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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2권] (18) 해방후 한국교회 재건운동과 그 시련 – 신학교육의 재정비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09 09:36
조회
1033

[범용기 제2권] (18) 해방후 한국교회 재건운동과 그 시련 – 신학교육의 재정비

해방직후 미군정 아래서의 우리는 일제시대보다 자유로웠다. 김천의 만우, 신의주의 한경직, 그리고 서울의 나는 모두 조선신학원에 모였다. 셋은 학창시절의 맹우(盟友)였다. 한국교회를 세계수준에 밀어올리기 위한 인물양성 그것은 자유로운 신학교육의 수준향상에 있다고 보았다. 만우는 목회신학, 한경직은 신약, 나는 구약을 전공하기로 해서 학업을 마치는 대로 셋이 같이 일할 작정이었다.

이제는 ‘일제’가 물러갔으니 기회가 온 셈이다. 셋이 서울에 모였다. 여자신학교까지 설계했다.

우리는 천리교재단을 접수하기로 했다.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 천리교 본부가 있고 ‘관장’ 이하 중요간부들의 사택도 거기 있었다. 지금의 영락교회 자리가 천리교 경성제일교회였다. 일본식 정원과 5층으로 된 기숙사와 소강당과 기숙사 아래층 집회실 등이 구비되 있었다. 모두 목조였지만 ‘스기’(杉), ‘히노끼’(檜) 등 화사한 재목이었다. 가구들도 일본양식의 고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예배 때 쓰던 거문고(고도)가 수십개 고스란히 놓여 있다. 우리는 그곳을 접수하여 여자신학교 캠퍼스로 쓸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한경직을 여자신학교장으로 하여 그 구내 사택에 살게 하고 거기 집회실을 ‘채플’로 쓰고 5층 목조건물을 여자신학생 기숙사로 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리교에서는 서울있는 조선인 천리교도들에게 소유재산전부, 다시 말해서, 40여개소의 천리교회당과 그 부속재산, 신도들 합숙소 등을 양도하여, 그들 이름으로 재단법인을 만들고, 그 재단으로 학교인가까지 맡아, 뻐졌하게 학교간판도 붙였다. 그때 군정청 문교부 책임자인 ‘밀러’라는 문관이 천리교에 편들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어쨌든, 한경직과 나는 이 건물들에 대한 ‘임대차’(賃貸借) 계약을 맺기 위해 그 책임부서를 찾아다녔다. 결국, 실질적인 서울시장인 ‘윌손’ 미군 대령의 사무실에 갔다. 천리교재단 소속재산목록을 제시하면서 임대차 계약을 맺자고 교섭했다. 그는 여기저기 전화로 문의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거기 대한 ‘제정법’이 없으니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그는 “그 건물들을 비워두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지금 어디나 빈집이 있으면 피난민이 마구 점령해버리는 판국에 무슨 법이론이냐? 적당한 신청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세 주고 다만 얼마라도 집세 받는 것이 있으면 유리하잖겠느냐?”하고 말했다. 결국 “네 재량대로 해라”는 허락을 얻었는지 그는 ‘꺼스토프’라는 소령을 불러 “이 목록대로 조선신학원에 접수해주라”고 한다. 우리는 꺼스토프와 함께 동자동에 갔다.

천리교 관장은 문서꾸러미를 갖고 와서 꺼스토프 소령에게 보인다. 그 재산들은 이미 접수되어 조선인 천리교회 재산으로 법적등기를 마쳤고 그것을 기금으로 농림학교(?) 설립인가까지 맡았다고 항의한다. 사실, 대문 기둥에는 군정청 문교부 당국자의 싸인이 또렷한, 접수증이 붙어 있었고 문교부 인가 ○○농림학교라는 커다란 간판도 걸려 있었다. ‘꺼스토프’ 소령은 일본인 관장의 서류는 보는체 만체 덮어놓고 ‘내가 이 천리교재산을 접수하여 조선신학원에 넘긴다’고 쪽지에 싸인하여 이걸 대문에 붙은 접수증 위에 붙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학교란 간판도 떼버리라 한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나는 ‘아하, 군정이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혼자 탄식했다.

천리교 관장은 문교당국의 ‘밀러’에게 급보했다. ‘밀러’가 와서 ‘꺼스토프’ 소령에게 사연을 설명하고 천리교편 정당성을 말했다. ‘꺼스토프’는 냉담했다.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내가 한 것은 내가 한 것이오”한다. 말하자면 자기 명령이 final이란 뜻이다.

‘밀러’는 나가면서 나를 보자고 한다. 나는 대문밖까지 그를 전송한다. 그는 “‘시체 있는 곳에 독수리 모인다’는 성경말씀이 생각납니다”한다. 내가 주검 뜯어 먹는 독수리 같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개인재산’이란 항목에 한 푼이라도 붙여 넣은 일이 없다. 그리할 생각을 해 본 일도 없다.

나는, “군정청에서 나와서 이미 접수해 주었으니 이제 와서 내가 두말할 수는 없지 않소?”, “미안하지만 협력해주시오” 했다. 그 후에는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후에도 일본인 천리교관장이 조선인 천리교도들과 짜고, 몰래 회수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는 눈치었다.

하루 ‘만우’는 조선인 천리교 책임자를 만나 학원사무실에 불러놓고 고래고래 야단쳤다.

“이 친일 민족반역자야! 다시 이 구내에 얼씬거린다면 당장 고발한다…….”

