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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103) 조선신학원 발족 –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31 14:14
조회
942

[범용기] (103) 조선신학원 발족 –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원래 신학교 설립기성회를 대표하여 그 실무를 맡은 분은 채필근 목사였다. 그는 그 업무를 완수하는대로 교장 자리에 앉을 것을 약속받고 있었다.

총독부로부터 신청만 하면 인가한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발기 위원회로서는 총회 인가맡은 다음에 총독부에 신청하는 것이 바른 순서라 하여 보류하기로 했다. 그 기간이 약 반년이었다.

결국 총회에서는 선교사들이 문닫고 간 평양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하여 정식 인가신청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서울의 조선신학교 설립청원은 제풀에 묵살될 운명에 직면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기’보다도 더 싱거워졌다.

그런데 폐회 직전에 평양의 윤원삼 장로가 긴급 발언을 요청하여 조선신학을 대변하는 일장 연설을 했다 한다. “이 교회의 수난기에 총회 산하의 현직 장로가 교회를 지키려는 충성으로 오십만원의 사재를 주의 제단에 바쳤는데 총회로서 감사와 격려의 표지는커녕 냉대와 질시로 대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라고 전제하고 제단의 성금까지 교권다툼에 희생된다면 금후 어느 신도가 충성을 보이겠느냐 하고 통매(痛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질러 절받기로 김대현 장로님에게는 총회 결의로 감사의 뜻이 전달되었고 조선신학교는 사설기관으로 인가수속을 계속 진행시켜도 좋다는 묵허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뒤늦게나마 전문학교령에 의한 조선신학 설립인가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했다. 평양신학교에서도 거의 동시에 같은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평양신학교를 위해서는 평남도지사(일본인)가 직접 선두에 나섰다.

“기독교의 일본화 또는 일본적 기독교를 강력히 추진시키려면 그 대적인 선교자들 발뿌리에 폭탄을 던져야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다. 사실 한국의 장로회 현직 목사가 거의 전부 평양신학교 출신이라는 현실에서 ‘일본화’ 정책에서도 ‘평신’을 이용하려는 것이 당연한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양손에 떡을 쥔 셈이어서 한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교파에 신학교 둘을 허락해도 되느냐? 하나만 허락한다면 어느 것을 택하느냐?

위치로 본다면 수도인 서울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교회의 일본화 정책을 위해서는 평양이 그럴 듯하다.

결국 우유부단한 수개월을 지냈다. 그 공백기간에 교회내 정치 브로커들만이 아니라 직업적 정치 낭인들까지도 끼어 들어 막후 암약이 볼만했었다. 총독부에서는 일본교단 통리 도미다 미쯔루(富田滿)에게도 의논했다고 들었다. 그는 한 교파 한 신학교 정책을 진언했다 한다. 결국 ‘평양’ 편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관제 신학교’ 맡을 친일교장으로서 채필근 목사가 뽑혔다는 것이다. 그는 옛날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친일 목사로, 동경제대 졸업생이니 안성마춤이었다.

그런데 채목사는 서울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그 일에 분주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 그는 간다온다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쩐 영문인지 몰랐다. 설립자와 기성회 간부들도 모르고 있었다. 몰랐다는 것은 그의 행방을 몰랐다는 말이다.

수일 후에 평양신학교가 인가되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큰 소가 없어지면 송아지가 대신한다는 식으로 남은 일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을 세 항목으로 나누어 보았다.

① 평양신학교와 동등의 신학교를 서울에도 인가해 달라는 기정방침을 관철해 보자는 것, 안될줄 알면서도 해 보자는 것이다.

② 그것이 안되면 총독부 인가에 너무 개의할 것 없이 신학교육의 실속만을 채워 보자는 것.

③ 전국교회 특히 경기 이남의 교회안에 통일된 지지세력을 육성하자는 것. 이것은 졸업생의 목사임직에도 관계되는 실제문제이기 때문이다.

첫째 과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관망하기로 했다.

둘째 과제에 있어서는 도청 권한에 속한 단기 강습소로 출발해 놓고 보자는 방침을 세웠다.

나는 도청에 들러 문의했다. 경기 도청에서는 신학교를 평양에 뺏긴 분노도 있었기에 내게 대해서는 호의와 후원이 대단했다. 담당관은 일본인이었지만 친절했다. 그는 격려의 말까지 한다.

“학교 인가 없으면 신학교육 못하나요? 강습소 인가로서도 얼마든지 신학을 가르칠 수 있을 겁니다. 곧 인가해 드릴테니 걱정마시오. 오히려 까다롭지 않아서 좋을지 모릅니다.”

셋째 과제인 교회관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경기 이남 교회에서의 첫째 난제는 교권과 관련된 지방색의 흐름이었다.

황, 평ㆍ양도 교회가 전체 교인의 3분지 2를 차지하고 있으니만큼 다수였고 따라서 남도 교회는 거듭하는 ‘소수자’의 ‘서러움’이 ‘앙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 신학교가 하나 생겼다. 그것이 또 ‘다수’의 횡포에 희생되고 있다. 이것은 묵과할 수 없다. 이번에는 총회를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신학교는 지켜야 한다.

