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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114] 선지자적 심정 - 1940년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10 11:04
조회
1519

선지자적 심정

《낙수(落穗)》(1940년)

“오라! 우리가 계교를 내어 예레미야를 빠지게 하자! 대개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있고, 지자(智者)에게는 묘안(妙案)이 있고, 선지자에게는 말씀이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닌즉 우리가 혀로써 저를 치고 그 모든 말을 듣지 말자!”(예레미야 18:18)

한 유다의 반역민들은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 맡은 직분을 가장 밝게 보여주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맡은 직분은 제사장, 지자(현인), 예언자(선지자) 등 셋이었다. 그러기에 구약의 사제문학(司祭文學), 지혜문학, 예언문학 등은 다 각각 다른 성직자들이 걸어간 발자취의 기록이다.

그러면 ‘제사장’이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고 교리화, 조문화하여 그것을 어떤 형체에 보전하려는 자들로서 종교생활의 의식적, 조문적(條文的) 방면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과거의 권위에서 사는 사람이었으며, 그를 억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 습성이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대망(待望)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이르게 한 것이었다.

그러면 ‘지자’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과거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온갖 인간사회의 실정을 통찰하여 거기에 숨은 어떤 원리원칙을 발견한 후 그것으로 현 사회의 실정(實情)에 적응한 지도이론을 삼으려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흔히 현실적이요, 철학적이었으나, 영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제사장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조문화, 의식화로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계시의 근본정신을 취하고 그 의문을 버리려는 것으로 그 근본 의(義)를 삼았다. 또한 지자들처럼 철학적, 혹은 실리적으로 사물을 정관함을 능사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에 감격하고, 그 받은 말씀으로 그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넘치는 영감을 힘입어 미래세계의 메시아적 이상왕국을 미리 보면서 기뻐한 것이었다.

종교생활에는 물론 의식과 조문이 필요하며, 철리(哲理)와 모략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제도 두시고, 지자도 두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룩한 생명이 발자(潑刺)할 때에만 그 종교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요, 영적 생명이 떠난 때에는 그 의식, 그 지략은 그대로 사해(死骸)며 위계僞計)인 것이다. 그러면 그 ‘성생명(聖生命)’을 전수하는 직분은 무엇인가? 그는 곧 선지자, 참으로 부름 받은 선지자, 사명에 붙잡힌 선지자가 곧 그 사람이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시요, 최대의 지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그 심정은 언제나 선지자적이었으며, 선지자의 계통을 이어 선지자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대(大) 이상을 성취, 실행함으로 그 사업의 목적을 삼으신 것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로 권능이 많으신 선지자’(눅 24:19)이었던 것이다. 선지자적 심정!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정이었음과 동시에 또한 크리스찬의 심정이어야 할 것이다.

선지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명을 받들어 하늘 권세로 하나님 말씀을 이 땅위에 선포하는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이다. “사자가 부르짖으매 누가 무서워하지 않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매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암 3:8)고 한 아모스의 고백은 그대로 선지자적 사명을 명시한 것이었다. 크리스찬아! 너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니냐? 성경에 쓰인 하나님의 말씀이 성신의 감화로 네 심령에 체험되어 다시 세상에 선포되는 때 너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이며 선지자이다.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 전하기에 전력을 다한”(행 6:4) 사도들의 대언자적인 태도를 실행에 옮긴다면 그의 인격 독특해지지 않으며 그의 감화 비범하지 않겠느냐? 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가진 자는 “천사를 심판할”(고전 6:4) 권위를 가진 자이니 하물며 세상일이랴! 그렇건마는 현대 우리 신자들 중에는 이 하나님의 예언자, 대언자로서의 고상한 특권을 스스로 세속화하며 돈을 사랑하며 세상 권세에 아첨하며 도인의 심정을 더럽히고 그 권위를 잃어 마침내 맛 잃은 소금같이 버림을 자취할 바 아니랴!

선지자! 그는 영감의 인, 거룩한 감격에 사는 사람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시매” 그 말씀에 감격하여 감연히 선 사람들이 곧 옛날의 선지자들이었다. “말세에 내가 내 성신을 만인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고 한 요엘의 예언은 성신의 충만한 감동으로 말미암아 영원을 투시하며 환상을 보며 대몽(大夢)에 사는 크리스찬을 그대로 예언한 것이었다. 크리스찬의 생활! 그는 곧 감격의 생활이다. 크리스찬에게서 성애(聖愛)의 감격이 식어진 때 그는 곧 생명을 잃은 자이다. 그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속죄애(贖罪愛)에 감격한 바 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 존재’를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성신이 감동한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애(救贖愛)를 체험하는 것이며, 이 지극한 사랑을 느낀 자에게는 거룩한 열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열심(熱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전 존재를 희생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한다. 이 감격은 거룩한 감격이다. 거기에는 이해타산, 권모술수, 분파 작당 등의 불순한 열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철두철미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다. 그에게는 열심이 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전도하는 열심과 사람을 실천하며 모든 선행을 예비하는 열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 교계에는 이 거룩한 감격이 없어도 열심으로 일하며 또 명성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직업적이며 그의 명성은 그대로 그의 심판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 ‘직업적 열심’이란 무서운 함정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할 의무를 느낀다.

