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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2권] (22) 통일에의 갈망(6ㆍ25와 9ㆍ28) - 1950년 남침의 경우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10 10:47
조회
981

[범용기 제2권] (22) 통일에의 갈망(6ㆍ25와 9ㆍ28) - 1950년 남침의 경우

1949년 7월 3일 이래 38도선에서는 무력충돌이 잦았다.

1950년 1월 26일에 한미상호방위 원조협정이 조인됐다. 2월 27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서 맥아더 장군과 회담했고 6월 17일에는 미국 국무성 고문 덜레스가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으며 6월 18일에는 미국의 존슨 국방장관과 부레들레 통합참모본부의장이 일본을 방문하여 극동정세를 검토했다.

이것이 ‘동경회담’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초부터 ‘북진통일’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운다’고 했다. 1950년 1월 이래 이승만ㆍ미국 사이의 긴밀한 접근은 이 계획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북의 김일성은 이에 자극되어 자기 편에서 선수 쓸 궁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공을 통하여 쏘련에서 무기를 공급받고 군대를 38도선 부근에 집결시켰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전쟁을 각오하면서 자기 편에서 선공(先攻)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일본-필립핀-동남아 선을 방위구역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쏘련ㆍ중공에서 맘대로 해도 좋다는 쪼로 생각할 수가 있다. 김일성은 ‘이것 웬 떡이냐’고 고스란히 그 함정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을까? 초조하게 남침을 준비하고 있는 이북의 실상을 미국이 몰랐을리 없다.

그러나 모르는 척 ‘유도작전’을 시도한 것이라고 한국의 지성인들은 추측한다.

미국의 정치적 흑막을 다 알 길이 없지만, 하여튼 나타난 뉴스는 이런 것이었다.

미국은 1950년 6월 25일 사건이 발생하자 곧 ‘국련안보이사회’를 열고 북조선의 이남공격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이북군의 즉각 철퇴를 요구했다. 이 회의 때 소련대표는 결석이었다 한다.

결석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의적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겠다. 추측건대, 미국과 실력대결할 자신이 없다는 것, ‘안보리’에서 ‘침략자’로 몰리시 싫다는 것, ‘중공’을 약화시킴으로서 두려운 경쟁자를 제거시키려는 것, 무기제공으로 중공에 대한 체면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특권의 길을 열려는 것 등등, 숨은 이유는 가지가지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 대한 ‘유도작전’이었다.

6월 17일에 ‘국련안보이사회’에서는 한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할 것을 가결했다. ‘침략’에 대한 ‘국제경찰군’ 출동이다.

1950년 6월 28일에 ‘미 극동공군전폭편대’가 출동, 6월 29일에는 미 해군작전 개시, 6월 30일에 미 육군부대파견, 한반도 전역 해안봉쇄와 북한기지 공격을 시작했다. 그 동안에 한강철교 파괴로 도강작전이 불가능했던 ‘인민군’이 6월 30일부터 부교(浮橋)를 밟고 도강했다. 그래서 국군과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됐다.

1950년 7월 3일에 맥아더 장군이 극공군사령관 권한으로 한국에 파견됐다.

미군부대가, 최전선에서 국군과 함께 전투를 시작했다. 인민군은 7월 5일에 인천을 점령했으며 ‘국련안보리’에서는 맥아더 장군에게 ‘국련군최고사령관’ 직을 맡기고 국련기를 사용하게 했다.

1950년 7월 9일에 한국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국군지휘권을 국련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대전협정’(大田協定) 각서를 교환했다.

7월 18일 미군 2개 사단이 포항에 상륙했다. 7월 19일 미국대통령 트루만은 특별교서로 100억달러를 군사비로 의회에 요청했다. 24일에 다시 105억 달러를 추가 요청했다.

7월 20일에 대전, 전주가 인민군에게 함락되고 대전에서 ‘딘’ 소장이 행방불명되었다. 같은날 미 국무성의 ‘조선백서’가 발표됐다.

7월 23일에는 대전, 영동에서 격전이 있었고 전라도 광주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1950년 8월 3일에 국련군은 낙동강 건너 새 방위선에로 철수하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대결하게 됐다.

그 무렵에 나는 일제시대로부터 10년을 못먹고 못입고 밤낮 격무에 몰두했던 여독(餘毒)이 도져서 극도로 쇠약했었다. 매일 40도 열에 떨면서 누워 있었다. 6ㆍ25는 주일날이었다. 우리 ‘단골의사’인 박요수아 장로가 예배후에 들렀다.

