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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119) 조선신학원 발족 – 미군 진주와 미군정 수립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01 09:17
조회
2983

[범용기] (119) 조선신학원 발족 – 미군 진주와 미군정 수립

미군 진주

결국 미군이 진주했다.

정치인들 사회에서나 해방되자마자 여운형 중심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니, 송진우 중심의 한민당이니 하는 정당들이 속출했고 총독부에서는 정권을 합법적으로 이양하려고 송진우 등에게 교섭했지만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면 일본총독부정치를 합법화한 것이 되고 자신들도 일제의 후신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수립

1945년 9월 2일에 미 극동사령관은 조선분할점령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9월 8일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 11일에 군정실시를 성명했다. ‘하지’ 중장이 ‘총독’ 자리에 앉고 아놀드 소장이 ‘정무총감’이 되고 그 밑에 민정장관으로 안재홍 씨가 임명되었다.

국민은 아직도 38선이 무언지도 몰랐다. 그런데 9월 2일에 벌써 미 극동군사령관은 조선 분할 점령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래도 미군정은 잠정적일 것이고 남북이 통일된 독립국가로서의 한국은 곧 출현될 것이라고 국민은 믿고 있었다.

12월 28일에 모스크바에서 소위 삼국외상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조선신탁통치안이 나왔다고 모두들 흥분했다. 독립국인데 신탁퉁치가 다 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년, 학생, 시민 모두 ‘반탁’ 운동에 나섰다. 좌익사람들도 가담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그들이 ‘신탄찬성’ 데모를 한다. 제 정신이 아니라, 지령에 움직이는 꼭두각씨였다고 모두 실망한다.

그 당시 송진우 씨의 훈정 5년설이 유포되어 거기에도 상당히들 반발했다.

국민들이 너무나 거센 반발을 고려해서였던지 신탁통치설은 유야무야로 되고 그 대신에 조선독립에 관한 미, 소 공동위원회가 성립됐다. 거기에는 김규식 박사, 이윤영 씨, 기독청년 대표로 강원룡도 참가했다. 결국 미, 소간의 합의는 기대할 수 없게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임정요인 입국

이승만 박사는 벌써부터 입국해 있었고 상해 임정요인들도 추후에 모두 입국했다. 그러나 ‘임정’으로가 아니고 개인자격으로 허입된 것이다. ‘미군정’이 정식 정부니만큼 다른 ‘정부’가 또 인정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임정요인들을 환영하는 모임이 감리교 정동예배당에서 열렸다. 김국, 이승만, 김규식, 3거두를 비롯하여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등등 기라성이 단상에 앉았다. 한마디씩의 인사 이야기가 모두 능숙했다. 모두가 막역한 동지 같았다.

김구 선생은 기독교회가 나라의 혼이 되면 경찰이 쓸데없을테니 교회는 늘고 파출소는 주는 나라가 되야 한다고 했다.

청년학생들이 모두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정객’들이고 해방 한국의 정치현실을 요리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대망(大望)이 몸에 밴 분들이니만큼 그때에도 ‘동상이몽’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승만 박사는 어떤 부자의 별장인 ‘돈암장’에 유숙하며 정략을 다듬고 있었다. 강원룡, 조향록, 이명하 등도 처음에는 부지런히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은 김규식 박사에게로 갔다. 이박사는 “너희는 내 하라는 대로만 해”하는 독재벽이 너무 일관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군정과 좌익계열

하지 중장은 군정초기에 공산당도 합법적인 정당의 하나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정당 중의 하나로 군정 아래서 얌전하게 협조하기에는 너무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폭력혁명’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존질서 존중을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장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선동하여 1946년 9월 28일부터 11월 중순까지 남한의 산업기능을 마비시켰고 참가인원이 3백만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가서 유세에 분주했다. 하지 중장에 공산당 합법화는 처음부터 반대였다고 한다. 어쨌든 자유분위기였기에, 학생, 청년, 시민, 정객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특히 언론기관은 ‘자유과잉’이랄까, ‘신문’이란 이름의 간행물이 수십종 나왔다. 어제는 우익이다가 내일은 좌익 – 그리고 ‘비판’이 아니라 야비한 ‘욕지거리’가 활자화 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디서나 ‘좌’와 ‘우’들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해방되자마자 미국교단본부와 W.C.C. 관계기관에서 그동안에 출판된 중요한 서적들을 골라 몇 궤짝 보내왔다. 거기에 토인비의 『역사 연구』도 들어 있었다. ‘한신’에도 보내왔기에 나는 탐독했다. 교회와 세상과 역사의 현실과 미래가 차츰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서울대학을 위시하여 좌익학생들이 어느 정도 우세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유물사관을 읽고 이론 정연하게 다른 학생들을 설득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익에는 그런 조직적인 학문의 준비가 없었고 다만 기독학생들이 종교적인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 뿐이었다.

