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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201] 복음의 자유를 확보하라!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13 19:58
조회
2379

복음의 자유를 확보하라!

<십자군> (1950년 2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런 고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바울이 전한 복음을 파괴하여 다시 종의 멍에를 메우려든 자가 누구였는가? 그것은 바리새인의 찌꺼기인 할례당(割禮黨)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복음의 자유를 말하기 전에 우선 바리새인의 역사의 그 특색을 소개하려 한다.

‘바리새’란 아람어의 ‘파티시인’에서 나온 것으로서 ‘분리파’란 뜻이다. 이 종파는 기원전 2세기 후반기에 생겨난 유대교 종파로서 그 정신적 연원은 멀리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부터 흘러온 것이지만 종파를 이루기는 ‘마카비’ 이후의 일이었다.

그들의 특색은 무엇이었는가?

[1] 철저한 성경주의자였다. 성경의 일점일획을 꼭 글자 그대로 믿을 뿐 아니라 그 성경에 대한 유명한 서기관들의 해석까지도 어김없이 믿는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성경 말씀보다도 서기관의 학설(學說)을 더욱 귀중하게 여겼다. “율법 자신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그 율법에 대한 서기관의 교훈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더욱 큰 범죄다.” 한 것이 70인 의회의 작정이었다.

[2] 그들은 신학적으로 영혼불멸과 내세의 보응을 믿었으며, 의인의 부활과 천사의 실재(實在)를 믿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인간의 자유를 믿었으며, 메시아의 강림을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요새 소위 ‘정통파 유대교’와 다른 것이 없었다.

[3] 그들은 이방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절대로 사귀지 않는 분리주의를 고집하였으며 회당의 상좌와 거리에서의 인사는 홀로 받으면서도 민중에게 섞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도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때 어느 종파보다도 다수당(多數黨)으로서 민중의 세력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눈에 비추어진 그들의 본색은 어떠하였는가?

[1] 그들은 성경조문을 다 외우고, 그 글자대로 행하노라고 애쓰면서도 율법의 근본정신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노라고 별별 규례를 다 만들어 까다롭게 굴면서도 안식일을 제정한 하나님의 근본정신은 몰랐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그 종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손을 씻고 재를 뿌리고 하는 ‘성결법’을 지키노라고 진저리나게 까다롭게 굴었으나 성결법의 근본정신인 마음의 깨끗함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위선자’밖에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2] 그들은 신학적으로 정통을 자랑하였지만 진정한 인격적 신앙의 고백으로 되었다기보다는 조상대부터의 관습적 전통(慣習的 傳統)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한 데 불과한 것이어서 극상해야 한 개의 관념체계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은 그들의 도덕 생활과는 거의 연관이 없었다. 그들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을 혀가 닳도록 외우면서도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거짓 증인을 사들였다. “탐내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사실은 성전 뜨락까지도 모리배들에게 세놓아 먹었다.

[3] 그들은 ‘되지도 못해가지고 된 체하는’, 범사에 ‘교만’만 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분리’는 ‘거룩’이란 것보다도 교만 때문이었다. 그들은 선민 중의 선민으로 자처하였다. 여기에 그들의 민족적 교만이 목구멍까지 차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혼자 ‘거룩’하였다. 윤리적으로 홀로 외로웠다. “메시아 왕국은 의로운 나라다. 우리만이 의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만이 약속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하며 그들은 머리를 잔뜩 제쳐가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 “화 있을진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하고 몇 번이나 외치셨는가?(마 6장, 13장, 23장 등) “회칠한 무덤이다”, “독사의 종류들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눈먼 인도자다”, “세리와 창기는 천국에 들어가되 바리새인들은 밖에 어두운 데서 이를 갈며 통곡하리라”고 통탄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종시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까지도 짐짓 마왕에게 돌리며 ‘이단자’ 예수를 기어코 십자가에 못 박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피 값을 저들 자손에게까지 물려주고 ‘게헤나’에 곤두박질쳤다.