대수롭잖은 태도로 말한다.

“어제밤에 이북애들이 월남하여 지금 의정부에서 국군과 싸우고 있답니다. 곧 격퇴되겠지요!”

나도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그렇겠지요.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운다고 밤낮 장담하던 이승만 박사가 실속없는 거짓말을 했겠소?”

나는 서울이 함락된다 셈치더라도 국군과의 시가전쯤은 있은 다음의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과 함께, 일인이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가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비오는 밤이었다. 새벽녘에 땅바닥이 통고하듯 ‘탱크’ 소리가 요란했다. 이박사는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시민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무를 것입니다” 한다.

밤새도록 같은 방송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해방직후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목사, 장로들은 6ㆍ25날 아침에 종로 성서공회에 모여 “서울을 사수한다”고 다짐했단다. 나도 목사였지만 내게는 아무 통지도 없었다. 통지가 있었대도 가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남산 잠두에 올라가 보려고 도농파출소 앞을 지난다.

파출소에는 붉은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서울을 사수한다던 목사들은 그 길로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정부는 벌써 전에 한강을 건넜고 이박사의 ‘메세지’는 ‘소리의 시체’였달까. 녹음판이 돌아가고 있는 ‘기계의 음향’이었다.

정대위, 이장식 등 젊은 교수들은 인민군의 징집을 피하여 삼각산 암굴 속에 숨었고, 김정준은 컴컴한 방에 누워 ‘폐결핵 3기 환자’를 위장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삼각지 정밀인쇄공장에서 붉은 지폐를 찍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미군기가 까마귀떼 같이 날아와 새까만 소이탄 알을 퍼부었다. 나는 동자동 우리집 높은 석축 모퉁이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폭탄마다 불덩이로 터져, 보고있는 사이에 삼각지는 불바다가 됐다. 광야가 됐다.

삼각지 가까이 청파동에 ‘하용’ 조카의 처가가 있다. 아내와 나는 궁금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삼각지 ‘벌판’을 가로질러 걷는다. 산 사람이란 하나도 없고 죽은 사람들은 기름과 함께 까맣게 졸아붙어 큰 숱덩어리만큼씩 되어 있었다. 청파동 사돈집은 모두 무사했다.

세브란스 병원이 인민군 헌병대본부였다. 하루는 꼬마병정이 문을 두드렸다.

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세브란스로 데리고 간다. 거기에는 김정준, 송창근도 와 있었다. 헌병은 인사성이 깔끔했다.

“어른들을 밤중에 오시게 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한가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간호원들이 모두 신학교 사택에 숨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지금 부상병들을 위해 간호원들이 많이 필요한데 다들 나와서 간호원 본연의 의무를 다해 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김정준 교수님 댁에 숨어 있다는 데요!”

김정준은 “없다”고 대답한다. “처음에 잠깐 들렀다가 어디론가 가곤 했습니다.”

“어디로 간 것을 아십니까?”

“모릅니다.”

몇 번이고 다구쳐 묻는다. 옆에 앉은 송창근 학장이 가로 막는다.

“우리집에 왔다가 어디론가 갔습니다. 자기 집에 갔겠지요.”

“집이 어딘지 가르쳐 주십시오.”

“모릅니다. 요새 행방을 알리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금후에라도 물을게 있으면 내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학교 책임자니까!”

딴 사람이 나타나더니, 느닷없이 딴 질문을 한다.

“인민군의 남조선 해방에 대한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남한에 부정부패 심하니까 하느님이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겠소!”

그들은 “그럼 돌아가십시오” 한다.

이번에는 헌병 둘이 우리 늙은이들을 ‘에스콧’하여 계단 아래 보도까지 나와 배웅했다.

송창근 사택은 도동 골짜기 변두리에 있었다. 신학교에서 접수한 것인데 무던히 큰 집이었다. 화재 후에 다시 옮긴 학장 사택이다.

우리는 거의 매일 찾아간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사복순경 두셋이 송목사 집을 둘러싸고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한다.

며칠 후에 우리집 지키는 열세살쯤 밖에 안되는 꼬마 인민군이 자기보다 더 큰 따발총을 메고 오밤중에 대문을 두드린다. 같이 파출소로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갓다. 잡혀온 사람들은 마당에 배꾹 서 있다. 나와 정대위는 사무실 안 의자에 앉힌다. 우대하는 뜻을 것이다. 조사하는 순사는 사복 형사인 것 같은데 두 사람 뿐이었다. 다른 시민들을 상대로 바쁘게 돌아간다.