그래도 그들은 오밤중을 타서 일인들과 밀회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꺼스토프’ 소련에게 천리교 간부들의 ‘조기송환’을 제의했다. 그 당시 남한의 일본인들은 예외없이 집단수용소에 넣고 배편이 나는대로 송환하는 것이었다.

손가방 하나도 들고 가지 못한다. 온전히 빈손으로 떠난다.

아닌게 아니라, 군정청에서는 동자동 천리교도를 비롯하여 서울 안 40여 천리교회 일본인들을 전격적으로 불러내서 집단수용소에 옮겼다. 그때까지도 내가 소위 원장이었기에 꺼스토프는 나더러 통고하라고 한다. 나는 천리교 대강당에 관장 이하 전원을 불러보았다. 그들은 양같이 온순하다. 다 나와 꿇어앉는다. 나는 “군정청에서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멧세지’를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원 구속한답니다. 언짢은 소식을 전하려니 나도 맘이 안 됐습니다만, 알려드리는 것 뿐입니다….”

관장은 이마가 ‘다다미’에 닿도록 절하면서 “가시꼬마리마시다”한다. “말씀대로 준행하겠습니다”하는 뜻이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식사하고 담배피우고 재떨이에 재를 털고 고스란히 사라졌다. 일본 문화재가 한 고깐에 가득히 차 있었다.

40여 군데 건물을 접수했지만 지켜낼 재간이 없었다. 영락교회 자리는 이북피난민들이 한경직을 찾아와 “하루밤만” 하고 빈방에 짐을 푼다. 그리고서는 눌러 앉는다. 몇주일 후에는 여자기숙사가 ‘피난민수용소’로 변모했다.

어느날 나는 거리에서 천리교신자인 조선인 할머니를 만났다. 깨끗한 할머니였다. “서울은 불바다가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한다. 나는 흘려듣고 지나갔다.

그 무렵에 이사회가 열렸다. 새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함태영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이사회에서는 송창근, 한경직과 나를 정교수로 선임하고 학장에는 종전대로 나를 선정했다. 나는 “새 출발이니 학장도 새 사람으로 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서 송창근을 추천했다. 그들은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한다. 나도 고집스레 밀었다. 그들은 미심쩍은 태도로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송창근이 학장으로 인준됐다. 여자신학교를 병설하기로 하고 한경직을 교장으로 선정했다.

이미 접수된 귀속재산 건물들이 쓰고도 남는다. 이사회에서는 우리가 우리끼리의 이미 내정했던대로 천리교경성제일교회였던 영락정의 천리교회를 여자신학교 ‘캠퍼스’로 하고 한경직 교장 사택을 그 안에 두어 보살피게 했다. 한경직도 정식으로 승낙했다.

동자동 천리교본부기지와 건물은 조선신학원 캠퍼스로 쓰고 송창근 원장이 ‘관장’ 사택에 입주하고 나는 언덕위 직원 사택의 하나를 주택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영락정 여자신학교 기숙사가 피난민 수용소로 변질했다는 것 때문에 긴급 이사회가 소집되어 한경직의 책임이 추궁됐다. 한경직은 사표를 제출했다. ‘이사회’에서는 사표를 수리할 태도였다.

송창근과 나는 그것이 한경직만의 책임이랄 수 없으니 우리도 같이 사면한다면서 즉석에서 사면서를 써냈다. 이사회로서는 재고할 밖에 없었다. 선후책으로 여자신학교를 동자동에 옮겨서 조선신학원 여자부로 하고 한경직은 송창근, 김재준과 함께 조선신학교 교수로서 사택만을 영락정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피난민들은 즉시 다른데로 옮길 것을 역시 한경직에게 책임지웠다. 한경직의 성격으로서는 단행하기 어려운 요구였던 것이다.

피난민 중에는 한근조 변호사 등 군정청에 영향력 있는 권력자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그때 귀속재산관리처장은 남궁혁 박사였다. 남궁처장은 2중 3중으로 임대계약을 맺고 집세도 이중, 삼중으로 받는다.

그러면 본래의 계약자가 소송을 건다. 소위 “계쟁중의 적산”이란 것이다. 판결이 “부지하세월”이다.

한경직은 군정청에 교섭하여 영락정 적산을 ‘이중’으로 임대차했다. 그래서 “계쟁적산”이 됐다. 동시에 그는 일본식 정원과 부속건물을 허물고 교회당 건축을 시작했다. 이사장인 함태영 옹은 몸소 찾아가서 공사를 중지시키려 했다.

삽질하고 곡괭이질하던 교인들은, “저리 비키시오, 거치장스럽소!”하고 괄시하더란다. 한경직은 나에게 딱한 사정을 말한다. “나는 윈리대로 하려는데 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언제나 약속대로 되지 않소. 그렇지만, ‘불하’할 때에는 조선신학 이름으로 불하하도록 하겠소. 이것만은 믿어주시오! 교회에서도 그렇게 결정했다오!”

적산관리국에서 불하통지가 왔다. 조신신학 경리부장인 박한진 목사는 없는 돈을 긁어모아 갖고, 오라는 날에 새벽같이 적산관리국에 갔다.

“어제 한경직 목사가 불하해 갔습니다.”

어안이 벙벙했다. ‘한’은 의식적으로 나를 속인 것이었던가? 제직들의 압력에 못이겨서였을까?

송창근은 한경직과 절교한다고 흥분한다. 그러나 나는 그 정도의 이해관계로 옛 친구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프린스톤에서의 첫 친교로 그를 대한다. 그러나 그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지금도 내게 수수께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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