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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102] 욥記에 나타난 靈魂不滅觀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17 18:29
조회
995

[0102]

욥記에 나타난 靈魂不滅觀

「落穩」
1930년 10월 25일

욥記에 靈塊不滅의 信仰이 明白히 나타나 있는가 없는가 하는 問題는 전적으로 욥記 19장 25절로 27절까지에 있는 文句를 어떻게 解釋할 것인가 히는데 달려 있다. 아직까지도 學者間에 많은 異見이 있어서 確言하기 어려우니만치 斯界學徒의 마음을 끄는 題目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이제 히브리 原文 옮기는 것은 略하고 最近에 된 英譯들을 찾아 보면

맥파딘 (Mcfadyen) 譯 “I know that there liveth a champion, /Who will one day stand over my dust;/Yea, Another shall rise as my witness, /And as sponsor, /Shall behold god;”

마팯 (Moffat) 譯 “Still, I know one to Champion me at last, to stand up for me upon earth, This body may break up, but even then my life shall have a sight of God;”

그레이, 드라이버 (Gray and Driver) 共譯 “But I know that my vindicator liveth, /And hereafter he will stand up upon the dust, And … /And away from my flesh I shall behold God. /Whom I shall behold on my side, / And mine eyes shall see unestranged.”

데이빗슨 (Davidson) 譯 “And after my skin which is distroyed. This here, even without my flesh shall I see.
God : Whom I shall see
And my own eyes behold, and not another’s;“

朝蘇語譯 「내가 알거니와 나의 구주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땅위에 서시리로다. 나의 이 가죽이 썩은 후에 내가 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을 보리로다.」

맥파딘은 키텔(Kittel)의 原本에 실린 附錄을 그대로 採用하여 極度의 自由譯을 試한 것이오 그레이와 드라이버는 26절의 上半節은 번역 不能이라고 아무 번역도 하지 않았고 마팯은 自己의 解釋에 基한 意譯을 試하였고 데이빗슨은 될 수 있는데 까지는 直譯을 試하였는데 ‘미부사리’(From or without my flesh)를 ‘오리’(my skin)의 結句(Apodosis)로 取扱하였다. 그러나 다른 學者들 中에는 이것을 對照句(Antithesis)로 取扱한 이도 많고 또 어떤 이는 이 두 文句가 共히 ‘肉體’라는 것의 概意的 表現으로 使用되었다고도 主張한다. 이것도 輕率히 判斷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보다도 더 微妙한 것은 여기 있는 前置詞 ‘민’을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것이다. 이 전치사는 영어로 ‘로, 으로’(From) 等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떠나’(Away from)로도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前者를 取한다면 욥의 말하고져 한 것은 ‘내 가죽(皮)이 비록 썩어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남은 肉體로 하나님을 目賭하겠다’는 것이 될 것이니 다시 말하면 現世에 살아 있는 동안 기어코 하나님을 뵙겠다는 것임에 靈塊不滅의 信仰과 關係될 것이 別로 없을 것이며 만일 後者를 取하여 ‘肉을 떠나’라고 번역한다면 그 反對의 事實을 意味한 것이 될 것이다. 데이빗슨은 後者가 文章構成法에 비추어 보아 前者보다 自然스럽다는 것을 力說하였고 그외에도 그린, 췌인(Cheyne) 드라이버 等이 그 後者 郞 ‘肉을 떠나’ 하나님을 보리라는 譯을 하였다.

그린(Green)은 自己가 그렇게 번역한 內面的 理由 두 가지를 들어 말하기를 “(1) 욥은 처음부터 끝가지 自己는 무덤가에서 彷徨하는 者로 自處하여 現世에서의 온갖 希望은 아주 없어진 것을 말하였으며 (2) 또 만일 욥이 自己의 信心에 對한 報應을 반드시 現世에서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主張하였다면 그는 自己의 中軸되는 思想을 내어버리고 自己를 못견디게 구는 ‘親舊들’의 思想을 따른 것이 된다고 했다”(Cheyne: “Job and Solomon” 34. Green: “Argument of Job”204-5) 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重要한 理由가 아닌 것은 아니나 그래도 아주 수긍할 수 없는 點이 아직도 남아 있다. 于先은 原文에 意義가 依然히 不分明한 까닭에 누구나 다 前後의 文脈을 보아 좋도록 解釋한 것임에 各自의 臆說에 따라 그 結論을 달리한 것이며, 데이빗슨의 熟鍊한 論文을 읽은 후에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疑惑의 念이 이주 사라지지 않는 것은 욥이 만일 이 句節에서 適確한 靈塊不滅의 來世觀을 告白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왜 그가 가장 分明하고도 普通 쓰는 말 ‘肉’과 ‘靈’을 對立시켜서 ‘내 肉이 없어진 後에도 내 塊으로 하나님을 뵙겠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語塞한 말 ‘皮’와 ‘肉’을 對立시켜서 ‘내 가죽(皮)이 없어진 後에 내 肉으로(或은 肉을 떠나) 하나님을 뵙겠다’고 하는 不分明한 表現을 했을까. 그도 亦是 傳統的 信仰인 黃泉說 때문에 (Doctrine of Sheol) 明確 한 靈塊不滅의 來世觀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所以이다.