정대위와 나는 한 시간 남짓하게 앉아 있었다. 갑자기 소장실 문이 열리며 송목사가 던져지다시피 밀려 나온다. 송목사는 모시 고이적삼을 입고 있었다.

파출소장은 골이 난 얼굴로 외친다.

“이 자식 집어 넣어!”

순사들은 적삼고름, 허리띠등속을 뜯어 팽개치고 옆에 있는 유치장에 끌어간다.

정대위와 나는 송목사와 말도 하고 인사도 하려 했다. “안되오!”하고 고래고래 소리친다. 새벽 세시다.

정대위와 나에게는 너무 늦었으니 내일 오전 열시에 다시 오라고 소장이 말한다. 후에사 알았지만 그건 도망치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 열시에 우리는 고지식하게 파출소에 갔다. 순사들은 모두 나가고 소장만 남아 있었다.

먼저 정대위를 부른다. 얼마 후에 나왔다. 불쾌한 얼굴이었다. 다음으로 나를 부른다. 들어갔다.

“당신도 미국 갔다 왔소?”

“그랬오!”

“언제 돌아왔오?”

“1932년이니까 거의 20년 전이오.”

“그 후에는 간 일이 없소?”

“없소.”

“그럼 좋소. 미국 갔다왔다고 다 문제삼는 것은 아니오. 최근에 갔다온 사람만 조사하는 거요.”

“당신 고향이 어디오?”

“경흥이오.”

“나는 무산 사람이오.”

그리고서는 말투가 아주 부드러워진다.

“예수 믿으시지요?”

“물론이요.”

“예수를 믿어도 미국식 예수는 믿지 마시오.”

그의 태도가 하도 부드럽길래, 나는 말을 걸어봤다.

“송창근도 경흥사람이고 기독교인인데, 그리고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는데…….”

그는 단호했다.

“우리가 이승만 정부인줄 아시오?”

“송창근은 친미 종교광이요.”

“나가시오.”

그래서 나왔다.

나는 집안에 앉아 있었다. 우리집은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일본인들이 그 바위 속에 턴넬을 팠다. 그것이 비상 방공호였다. 비밀 출입구가 있고 전등시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촛불신세를 져야 한다.

우리는 라디오를 숨겨 놓고 그 턴넬 속으로 들어간다. 대구 부산 대전 등지에서 전쟁뉴스가 연방 방송된다.

인민군과 국군은 낙동강에서 맞서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여 맥아더 장군이 인솔한 미군이 울산에 상륙하여 북진중이라 한다. 자유진영 16개국이 참전하여 ‘국련’ 깃발 아래서 이북군과 대결하게 됐다고도 한다. 이제 서울 탈환은 시간문제로 됐다.

하루는 감리교 안장로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오래 전에 월북하여 감리교 김창준 목사와 함께 기독교 연맹에서 일하노라고 했다. 그는 30대 연령인 것 같은데 큰절을 하고 꿇어 앉는다.

“이제부터는 김목사님께서는 나오셔서 우리를 지도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딴 세상이 됐으니 우리같은 과거의 인물은 후퇴해야 하겠지요. 생존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오.”

그리고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하여 자유진영 16개국이 국제연합군으로 출전했는데 ‘인민군’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혼자서 세계를 상대하여 이길 수 있겠소?”

“승산이 없지요!”

“전쟁이란 이기려는 싸움인데 질 싸움을 왜 하려는 거요?”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글쎄요! 그래도 싸워야하지요. 3ㆍ1운동 때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었어요? 그래도 싸웠잖았습니까? 우리도 그 정신으로 일하는 겁니다.”

“잘 해보시오. 나는 나대로의 길이 있으니까!”

그는 두 번 찾아왔다가 그대로 갔다.

자정 쯤에 서울 바닥이 마구 흔들리는 괭음으로 들려왔다. 나는 어디고 화약고가 터지는 줄 알았다. 후에사 알았지만 국련사령관이 한강철교를 폭파한 것이었다.

인민군의 도강작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그때 그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 군중은 고스란히 익사했다고 들었다.

백지엽 장로가 피신했다가 나를 찾아와서 현관마루에 걸터앉아 몇마디 위로와 격려를 남기고 갔다.

하루는 대구출신인 최문식이 사람을 보내왔다.

