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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편지에 대신하여(1948년)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13 19:02
조회
3016

편지에 대신하여(1948년)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231-245)

조선신학교와 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관하여 항간에 유언조어(流言造語)가 구구하다는 소식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나로서는 구구히 변명하거나, 또는 그 말하는 이들을 상대로 논쟁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친분이 있는 성도들과 본 신학교 졸업생 제위와 또한 저를 아껴주시는 선배 제현(諸賢)께서는 그저 듣고 지낼 수가 없을 만친 궁금하신 모양이어서 그 진상을 알려 달라는 편지가 날마다 불어갑니다. 저도 이 사상으로 물어주시는 편지에 대하여서는 회답하여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책임을 느끼오나 원체 정력과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일일이 답장을 드릴 수 없사와 이 공개편지로 답장을 대신하려 합니다.

[1] 신학교육에 헌신한 동기

1884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신교(新敎)가 들어온 이후, 불과 수십 년에 세계 선교지 중, 경이의 성적을 드러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연민(憐憫)함과 동시에 초대 선교사 제위의 공적이 큼을 칭하(稱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육 방침에 있어서는 기다(幾多)의 인위적인 방법론 때문에 유감된 바가 많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선 네비우스 선교 방법의 좋은 점인 자력 선전, 자립적 자치의 원칙을 조선 장로교회 건설에 적용해 주신 선교사 제위의 지혜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동 방법 중 지도자 문제에 있어서는 선교사가 그 지도권을 파악하기를 견지합니다. 그러하기 위하여는 본국인 교역자 양성기관은 선교사의 수중에 장악하여 그 교육 정도는 어디까지든지 선교사와 동등됨을 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설기의 수년간은 몰라도 위대한 장래를 위하여는 결코 취할 길이 아닌 줄 믿습니다. 백년지계(百年之計)는 재어수인(在於樹人)이라고, 사업 중심보다도 인물 중심으로 건설하기 전에는 참된 건설을 기대할 수 없음은 우리 주님의 하신 일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교회 초대 인물 중에는 이른바 ‘거물’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세계적인 무대에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지 않았던 탓으로 정중(井中)에서 그 일생을 끝마치고 세계적인 활동은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들에게 곧 미국이나 영국에 유학시켜 대학과 신학을 마치고 세계적인 공기에 접하게 하였더라면 적어도 일본 교계의 인물을 능가할 수 있었을 줄 확신합니다.

3ㆍ1 운동 이후 민족적 자각에 따르는 자유 연학(硏學)의 대세를 어찌할 수 없어 체면 유지를 위한 수삼의 유학생 파견이 있었으나 그것도 중학 전문학교 등의 자격교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고 참으로 교역자를 위한 것은 더욱 근소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 ‘네비우스 방법’은 방법이라기보다 불변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미일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선교사의 활동이 정지되고 동시에 평양신학교마저 폐문되니 조선 장로교회는 신학교육기관이 전무한 채 수년을 지냈습니다. 신사참배에 불의의 굴종은 하였을망정 하나님이 불쌍이 여기심은 변함이 없으신지라, 교회는 여전히 유지되어 가는데 교역자의 보급은 거의 없었으므로 신학교의 설립을 원하는 요청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리하여 1939년 3월 27일에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설치되고 고 김대현 장로께서 당시 시가 25만 원의 정재(淨財)를 기부하여 주셨으므로 그것을 기초로 1939년 9월 13일 장로교 총회에서 인허를 받아 이사회를 조직하고 조선신학교 개강을 위하여 준비를 진행한 결과 1940년 4월 19일에 서울 인사동 137번지 승동 예배당 내에서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 교육기관이 고고(呱呱)의 성(聲)을 거(擧)한 것입니다.

