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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519] 4ㆍ19 以後(이후)의 韓國敎會(한국교회) - 1961년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19 01:25
조회
842

4ㆍ19 以後(이후)의 韓國敎會(한국교회)

「기독교사상」

4ㆍ19의 정신적 바탕

우선 우리는 4ㆍ19의 정신적 바탕을 좀더 솔직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4ㆍ19가 과연 「혁명」이었는가? 나는 문교부에서 이에 대한 질의서가 왔을 때 「의거」(義擧)라고 회답한 일이 있다. 4ㆍ19의 학생 운동에는 「혁명」보다도 훨씬 더 순수하고 순정한 윤리적 고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혁명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무서운 「악마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① 종말적 요소가 혁명의 주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회는 개량할 여지가 없으니 어찌되든 두들겨 부수고 보자하는 것이 혁명의 첫 생각이다. 그것은 현존질서에 대한 무자비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데모」같은 것은 「혁명」 수단에 들지 않는다. 비밀결사, 지하운동, 그리고 파괴, 복수, 통쾌한 힘의 승리 등등이 과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4ㆍ19학생 운동에는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어디까지나 비폭력 합법적인 의사표시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고 건전한 민주적인 정신을 표현하려는 성의가 넘쳤었다. 폭력보다도 시종 윤리적 순수성을 발휘하기에 일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혁명」이라기에는 너무나 윤리적으로 순수하고 고귀하였다.

② 「혁명」은 자유의 깃발 아래서 「정권」 탈취를 목적하고 진행된다. 폭군정치에서, 귀족계급에서, 부르조아 계급에서 인민을 해방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되는 즉시로 그들 자신이 새 계급, 새 우상이 되어 다시 인민을 노예화한다.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그러했고, 남한에서의 자유 정권이나, 터키에서의 멘데레스 정권이나 정도의 차는 있어도 실상은 같은 궤도를 걸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다음 「정권」을 제 손에 잡지도 않았고, 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 정권이 저지른 그 아무 것에도 직접 책임질 처지에 있지 않다. 다음 정권을 노리지도 않고 또 거기 책임을 지지도 않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③ 혁명은 극단적 수단에 의하여 그 실현을 기대하는 것이다. 과거는 송두리째 부정하고 미래는 무조건 긍정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못한데 역사의 비극이 있고 「아이로니」가 있는 것이다. 혁명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하다. 극단은 결국 폭력에 의한 가능성에 호소한다. 그리고 과거를 적으로 삼아 축적된 증오감정을 도발시키므로 복수심에 불을 지른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원수라는 신화에 미쳐 날뛰게 한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애당초부터 그런 극단을 원하지도 않았고 적이나 가상 적을 목표로 날뛰지도 않았다. 시종일관 자기희생적인 높은 윤리행동을 염두에 두고, 이 박사와 면담하여 눈물로 나라를 위해 호소했다. 그들은 복수에 취하여 원수의 피로 축배를 올리는 심정을 추호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④ 혁명은 과거에서 단숨에 미래로 비약한다. 현재는 다만 미래를 위한 방편이다. 현재가 현재로서 실재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현재에 하는 일들은 그것 자체에 책임이 돌아가지 않는다. 현재에 방화, 학살, 허위선전, 이간, 모략, 증오, 심지어 부모와 선배를 살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변천과정이요, 비실재요, 미래의 영광에 포섭될 진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오히려 「현재」를 성화했다. 그들이 그 당시 정권의 횡포에 더 견딜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가지고 그 실현과정의 한 단계로서 「데모」를 감행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불의를 참아 묵과할 수 없었음과 동시에 의를 위한 현재의 한 순수한 외침이 광야에 사라지는 소리와 같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의로운, 그리고 의를 위한 거사일 것을 믿고 나선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충분히 의의가 있음을 확신한 것이었다. 마치 3ㆍ1운동 때의 그것과 같은 정신적 윤리적 선언이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거사는 그 「현재」에 모든 것을 함축시킨 것이었다. 그러므로 4ㆍ19는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혁명」의 계열 이상의 「의거」였던 것이다. 4ㆍ19때에도 방화, 폭력 항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의 본래의 의도도 아니었고 또 그들의 주동에서 생긴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로는 물론 「혁명」에 못지 않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폭력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그 윤리적, 정신적 승리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은 학생들 측에서 본다면 초타산적인 「주어진」 상급이었다.

