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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511] 4ㆍ19와 정신적 기반 - 1961년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19 01:14
조회
872

4ㆍ19와 정신적 기반

흥사단 금요특강
1961년 3월 10일

나는 오늘 말하자면, 좁은 의미에서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는 데 그치게 될 것이며, 또 나의 입장은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죤ㆍCㆍ베넷의 소위 「Moral Cowreorus」의 선을 벗어나는 때도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끝까지 들으시기에는 적잖은 인내를 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청강하시는 여러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는 4ㆍ19 「혁명」이라고 하지 않고 「의거」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회답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4ㆍ19 학생운동은 「혁명」보다도 훨씬 더 순수하고 순정하였으며 더 도덕적으로 고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혁명」이란 데는 역사적으로 보아 훨씬 더 악마적인 요소가 내포되고 있는 것이다.

① 혁명에는 언제나 종말적 요소가 주요 역할을 한다. 이 사회는 더 이상 개량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어찌됐던 두둘겨 부수자는 것이 첫 생각이다. 그것은 현존질서에 대한 무자비한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파괴 복수 그리고 힘을 자랑하는 통쾌한 승리가 제시된다. 그러나 4ㆍ19학생운동에는 이런 데 비하면 너무나 고상한 윤리적 순수성이 시종 발휘되었었다.

② 혁명은 언제나 자유의 깃발 아래서 진행된다. 그러나 결국은 언제나 자유 대신에 운명이 이를 포착한다. 사람들은 폭군정치에서, 귀족계급에서, 부르죠아 계급에서 혁명에 의하여 해방된다. 그러나 그 즉석에서 새 계급, 새 우상이 그들을 포착하여 여전히 노예화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그러했고, 남한에서의 자유당 정권이 또한 같은 궤도를 굴러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다음 정권을 제 손에 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새 정권이 저지를 그 무엇에 아무 책임도 질 처지에 서지 않았다.

③ 혁명은 사회발전이란 신념에 심취한다. 그들은 예외없이 유토피아니즘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점진적이 아니라, 돌진적으로 중용지도가 아니라 극단적으로만 나가야 그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과거의 현재는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리하여야 거기서 새 것이 나올 것이다. 하고 절규한다. 그러나 그 무덤 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무엇이 있다는 데 역사의 비극, 또는 「반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우리 학생들은 그런 「극단」을 욕구하지 않았었다.

④ 혁명은 그것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비판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 순진한 것이다. 혁명이란 그 진행에 있어서 「가능성」과 「폭력의 저울질」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리해 놓은 다음에 비로소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성적 활동을 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우리 학생들은 시종, 자기희생적 고상한 윤리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⑤ 혁명은 복수심의 아들이다. 과거의 축적된 증오감정없이 혁명은 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미워할 적을 제시한다. 만일 그 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가상 적을 만들어 세워놓아야 한다. 사람들은 이 원수라는 「신화」에 붙잡혀서 미쳐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이박사를 「적」이라고 내세우지 않았다. 그를 찾아 만나 같이 울면서 나라를 위해 호소했다. 그들은 복수심에 미쳐 원수의 피로 축배를 올리는 심정을 추호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⑥ 혁명은 공포의 친구다. 공포는 권력과 함께 자란다. 혁명가가 권력을 얻어 성공할수록 그의 공포심은 늘어간다. 그는 부득이 세상을 둘로 나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하나는 언제나 적이다. 반혁명, 반동분자, 반집권 등등의 명패가 붙은 적인 것이다. 그의 눈에는 「I」와 「not-I」와의 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not-I」는 「Enemy」다. 혁명당초에는 혁명가는 희생적, 자유주의적, 의용심이 불타는, 민중의 가까운 친구인 영웅이었다. 그러나 일단 집권자가 된 때에는 그 혁명 이전의 혁명대상자보다도 더 가혹한 압박자로 화하기 쉽다. 왜냐하면, 혁명의 승리는 폭력의 승리를 말하는 것인데 폭력은 언제나 반항자를 상정하는 것이요 따라서 폭력의 성공은 부단의 반항자 악몽에 포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더 큰 부단의 압박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스탈린에게서 그 전형적인 것을 발견함과 동시에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우리 이승만 박사의 경우에도 같은 코스를 더듬은 불행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⑦ 혁명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가지고 있으나 현재는 안중에 없다. 과거는 미워해야 할, 없애버려야 할 모든 것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단정한다. 미래는 행복, 자유, 평등, 평화 등등의 낙원이다. 그들은 이 과거에서 단숨에 이 미래의 낙원으로 비약한다. 현재는 다만 이 미래를 위한 방편이다. 현재는 현재로서 실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하는 일은 그것 자체에 책임이 없다. 현재에 방화, 학살, 허위선전, 이간, 모략, 증오, 부모와 선배를 살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변천이요, 비실재요, 미래의 영광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혁명이 진전되는 동안 기억은 없다. 우리 학생들도 일시 이런 단꿈을 꾸었을른지 모르나 지금 쯤에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얼른 듣기에는 역시 「꿈」같은 이야기일는지 모르지만, 기독교신학의 입장에서 얼마를 말씀드려야 한다.