그때 조선신학교 설립 사무를 맡으신 이들은 조선총독부에 먼저 정식 학교로서의 설립 인가를 제출하였으나 선교사의 발부리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 더욱 유효하다는 총독부 당국자들의 결론으로 말미암아 조선신학교는 제외되고 평양에 유일한 장로교 직속 신학교를 인가하게 된 것은 제위께서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평양신학교는 관립에 가까울만치 간섭을 받는데 반하여 우리 신학원은 정식 학교가 아니니 신앙 양심을 비교적 더 많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을 회상하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우리 교회로서의 처음 되는 신학교를 개강할 때 하나님 앞에 받은 바 몇 가지 명백한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1) 우리는 조선 교회로 하여금 복음 선포의 실력에 있어서 세계적일뿐 아니라, 학적ㆍ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게 할 것.

2)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 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찬(硏鑽)을 경(經)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

3)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충분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 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4) 성경 연구에 있어서는 현 비판학을 소개하되 그것은 성경 연구의 예비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이요 신학 수립과는 별개의 것이어야 할 것.

5) 어디까지나 조선 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에 넣은 신학이어야 하며, 신앙과 덕에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 할 것,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오모략과 교권 이용 등은 조선 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런 논쟁을 피할 것.

대략 이런 몇 가지를 규범삼아 이래 8년의 세월을 기도와 노력으로 어느 정도 결사적인 봉사를 이어 왔던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의 소식과 함께 우리에게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습니다. 숨어 다니던 성도들이 갑자기 나타나 그 의를 태양같이 빛내려 합니다. 옥중 성도가 분풀이를 합니다. 지도역량이 없는 조선 교회는 어리둥절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미국 장로교 총회를 이단이라고 10년래 분쟁을 일삼다가 탈직 처분을 당한 소수의 반동파 세력이 이 혼란기를 노리고 손을 폅니다. 갔던 선교사들도 교회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단순하던 무대에 조화 없는 소음이 미친 듯이 납니다. 어떤 선교사와 그에 추종하는 조선 교역자의 소수는 옛날의 선교사 집권과 네비우스 교육 방법을 재현시키려고 술책을 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조선 교회의 건전한 성장을 위하여 받은 바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임을 확신합니다. 이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일보도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2] 소위 정통 장로파의 암약에 대하여 일언합니다.

19세기 말엽에 보수파 신학의 세계적 대변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 하지, 워필드 등의 직제자로 자칭하는 일부 인사, 특히 메첸 박사를 중심으로 소위 전투적 불평주의자의 그룹이 생겨진 것은 여러붙도 잘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 즉 계시 교리, 즉 신앙을 표방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성경에 둠과 동시에 성경의 권위는 그 축자적 영감에 의한 절대 무류(無謬)에 두고 이에 부합되지 않는 자는 모조리 교역 계에서 축출하려는 실제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산 인격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대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을 믿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믿는 대신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믿는 사이비적 복음주의자들임을 프린스턴 신학교 현 교장인 마카이 박사는 명백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파의 세력 확장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소위 ‘진리 옹호’라는 미명하에서 도덕을 초월한 행동을 감행합니다. 그들의 진리란 것은 ‘인격인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관념의 체계를 말함입니다. 그들의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가 아니라 관념의 종교이며, 성신의 종교가 아니라 책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교회의 심판자로 자임합니다. 자신의 신앙은 절대 정확한 표준이므로 거의 반성할 여지도 없고 오직 타인을 그 표준에 의하여 평론하는 것으로 일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시대의 바리새 교인이란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그룹이 미국 교계에서 10년래 분쟁을 일으켜 왔습니다. 학교에, 지교회에, 노회에, 총회에 가는 곳마다 분쟁과 증오와 변론과 작당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평화리에 해결하려고 신학교는 신학교대로, 총회는 총회대로 있는 노력을 다하였으니 그들은 그 평화적인 기회를 이용하여 더욱 강력하게 투쟁을 추진시켰습니다. 참다못하여 이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는 무뢰배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어 1929년 미국 북장로교 총회에서는 마침내 그들을 제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를 따라 총회를 탈퇴할 교회가 상당히 많을 줄 예상하였으나 사실은 그들에게 실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프린스턴에서 나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란 자파(自派)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메첸 박사가 친히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 ‘미국 장로교회’란 이름으로 새 교파를 창설하였으나 그 명칭이 부당하다는 외부의 물의가 심하였으므로 부득이 ‘정통장로교회’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메첸 박사는 미구에서 서거하고 그 후배들 중에서 다시 이론 투쟁이 생겨서 10년도 못되는 동안에 교파가 셋이나 되었고 신학교도 셋으로 되었습니다. 그들은 미국 장로회의 반역자로 규정되어 있는 까닭에, 미국 남북장로교회에서는 그 신학교를 인정하지도 않으며, 그편 사람을 교역에 채용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조선 장로교회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조선에 나온 선교사의 거의 전부가 메첸의 동정자이며 특히 평양신학교의 교수진은 메첸 계통의 사람이 거의 전부였으므로 그들은 “조선은 우리 교구다”하고 호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미국 북장로교 총회에서 분리될 때 그들과 행동을 같이한 조선 선교사는 하밀톤(함일돈), 부르스 헌트(한부선), 훌드크롭(허대전)등 수삼 인에 불과하였습니다.