그러므로 4ㆍ19의 정신적 바탕은 「정치적 혁명」의 계열에 속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민정신의 앙양, 국민생활의 재건을 위한 윤리적, 민주적 「혼」의 폭발이었다. 그러기에 지금에 있어서도 그 주류가 국민생활재건, 국민정신의 변신, 사회생활 전체로서의 건전한 Ethos의 조성에 지향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진실로 건국의 기초닦이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에 온 정권이 그들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 「의거」의 윤리적 바탕에서 날카로운 감시와 경고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의거」자로서의 당연한 권리요 또 의무기 때문이다.

4ㆍ19 이후의 교회

4ㆍ19는 암흑을 뚫고 터진 눈부신 전광이었다. 그 윤리적 높은 행위가 일반의 양심에 자화상을 파생시켰다. 교회도 이 섬광에서 갑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하여 구정권의 악행에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교인까지 생겨났다. 교회기관으로서 스스로의 과오를 사회에 성명한 문서가 한 두 종이 아니었다.

8ㆍ15 이후 교회 자체가 급변하는 사상의 와중에서 스스로를 정돈하지 못하고 분쟁과 아울러 윤리적 혼미에 빠졌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대사회적인 책임에 두드러진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자괴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제일 높은 감투자리가 명목만으로라도 기독교인에게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분리주의적 근거 위에 선 교회 대 국가 관계에서 당연히 계속되어야 할 「긴장」이 풀렸으며 거기에 따르는 교회의 자가부패가 또한 적지 않았었다. 원래 우리 나라의 기독교는 전래한지 한 세기도 못되는 짧은 역사와 전인구의 4퍼센트도 못되는 소수를 갖고 있는 데다가 기독교 자체의 자기 이해가 또한 종래의 미신, 민속적 관습, 유, 불교적 기풍의 생산화 등등으로 자가혼탁을 이루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는 법적으로다 기풍으로나 온전히 세속국가다. 그런 처지에서 교회가 대국가 관계에서 「긴장」을 풀었다는 것은 무서운 실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제요인도 작용하여 시종 불투명한 대국가관계를 지속해 왔었기 때문에 국가의 잘못에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분간없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대국가적 과오 때문에 「교회」의 현재 가치나 위신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려는 낭만적인 전적 개혁을 단언하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현실을 움직이는 데 별로 실현을 보지 못했을 것은 물론이다.

