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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944] 한국교회의 기독교화 - 1971년 1월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09 14:38
조회
661

한국교회의 기독교화

「제3일」1971년 1월

한국교회는 가장 예수를 잘 믿는 교회라고 자부해 왔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와는 일치된 동일어인 것 같이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만큼 『한국교회의 기독교화」라는 특집에는 상당한 충격을 느끼는 인사도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70년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심판의 세대라고 할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어물어물 넘겨버리지 못하게 된 ‘고발의 시대’다. 나 자신이 철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검문하지 않으면 남이 나를 무자비하게 폭로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고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특집은, 주관한 자신도 한국교회 교직자의 한 사람이요, 집필자 모두가 교회원의 하나니 만큼, 나를 청하는 것이요, 남을 비방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둔다.

① 기독교가 무어냐 할 때, 너무 신학적으로 어려운 정의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는 예수를 닮으려는 종교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가 아니다. 흥행적인 책의 종교는 율법주의적 종교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바리새파를 배격했다. 율법주의란 것은 사법책 - 율법이 기록된 책 - 을 신성불가침의 성물로 모시고 그 글자의 일점일획도 어길 수 없다고 믿는 종교다. 그리고 인간은 그 율법 조향을 하나도 빼지 않고 향상 완전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율법 아래서 죄책감에 떨고 있는 종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바리새인들을 반격했다. 말하자면 “율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어서 어디까지나 인간상위의 종교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장로회)에서는 성서주의를 강조하여 성서문자무오설까지 맹신하며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 하여, 예수의 권위도 성서가 좌우하는 것 같이 가르쳐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아들 예수를 믿는 종교요, 신구약 성경이라는 ‘책의 종교’가 아니다. 계시의 내용을 알기 위하여는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알아내는 데 가장 좋은 참고가 된다는 의미에서 특정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 뿐이요,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신적인 것으로 우상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의 종교는 고정된 문자 이상으로 생동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거기서 생명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고정주의적 정통신학과 축자영감설에 의한 성서주의적 ‘책의 종교’는 기독교의 본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하는 산 인격으로서의 예수의 종교에 돌아와야 한다.

② 예수의 종교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선, 그 방향에 있어서 하늘이 땅에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역사 가운데 오신 종교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매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고 요한은 증언했다. 위에서 아래로, 거룩한 이가 죄인들 가운데에 오신 그이가 예수였다.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 그는 인간들을 찾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그는 인간들을 찾아 하늘에 끌어 올려 천사 같은 영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은 아니었다. 하늘이 땅에 내려온 것은 땅을 하늘에 올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이 땅의 몸이 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아들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들의 혼, 인간성이 하나님 아들 딸로서의 바탕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어디까지나 현존한 땅을 위하고 현존한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부활 승천한 예수도 ‘다시 오실 이’로 올라가신 것이요, 그 반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선교 표어는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하는 그것이었다. 구원이란 것은 죽은 다음에 천당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꿈 같은 이 세상은 취할 것 없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하늘에서 땅에로의 방향이었는데, 한국교회는 땅에서 하늘로의 방향을 강조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예수를 예수의 모습 그대로 온 세계에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취한 방향을 반대 방향으로 돌이켜 가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네가 예수를 믿느냐? 그러면 예수와 함께 인간을 찾아 세상 속에 들어가 거기서 예수와 같이 섬기라”, “그러다가 예수처럼 고난을 당하면 예수와 함께 영광도 받을 것이다.” 이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인간을 찾았다. 인간은 상실된 상태에 있었다. 병든 육체 때문에 신음하는 인간들을 수없이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질병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썼다. 율법주의적 종교 밑에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종교에서 버림받은 대중들을 찾았다. 그는 그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했다 “내게로 와서 내게 네 마음 문을 열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너를 구원하리라” 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희가 약할지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욱 그러하지 않으시겠느냐?” 했다. 그는 인간들 중에서도, 죄인, 세리, 윤락한 사람들, 가난한 자, 병든 자, 인간들 측에서 쫓겨난 나환자, 불구자 등등 소외된 인간들을 더 많이 찾아 그들을 새 인간으로 변혁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는 교회라는 대피소도 만들지 않고 직접 자기 ‘몸’으로 인간들에 부딪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자기 몸에 대신 짊어지셨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에 빈민, 죄인, 윤락여성, 거지, 부랑소년, 실직자, 노동자 등등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는가? 남루한 의복을 입은 자가 안심하고 예배에 자리를 같이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름 높은 명사들이 우리 교회원이 되어 있다는 자랑은 들을 수 있어도 가난뱅이들이 드나드는 것을 좋아하는 교회는 그리 있는 것 같지 않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시하며 평생길을 걸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살았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죽일 흉계만 꾸미고 따라 다녔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참혹한 죽음 그것이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치욕이요, 괴로움이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용감하게 그 길을 걸었다.

