山)란 잔디밭언덕 겸 광장이 있고 그 주위에 선교사 주택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잔디깎이, 유리창 닦이, 서재 먼지털기, 고깐 정리, 지하실 정돈, 때로는 꽃나무 전지 등등 닥치는대로 일하여 용돈을 벌었다. 그런 일 하고 싶은 일본인 학생들도 많았지만 치우 내 차례로 된다. 엘리야에게 빵 부스러기 물어다 준 까마귀를 연상했다. 일용할 양식은 주께서 마련하신다. 기숙사 식당 주인도 장작을 패든, 통나무를 자르든 내게 시키고서 밀린 식비를 탕감해 준다.

무얼하나?

2학년 때 하기방학 – 송창근 형은 귀국하고 나는 혼자 기숙사에 남았다. ‘이노우에’, ‘후까미’ 등 일본 학생 몇이 있기는 했지만 기숙사는 빈집 같았다. 나는 토요일 ‘우시고메’ 감리교회당, 아오야마 오정목 교회당 등의 소제인으로, 얼마의 삯을 받아 연명하고 있었다. 나머지 날들은 온전히 자유다 텅 빈 방에 종일 혼자 딩군다. 책만이 친구랄까?

‘아리지마’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등도 읽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참회록 등 스토아파 서적들에도 친했다. ‘다니자끼’의 순정소설, ‘이시가와 다꾸복꾸’의 시가,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신학서적들도 더러 갖다 읽었다. 읽으면 쓰고 싶은 충동도 생긴다. 써 놓으면 해산한 부인같이 뭔가 후련해진다. 그러나 내 평생사업은 무엇인가? 내 ‘Life Work’이란 것도 나는 모른다. 신학에 들어온 것도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이고 목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교회에 충성할 용의도 없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 그래도 교육밖에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게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후진들에게 뭔가 ‘혼’을 넣어줄 접촉점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유치원부터 소, 중고, 대학까지의 교육왕국을 세워 본다고 맘 먹었다. 강령, 실천요강 생활규범 등도 적어 봤다. 지금부터 동지를 모아야 한다고 이름을 적어 보기도 했다. ‘떠스케키 인스티튜트’ 같은 것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해놓고 보니 제김에 감격해서 눈물이 난다.

여름해가 서편에 여울지며 하늘이 유난스레 타오른다. 뭔가 ‘비전’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8월 24일이었다. 나는 기원(祈願)의 함을 만들고 거기에 남은 돈을 넣으며 무시로 기도했다. 어떤 때는 금식하고 식대(食代)를 거기 넣기도 했다.

하루에 식빵 두 갈피에 냉수 한 잔, 그리고 ‘스토익’처럼 굶어도 봤다.

하루는 ‘이노우에’ 군이 와서 그 동안에 내가 끄적거린 ‘소설’(?)이랄까 수필이랄까를 읽고서 ‘아오야마 학우회잡지’에 내자고 한다. 나는 ‘웃기지 말라’면서 빼앗아 ‘오시이레’(벽장) 속에 팽개쳤다.

겨울

스팀도 난로도 없는 ‘다다미’깐 기숙사는 춥다. 애기주먹만한 연탄 덩어리에 불을 달아 잿속에 묻은 작은 화로를 ‘고다쯔’라고 한다. 그걸 끼고 앉으면 좀 온기는 돌지만 가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밤에 이불 속에 넣어도 좀덜 추운 대신에 아침부터 골치를 앓아야 한다.

나는 ‘간다’(神田) 고물점에 들렸다가 싸디싼 외투 하나를 샀다. 훨씬 도움이 됐다. 그런데 어늘 밤 어떤 인연으로 어느 고학생 숙소에 들렸다가 그가 내복도 없이 여름학생복 속에서 떨고 있는 걸 보고 내 외투를 벗어 줬다. 그는 초면인 나를 놀란 낯으로 쳐다보다가 미안하다면서도 받아 입었다. ‘무사시노’ 거센 바람을 안고 나는 귀로에 올랐다.

발길이 가볍고 춥지도 않다. 기분이 만점이다. 예수님이 축복하시나보다 하며 혼자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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