4ㆍ19 이후에 교회는 여러 교파에서 각기 총회들을 모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 심각한 반성이나 새 세기를 위한 설계도 볼 수 없었다. 구태의연하였으며 어떤 교파에서는 분열에 더욱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국가와 교회의 분리는 어느 정도에서 그어졌으며 그 둘의 접선은 어떤 태도로 되어져야 할 것인가? 교회의 대국가 책임이란 어떤 면에서 어떻게 져야 할 것인가? 교회인이 일반 사회로서의 공동사회생활에 동참하는 때 그 실제면에서 어떤 생태를 가질 것인가? 등등을 침착하게 검토하여 금후의 양자 관계가 전과 같이 뒤죽박죽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체적인 탐색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 자체로서도 자가정돈을 위한 금후태세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인가에 진지한 생각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약에서 본다면,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에 국가를 적극적으로 긍정하였으며, 그것은 인간생활 전반에 대한 권선징악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하나님이 그 안에서 그것을 통하여 섭리하신다고 하였고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이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복종」이란 말은 현대 민주사회에 있어서는 「책임적으로 참여 또는 동참」한다는 용어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록에서는 국가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짐승」으로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렇다고 신약성서의 국가관에 근본적인 모순이 내포되었다고 볼 것은 아니다. 묵시록의 태도는 국가가 국가의 주어진 본분을 지키지 못한 경우에 취해진 태도였을 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원칙이 되살아난다. 그것은 카이사와 하나님을 1대 1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하나님 아래 있는 카이사인 것은 본래부터 인정되어 있다. 다만 국가에는 국가로서의 구실이 적극적으로 인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국가로서 손못댈,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영역이 또한 따로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때 사도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너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고 단연히 처형을 감수하게 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 아니라, 카이사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성역을 하나님께 돌리는 비상한 행동이다. 이 선이 불가능해서는 안된다. 거기에 정교분리의 원리가 선다. 그런데 그 선이 사실상 어디서 그어져야 하느냐가 문제다. 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자기를 신화하는 때 이 선은 사실상 도말되는 것이므로 신자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다. 국가가 종교의 내용에 간섭하는 그 교리를 규정하고 가르치려 할 때 그것은 침범되기 때문에 이에 항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권 때에 비구승만이 참 불교도라고 국가에서 규정한 것은 국가로서의 월권행위였다. 기독교에 대하여 동일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만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교회는 국가적 집권자에게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 집권자를 교회자신의 편익을 위하여 이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결국 교회가 국가 노릇을 하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집권자가 우연히도 교회인이었다 셈치더라도 교회는 그 국가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위하여 일반시민 이상의 권익을 상정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국가의 존재를 논함에 있어서 인간의 범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필요하다는 소극적인 허용 태도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보다도 인간공동사회의 적극적인 복지건설을 위하여 국가는 항구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국가가 시도하는 모든 건설적인 사업에 솔선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이웃을 위하는 기독교 윤리의 실천과정임과 동시에 국가를 통하여 또는 국가 안에서 인간의 현세 생활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순응하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대략 이상과 같은 원칙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선이 그어진다고 본다면, 우리 교회가 이정권 시절에 똑똑히 굴지 못했던 자화상이 드러날 것이다. 국가를 절대화하려는 독재경향이 익어감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에 교회로서의 경고를 제대로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 교회가 멋없이 집권자와 일치의식에 자위소를 설정했었다는 것, 교회가 대사회 건설 사업에 활발하지 못했다는 것 등등이 원칙적으로 반성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대 국가의 협력선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교인 중심의 기독교 정당을 조직하여 교인끼리 뭉쳐진 정당활동을 하는 것이 가장 두렷하고 또 대국가 관계에서도 유효한 접선, 발화점을 가지는 것이 되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실무익한 우견이란 것이 세계적인 정론으로 되어 있다. 우선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동일한 정견을 언제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상정할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며, 정당과 교회를 일치시키는 풍조를 조성하므로 말미암아 교회에 오명을 돌리게 되며, 정적이 저절로 교회까지 적시하게 되며, 타정당에서 기독교인을 뽑아냄으로 말미암아 그 정당 안에서의 누룩이나 소금 구실할 요소를 제거하게 되며, 기독교 정당 자체는 자신의 정략에 거짓된 신적 재가를 선포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감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독일과 이태리에 카톨릭 중심의 기독교 정당이 있고 홀랜드에 신교중심의 기독교 정당이 있다. 카톨릭에서는 그런대로 해갈 수 있는 성 싶으나 신교는 홀랜드에서도 사회정책, 식민지 문제 등으로 양분되어 한 부분은 세속적 사회주의자들과 합하여 버렸다. 국민의 거의 전부가 기독교인인 나라들에서도 그러한데, 기독교인이 전인구의 4퍼센트도 못되는 우리나라에서 교인끼리가 고립한다면 그것은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의 대국가 봉사의 정상적인 접선점, 역시 비정치적 사회, 도덕, 교육 등 분야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간접적인 공헌이라고 한다. 교인에게 기독교적 윤리의식을 뚜렷하게 길러줘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일반사회의 윤리적 기풍을 조성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도덕적 감수성이 마비되지 않게 항상 가치체계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 각개 인격을 존중하는 일과 가정을 정화하는 일과 약자를 구호하는 일과 범죄자를 선도하는 일, 적대자와 화해를 촉진하는 일 등등은 기독교인이 사회생활에서 날마다 원칙적으로 명심 실천할 강령들이다. 그러나 교회의 윤리표준이란 것도 얼마 가면 정체되고 고정되어 한낱 「고루」의 대명사 구실밖에 못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대의 윤리행위가 성공적으로 이를 타개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지도에 겸비해야 한다. 그리하여 장구한 세월을 두고 꾸준히 나가는 동안에 공동사회의 양심이 조성되는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한 바울의 격려가 절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군다. 자유하면서 잘 사는 민주의 길은 껑충 뛰어 대번에 꼴인할 수 있는 가짜 길이 아니다. 조급성은 독재를 유치한다.