사실, 조선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정통신학으로 다졌기에 타계주의적인 부흥집회가 대표작이고 이론적인 역사 관심을 거의 없었다. 기독학생들은 이 점에서 좌익 학생들과 맞설 수 있는 역사관과 역사의식이 필요했다.

기독학생들은 학술강연회를 열고 강사를 초청하여 그들의 갈급을 축이려 했다.

제1회 학술강연에서 그들은 내게 토인비 역사관을 소개해 달라고 청했다. 내가 그 방대한 저서를 다 읽었을리는 물론 없다. 그러나 마침 시카고 대학에서 이미 간추려놓은 요령을 더듬어 세 시간 강의했다. 강연장소는 경동교회 별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대학생들이 창밖에까지 빼꼭 서 있었다. 한국역사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나는 믿게 됐다.

학생들은 ‘이제 우리도 할 말이 있다’하는 자신을 갖고 헤어졌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얼마든지 맞설 수 있다는 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그때 연대 총장으로 있던 백락준 박사는 선생들 앞에서 “그 책이 우리도서관에도 한질 와 있는데 소위 역사를 전공한다는 너희는 무엇하고 있었느냐”고 꾸지람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군정청에서는 일제 때의 여러 관립 단과 전문학교들을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부르게 했다. 그리고 미국인 무어란 사람을 총장으로 임명하여 그 통합절차를 맡겼다. 그는 갖가지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이를 강행 실현했다. 기독학생들은 통합된 기념이라면서 서울대기독학생 주최로 내게 특별강연을 청해왔다. 장소게 어데였던가 시민회관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기억이 분명치 않다. 학생들도 빼꼭 차 있었다. 서울대 총장이란 분이 개회인사와 아울러 통합의 취지를 말하고 내 강연은 시작됐다. 연제도 잘 기억되지 않지만, 내용인즉 새로운 각도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는 것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강연은 대성황이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통합한다는 뜻이 포함된 기독교적 유신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미국의 움직임과 국내운동

미국은 1947년 10월 18일, 조선문제를 정식으로 국제연합에 제소했다. ‘국련’ 감사하의 남북총선거에 의하여 통일한국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안이 ‘국련’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국련의 입국을 거부했다. 그래서 1948년 3월 1일에 하지 중장은 남조선 단독선거안을 발표했다. 여론은 찬반 둘로 갈라졌다. 영구분단의 징조래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현실에서 ‘차선’(次善)이라도 해놓고 봐야 한다는 찬성파와의 두 갈래였다. 나는 반대편에 서명했다.

1948년 4월 2일에는 제주도에서 공산반란이 치열했다.

1948년 4월 19일에 평양의 주동으로 남북정당 및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남한에서 김구 선생 일행이 참석했으나 북노당 일방통행적인 의사진행에 실망하고 돌아왔다. 이승만 박사는 공산당과의 협상에서 통일을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라고 일소에 붙였었다. 그러나 결과 여하를 막론하고 ‘통일’을 의논하자는데 불참할 수 있느냐 하는 ‘도의론’에서 김구 선생은 비장한 심정으로 북행한 것이었다.

군정에서 대한민국 수립에로

1948년 5월 10일 하지 중장은 마침내 국련 감시하에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했다. 그리고 동년 8월 15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수립을 선언했다.

동년 9월 9일에 소련점령군 사령부에서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북조선에 수립하고 10월 19일로부터 12월 26일까지에 소련군 철수를 완료했다.

동년 10월 20일에 남한에서는 좌익음모에 의한 ‘여수 반란 사건’이 발발해서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국군과 경찰의 토벌로 평정됐다. 그 얼마전의 ‘대구 반란 사건’도 같은 부류의 것이었다.

이렇게 소요, 반란 등 사건이 빈번했다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국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을 가결했다.

1948년 12월 12일, 제3회 국련총회가 파리에서 열릴 때, 한국에서는 장면 씨를 수반으로 한 사절단을 파송하여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란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그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도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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