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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240] 미국 장로파 선교사와 한국 장로교회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10 11:37
조회
1005

미국 장로파 선교사와 한국 장로교회
– 특히 신학교육 문제를 중심으로

김옥균 씨의 개화운동이 실패하고 보수당이 정권을 잡은 이래, 한국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존망대(自尊妄大)하여 스스로 세계와의 관련을 끊고 소위 ‘은자’의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가 거세니만치 늘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둘러막았던 담장에 저절로 틈이 생겼고 이 틈을 타서 1884년 9월 미국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N. 알렌 (Rev. Horace Nowtonallon) 박사가 입국하였다. 그는 궁의로 지내면서 뒤를 이어 들어올 선교사들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호레이스 G. 언더우드(Horace Glant Underwood) 씨가 25세의 청년 목사로 인천항에 상륙하여 감리교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목사와 함께 한국의 첫 목사 선교사가 된 것이다.

5년 후인 1890년 1월 25일 사무엘. A. 마펫(Dr. Samuel Addison Moffett, 마포삼열)이 북장로파 선교사로 입국하자, 이 원기 왕성한 청년 선교사들은 한층 활기를 띠고 위대한 장래를 꿈꾸며 각 지방을 여행하였다. 같은 해에 이 젊은 선교사들은 노련한 중국 선교사로서, 25년간의 경험을 가졌을 뿐 아니라, 독창적인 선교 방법을 발표한 F. 네비우스 목사를 초청하여 2주일 동안 열심히 선교 방법을 배우며 검토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방법은 단연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C. A. Clark,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 p.73).

그 방법은 한국 장로교회의 급속한 양적 발전에 다대한 공헌을 남기었다. 그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자력 선전 : 누구나 예수 믿는 그날부터 자기가 아는 정도의 것을 발표하며 그의 가정이나 근친이나 친구에게 믿기를 권하며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공부와 신학연구를 충분히 한 목사나 전도사라야 비로소 전도할 수 있다는 관념을 아예 처음부터 배제하고, 믿는 그날부터 모든 평신도가 다같이 전도인이 되어야 구원 얻은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말미암아 많은 신도를 단시일 안에 얻게 되었다.

[2] 자급 : 신자가 교회를 설립하여 회당을 마련하며 교역자를 청빙하는 등에 있어서 결코 선교사의 보조를 바라거나 어느 다른 기관의 신세를 지려는 심사를 가지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자급정신을 훈련 실천시키라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에서 어느 지교회나 거의 전부 자립되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 자치 : 선교사가 전도하여 세운 선교지의 모든 교회는 선교사를 보낸 나라의 교회에 속한 지교회로 간주되어 그 치리를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 상식이다. 감리교회에는 이 연관성이 지금도 퍽이나 긴밀하다. 그러나 네비우스는 이것을 시정하여 선교지대에 노회를 구성할 만한 교회 수가 되면 곧 독립된 총회를 조직하여 그 선교지 교회가 처음부터 자치기관을 가지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장로교회에서도 1907년 9월에 전국 교회가 합하여 한 노회를 구성함과 동시에 임시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12년 9월에 총회가 조직되고 1922년 9월에 온전한 헌법이 제정 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1886년에 9명의 세례교인, 1887년에 25명, 1888년에 65명, 1889년에 104명, 1890년에 100명, 1896년에 500명이던 한국 교회가 1907년 한 노회로 구성될 때에는 조직교회 50, 미조직교회 1,022, 세례교인 4,585명, 총 출석교인 1만 8,081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1912년 제1회 총회를 조직할 때에는 세례교인 8,836명, 총 출석교인 5만 3,008명, 오늘에 와서는 부정확하나 대략 50만의 교인 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노력과 그 방법의 실제적인 공효가 크게 기여한 소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양 성현의 말에 1년 계획은 곡식 심는 데 있고, 10년 계획은 나무 심는 데 있고, 100년 계획은 사람 심는 데 있다고 했다는 것과 같이, 이 방법을 채용한 선교사들이 과연 백년대계를 지혜롭게 세웠던가? 이 네비우스 방법이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 질보다 양에, 인물보다 사업에, 가치보다 능률에 치중하였다는 것은 그 나타난 것으로도 틀림없이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들의 교계 인물 양성기관 신학교육 이념과 그들의 전 교회 지도정신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1901년 평양 선교사회에서 2명의 장로를 학생으로 신학교육을 시작하고 1905년에 선교회 경영의 평양신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어 1년에 석 달씩 5학년에 졸업하는 제도하에서 40명의 학생이 등록되었다. 그러나 이 신학교육에 대한 준비는 오래전부터 숙고된 것이어서 1896년에 이미 7개조의 신학교육 이념이 수립되었다.