조선 사람으로 특히 메첸 박사에게 사사한 이로서는 프린스턴 신학에서는 아마 박형룡 씨가 가장 충실한 이에 속할 것이며, 분리된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이로서는 박윤선, 명신홍 등 제씨가 현금 그편에 서서 활약하는 선봉일 것입니다.

해방 후 조선 교계는 불안정을 계기로 그들의 분열 공작은 점차 활발해졌습니다. 우선 신사참배 문제로 불평을 품었던 기다(幾多)의 인사가 마산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자 그들은 현존 교회에 불평을 가진 이들을 조장하여 자기의 세력권 내에 도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박윤선 씨를 비롯하여 그들의 파견한 선교사 부르스 헌트를 교수로 임명하며 다시 만주로부터 박형룡 씨를 청하여 교장으로 취임시켰습니다.

그들은 이 신학교를 한국의 웨스트민스터라고 부르고 자파의 기관지에 대대적으로 소개하며 한편 경남노회 내에 분쟁을 일으키고 다시 손을 뻗쳐 서울의 조선신학교의 교란과 점령 운동을 전개시켰습니다.

그리하여 1947년 대구 총회 직전 조선신학교 학생 기십 명의 쿠데타 운동을 비밀리에 지도 혹은 원조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중앙신학, 중국의 화북신학, 조선에서의 구 평양신학 등은 자기네와 사상적으로 공명할 것이라는 견해로 이 제 학교 졸업생들에게 협찬을 구하며 서도(西道) 교우들의 전통 애호의 감정과 애향심 특히 ‘평양’을 그리는 마음을 이용하여 그들에게도 추파를 보내어 조선 교계의 대다수 지도자를 일거에 그 장중에 넣어서 “조선은 나의 교구다”하던 장담을 실현하려 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극히 상식적인 면에서 관찰할지라도 진위는 드러날 것입니다.