勿論 욥은 現世에서 더 오래 살기를 期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는 때 그는 極度의 不平과 落膽을 表示하였으니 이는 그의 思惟 가운데 있는 ‘生’이라는 觀念은 純然히 現世의 生을 意味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베틀에 북(梵) 같은 나의 날(日)들은 所望없이 끝막아 버립니다.
오, 생각하소서 나의 生은 입김같아서
다시 좋은날 봐올 길 없소이다.
…………
사라져 없어지는 구름같사오매
陰府에 내려갔다 올라올 길 없소이다.”
(욥 7: 6, 7, 9)

라 한 것은 그가 生의 하염없음을 슬퍼한 나머지 ‘生은 헛된 입김,쓰러지는 구름’ 같아서 소망도 없으며 다시 찾을 곳도 없다고 괴로운 탄식을 아끼지 않은 것이며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란 사는 날은 짧고 괴로움은 많사외다.
꽃같이 났다가 또 시들어지며
그림자처럼 움직여 定함이 없사외다.”
(욥 14:1~2)

“사람이 죽어 늙어지어 그의 마지막 숨결을 내쉰때
그는 어디 있나이까.
(그는) 물 없어진 바다
말라 붙은 골짜기이외다.”
(욥 14:10~11)

이밖에도 그는 같은 意味의 괴로운 탄식을 많이 말하였으니 10장 9~13절 까지에는 人生이란 거룩한 土器장이의 손으로 빚어만든 한 조그마한 흙덩이에 숨과 생각과 靈을 넣어 놓은 것으로 結局은 다시 無意味한 티끌가루로 돌아갈 밖에 없는 것을 원망스럽게 말했으며, 13장 28절에는 그의 生命이 날로 썩어져서 좀먹은 의복같이 떨어져가는 것을 괴로워 하였으니 다 明確한 靈魂不滅의 來世觀을 찾지 못한데서 생긴 괴로운 告白인가 한다.

그러면 욥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 줄 믿었는가? 3장 1~22절에 그는 自己의 난 날을 咀呪한 後에 죽은 者의 平和로운 靜寂과 安息을 부러워서 이렇게 노래했다.

“왜 무릎에 나를 받들었으며 왜 가슴이 나를 젖먹였던고
그러지 않았던들 지금의 나는
고요히 누워 平安히 잠잘 것을
…………
强者가 掠奪을 그치고
弱者가 마음놓고 있는곳!
포로가 다함께 고요히 누워
看投軍의 毒한 소리를 듣지 않는곳!
큰 者와 작은 者 分間이 없고
奴隸가 主人에게서 놓임받은 곳!
오, 하나님 왜 受難者에게
빛을 주시나이까?
왜 쓰린 落望에 있는 人生에게
삶을 주시나이까?”
(욥 3:12~14, 17, 20)

여기에서 우리는 욥의 괴로운 ‘死의 讚美’를 듣는다. 이 靜寂과 安息으로 表現된 死者의 世界는 陰酸한 쉐올(She이) 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데이빗슨이 ‘舊約神學’ 479頁에서 말한 바와 같이 ‘墓所의 景과 死者의 肉體的 狀態를 想像’하여 詩的으로 着色한 것임이 分明하매 구태어 敎理的 問題에까지 올릴 必要는 없는줄 안다. 이밖에 다른 곳에서는 始終一實하게 죽으면 陰府(Sheol)로 내려 간다는 것은 再言은 要하지 않는 定理 같이 말하였다. 이 쉐올은 ‘暗黑의 世界, 陰酸과 混濁의 世界, 거기에 비취이는 빛이란 끊어지고(14:21) 거기서 나올 所望도 없는(10:21)’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욥의 來世觀이 대개 어떠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는 生의 唯一한 實在性은 오직 現世의 ‘삶’에 있는 것이요, 死後에는 暗黑과 混濁 그 자체인 쉐올에서 ‘삶’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나 희미한 끊임없이 늘어진 半意識의 ‘存在’를 繼續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14장 13~15절에 그는 이 쉐올에서 벗어날 때가 있을 것을 말하였으나 그 다음절 16, 22, 特히 19절로 22절에서 郞時 그런 希望이 不可能한 것을 스스로 言明해 버렸다.

그러면 이런 思想的背景을 가진 욥에게서 明確한 靈魂不滅의 來世觀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없다는 理論이 優越하다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도 相當한 무게가 있음을 認定 안할 수 없는 줄 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욥의 來世觀을 正當히 把握하려면 그의 思想을 全體的으로 보아 그 곡절있는 움직임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욥은 人生의 巡禮者다.