첫 세 조목은 소극적인 것으로서 어떤 사람(말하자면 어떤 전도사나 선교사 서기나 또는 특히 눈에 드는 사람)을 신학 공부시키려고 작성했을지라도 그 사실을 본인에게 알리지 말 것, 그 사람을 전도인으로 쓸 경우에도 선교사 돈으로 월급을 주지 말 것, 미국에 유학시키지 말 것(적어도 선교 초기에는) 등이요, 다음 네 가지는 적극적인 이념으로서 성신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할 것, 기독교 근본적인 사실과 말씀을 철저히 주입할 것, 고생에 견디는 좋은 그리스도의 병정이 되게 할 것, 일반 민중보다 조금 높은 정도로 교육시킬 것(너무 높게 교육시키지 말 것) 등이다.

무슨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에는 선교사에게 물으면 다 가르쳐줄 테니 너희는 거저 시키는 대로 일만 하라는 것이 그들의 한국 교역자에 대한 태도였으며, 이런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미국 유학도 금지하고 고등 교육도 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애초부터 한국 교회를 못 되게 하기 위한 계획적인 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의 정도가 너무 낮아 보이니 선교사와 동등의 교육을 받았댔자 써먹을 데가 없으리라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요, 한국 사람들은 사대정신이 강하므로 선교사에게 잘 복종할 것이 사실이매, 선교사가 쥐고 쓰면 더욱 쉽게 능률을 내리라는 관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50년 내 한국 교계에는 상당한 거물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세계적인 호흡을 못했기 때문에 그 안계가 좁고 그 지식이 얕아서 결국 세계적 지도자의 품격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이었다. 오늘날 교계에 인물이 이렇게까지 결핍하다는 것은 이 근시안적인 신학교육 이념 때문이었다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 문교부장관 백낙준 박사도 지금부터 25년 전인 1927년, 그의 저서 『한국신교전래사(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206면에 아래와 같은 평을 발표하였다.

