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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2권] (50)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서울의 중견목사들 작전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21 09:23
조회
782

[범용기 제2권] (50)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서울의 중견목사들 작전

전필순, 유재한 등 서울의 교권주의자들은 이 기회에 ‘한신’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책략을 꾸몄다. 우선 함태영을 ‘명예학장’에서 ‘실권학장’으로 취임시키고 재산과 경리를 맡을 살림살이 ‘주부’는 최거덕 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말하자면 ‘박한진’ 대신에 ‘최거덕’을 앉히자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준이 도사리고 앉아 있는 한 일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재준을 파면하고 함태영을 앉힌다는 꾀였다.

그래서 이사회가 소집됐다. 당시의 이사장은 김종대였다.

김종대는 피난중에 줄곳 우리와 고락을 같이했다. 그래서 직원 사택 중의 한 천막집에 살고 있었다.

이사회를 열었다. 주로 내 얘기래서 나는 자리에서 나왔다. 이사회는 둘로 갈라졌다. 거의 반반이어서 3분지 2는 암만해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사회에서는 교수들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정대위가 교수회 대표로 나와 보고한다. “아직 시국도 안정되지 않았고 장로교 총회관계도 극히 유동적이어서 예측할 수 없으니 당분간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바른 처사라고 만장일치로 합의했습니다.” 한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신학교는 양로원이 아니다!”하고 극언하는 교수도 있었다 한다.

서울 책사들은 다시 묘여 ‘박용희’를 ‘부학장’으로 밀었다.

박용희 목사는 경기 출신의 항일투사로서 상해임정에도 깊은 관계를 가졌던 분이다. 일제 시대에는 몇해동안 자택감금을 당했었고 장대한 체구의 ‘잘난’ 인물이었다. 젊어서는 장사(壯士)라는 타이틀이 붙은 힘세고 날쌘 분이었다 한다. 평양신학도 나오지 않았고, 자습과 이력으로 목사직을 얻은 분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줄거리는 없다고 하겠다. 목포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 분들에게 말했다.

“나는 신학에 생소하고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분간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나를 ‘부학장’으로 미느냐? 그리고 부학장이 된다면 내가 할 일은 무어냐?”

그들은 터놓고 말한다.

“‘한신’에서 김재준을 파면시키고 한국신학대학을 서울사람들 손에 넣는 일입니다.”

박용희는 즉석에서 거부했다.

“김재준에게 파면당할 죄과도 없고 내게 파면시킬 능력도 없오. 그리고 한국신학대학은 이미 장로교 총회의 교직자 양성기관으로 인준된 학교인데 서울사람만의 독무대가 될 수는 없오.”

“나는 가오.” 하며 퇴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동란중에 있는 목포를 향해 혼자서 훨훨 떠나는 것이었다.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났다. 나는 만류했다. 기어코 떠난다. 나는 여비로 금일봉을 드렸다. 멀리까지 전송했다. 길을 가면서 하신 얘기가 위에 적은 내용의 것이다.

서울분들은 함태영을 물고 늘어졌다. 함태영 학장이 실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권에 민감한 서울 토백이 중견목사들로서는 그럴만도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원래 내가 용정에서 서울에 오기전에 그들은 ‘서울신학원’이라는 무허가 강습소를 시작했었다. 최거덕이 원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에게도 강의를 청하기에 몇과목 가르쳤다. 김대현 장로에게 신학교 설립과 재단 조성을 처음으로 권한 것도 그들이었다. 내가 김대현 장로의 공식 초빙서를 받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나를 자기 동지들에게 소개하고 자택에서 환영 디너를 채려준 것도 그이였다. 그러나 나는 ‘서울’보다도 전 조선교회를 상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내게 대한 기대는 여의치 않았다. 교수진 짤 때에도 그들은 제외되었다. 신호신학교 졸업만으로는 세계교회적인 신학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잔치상을 차려놓고 밀려난 주인같이 됐다고 느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당당하게 도전할 지식과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교회 ‘정치’의 무대에서 대결하기로 한 것이다. 함태영은 전라도 전주 출신이지만 함북 무산에서 자랐고 13세때에 서울에 옮겨, 서울 사람으로 ‘인테그레잇’했다. 그가 부통령까지 됐다.

이용가치가 있다. 그이를 실권학장으로 추대하고, 무슨 이유를 붙여, 김재준을 몰아내고 신학교를 자기들 교권 안에 회수하자는 것은 그럴사한 얘기다.

신학교는 고장이 서울이고, 기금도 서울서 나왔고, 첫 개강도 서울신학원이라는 자기들 기관이었으니 의례 서울교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집념이 노상 경우없는 발악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큰 테두리에 작은 것이 들어갈 수는 있어도 작은 테두리에 큰 것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전필순을 소외하지 않았다. 그를 교수직에 모시지 못한 것은 학력(學力) 때문이오 나의 사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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