그는 대구반란사건때 주동자의 하나로 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인민군 진주와 동시에 석방된, 평양신학 출신의 목사였다. 나는 일제시대부터 아는 사이다. 최문식은 두 번이나 사람을 보냈다. 만나자는 것이다.

어느날 나는 종로에 나갔다가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뚱뚱 부어서 전혀 옛면목이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남조선’ 민정실시를 위한 최고위원 7인 중에 자기도 들어 있노라는 것이었다.

‘7인위’에서는 우선 숙청대상을 토의했단다.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재판에 붙인다”, “목사는 사형에 처한다”, “장로와 교인은 인민재판에 내세운다.”

그때 이에 대하여 자기로서의 수정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목사는 간단하지 않소. 목사에게는 적어도 평균 2백명의 교인이 있소. 그 목사가 잘했든 잘못했든 우리 손에 죽었다면, 그 교인은 ‘우리 목사님이 순교하셨다’고 하며 그때부터 우리를 악마적인 원수로 대할 것이오. 교회 수를 1천으로 잡더라도 교인이 20만명이오. 20만명을 하루 아침에 ‘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졸렬한 정치가 아니겠오?”

7인 위원들은 ‘그것도 그럴 것 같다’면서 최문식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서 ‘구체안’을 말하라 하더라는 것이다.

최문식은 말했다.

“목사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①은 일제시대에도 이승만 시대에도 당국의 시녀됨을 거부하고 의를 위해 고생한 사람이 있다. ②는 일제시대나 이승만 시대에나 조용하게 자기를 지켜 당국에 붙거나 이용당하는 일이 없던 사람, ③은 일제시대나 이승만 시대에나 당국의 앞잡이가 되어 적극 협력한 사람. 이 세종류의 목사를 분간있게 다뤄야 하는데 ‘제2’의 유형에 속하는 목사는 우리가 앞잡이로 쓰자. ‘제2’ 유형의 목사는 우리가 완전히 정권을 세울 때까지 건드리지 말자. 우리 정부가 돈 다음에 다시 불러 물어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자. ‘제1’의 유형에 속하는 목사는 당장 유격대에라도 편입시키자.”

7인위원회에서는 “좋다. 그럼 네가 목사들 심사하는 책임을 맡아라” 해서 “이렇게 와 있는 겁니다” 한다.

“그럼 나는 어느 유형에 속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김목사님은 ‘제2’ 부류에 속한다고 봅니다. 댁에 계시면서 기도나 하십시오” 한다. 나는 나가려고 일어섰다.

“잠깐만”하고 최문식은 나를 멈춘다.

“각서를 간단하게 써 놓고 가십시오.”

나는, “각서라는 것은 잘못했으니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하는 다짐을 남기는 것인데 내가 목사된 것을 잘못이랄 수도 없고, 기독교인 된 것을 후회하는 일도 없고 정치에는 아무 참여도 안 했으니 정치인과 책임을 같이할 성직의 것도 아니잖소? ‘각서’는 못쓰겠소.” 했다.

“그럼 ‘기관’으로서의 각서를 써 주십시오” 한다.

“나는 기관장으로서 그 기관을 대표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기관으로서의 각서를 쓸 자격이 없소.”

“그럼 나가십시오” 했다.

최문식의 옆에는 힘께나 쓸 것 같은 험상스런 뚱뚱보 사내가 우리를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후에사 알았지만 그는 최문식을 감시하는 김일성의 직계요원이라고 했다. 그후 얼마 안되어 최문식은 행방불명이 됐다. ‘게릴라’를 자원해 출전했다는 ‘루머’였지만, 숙청된 것으로 안다.

하루는 집이 통째로 몸부림친다. 너무 큰 굉음(轟音)이어서 나는 폭발하는 분화구 언저리가 앉은 것 같았다.

왠일인가 싶어 서울역 광장에 나가 봤다. 광장에는 대형폭탄 두 개나 떨어져 진짜 화산 구멍같이 패여 있었다.

유리창 종류는 온통 부서져서 땅바닥은 유리조각 백사장으로 변했다. “시민은 안전을 위해 촌으로 피난하시오”하는 ‘삐라’가 가을철 낙엽같이 너더분하다.

나는 어디론가 피난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9월이 되자 전세는 역전하는 것 같았다. 피난민은 남으로 남으로 밀린다.

9월 5일에 미국에서는 육군 7만명을 소십한다.

9월 15일에는 국련군이 인천에 적전 상륙했다.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진두 지휘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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