“선교사가 한국 교역자 양성 방법에 신중을 기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귀한 동기도 우리는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좋은 의도로 한 것이라도 그것이 너무 과도히 주장될 때에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 이 훈육책은 전체성으로 보아 원대한 환상에 기인한 것이 아님이 사실이다. 자존심 있고 자신 있는 인간을 우리는 교육받은 지도자에게서 기피하고 있다. 한국 교역자들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를 위하여 공헌한 업적을 계승할 지도자들이다. 한국 교역자의 지적 요양이나 문화적 품격이 높이 보장되어 선교자들과의 사이에 불쾌한 차등감이 생기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한국 교역자의 지적 수준을 최저선에서 정지시킨 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선교사들에게는 대학과 신학의 전 과정을 졸업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들의 후계자가 될 한국의 교역자는 일반 교인들보다 조금 높은 정도의 교육밖에는 받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이미 본 대로 그리스도교는 무식계급의 대중에게 그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 신도보다 조금 높은 교육이라면 그 정도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은 일본, 기타 외국에 유학하여 문화와 과학을 자유로 습득해 온다. 그런데 교육자는 현대 교육을 받지 못한 과거의 인물로만 구성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교역자는 존경과 위신을 확보하는 대신에, 온전히 그 반대되는 것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한 그들의 과소평가와 한국인의 그들에 대한 과소평가 때문에 생각과 감정이 어느 정도 마비된 선교사들은 새 세대를 위하여 개혁은 단행할 만치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역사가 토인비가 말하는 ‘승리의 도취(Intoxication of victory)’에 사로잡힌 선교사는 대중에게 부단히 ‘미메시스’를 나눠주는 대신에 자기 자신이 ‘소수의 지배자’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50년래의 집권을 놓아버리기가 몹시 애석했던 것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에게서는 이것이 하나의 선교 ‘방법’ 문제일 뿐 아니라, 그들의 신학사상 자체가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의 신학사상은 거의 전부가 극단의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뒤를 이어 나오는 젊은 선교사들도 역시 그런 타입의 사람만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한국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본래 극단의 보수주의자란 이미 가진 그것이 온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심적 태도를 굳게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역자가 혹시나 다른 것을 배울까 봐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철의 장막’이라도 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극치에 처해 있다면 몰라도 조금이라도 생명이 있는 한 변천과 진보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어서, 미국・영국・구라파・일본 등이 다 신학사상에 있어서 활발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그때에 유독 한국만이 그 감화에서 온전히 제외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독립선언과 함께 치열한 민족운동이 전개 되었다. 선교사들도 한국인을 도와 이모저모로 이 운동에 공헌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에도 다소의 자유가 주어졌다. 많은 청년들이 외국에 유학을 떠났다. 총독부에서는 각 사립학교도 공립과 동등의 자격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격교사를 채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까지 정규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미션스쿨들은 자격교사를 얻기 위하여 허둥지둥 몇 사람을 골라 일본으로 유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위한 일본 유학은 물론 아직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목사일 보는 데는 정부의 자격검정이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 일본의 제(諸) 신학교에 유학 가는 청년들도 점점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선교사의 ‘사상통제’ 정책은 차츰 유루를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34년 평양에서 선교 50년 기념 축하식전이 거행되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선교사에게 드리는 ‘화환’이었음과 동시에, 선교사 중심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조종’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것은 과거 50년의 ‘약력’을 억지로라도 좋게 꾸미려는 의례이기는 하였으나, 금후 50 년의 새 세대를 건설할 하등의 젊은 이상도 박력도 없는, 말하자면 하나의 수선스러운 장례식 기분이었다. 그때 늙은 목사님들이 축하받기 위하여 올라앉은 2층 원두막이 그 과중한 짐 때문에 견디다 못해 찌그러져서 하마터면 많은 사람이 다칠 뻔했다는 것도 웃지못할 하나의 희극이었다.

그 이듬해 1월호 《신학지남》 권두언으로 무엇 하나 쓰라는 청을 받은 나는 단문을 발표한 일도 있다.

1936년이다. 일제의 사상압박은 차츰 더 노골적으로 실시되어 신사참배가 그리스도교 각 기관에까지 강요되었다. 조선의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지은 선교사 지도하에서 50년이나 훈련받은 조선 교회는 이제 첫 시련에 봉착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교사나 조선 교인이나 막론하고 용감한 거부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선교사는 타국인이니 신변 문제까지 될 것은 없었으나, 조선 교인으로서는 1년, 2년 꾸준히 악착한 고문과 감옥살이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전체 교인에게 이런 영웅 적 행동을 일률적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튼 조선 장로교회 유일의 교역자 양성기관인 선교회 경영 평양신학교는 선교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무기 휴교를 선언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존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0년까지 선교사는 일체 귀국하고 조선 교회는 일제라는 박정한 ‘계모’ 밑에서 고아같이 자라고 있었다. 그동안에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도 하여간 조선 교회는 조선 사람의 손에 맡겨졌으니, 우리가 해갈 것이라는 자신과 자각은 남몰래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1940년 4월, 조선 사람끼리 세운 조선신학교가 서울 승동교회 아래층에서 개교되었다. 이것은 조선 교회 50여 년 사상 처음 되는 기록이었다. 이날부터 참된 의미의 조선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다른 기관은 다 조선 사람에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신학교만은 기어코 선교사들이 직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선교사 우월권, 선교사 주권을 유지하려면 조선 교역자의 질을 선교사 이하의 선에 정지시켜야 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신학교육을 온전히 선교사가 독점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조선 사람의 힘으로 조선신학교가 설립되고 선교사가 일제히 귀국한다는 것은 비록 전쟁에 의한 불가피한 사태였다 할지라도 벌써 선교사 집권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래 5년 동안 우리는 전쟁과 궁핍과 압박과 시련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면서도 교회 문만은 끝까지 닫지 않으려고 있는 힘과 재주를 다해 왔다. 그동안 선교사나 외국인으로부터의 원조는 꿈에도 기대해 본 적이 없으며, 기대할 처지도 물론 아니었다. 그래도 신학교도 해왔고, 학교도 했고, 교회도 지켜 왔고, 전도도 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종막을 고하였다. 1946년부터 선교사는 다시 옛 일터로 찾아와 주었다. 돌아온 그들의 태도는 퍽이나 신중하였다. 거의 1년이 지나도록 정관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신학교를 다시 그들의 손에 쥐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는 이북에 있으니 할 수 없고 이남에는 조선신학교가 있어 벌써 5회나 졸업생을 내고 더욱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으니 함부로 손댈 수가 없었다.