우선 미국의 남북장로회 총회에서 작당 분쟁을 일삼하 평화와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방축(放逐)을 당한 극소수(미국 전장로교회의 5%도 못되는) 그들의 손에 우리 조선 장로교회 전체를 다 맡긴다는 것은 조선 장로교회를 전 세계적인 대생명체에서 절단하여 일부 반도에게 붙이는 것이며, 우리 순진한 성도들을 자기도 모르는 중에 전 세계적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취하는 지도원칙인 사상의 절대 통제, 전통의 묵수(墨守)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잖아도 노예근성 때문에 골치 않는 우리 민족에게 더 심각한 무지와 굴종을 강요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유로 진리를 탐구하는 창조적인 기개는 날로 위축되어 마침내 이조(李朝)의 유교가 정주학파에 종이 되어 이에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엄벌하다가 결국은 번문욕례(繁文縟禮)와 사색당쟁으로 나라를 망하여 먹은 것과 똑같은 결과를 재래(齎來)할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이런 신학 문제의 논쟁은 일반 신도에게는 판단의 능력이 없으니 가부를 운위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는 “천사라도 심판할 수 있다”고 말씀한 것과 같이 우리는 가장 평이간명(平易簡明)한 판단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열매란 것은 그 도덕생활입니다. 우리는 그 나타난 언행 심사를 보고 그 신학의 정부(正否)를 알 수 있습니다. 성신에 심은 자는 성신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둡니다.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였습니다(갈 5:22, 23). 육신에 썩어질 것을 거둘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와 이단과 투기’ 등등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의 ‘인격’과 친교를 맺는 것보다, 그에 대한 ‘관념’에 사로잡힌 자는 공산주의자처럼 이데올로기라는 우상에 붙잡힌 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리스도도 사랑이시오”, “내가 너희에게 오직 한 가지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사랑 안에 있으면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의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온갖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단이 무엇입니까? 어떤 관념을 고집하기 위하여, 사랑의 심정을 유린하는 자가 가장 큰 이단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강점은 이론보다도 그 도덕적 생명의 권세에 있습니다. 이론으로 이단 정통을 정한다면 철학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교리 투쟁의 결과가 언제나 형제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기록을 남긴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정을 제외하고 이데올로기만으로 심판하려 한 까닭이었습니다.

이제 소위 정통을 운운한다는 이들의 나타난 언행과 심사를 따져보십시오. 간 데마다 분쟁을 일으키며, 편단을 만들며, 증오심을 조장하며, 원수를 맺으며, 자기를 의롭다 자랑하며, 성역자를 걸어 송소(訟訴)하기를 능사로 하지 않습니까? 성신의 열매 사랑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이 혹 전도하는 능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파의 ‘주의’(主義) 선전이 언제나 강력한 동기가 되어 있습니다. 자파 세력의 확장이라는 야심이 언제나 움직이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 교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라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하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불순한 동기로 전도하는 것을 잘 아신 까닭이었습니다.

보통 상식을 가지신 신도라면 누가 참말 정통이고 이단인가를 그 심정과 열매를 보고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소위 조선신학교 학생 사건의 진상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들은 양양한 미래를 가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내가 구약 강의에 있어 현대 비판학의 결론을 소개할 때 그들 중에는 종전의 소신보다 다른 데 스스로 고뇌를 느낀 사람이 약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민을 솔직하게 나에게 질의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고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은 그 고민을 학교 이외에 다른 선배들에게 고백하고 거기서 비판을 받으며 또 지도와 연락을 계속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극비리에 총회에 제소하여 쿠데타에 성공을 기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다시 학교에 아무 일 없는 듯이 등교하여 장기적인 음모를 기도한 것입니다.

학교 당국으로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 행동이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떠난 것이었으므로 소수 주동자에게 퇴학을 명하고 연명자(連名者)에게 무기정학을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회오(悔悟)를 표명하고 돌아오는 때면 해벌(解罰)할 것을 언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결속하여 가지고 끝까지 학교에 대항할 것을 표명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장래를 위하여 불소(不少)한 기우(杞憂)를 느낀 것입니다.