만일 이 성령의 거룩한 감격 없이 신학을 강해한다면 그 신학교는 그 야말로 ‘목사지법(牧使之法)’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는 될지언정 ‘목사’를 육성하는, 거룩한 심정 전수처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목사적 심정’, ‘선지자적 심정’을 배양하지 못하고 다만 교리 교조와 교파열과 교계 처신술이나 배워 가지고 나온다면, 그 ‘득업사(得業士)’는 진실로 한심한 득업사임을 절감한다. 그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성역을 맡는 때 그 주입된 방법론에 따라 열심으로 일하여 많은 능률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불길은 굉장해도 뜨겁지는 않으며 뇌성은 굉장해도 뇌광(雷光) 은 안 보인다.”는, 뇌광으로 인격의 서로 부딪치는 생명의 감격이 거기에 있지 못한 것이다. 이 ‘직업적 열심’의 소유자는 교회생활이 외부적 방면 에 그 활동의 중심을 두는 것이다. 그는 교회기관의 증설에 열중한다. 그는 대집회를 열기 위하여 힘을 다한다. 그는 소위 정통교리의 옹호, 이단의 배척에 광분한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회개하고 전존재를 주님께 바치려는 감격에 넘친 ‘적은 무리의’ 심정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새 생명의 요동이 있어 그들의 고정된 방법과 제도에 들어맞지 않는 때면 그 들은 온갖 술책으로 그 억압에 진력한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직업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며 그들의 제도와 방법을 하나님의 심정보다 더 중히 여긴다.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금과옥조로 지켜 능률주의 위에 건설한 조선 교회가 필연적으로 도달할 곳은 이 직업적, 교권적이란 함정이 아닌가?

선지자! 그는 대망에 사는 자이다.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아 예언은 곧 그들 소망의 기록이다. 이와 같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또한 우리 크리스찬의 심정이다. 이 소망이란 다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신자가 얻을 종말관적 소망만 말한 것이 아니라, 현실생활의 온갖 사위(事爲)에서 언제나 낙심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불멸의 동경과 희망으로 ‘불사신’적 생활을 계속하는 생활의 총괄적 표현을 이름이다. 위대한 소망은 위대한 환상을 보여주며, 위대한 환상은 위대한 사업을 성취케 한다. 안디옥교회의 다섯 선지자에게 보여진 세계 전도의 위대한 환상은 마침내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그 천추에 다시없는 위대한 영적사업에 성공을 보게 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었고, 행로난(行路難)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대인의 음해와 이방인의 핍박, 로마 시민들의 부패와 만인들의 미신, 집권자의 강압, 교회의 분열, 내우외환이 층생루출(層生壘出) 할지라도 그들은 오직 소망, 소망, 소망 중에 진군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벌써 그 광대한 로마의 전판도(全版圖)의 방방곡곡에 하늘을 뚫고 솟은 고딕형의 대 교당(敎堂)이 보였으며, 그들의 귀에는 가이사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 귀천이 다함께 예배에 모이라는 은총의 종소리가 명백히 들리었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그 최후를 고하였으나, 그의 환상은 당시의 땅 끝 서반아의 성채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있었다.(롬 15:24, 28) 이 위대한 소망은 ‘5월화(Mayflower)’의 적은 목선을 몰아 대서양의 거친 물결을 누르고 미대륙에 새로운 제국을 세웠으며, 멀리 ‘암흑의 대륙’을 향하여 ‘효성환(曉星丸)’을 띠어 ‘의의 태양’이 첫 서광을 빛나게 한 것이다.

지금 조선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행로난이 문제가 아니라 위대한 소망에 불타는 자, 위대한 환상에 그 마음 뛰노는 자 있고 없음이 문제이다. 지도자들이 보는 환상이 지역적으로 조선을 넘지 못하며, 교파적으로 자교파(自敎派)를 넘지 못하고, 교리적으로 바리새(‘분리’라는 뜻) 배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느 밭에서 세계적 지도자가 자라나고, 누구로 말미암아 교파연맹의 운동이 일어나며, 어떻게 성도의 거룩한 교제, 사랑의 연합이 이루어지랴! 그 마음속에 거룩한 환상을 품지 못한 자로서, 다만 교조(敎條)와 언론과 모략을 재료 삼아 자기중심의 ‘직업적 열심’에 맡기어 교회사를 농락한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분쟁, 배격 등의 악을 빚어낼 것이다. 이는 자기 영업의 번영을 위해서는 자연 그 경쟁자를 없이하고 자기가 그 권익을 독점하려는 것이 직업 전선의 원칙인 이상, 그런 직업적 열심자가 2인 이상 되는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 분열, 항전이 있을 것인 까닭이다.

그러면 그 자체 내에 이런 우환을 배태한 조선 교회가 이제 취할 길이 무엇인가?

첫째로, 현 지도급에서 절대 겸손과 철저한 회개를 보여주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직업적 자중’, ‘직업적 교만’, ‘신앙적 자만’을 용감하게 버리고, 선교사로부터 일반 교인에 이르기까지 재를 무릅쓰고 주님 앞에 꿇어 엎디어 사죄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불순한 동기, 혹 잘못된 방법으로 시작된 사업이 있으면 속임 없이 일반에 공개하여 그 시정을 천하에 소(訴)할 것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혹 그 크신 연민으로 우리에게 ‘새 심정’을 창조하시매 새 감격을 주실 것이거니와, 그러지 않으면 갑자기 새 생명의 요동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제2세 교인들이, 즉 교회 청년들이 조선 교회로서의 세계적 사명에 대한 깊은 자각을 가지고 좀 더 위대한 소망과 환상에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 존재를 바치어 주를 위하여 큰 꿈을 꾸며 큰일을 계획한다면, 그 열성과 그 감격이 그대로 조선 교회 자체를 살리는 ‘선지자적’ 생명운동이 되어질 것이니, 이를 생각할 때 마음 이 뛰논다. 다만 엘닷과 메닷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신으로 감동시키사 여호와의 백성이 전부 다 선지자 되는 것이 나의 원하는 바로라.”(민 10:26~29)라고 한 모세의 대발원이 그대로 우리의 기원이며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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