조선신학교는 참된 의미에서 조선 교회의 산파역을 맡은 역사적인 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출발 당초부터 건전과 신중을 기했다. 그 교육이념의 수립에 있어서 지금까지 물려받은 전통인 보수적 신앙을 기반으로 하되, 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확보해야 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 교회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사대사상이나 의타주의를 시정하여야 할 것을 절감하였다. “하나님만 믿고 모험하라!”고 늘 외쳤다. 그러나 일대 일의 인격적 존엄을 확보하면서도 세계 교회와 병진하며 주 안에서의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세계 교회 운동’에 적극 협력할 것을 지향했다. 구 평양신학교의 표어(?)가 ‘조선 교회를 위한 조선 교역자’란 것 이었다면, 조선신학교 교육 책임자들은 신앙으로나 학문으로나 ‘조선 교회를 위한 세계적인 교역자’를 양성하고자 염원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보수적이면서도 자유정신이 보장되었고, 조선적이면서도 세계적인 ‘환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또 선교사든 어느 딴 교파 사람이든 진실하게 인격적으로 친구 되려는 이를 의식적으로 소격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문호는 언제나 개방되고 있었다. 이 신학교는 1946년 총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가 되어 교회 안에서의 기반이 더욱 굳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 총회적으로 이사회가 재편성되고 각 선교부에 교수와 이사를 보내어 협력해 주기를 청하였다. 캐나다 선교부에서는 진심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하고 스콧 박사를 교수로 보내주어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존경하는 친구며 선배로 모시고 있다. 미국 북장로 선교부에서는 “아직 정식으로 관계할 시기가 아니므로 두고 보자.”는 회답이 왔다. 그리고 미국 남장로 선교부에서는 놀라운 회답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1) 교회 방침에 있어서 태초부터의 순 전통적인 성경 해석과 전통적인 신학을 가르칠 것, 2)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하면 현 교수진을 퇴진시킬 것, 이것을 약속한다면 1년 동안 시험으로 교수 한 사람을 보내고, 이사회에 이사를 파송함과 동시에, 경상비 얼마를 담당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사회로서는 너무나 솔직한 명령(?)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사회로서의 회답은 극히 온건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1) 조선신학교에서는 전통적인 해석이나 전통적인 신학을 무시하는 일이 없으니 그 점은 안심하여도 좋을 것이라는 것과 2) 현 교수진의 진퇴 문제에 있어서는 귀 선교부에서도 이사회에 참석하여 이사회로부터 충분히 토의한 후 퇴진시켜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에 공론에 의하여 작성할 것이요, 지금부터 약속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후 그들로부터는 아무런 교섭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 전투적 근본주의자인 메첸 파 선교사들이 부산에 상륙하여 총회에 불평을 품은 재건파를 발판으로 삼고 분열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재건파계의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그들의 신학교로 삼음과 동시에, 경남노회에 분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또 이북에서 이남한 피난 교역자들은 전부터 친근한 북장로 선교사들과 접근하여 하나의 이북세력을 구성함과 동시에 평양신학교의 재현을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남북장로회 선교사들과 이북에서 피난 온 수많은 지도적인 한국 교역자들과 이남의 정통주의 목사들과 메첸 파 지도자들이 서로 어울려서 한 강력한 보수진영을 구성함과 동시에 새 역사를 창조하려는 조선신학교에 대하여 총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그들의 표면에 내거는 공격 이유는 대개 이런 것이었다. 즉 “조선신학교에서는 성서의 고등비평을 가르친다는 것을 보니 이전 평양신학교의 ‘정통’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정통’, 즉 ‘신신학’일 것이다. 신신학이라면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며 기적도 부인할 것이요 사도신경도 안 믿을 것이다.” 하는 것이어서 자기류의 어떤 가설에서 연역하여 가상적인 결론을 만들어가지고 그들의 가상적인 조선신학교에 뒤집어씌우는 전술이었다. 그들은 자기가 상상 가운데서 만들어낸 조선신학교와 사실 그대로의 조선신학교를 구별하지 못하는 심리적 변태에 사로잡혀 있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위증죄, 이간죄, 작당죄 등을 거쳐 신도에게서 사랑의 심정을 뽑아 버리고 원수 맺은 것 과 증오심을 심어주는 가장 악마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자기가 절대적인 줄 아는 광신적은 그들에게는 돌이킬 마음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조선신학교 측에서는 사실이 아닌 그들의 허위선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시정해 주실 줄 믿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정도로 묵묵히 자기 사명에만 충실하려 하였다.