[4] 특별위원과 이사회와 나

그 후에 나에게 총회에서 특별위원을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학생의 처분은 교수회의 권한이요, 교수에 관한 것은 이사회에서 의정(議定)할 것인데, 교사회나 이사회의 처사를 보기 전에 특별위원을 보낸다는 것은 상회(上會)로서 너무 조급한 처사일 뿐 아니라, 학생들의 무궤도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 인정 조장하는 것으로서 행정상으로나 교육상으로나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할 수 없었으나, 나는 별 항의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특별위원회가 서울에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충분한 재료를 드린다는 의미에서 나는 교장의 명에 의하여 진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의 총회 문전에서 배부한 인쇄물을 읽고 나에 대하여 사실대로 나의 소신을 진술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중심으로 수일 토의하다가 나에게 직접 문답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까지에 해혹(解惑) 못한 점은 나의 성경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성경의 절대 무오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진술서에 쓴 대로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임을 믿으며, 사도신경과 장로교 신조를 그대로 믿는 것을 하나님이 아실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무오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그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구속주의 출현과 구속함 받고 영생 얻는 길을 계시하는 것이 목적이므로(요 5:39) 목적 달성에 틀림없으면 성경은 틀림이 없는 것이요, 자연과학이나 역사과학의 순지식적 부문에까지 성경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특별위원 중에는 성경의 축자적 무오를 주장하는 이도 있었으므로 통일된 결론을 짓지 않고 전체 이사회에 넘기기로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에, 전체 이사회가 모여서 논의한 나머지에 다시 나에게 대담을 저하였습니다. 역시 성경관에 대하여 다소 불분명한 일이 있으니 설명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본의가 성경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음을 우선 알아주어야 할 것과 성경 무오를 입증하는 데 있어서 구속을 위한 특별계시라는 가장 견고한 기반에 서 있어야 필승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잘 알았다고 말하고 진술서에 나타난 문구에는 다소 오해를 일으킬 우려도 불무(不無)하니 성경관에 대하여 일 후에 간단한 성명서를 발표함이 여하(如何)한가 하기에, 그것은 학교 당국과 논의한 후에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총회장으로부터 결론짓기 위하여 문답하고 싶으니 묻는대로 대답하라고 하였습니다.

총회장은 기도한 후 나에게 지금까지 신학교육을 위한 수고를 감사한다고 말하고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1) 문 : 이번 학생 사건 때문에 교계가 소란하게 된 줄 압니까? 답 : 압니다.

2) 문 : 조선신학교를 더 완전한 신학교로 만들기를 원합니까? 답 : 원합니다.

3) 문 : 이번 학생사건에 있어서 실수된 것이 있다고 자인합니까? 답 : 교수 내용에 대하여서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지 않으나 교수 방법에 있어서 학생들의 이해 정도를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은 느낍니다.

4) 문 : 금후에 교수 방법을 변사(變思)할 의사가 없습니까? 답 : 학생의 현편을 따라 수시 변경하겠습니다.

5) 문 : 성경관에 대하여 성명을 내겠습니까? 답 :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학교 당국과 의논한 후 성명서를 내겠습니다.(끝)

나는 내 강의를 듣는 학생 중 약간 명이 주동으로 교회에 소란을 일으키게 된 데 대하여 교사로서의 심심(甚深)한 진사(陳謝)의 의(意)를 표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나와의 대담은 필하고 나는 퇴장한 것입니다. 그 후에 된 일은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일이 아니니 여기서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듣는 바에 의하면, 내가 발표한 성명서와 이 문답서를 각 노회에 보내면서 이 문제는 무사히 단락을 짓기로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나는 약속대로 성명서를 내었는데 다시 모인 전체 이사회에서 검토 후 무난한 것으로 인정되니 받기로 가결하고 그것을 각 노회에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5] 처벌 학생 복교의 경위

제1차 이사회에서 나에 대한 문제가 일단락을 고하자 처벌당한 학생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학생 처분은 교수회에서 할 것이므로 이사회로서 간섭할 것이 못 되나 소속 노회 안에서 어려운 문제가 있으니 이사회로서 특별위원을 내어 교수회에 사정을 진술하고 재고를 요청하기로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위원으로 선정된 이창규(李昌珪), 김종대, 양 이사가 교수회에 요청하는 바 있었습니다. 본래 교수회로서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취한 행동이 학생의 본분에 어그러진 것을 이유로 처벌하였으며 또 언제나 그 행동의 과오를 자인하면 해벌하기로 언명한 것이니 이사회에서 그 학생들을 잘 회론(誨論)하여 행동의 과오를 자백하도록 한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뜻을 표명하였습니다.