그래서 총회 분립운동이 암암리에 진행되어 분립총회 대의원수와 그 명단까지 작성되고 소집날짜가지 통고되었다 한다. 그러나 대의원들이 출발 직전에 연행되기도 하고 서울역 도착 즉시 경찰에 의해 송환되기도 하여 회집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 지령에 의한 경찰의 방해공작이었다.

이 총회분립의 주목적은 교권획득이었고 신학교 문제는 구실 또는 명분으로 이용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 총회분립운동 진행에 있어서 그들은 내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는 챌 수 있었다.

나는 이 작업의 주동자 중 한 분이신 승동교회 오건영 목사님에게 내 태도를 표명했다. “이 총회분립 문제는 신학사상이나 신앙고백적 진리파지(把持) 문제가 표면화 한 것이 아니고 남과 북의 교권 싸움이 노골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솔직히 말한다. 신학교는 이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이용되지도 않는다. 총회분립문제는 내 알바 아니지만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반대다.”

어쨌든 이 작업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재연할 불씨는 남아 있었다.

둘째 난제는 신학문제다. 남도 장로교회의 중심은 대구였다. 대구는 서울 이남의 ‘평양’이라고 한다. 평양신학교 출신 원로급 목사님들이 대부분의 교회를 맡았고 신학적으로는 정통주의 일색이다. 그들은 서울에 새로 된 다른 조선신학교에 대하여 ‘지지’보다도 ‘감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신학’파의 책동이나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경기노회는 어떠한가? 교권쟁탈의 첨단적인 책사들이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문제에 있어서는 유동적이어서 ‘대구’의 기류와는 같지 않았다.

경기에서의 두목은 ‘전필순’이었고, ‘최석주’ 유재한 등 목사가 ‘에이드’로 일하는 것이었다. ‘교권쟁탈’이란 서북교권을 기호교권에로 교체하자는 것이다.

전필순은 벌써부터 똘똘뭉친 자기 그룹을 만들어 갖고 있었다. 서울안에 서북세력을 ‘체제화’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수 있는 정인과(당시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에 대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도 생각된다. 사실 그들은 이전에 신흥우 씨 중심으로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한번 도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인과를 지지하는 절대적인 서북세력 앞에서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전필순 그룹은 그 그루터기라 하겠다.

이 전필순 그룹에는 서울 근방의 감리교 목사들도 얼마 가담해 있었다. 감리교 안에도 같은 남ㆍ북 세력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전필순은 나를 찾아왔다. 자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 차사백 여사도 지면있는 분이었기에 인사도 할겸 잘되었다고 동행했다. 댁에 들어가니 전씨 그룹이 다 모여 있었다. 나는 그게 ‘그룹멤버’인줄은 몰랐었지만 몇마디 대화에서 곧 알게 되었다. 감리교 목사들도 섞여 있었다. 다 아는 친구들이다. 얼마 이야기 하다가 선약이 있다고 나와 버렸다. 전필순은 나를 배웅하면서 나도 그 그룹에 들라고 권한다.

“모두 내 아는 친구니 얼마든지 가까이 지낼 수는 있지만 ‘그룹에’ 들 생각은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 후에도 자주 모이는 모양이었으나 내게 알리는 일은 없었다.

멀리하면 방해할 것이고 가까이하면 ‘서울화’할 것 같아서 나는 신중을 기했다. 서울은 일종의 소용돌이였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를 갖기도 했다.

전필순은 이런 말도 했다. “교회에도 정치가 있는 것이고 정치는 권력을 노리는 것이 사실인만큼 교권쟁취 운동이 교회 총회나 기관에 없을 수는 없다. 그런데 평안도 교권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충동적인 요소가 다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경도가 교권을 잡으면 큰 일이다. 그들은 한 번 잡으면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의지적이기 때문에 걸머쥐면 뺏기 어렵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나도 함경도 내긴데 무슨 정치적 포석으로 그런 말을 내게 했는지 지금도 판단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일종의 ‘예방전쟁’ 통고였는지 기상측정 ‘발룬’이었는지 알송달송하다.

서울에 대해서는 그때 그때 형편을 보아 대처하기로 하겠지만 ‘대구’의 굳어진 ‘정통’ 아성에는 어떻게 접근하며 어떻게 극복하고 그들을 조선신학교 지지세력에 가산할 수 있을까?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통틀어 서울 세력을 ‘좌’라 하고 대구 세력을 ‘우’라 한다면 좌(左)가 지배적인 경우 총회분열의 우려가 짙어진다.

우(右)가 극성부릴 경우 평양신학의 홍수 때문에 조선신학이 익사(溺死)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발톱을 감추고 날개펴 하늘에 떠 있는 그러나 그 눈은 숲속의 토끼까지도 놓치지 않는 ‘독수리’가 되려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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