1947년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모모 교수에 대한 조사위원이 선정되어 그 신학사상, 특히 성경관에 대한 것을 조사하여 그것을 조선신학교 전체 이사회에 보고하여 이 이사회에서 결론짓는 대로 전국 교회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 위원 중에는 미국북장로회의 로드 목사, 남장로회의 낙스 목사의 두 원로 선교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 삼차의 회합 끝에 결국 이단으로 결정 지을 근거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전국 교회에 공시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48년 총회가 가까워 오자 그들의 운동은 다시 활발하게 되어 대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이번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점령하든지, 그렇게 못하면 새 신학교를 하나 세우든지 둘 중에 하나를 단행하기로 작정하고 만반의 공작을 다하였다.

1948년 총회는 열렸다. 대논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조선신학교를 어쩌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 신학교 설립 인허도 의제에 오르지 못한 채 폐회되었다.

그 후 몇 달 안 되어 구 평양신학교적인 새 신학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고 미국 남북장로회 선교사는 비공식으로 그 학교에 협력하였다.

1949년 총회가 열리자 다시 신학교 문제가 벌어져서 장로회신학교가 총회 직영으로 허락됨과 동시에 조선신학교와 합동하여 한 신학교로 되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에서 신학교합동위원회가 선임되었다. 조선신학교에서는 언제나 문호를 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신학교와는 손 잡을 생각이 없다는 의미에서 새 신학교가 설립된 것이었는데, 총회로서 그 설립을 인허하였더라면 그것은 두 신학교가 각각 자기 길을 걷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석에서 다시 합동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자체 내에 논리의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어서 그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동위원은 한인 원로 목사님들과 원로급 선교사로 구성되었는데, 수차례의 회합과 교섭을 거듭한 후 ‘회동7원칙’이 제시되었다.

그 원칙 중 중요한 것을 적기한다면, 1) 두 신학교 직원은 총 퇴진할 것, 2) 교장과 교수는 이사회에서 선정하되 교장은 한인 원로목사 중에서 선정하고 교수는 미국 남북 장로파 선교사 중에서 각 1인씩 선출하여 중요한 과목은 그들에게 맡기고 기타 과목은 한인 목사 중에서 적재를 택하 여 충당할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한 조선신학교 이사회 측의 회답은 아래와 같다.

