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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1154] 장공칼럼 : 고난과 창조 - 1977년 5월 16일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11 15:32
조회
614

[長空 칼럼]


고난과 창조

한국역사는 수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 수난의 도전에 한국민족이 어떻게 응전했느냐에 따라서 그 수난의 가치는 결정된다. 우리의 과거는 반드시 창조적이요 건설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수난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응전하고 있는가? 한국신학대학생들은 4월 7일 학생 전원이 예배실에모여 고난 예배를 드리고 고난선언을 발표했다.

“우리 한국신학대학생들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임을 믿는다. 그는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다. 우리는 그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 암흑의 때에 그를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이미지’를 되찾기 위하여 주님의 고난을 기억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신화나 전설일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며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 임마누엘의 형제와 자매가 우리 주님 제자로서의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밖에 없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들은 국내의 암흑상을 실증적으로 고발하였으며 일인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의 비법성, 긴급조치령, 국가보안법 등의 인권탄압과 비인간적 탄압성, 부패와 치욕외교에 의한 국제고아화, 공해수입 매판자본 등에 의한 국토의 쓰레기통화, 물가고와 세금고에 의한 국민생활의 파탄, 학원 병영화 등을 고발했다. 그리고 (1) 현정권의 퇴진 (2) 3권분립의 민주정부 수립 (3) 진정한 인간교육과 가치관 수립을 위한 문교행정 (4) 민족자본육성과 매판자본배제, 국민복지향상과 소득의 공정분배 (5) 전체 기독자의 현상 개혁에의 총력집결 등등을 결의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다섯 학생을 반공법으로 구속했다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부활절연합예배 준비기도회에서 고난선언을 발표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오늘날 이 세계를 휘어잡고있는 금력과 완력, 물질주의와 상업주의, 폭력과 전쟁의 악령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역사 속에서 주의 뜻을 증거하고 신앙을 고백해오고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방을 받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한다. 부활의 영광은 수난과 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곳에서만 결실되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 깊이 자국나 있는 수난의 상처는 부활의 영광의 대표이다…”

그러나 해외 특히 부요사회로 지목된 북미주 한인사회와 교회에서는 고난에 대한 관심도 이해도 깊은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한 것같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혐오하는 본능의 범위 안에서만 살려는 의욕으로 차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라면 예수를 응시하지 않을 수 없고 예수를 본다면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촛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고난과 창조”라는 과제를 다루게 됐다.

인간은 몸을 갖고 산다. 폼은 먹고 마시고 업고 쉬고 하는 생활조건을 요구한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잠못자고 하면 폼이 괴롭다. 몸이 괴롭다는 것은 그 “인간”이 괴롭다는 말이다.

몸을 가진 인간은 그러므로 잘먹고 잘입고 좋은 집에서 잘살기를 원한다. 몸이 편하고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인간은 나면서부터 기성품으로 이런 것을 갖춰갖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갓난애기는 자기몸 보호에는 “제로”에 가까운 무능력자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눕히며 …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는 어버이 보호와 사랑이 절대로 요청된다. 철이 조금 들자마자 애기는 무언가를 가지려고 애쓴다. “내꺼다!” 하고 두살배기도 형과 싸운다. “소유욕” 없이는 자기보호가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무어구 소용될 것을 내게 붙여 놓아야 살겠단 심사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주의가 되고, 이기주의가 되고, 자본주의제도가 생겨나고, 억만장자도 생겨나고 무일푼의 가난뱅이도 생긴다. 가난뱅이는 소유가 없다는 것뿐이요, 소유욕까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진실할지 모른다.

이렇게 부요와 편리와 안일과 쾌락은 모든 몸가진 인간들이 예외없이 원하는 바이지만 그 소원을 성취한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 대다수 인간은 거기 대한 욕심만이 부풀어 있을 뿐이요 고통을 불치병같이 폼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소위 “성공자”란 사람들도 반드시 기쁘고 행복하기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생명과 그 가치가 물질의 소유량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쓰고 부자가 됐다고 하자! “So what?” 그러니 어떻단 말이냐? 특수층이라 하여 대다수 인간들로부터 소외되고 “특수”하다는 것도 “돈”이란 부착물 때문에 하는 말이요, 그 자신의 인간됨으로 “특수”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의 “고독”은 심각해진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누르고 괴롭히고 짜내고 짓밟는 권력쾌감은 권력상실과 그 상실에 따르는 공포감에 정비례한다.