기독교인의 직장도덕이 훈련되어야 한다. 이 점은 영국의 유럽 제국에서는 거의 완전을 기할 정도로 전통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직장에서의 절대정직이란 것은 교회에서의 훈련 결과였다. 우리나라 교회인이 직장윤리에 등장한다면, 도대체 어디서 소금이니 누룩이니 빛이니 하는 상징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4ㆍ19 이후 교회의 대 사회적 관심의 적극적인 표현은, 근자에 생긴 「절량농가 구호 운동」이 아마 그 첫 표징일 것이다. 그것이 항구한 대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당장 가만 있을 수 없다는 순정의 발로라는 데 의미가 있다. 홍로일점일지 몰라도 기특한 표징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좀 더 넓은 그리고 기술적인 선한 사회운동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처음이라, 범위를 넓히는 데 두려움이 있었으나, 금후에는 교회가 스스로의 Provincialism을 극복하고 오히려 자기를 숨기고 전체로서의 공동사회에 호소함으로 말미암아 뜻 있는 이들과의 간격 없는 협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ㆍ19 이후에 가장 활발히 전개되어야 했을 운동은 국민생활 재건운동이었다. 유토피아적인 제2공화국이 어떤 정당의 손에서, 마치 요술쟁이 보자기 속에서 달걀 나오듯이 우리 앞에 떠오를 것으로 기대할만치 순진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만 쳐다보고 기대에 어긋난다고 불평만 하는 경향이 늘어간다. 물론 불평들을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제 일처럼 서둘지 않고서 어떻게 주인노릇을 할 것인지 의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도, 일반시민도, 교회도 밑바닥에서부터 민주건설 운동을 전개해야 할 시기는 왔다고 본다. 우리가 직접 담당하지 않은 정치와 행정의 잘못에 우리 교회가 직접적인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국가가 교회 내면생활의 부진에 직접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비정치적인 제반 사회적 건설사업에 있어서는 교회가 책임적으로 동참할 충분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교인으로서 국민 공동사회 안에서 삶을 함께 하는 경우에 교인이라고 법적으로 예외를 만들 아무 특권도 없는 것이다. 다른 시민들이 법에 의하여 처단을 받아야 한다면 교인도 그러할 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 성서에는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재주를 부리면 얼마든지 도피처를 마련할 수가 있다.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범법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음과 동시에 죄인을 용서할 뿐 아니라, 대속하고 죄인에게 의를 입히는 은혜가 있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당사자는 뻐젓이 도피처를 발견하고 당당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 시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신자는 일반 국민으로서의 공동사회 규례에 동참해야 하며 그것을 온정으로 바꾸기를 삼간다. 그리하여야 교회가 스스로를 편달하는 데 시민 이하가 되지 않게 됨고 동시에 공동사회의 공의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기독교 국가의 교회에서 전통으로 지켜온 유산임을 기억해야 한다.

마감으로 4ㆍ19 이후에 교회 자체 내의 자가정돈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나는 보았다. 물론 본래부터의 분열주의자들은 제 갈 데로 갈 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후에 오히려 격화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대 사회 책임을 위해서나 교회 자신의 본성 회복을 위해서나 같은 主(주)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겠다는 경향도 4ㆍ19 이후에 그 농도가 짙어가고 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요, 기구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기구는 이에 따를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아직도 실질적으로 생리화되지 못한 점이 허다하다 할지라도 대체 방향을 그렇게 잡고 항행하게 된다는 것은 소망 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세계가 분명히 둘로 갈라져서 그 국경선이 우리나라 중턱을 뚫고 나갔다는 현실은 이 둘의 세계가 피차 현존한 운명을 달리하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가 단독으로 우리의 통일난제를 전개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든지 둘의 세계가 합의되어 우리나라의 남북통일이 실현된다면 우리 교회는 갑자기 새로운 역사적 국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UN감시하에 민주통일이 실현된다 셈치더라도 교회는 공산세력과 직면하여 본격적인 투쟁을 개시해야 한다. 그 때까지도 교회가 자가정돈을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심판을 초래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 동안에 공산주의를 과대히 평가한 나머지, 그 야만적인 폭력과 테러에 여유있게 대결할 정신적 준비를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맑스냐 그리스도냐?」 등의 양자 택일적인 빡빡한 태도를 오히려 영웅시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그리스도와 1대 1로 대결하는 위인이 아니다. 그는 영적으로는 두더지 같이 눈을 잃은 존재였으며 따라서 인간 이해에도 암흑이었다. 그는 하나의 「악의」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처지에서 본다면 가련한 「잃은 양」의 하나였다. 하여튼 공산주의자도 인간이요 악마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그리스도인의 전도의 대상에서 제외된 수가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영의 사랑으로서의 여유와 함축과 용기를 길러야 한다. 그들은 물론 우리에게 온순할 정도로 겸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와 1대 1로 아옹다옹하리만치 용렬한 분이 아니라는 것만는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4ㆍ19 이후의 학생정신이 끊임없이 건실해야 함과 동시에 4ㆍ19 이후의 교회도 거대한 약진을 위한 재정돈과 대사회적 재발전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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