오순절에 성신의 불길이 타오를 때 그들도 적잖이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꽁무니에는 그 성경문자주의, 율법주의, 정통신학, 분리주의 등이 여우꼬리처럼 달려 돌아가며 좀처럼 감춰지지 않았다. “예수 믿는 것 좋다. 그러나 할례 받고 예수 믿어야 구원 얻는다” 하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성경문자주의자의 생각으로 본다면 그것도 그럴 법한 주장이었다. 창세기 17장 9-14절에 무어라 하였는가?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세워 지키게 할 언약은 이것이니 너희 중에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는 나와 너희의 사이에 언약의 표니라. 남자는 너희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의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물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 그리하면 내 언약이 너희의 몸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양피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만자는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모세도 할례를 등한히 하다가 큰 봉변을 당하지 않았는가? 예수님 자신도 할례를 받으셨고 사도들도 다 그리하지 않았는가?

“예수의 말씀 가운데 할례를 받지 말라 한 구절이 어디 있느냐? 할례는 계약의 표다. 이 표가 없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버린다고 쓰여 있지 않느냐. 이방 사람도 그리하라는 명문이 있는데 너는 어찌하여 이방 사람이나 유대 사람이나 ‘할례’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느냐? 너는 성경으 ㄹ파기하는 자다!” 하고 바울을 압박한 것이었다.

사도들 중에서도 아마 “할례도 받고 예수도 믿으면 더 안전할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끄덕거린 이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아이고, 싸우기 시끄러운데 이방 사람들에게 조금만 수고를 더 시키기로 하지 무얼! 할례를 받아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것만은 인정된 사실인데 무슨 큰일 날 것도 없잖은가?”하는 무사주의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단호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복음의 종교로 인격적 자유의 총본부가 되느냐 율법주의 종교로서 유대교의 한 새 종파로 종노릇 하느냐 하는 생사 문제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던 까닭이다. “할례를 받았더라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니 여전히 복음적이다”고 안심한다면 그것은 교묘한 속임수에 빠진 것이다. 그것은 “예수는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 얻는다”는 것으로도 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헛 죽었다”고 바울은 외쳤다.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만나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말함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십자가다.

‘그리스도 안에’ 연락되는 길은 오직 ‘믿음’ 뿐이다. 믿음이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아멘!”하고 그에게 자기를 포기하는 태도다. “이제부터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산다”하는 생활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마음에 충만하여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선함이 가득한 인격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니만치 그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주체와 주체의 관계요, 주체와 물상의 관계가 아니다. 믿음은 나와 예수님과의 인격관계요, 나와 책이나, 나와 교훈이나, 나와 학설이나, 나와 신조의 관계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으로 사귐을 가질 때 나를 정죄할 사람도 없으며 나를 정죄할 법도 없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신앙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나는 그 ‘통’ 속에 갇혀서 잘못하면 통조림이 되고 만다. 어느 정도 변치 않을는지 모르나 생명은 없어진다.

그리스도와 나의 인격관계에는 아무러한 것도 게재시킬 수 없다. “내가 예수 믿어 구원 얻는다”는 대헌장에는 아무 것도 덧붙일 조건이 없다. 그것이 조건부가 되는 날에는 복음은 벌써 자유를 상실한다. ‘할례’라는 조건이 붙어서 복음의 율법화한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 우리 교회 내에 있는 소위 정통주의자들이 어느 정도로 이 인격적인 복음 신앙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성경문자무오설을 믿어야 구원 얻는다”, “예수를 믿되 동시에 칼빈 신학을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등의 심적 태도에서 해방되기 전에는 복음은 그들에게 한낱 관념일 뿐이다. 그들은 할례당적인 율법사 이상으로 평가받을 아무 실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늘에도 바울은 복음의 자유를 위하여 할례당과 싸우고 있다. 할례당이 교회를 농락할 때, 거기에는 분열과 정죄와 법과 교만과 ‘종이법왕’이 있을 뿐이다. 사랑의 주님은 문 밖에 헛되이 두드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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