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30) 동경 3년 – 청산학원 학생(초년생)
[범용기] (30) 동경 3년 – 청산학원 학생(초년생)
나는 청산학원 학생도 아니면서 여름내 ‘본교생’ 특혜 받는 게 어쩐지 께름했다. 그렇다고 공사감독에게 ‘고백’하기도 쑥스럽고 해서 2학기부터라도 진짜 학생이 되야겠다고 맘 먹었다. 그리하면 ‘속도 위반’ 쯤은 용서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교무과의 ‘다까야나기’ 씨에게 2학기에도 입학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입학시기는 아니지만 청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때 신학부장은 ‘베리’ 박사였는데 그도 허락한 모양이었다. 나는 ‘청강생’으로 교실 뒷자리에 소리없이 앉았다. 교실이래야 진재 후 임시 ‘하꼬방’이다.
이분, 저분 교수들 강의는 별거 아니었다. 그러나 그 중 ‘히야네’란 선생이 맘에 들었다. ‘류규’(오끼나와) 태생으로서 몸집이 크고 소위 ‘화한양’(化漢洋) 세 학문에 자유로 드나드는 분이었다. 전공은 비교종교학이었고 ‘세계종교사’, ‘일본종교사’ 등 방대한 저서를 써냈다. 동경제대(帝大) 그룹에서는 그 서평에 ‘부피로 한 몫 보려는 잡다한 내용’(見掛け倒雜駮極まる)이라고 혹평했지만 ‘히야네’ 선생은 “그러면서도 그들이 내 책에서 곧 잘 인용하던데…”하고 고소하는 것이었다. 그가 ‘류구’(琉球) 출신이라서 차별대우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학기말 시험이란다. ‘히야네’ 선생은 학생들에게 일반적인 시험문제를 내 주고 내게는 ‘조선의 제종교와 기독교’(朝鮮の諸宗敎とキリスト敎)란 논문을 즉석에서 한 시간 안에 써 내라고 한다.
나는 원시종교, 불교, 유교 등의 한국관계를 약술하고 풍수설 등 참서(讖書) 이야기도 쓰고 결론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 종교를 완성시키느냐를 일사천리, 큼직한 시험지 십여장 썼다. 한문 향기 감도는 일본문장에는 자신도 없잖아 있었던 터여서 그것이 ‘히야네’ 씨의 구미에 맞았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다음 주, 그 시간에 ‘히야네’ 선생은 학생들 앞에서 “내가 학생 답안에 백점 줘 본 일이 없는데, 이번 ‘긴상’(金氏) 논문에는 백이십점을 줬다”고 했다. 나는 좀 면구스러웠지만 자랑도 느끼었다. 학생들은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너절한 옷, 못생긴 얼굴, 못먹어 생기없는 나를 ‘Somebody’로 쳐 줬을리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티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일본인 예절이 발라서 속은 앙큼하면서도 겉으로는 좀처럼 ‘실례’를 하지 않는다. 요는 나 자신의 문제다. 내가 좌절감이나 열등감에 자진 걸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다.
적어도 이번 ‘히야네’ 선생의 평정(評定)이 나의 자기 긍지에 보탬이 됐다는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히야네’ 선생은 세상 떠날 때까지 한국 학생만 만나면 내 소식을 물었다 한다.
‘히야네’ 선생은 독특한 문장가였다. 글의 원천(源泉)이 무진장이였고 스타일에 구김새가 없었다. 한 때, ‘일본 교단신문’, 말하자면 일본 교단 기관지 주필인가 할 때, 교계평론에서 ‘춘추직필’(春秋直筆)이 너무 날카로워 ‘명사’들의 ‘가면’이 벗겨지자 반발이 생겨 그만 둔 일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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