“양교 합동을 위한 기도니만치 양교 현직원은 무조건 합동함이 가한 줄 아오며 신학교 교수 임용에 관하여는 선교사나 한인을 막론하고 적재를 이사회에서 채용함이 가한 줄 아나이다.” 하였다. 그러나 7원칙은 끝까지 변경되지 않았다. 이만하면 합동위원회의 의도가 내연에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결국 합동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1949년도 저물어 가는 12월 초순 미국 북장로 외국 선교회 장, 세계기독교총연합회장이며, 프린스턴 신학교 교장인 존 매카이 박사가 내한하였다. 그는 서울 시내 교역자 연합회 주최의 환영회 석상에서 대략 아래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선교사와 선교지 교회와의 관계는 네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선교의 초기로서 그것은 온전히 선교사의 지도하에 있는 교회다. 둘째 단계는 선교사와 선교지 교회가 서로 협의하여 일해 가는 시대다. 셋째 단계는 선교사와 선교지 교회가 온전히 독립하고 선교사는 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보조하는 시대요, 넷째 단계는 선교사의 도움이 필요 없고 오히려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게 되는 교회로 확립되는 시대다. 지금 한국 교회 는 제1, 제2의 단계를 지나서 제3에서 제4의 단계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신학교 문제 해결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는 신학교가 둘이 아니라 서넛이 있어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이런 문제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학교와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 관계가 호의와 이해로 잘 조화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1950년 총회가 대구에 모였으나 개회도 못하고 유회하였다. 그러나 산회하기 전에 거기서 작정한 것은 신학교 위원을 각 노회에서 2인씩, 각 선 교회에서 1인씩 선출하여 7월 중으로 회를 구성하고 신학교 문제에 성안을 얻으면 그 안을 각 노회에 수의하여 가부를 표결한 후 가결되면 차기 총회에 보고 실행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년 6월 25일에 우리는 전고 미증유의 국난에 봉착하고 만 것 이다. 1951년 6월, 피난 중인 부산의 일우에서 총회는 다시 소집되었다. 신학 위원회가 그때에야 초회합을 하여 “양 신학교 직영을 다 취소하고 새로 총회 직영의 신학교를 대구에 설립하자.”는 안이 성립되어 그것을 노회수의도 번안 결의도 없이 총회에서 직결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남북 장로회 선교사의 절대적인 지적이 있었으나, 그것이 이번 총회에 제출될 하등의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두고두고 물의를 일으킬 명백한 결함을 내포한 채 허둥지둥 폐회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총회가 끝나자마자 양교에는 ‘직영 취소’ 통지가 발송되고 대구의 소위 총회 직영 신학교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선교사가 교장이 되고 남북 장로회 선교사가 재정을 내고 또 중요한 교수로 들어앉았다. 이리하여 1946년 이래 꾸준히 작전해 온 그들의 꿈은 마침내 실현된 셈이다. 즉 총회의 탈을 쓴 선교사 직영신학교, 옛날 평양신학교의 재현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아직도 너무 어리다’, ‘선교사 집권시대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 그이들의 판단인 모양이다.

조선신학교 측에서는 다른 사람의 사업을 방해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국 선교사에게 신학교육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봉사할 사명을 주셨다면 우리에게도 다른 의미에서, 오히려 더욱 중대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에 봉사할 신학교육의 사명을 주셨음 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사탄의 수가 남대문의 기왓장 수보다 더 많다 할지라도 우리는 일한다.”는 목표를 향하여 더욱 용진하고 있다.

그리하여 직영 취소 통지가 있건 없건 한국신학대학은 없는 데서 만물 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몇 번이고 경험하면서 꾸준히 봉사하며 수련하며 학을 연마하며 고장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었다.

한신이 굴복하고 폐교하기를 기대하던 그들은 스스로 약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총회에서는 더 큰 최후적인 탄압, 아니 전적인 말살을 단행하려고 부지런히 기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1952년 총회는 모였다. 여러 가지 불순한 책동이 주효하여 절대 다수의 대의원을 획득한 그들은 조급한 승리감에 취하여 상대방의 언론을 봉쇄하고 법과 규칙을 유린하며 절차를 무시하여 가면서 소위 혁명의 승리에 취한 공산당들처럼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신학대학 모모 교수의 파직 또는 제명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 지지자를 심사 처단할 것과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을 교역에 채용하지 않을 것 등을 가결하였다.

그러면 이제 총회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셈이다. 한국신학대학은 죽었다. 가인에게 죽은 아벨과 같이 형님에게 맞아 죽었다.

하회는 하나님이 심판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변호가 없었더라면 정의는 지금도 바리새와 제사장과 빌라도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시다. 한국신학대학은 다시 살 것이다. 복음의 자유,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한국 교회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한국 민족의 개조를 위하여 허물어진 한국 산천의 재건을 위하여, 그리고 전 세계 크리스찬의 친교를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은 무덤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선배·선교사들의 위대한 업적을 충심으로 감사한다.

우리는 동역 중에 있는 미국 선교사 제씨의 한국 교회를 위한 선한 동기를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심리를 탄식한다. 그보다도 우리 형제들의 노예근성과 우매를 통탄한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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