그의 記錄은 冊床위에서 三段論法으로 쌓아올린 論理의 殿堂은 아니었다. 차라리 人生의 曠野에서 갈찾아 헤메이는 눈물겨운 苦憫의 告白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變遷이 많고 矛盾과 自家撞着도 많은 것이다.

死者의 고요한 安息을 부러워하던(3:14~19) 그가 死者의 世界인 쉐올의 暗黑을 생각하고서는 몸부림치며 원망하였으며(10:21, 22) 쉐올에서 다시 나오기는 絶對不可能하다고 宣言하다시피한 그가(7:7~9) 하나님이 자기를 쉐올에서 불러낼 때를 기다리겠노라고(14:13~14)도 하였으며, 하나님은 苛酷한 無道德한 이라고 원망하던 그가(9:22~24) 自己를 辯護해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라고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기도 하였다(19:24~25).

이렇게 그는 安定없는 마음으로 이곳저곳 더듬어 헤매었다. 그러나 그의 품안에는 한 작은 羅針盤이 있어서 그의 나아갈 方向을 멀리 가리키고 있었으니 그 바늘의 한쪽 끝은 하나님의 의(義)를 가리키고 또 한쪽 끝은 그의 良心-潔白한 良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길을 찾아 헤메이는 동안에도 이 바늘만은 항상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은 義로우시다. 그리고 내 良心은 潔白하다. 그런고로 이 現在의 慘狀에 對하여 무슨 說明이 있어야 할것이다 하는 것이 그의 속임없는 心情이었다.

“이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다. 내게는 소망이 없소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앞에서 내 길을 변호하오리니 敬虔치 못한 者가 그의 앞에 올 길이 없사오매 이것이 나에게 救援의 表가 됨이외다.”(욥 13:15~16)

“만일 하나님이 義로우시다면 潔白한 사람을 無故히 埋葬해버릴 理由는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이 그가 붙잡고 놓지 않은 가장 큰 眞理였다. 이 信念이 그에게 잠깐이나마 쉐올에서 復活할 希望도 보게 하였으며(14:13, 14) 아벨의 피가 땅을 적셨을 때 하늘에 계신 증인이 이를 변호해준 이야기를 연상케 하기도 하였으며(16:18, 19) 甚至於 옛이야기를 싣고 고요히 서 있는 碑石에 呼訴할 생각도 나게 한 것이었다(19:23, 24).

이렇게도 受難者의 倫理的 先後策을 생각하고 있는 反面에 그보다 더 큰 問題가 그를 괴롭게 하였으나 卽 大體 義人이 因苦할 ‘까닭’이 무엇인가, 無辜한 피가 땅을 적실 理由가 어디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理性은 이것을 判斷하기에는 너무나 局限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直接 問議하기를 要求한 것이다.

“나는 오직 全能한 이에게만 말씀드리렵니다.”(욥 13:3)

나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의 問議와 懇願, 그의 探求와 祈禱는 마침내 그를 피스가의 높은 峰위에까지 인도하였고 거기서 그의 오랜 懇求에 對한 確證의 世界를 展望하게 하였으니 곧 이번 硏究의 本題가 되어 있는 19장 25~27절에 있는 말씀이다. 거기에서 그는 (1)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潔白한 것을 辯護해 주시리라 (2) 그가 틀림없이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봐올 것이라 하는 두가지 偉大한 信仰의 世界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느때 어떻게 이것이 成就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重要한 問題가 아니었다. 이것의 그의 生前에 成就되든 死後에 되든 또는 그가 普通肉眼으로 하나 님을 뵙든, 가죽이 다 벗겨진 고깃덩이 몸으로 그를 뵙든, 復活한, 새로 지음받은 몸으로 그를 뵙든, 아주 肉에서 떠난 靈으로 뵙든, 이런 것은 그가 그다지 크게 關心한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참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은 - 그야 살던지 죽던지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義’와 ‘聖徒에 對한 하나님의 啓示’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며 또 반드시 있을 것이리는 確信이었다.

스트란(Strahan)이 스멘드(Smend)의 책을 引用하여 말하기를 “死後의 永遠한 生命에 對하여 욥은 言明한 바가 없다. 그가 생각한 生命의 回復이란 것은 그의 正義感의 體現에 不過하다. 卽 現世에서 滿足을 얻지 못한 그의 正義感이 그의 믿음의 目標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 뿐이다” 라고 하였다.

事實 욥은 事後의 靈魂不滅에 對하여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傳統的 信仰인 陰酸한 쉐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强烈한 正義感은 이에서 滿足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에 靈魂不滅의 偉大한 信仰은 ‘하나님의 義’라는 터전에 뿌리를 박고 ‘욥의 潔白한 良心에’ 그 작은 싹을 돋게 하였다. 마치 작은 상수리 나무 열매가 偉大한 將來의 可能性을 품고 가시텀불 속에서 그 조그마한 싹을 돋힌것 같이.

[김재준 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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