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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4권] (8) 상한 갈대 - 空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16 15:13
조회
1188

[범용기 제4권] (8) 상한 갈대 - 空

내 “호”를 장공(長空)이라고 자타 없이 부르는 것 때문에 그 뜻이 뭐냐고 묻는 분이 적지 않다. 사실, 내게 있어서 “호”란 것은 일종의 “펜네임”이고 별 거창한 뜻이 바다 밑 신비처럼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내 자신이 생각해 낸 이름이 아니라, 내 선배 친구 한 분이 나에 대한 “인상”의 부서진 조각들 틈에서 주워낸 선물이었으니 나는 고맙게 받은 것 뿐이다.

내가 20대, 이상과 공상이 뒤섞여, 무지개 타고 하늘에 오르는 동화의 세계가 생각의 테두리에 맴돌고 목가적인 낭만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감미로울 무렵에 그리스도가 찾아 오셨고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손잡아 주었다. 두 분 다 “인간 사랑” 때문에 “철부지” 소년을 불러 주신 것이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이었지만 정신연령으로 따진다면 “소년”이하였을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는 부요한 상인의 아들로서 “기사”(Knight)로 출세할 작정이었고 아버지도 그걸 원했었다. 그러나 “기사”로 앗시시 성주를 위해 출전했다가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온 “프랜시스”는 허무했다. 어느 이른 봄날 그는 앗시시 성 밑에서 고독을 되새기며 파랗게 싹트는 작은 풀을 만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자기 모습대로의 돈 욕심과 이름 욕심에 묶어 “마몬”의 제단에 받치려 든다. 나는 탈출해야 하겠다. 아주 벗은 몸만으로 도망쳐야 한다. 그래서 그는 집을 나왔다. “아비를 거역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네게는 한 푼의 유산도 주지 않는다”하고 아버지는 그를 재판소에 데리고 가서 금치산자로 신고했다. 프랜시스는 거기서, 입은 옷들을 홀랑 벗어 팽개치고 “이제부터 내 아버지는 하느님만이다” 외치며 나왔다. 그는 거지 틈에 끼어 거지 옷을 걸치고 평생 “무소유”의 “방랑성자”로 지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단념한 그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작은 형제들의 사랑, 새와 이리와 물고기와 벌레들의 사랑 속에 살았다. “형제 태양이여”, “자매인 달이여!”하고 하늘을 우러러 사랑의 찬가를 영탄한다.

“무소유”의 빈 마음(空) 속에 몰려드는 사랑의 회리바람에 쌓여 엘리야처럼 하늘에 올랐다. 그의 무소유는 사랑을 위한 공간이었다.

내가 “장공”이란 “호”를 쓰게 되자, 내 형님은 “네가 중이냐? 무슨 호가 그래!”하고 언잖아 했다. 불교에서는 “공즉실”, “실즉공”이어서 空(공)에 実(실)이 있고 実(실)에 空(공)이 있다니까 불교적이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이 본다면 구만리 장공이란 펼쳐진 하늘이기도 할 것이다. 이태백이 “푸른 하늘 한 장 종이에 내 뱃속 시를 적으련다”(靑天一張紙, 写我腹中詩) 했다는 것도 “창공”과 통한다 할까. 그래서 아마 “만우” 형이 나에게 “장공”이란 “호”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후일에 나는 서폭에 이런 글을 써 벽에 걸어 둔 일이 있다. “万里長空(만리장공)에 片雲(편운)이 浮動(부동)터니 晩雨一過後(만우일과후)에 秋陽(추양)이 可愛(哀, 가애)로다.” 백영렵 목사가 보구서 재미있는 교우록이라고 했다. “片雲(편운)”은 채필근, “晩雨”(만우)는 송창근, “秋陽”(추양)은 한경직이다. 모두 같은 시절의 선후배다. 그들 삶의 모습이 요약돼 비친다. 그러나 더 쓰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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