그는 불안하고 불신하고 초조해지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고통”은 가진 사람, 안가진 사람 모두의 문제로 심각해진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용기 같은 것은 고통의 문제를 주제로 다룬 것이고, 예언자들 특히 제2이사야도 그랬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고통”의 실재를 응시하며 한걸음 한걸음 그 고통의 극(極)인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전진했던 것이다.

구약시대에 고통의 문제를 다룬 사랑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면 (1) 처음 단계에서는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요 부귀영화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생각이었다. 아브라함도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다. (2)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란 것 보다도 자기 잘못 때문이란 것이다. 욥이 고통을 받을 때 욥의 친구들이 이런 견해로 용을 괴롭혔다. (3)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도 자기 잘못도 아니라, 숨은 운명의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전도서가 주로 그런 견해였다. 한국에서의 ‘사주팔자”란 것도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4) 고통은 인간을 교육 훈련하기 위한 교재란 것이다. 고통 없이 자란 인간은 콩나물같이 키만 크고 중심이 없는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문제다. 너무 심한 고통은 교육보다도 사멸을 가져온다. 젊은이들에게는 적용될지 몰라도 늙은이의 고통은 죽음에의 급행열차여서 교육효과에의 기간도 없다. 회개에의 시점은 죽음직전 일순간일 수도 있다지만, 그런 것은 예외의 예외에 속한다. (6) 초월해 산다는 태도다. 괴로우면 어떻고 즐거우면 어떠리. 인생 팔십이 고래회라, 죽으면 모두가 북망산의 한줌 흙이 아니냐? 청산도 절로절로 인생도 절로절로, 자연 안에서 자연과 같이 자연에 살다 자연에 돌아가는 것, 괴롬도 자연, 기쁨도 자연 - 희로애락을 초월하여 자연에 살면 고통도 즐거움도 도인(道人)의 정정(靜淨)을 설레지 못한다는 도교(道敎)적인 태도도 있다. (7) 그러나 고통의 문제가 가장 적극적 건설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구약의 이사야 제53장에서다. 예수는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에서 사실화하려 했다. 그것은 고통을 사랑의 무기로 사용하는 그것이다. 그는 “고난의 종”(Suffering Servant)으로 자신을 십자가의 제단에 던졌다. 다시 말해서 남을 위해 기쁘게 받는 고통은 숭고한 가치창조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 영광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인간역사 안에 “성육신”하게 하기 위해 받는 고통은 거룩한 영광이라는 것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톰과 같이 하라”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예수는 말했다. “이웃사랑”이 무언가? 그것은 이웃을 위하여 고통을 분담하는 삶이다. 사랑은 그가 사랑하는 자의 고통을 대신하는 데서 그 정체가 드러난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을 내가 대신 젊어진다는 데서 그 사랑이 폼으로 현현(顯現)한다. 속량애 대속애 - 그것은 사랑의 극치다. 그 사랑은 예수를 죽음과 무덤에 밀어 넣었으나 그것은 제3일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했다. 그것은 사랑의 승리였다. 고통의 십자가가 승리의 부활을 위한 선행조건이란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손과 발과 옆구리에 죽음의 상흔(傷痕)을 언제나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부활한 예수와 역사적인 예수를 한 Person으로 입증하는 표적이었다.