이튿날 이사 이창규 목사께서 학생에게 이 일을 광고하셨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처벌당한 학생들은 처벌 전으로 돌아간다.
2) 금후에 여전히 학교 당국에 불순종하면 단연 용서가 없다.
3) 1주일 이내에 등교하지 않으면 제명된다. 이상.

그리고 이사 두 분은 처벌당하였던 학생을 따로 일당에 모으고 그 행동의 과오를 타일렀으며 학생들은 그 취한 행동의 잘못을 자백하고 대표를 뽑아 교장에게 용서를 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구에 닥쳐올 학년말 시험에 그 학생 중 대부분은 수험을 거부하고 무단히 귀향하였으므로 성적의 미급과 소행의 부당으로 진급이 불허되었고 순종하여 수험한 학생들은 지금까지 화평하여 수업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그 학생들은 대부분 고려신학교로 갔기 때문에 자연 제명이 되고 만 것입니다.

[6] 이제 나는 항간에 돌아다닌다는 유언비어에 대하여 몇 가지 대답을 하여 두렵니다.

1) 내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도, 기적도, 부활도, 재림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하는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이는 나의 저서와 아울러 내가 8년래 강의한 것을 들추어보면 알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교안의 프린트를 보아도 알 것입니다. 그런 말을 유포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는 범계자(犯誡者 )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내가 신신학자라, 칼빈 신학을 부인하는 자라 운운하는 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지나친 기우라고 봅니다. 학생들에게 이미 공개된 교안이 이를 자연히 알 것입니다. 내가 자유주의라면 그것은 아마 내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리를 탐구할 것을 언제나 강조하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첸 박사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이라는 책에서 대조시킨 의미의 자유주의는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3) 내가 성경 연구에 있어서 비판적 방법을 채용하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현대 비판학의 정당한 결론으로 공인된 몇 가지는 이를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성경의 서론에 있어 어느 책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쓴 것이며 어떤 경로로 성경에 편입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한 것이니 이는 성경 연구의 준비지식으로 필요한 지식의 문제요, 결코 신앙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어디서 언제 썼든지 간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지고 또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성경에 편입된 한 하나님 말씀 되는 데는 틀림이 없는 까닭입니다.

[7]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진퇴 문제에 대하여 내 태도를 표명하려 합니다.

거반 모모 인사들이 대전에 모여서 ‘조선신학교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일부 인사의 개인적 행동이므로 노회나 총회에서 운위할 성질의 것이 아님이 사실이나 거기서 논의하였다는 안건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과시(果是) 영웅들이라고 감탄하여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조선신학교 현 이사진과 교수진을 총퇴진시키고 일체(一切) 재조직하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사도 총회에서 공천한 인사들이요, 교수들도 조선신학교를 직영으로 받을 때에 총회에서 그대로 인허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들 전체를 총퇴진시키는 데는 100만 신도 앞에서 하늘에 사무치는 범죄 사실의 존재를 입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진이나 교수진이 그들의 판결에 대하여 하등의 불복이 없어야 성립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의 구과(咎果)는 교수진을 옹호한 데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특히 나의 진퇴가 이 문제의 관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 퇴진을 요구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검토하여 봅시다.