“너희도 각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고 그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였다.

우리가 져야 한다는 그 십자가도 고난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십자가를 미화하고 씸볼로 만들고 패물로 폼을 꾸민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화 하였다.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가 우리 죄값을 도맡아 선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질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믿습니다”고만 하면 된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내 죄를 대속한 구주심을 믿는 그것이다’ 하고 설명한다. 아주 대중적이다. 대중에게 구원이 적용되게 하려면 그런 설명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들까지, 제자들까지 그렇게 안정한 기독교에 머물 수는 없다. 한국교회가 미국식 풍요사회에서 만들어내는 호화판 기독교를 그대로 받아들여 ‘종이 호랑이’식 교회를 자랑할 것인가? 그렇잖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분담하면서 그와 함께 인간전선에 나가 상실된 인간들에게 몸으로 봉사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자기 안위를 위하여 전자를 택한다면 그야말로 후방에서 그리스도 없는 빈 교회당이나 지키다가 심판날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로 저주 받을 두려움을 예상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종교는 부활의 종교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고 예수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을 논박했다. 예수의 종교는 죽은 자의 사후처리를 위하여 있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산 자, 생존하는 자, 이 역사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영원한 삶과,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산 자’, ‘죽은 자’란 것은 동물적인 사가 아니라, 인간적인 죽음 - 인간의 인간됨은 그 정신성에 있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때에 인간적인 죽음이란 말이 사용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화해가 성립된 때, 그 인간에게 죽음이 권세를 갖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해체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인간인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와 함께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은 몸의 부활까지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죽음에서 세상의 무상을 말하고 폼은 흙으로 돌아가나 영혼은 천당에 올라가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것을 과도할 정도로 강조한다. 결국 영혼만이 실재요 몸은 무익하다는 헬라철학적인 이원론에 휩쓸려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국 교회에서도 몸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에게 실감 있게 강조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신자들은 “예수 믿고 천당간다.” - 말하자면 영혼이 영계에서 영생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으로 위로를 받으며, 거기에 소망을 두는 것이 거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된다.

③ 한국교회와 역사에의 사명 : 이상에서도 자주 언급한 바이지만 한국교회는 너무 타계적이었다. “세상에서 탈출하여 교회에 머물다가 죽는 날 천당에 간다” 하는 노정표가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 일에 다시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앙의 타락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하여 될수 있는 대로 기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기까지 사랑하신 것은 세상이었다(요한 3:16). ‘세상’이란 것은 인간들이 사는 모든 영역의 총칭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역사란 것은 인간들의 모든 사건들이 연출되는 무대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을 찾아다니시고 그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봉사하였다. 많은 인간들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하셨다(마가 10:45). 예수는 의인을 방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신자들이 불신자라고 내버린 사람들을 찾았다. 유대교 회당에서 한두 번 설교를 하셨지만, 회당을 거점으로 선교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조직체도 만들지 않으셨다. 다만 몸으로 직접 인간들을 찾아 그들을 섬기고, 가르치고, 병고치고, 사랑했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교회라는 조직체를 하나님 나라와 일치시킬 정도로 교회주의가 강하다. 교권에 대한 관심도 노골적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 농성하여 세상에 총을 겨누고 있다. 접근하면 쏜다는 식이다. 그리고 게릴라를 세상에 보내어 단 몇 사람씩이라도 잡아다가 교회 안에 옮기는 것이 전도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댓가이고 세상이 하나님의 세계여서 세상 속에 하나님의 거룩이 감취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망할 세상, 심판 때에 유황불에 타 없어질 세상이라고 한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등에 교회는 본격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일이니까 교회는 관여할 바 아니라고 한다. 책임은지지 않으면서 그 결과에는 동참한다. 염치없는 태도다. 한국교회는 역사에 책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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