그래서 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는 선교의 맨처음부터 십자가를 응시하며 그 표적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선교직전의 광야에서의 시련기록을 잠시 더듬어 보아도 그렇다. (1) 풍부한 물질로 민생을 부요하게 먹고 마시고 살게 하라, 그리하면 민중이 너를 구세주로 따를 것이다. 여기에 십자가의 고통은 없다. (2) 특별한 신통력으로 민중들 앞에 기적을 과시하여 만민으로 추종하게 하라, 여기에도 십자가의 고통은 없다. (3) 악마에게 절을 하고 천하만방의 영화와 왕권을 누리라. 여기에도 물론 십자가의 고통은 계산에 안들었다. 오직 힘과 영화와 번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유혹에서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일갈했다. 그리고 천하만민의 죄와 고통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죽는다는 십자가의 길을 택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통은 만민대속의 무한대의 사랑의 계기었으며 그것을 몸으로 체현하는 때, 한없이 크고 높은 자기창조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예수의 수난은 고통을 일부러 찾아 억지로 자기 몸을 괴롭히는 금욕주의자의 그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금욕주의자도 율법주의자도 신사도 양반도 아니었다. 그는 서민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그들 집에 유숙하였다. 창기들도 그를 따랐고 그도 그녀들을 꼭같은 인간으로 대했다. 그리고 그런 삶 때문에 고통을 가해오는 일이 생기면 피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그러나 도저히 피해낼 수 없거나 피해서는 안될 경우에는 정면으로 그 고통을 껴안았다.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고민과 결단이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버림받고, 자기의 제자와 은혜입힌 자들에게 버림받고 최후에는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는 진짜 ‘외톨이’로 죽는 고통이었다. 그는 극도의 고통을 껴안고 고통 속에 죽은” 아무도 기억해줄 인간이 없는 - 고통에의 고독한 “참패자”였다.

그의 사형수로서의 죄목은 복잡했다. (1) 정치적으로 유대독립당 “젤로트” 유격대 두목이라는 국가반역죄를 선고받았다. (2) 종교적으로 칠십인 의회와 대제사장으로부터 신성모독죄를 선고 받았다.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으니 더 물을 것 없는 “독신죄”(瀆神罪)란 것이었다. 독신죄는 사형에 해당한다. (3) 사회적으로 유대인사회의 기강인 모세의 육법을 파괴한 “파계자”란 것이다. 그는 유대인의 긍지인 정결법을 무시하고 이방인, 죄인, 세리, 창기 등과 어울려 다니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유대인사회의 질서를 교란파괴했으며 안식일에도 일함으로 율법 자체를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그 때 집권자들 눈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보였을지 몰라도, 하나님과 의인들 앞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선이요 영생의 바탕이었다. 오늘에 있어서도 진정 예수를 따르려면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이 따른다. 당장 죽지는 않는다 해도 죽음의 그늘 밑에 살아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바른말로, 횡포하고, 불의부패한 독재정권을, 비판하면 국가전복죄 또는 정부 반역죄로 몰린다. 기성교회의 잘못된 기독교 이해와, 불의에 동조하고 부패를 조장하는 불신앙을 규탄하면 “이단자”로 몬다. 청계천의 빈민촌, 산업사회의 노동자, 실업인, 억울하게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대변하면 “빨갱이” 딱지를 부친다. 교직자가 창기와 불량소년소녀를 친구로 삼아 그들을 예배당에 들여놓으면 “성역”(聖域)을 더럽힌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오늘도 예수가 여기에 오신다면, 특히 한국과 같은, 가난할 뿐 아니라, 불의와 부패와 횡포가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만신창이가 된 고장에 오신다면, 그가 미화된 교회당 안이나, 호화주택의 교회지도자 가정보다도 가난하고 짓밟히고 착취당하고 병들고 그러면서도 왜 그런지도 모르는 - 분노도 느낄 줄 모르는 - 그런 “기민”(棄民)들을 찾아 그들을 자각과 격려로 일어서게 하실 것이 확실하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란 것을 의식시키기에 힘쓰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친구로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지는 십자가의 길을 다시 다시 가실 것이 아닐까?

이런 예수상을 보았기 때문에, 한국의 “창조적소수자”인 학생, 목사, 신부, 민주인사 노동자, 일부정치인, 민주기자 등등이 즐겁게 그러나 엄숙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죄없이 감옥에 갇히며, 채찍에 몰려 길바닥에 짐승같이 이리 몰리고 저리 쓰러지고 하면서도 꾸준히 자유 한국의 회생을 위해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제3일”이 반드시 올 것이며 그들은 예수와 함께 그 몸에 못박힌 흔적을 지니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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