우선 작년의 학생 사건을 계기로 생긴 수삼 차의 이사 회합에서 나를 퇴직시키기로 작정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면 그것은 나의 학적 입장이 장로교 신학교 교수로서의 절대 불가용(不可容)의 것임이 입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학적 진리의 문제요, 행정 문제는 아닙니다. 학적 진리의 왈가왈부란 전 세계 사학계(斯學界)의 학적 판단이 이를 작정하는 것이요, 결코 교권이나 정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느 한 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적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거대한 유기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정죄하려면 우선 나의 제출한 진술서를 영역하여 적어도 조선 교회와 직접 관계 있는 미국 남북장로교회 각 신학교와 총회 교육국, 캐나다, 호주, 영국, 스코틀랜드 등의 각 장로교 또는 연합교회의 제 신학교와 교육국에 보내어 그 신학자들의 판단을 얻어 그것을 정리하여 보아야 비로소 다소 권위있는 판단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이란 신앙 양심과 직접 관계된 것이니만치 다시 그리스도와 나 자신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성신의 간증(干證)과 묵계(墨契)가 있는 것이어서 이에 함부로 손대는 것은 지성소를 범하는 두려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갑자기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너무나 인간적인 심경이 눈앞에 잡힐 듯이 서연하여집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려 하노라……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전 10:7~11:21).

저가 믿음의 증거를 가졌느냐? 나도 더욱 그러하다. 내가 유교와 한학의 열심 있는 집안에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 어버이에게서 끊어지는 쓰라림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증거를 얻었노라. 주께서 의롭다 하시나니 누가 나를 송사하랴 하는 마음의 기쁨에 몰려 손에 쥐어진 하늘의 약속만을 가지고 바다로 육지로 오십 평생을 표랑(漂浪)하였으되 내가 부족함이 없었노라.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였느냐? 나도 그러하다.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외로우되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였도다.

저가 신학교육에 공헌이 있느냐? 나도 그러하다. 사면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총회도 외면하고 지나갈 때 주의 막대기가 나를 붙드셨도다. 내 설령 마지막 숨을 내쉬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수백 명 후진을 생각하고 하늘의 별을 세일 수 있음을 자랑하리라.

저가 현대주의의 결함을 아는가? 나도 그러하다. 저는 전망대 위에서 보고 외쳤으나 나는 그들과 함께 피하는 거리를 순례한 사람이다. 나는 그 결함과 아울러 그 장점도 발견하고 있다.

저가 정통을 자랑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그는 관념으로서의 정통을 안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자신의 심정에 부딪혀 들어가는 전 인격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저가 칼빈 신학을 수호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나는 칼빈이 주창하였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다가 결국 칼빈의 문하에서 내 신앙의 지적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친구님들이여, 나의 어리석음을 용납하시오. 더 쓰지 않으렵니다. 주를 사랑하고 조선 교회를 사랑하는 열심히 나를 미치게 한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떠나간 학생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전도(前途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선배 혹 동료인 ‘정통 애호자’를 존경하고 아낍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소신을 은혜 받은 대로 겸손히 증거하며 열심히 전도하고 또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성도의 친교를 교란하지 않기를 충고합니다.

그러나 나는 선진국인 미국의 소위 ‘정통장로회’가 자기네의 분파적 투쟁심을 조선에 불붙여 불신자 획득보다도 기성 교회의 교란과 쟁탈에 정력을 견주하는 것과 남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자기네 본국 교회에서 이미 경험한 결과를 번연히 알면서도 하등 명백한 지도성을 표시하지 않고 무위좌시(無爲坐視)하며, 어떤 인사는 도리어 그런 것을 틈타서 전쟁 전 선교사 집권의 회복을 꿈꾸는 것을 볼 때 의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 편지 쓰는 동기도 사실은 우리끼리의 변론을 뜻한 것이 아니요, 알면서 아웅하는 저들에 대한 우리 교회의 정당한 인식을 촉구하려는 데 있습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그편 선교사가 방금 다수 입국 중이라 합니다. 전 세계 교회는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연합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도 조선 교회가 세계 장로교회 성도의 교제에서 끊어지지 않기를 빕니다.

쓰는 중에 사랑을 손상한 것이 있으면 부디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오해된 것이 있으면 본의 아닌 줄 양촉(諒燭)하시고 시정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안에서 친구님들의 만복을 빌며 삼가 이 편지를 끝맺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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