[1] 기독교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성 자체의 변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실시에 의한 원시공산시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시대에 해당한 것이고, 그것이 사유재산제도로 된 때 기독교의 낙원상실, 타락에 해당하며 이제 다시 공산주의가 실시되면 그것은 낙원회복, 또는 구원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구원주는 누군가? 그것은 무산대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유재산을 점유하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무죄자」인 까닭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식이 인간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심연」을 설명하는 데 아무 그럴듯한 중량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인간성의 변혁, 또는 새 사람의 「타성」이란 것은 어떤 사회혁명에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고 근본적인 혁명이다. 혁명이 지난 다음에 우리는 사실상, 새로운 제도, 새로운 사회풍조, 새로운 사상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새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여전한 「옛 사람」이 색다른 의복을 입고 다시 무대에 출연하는 것 뿐이다. 새 사람이란 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고 그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새 사람」은 사회기구의 산물이 아니라, 영적 탄생이다. 혁명에서 말하는 「새 사람」은 「새 사람」의 심볼을 입고 나선 「옛 사람」이요, 실재로서의 「새 사람」은 아니다. 마틴ㆍ루터가 「좋은 일을 하여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한 것은 기독교윤리의 핵심을 찌른 말이다. 기독교에서의 「새 사람」은 존재의 문제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문제일진대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고쳐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근년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점에서 이상주의자들보다 훨씬 진지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인간혼 안에 내림하여 그 바탕을 변혁시켜, 손실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가능하였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레 등등 적고 큰 「새 사람」형의 군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전래한지 한 세기도 못되는 짧은 역사와, 전인구의 4퍼센트도 못되는 소수를 갖고 있는 데다가 그 기독교 자체의 이해에 있어서도, 종래의 미신, 미신적 관습, 유불교적 생활기풍의 생리화 등등이 혼선을 이루어 자못 혼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본연의 자태를 전시하지 못하는 나무지 그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송구함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에 실망할 수는 없다. 그 때에는 근본적인 절망일 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다시 4ㆍ19의 정신을 솔직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4ㆍ19는 어디까지나 「의거」 즉 의로운, 또는 의를 위한 거사였다. 그것이 혁명에 유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미리부터 설계된 청사진에 의하여 성취시킨 것이 아니라, 한 놀라운 상급이었다. 그것은 「혁명」이라기 보다 하나의 국민운동의 유형이었다. 그게 기술적으로 전개시켜 국민생활재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데에 그 주류를 돌리는 것이 더 항구적인 밑바닥에서부터의 건설운동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 운동은 단시일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급하게 「유토피아」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러면 어떻게 이 4ㆍ19의 의로운 학생들의 정신을 구현시키기 위한 전국민적 정신운동에 이바지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에서와 같이 국가와 교회의 분립주의를 채택하였다. 그 다른 점은 미국은 국가로서 교회의 내부에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전 국가가 기독교적 「에토스」로 침투되어 있음에 반하여 우리나라나 인도, 일본같은 나라들은 국가가 전혀 세속주의적 기풍에 잠겨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여튼 우리나라도 정, 교분리주의로 되어있기 때문에 교회는 정치에 직접 간섭하거나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간접적으로 국가에 봉사한다.

[2] 그때그때의 큰 사회문제들에 대하여 교회는 국가를 위한 건설적인 비판과 계몽과 교육을 한다. 교회는 온갖 비정치적인 문화사업, 교양사업에 적극 협력한다. 요사이 교회에서 절량농가구호운동을 전개하여 어느 정도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선한 사업 추진에 있어서 교회는 결코 Provincialism에 빠져서는 안된다. 교회밖의 시민들과도 그 사업의 취지와 목적에 따라 적극협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협력해야 한 선한 사업들은 얼마든지 있다. 적십자사 운동도 그 하나다. 국토개발이고, 국민생활재건이고 솔선 동승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로서 가장 본질적인 사명은 복음전파에 의한 인간성 자체의 변혁에 이바지하는 일일 것이다. 오랜 기도와 간구와 노력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거대한 「새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탄생하면, 전국민의 정신적 도덕적 갱신은 단시간에 되어지는 예가 불소한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건전성이 밑바닥에서부터 마치 애굽의 피라밋트처럼 세워지게 하는 것이 가장 항구한 국가적 봉사로 될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옛 사람들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하고 바울은 에베소 4장 24절에 권고하고 있다.

나는 이것만이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역사의 진전에는 많은 요인이 서로 엉키어 있을 것이다. 그런 몇 천년을 지낸 지금에 와서 우리는 종교의 우열이 그 역사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호메트교 일색인 중동아세아와 애굽 및 아프리카의 일부, 원시종교 그대로의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 인도교 산하의 인도, 불교의 타이, 버마, 실론, 유교의 중국, 한국, 유불신 종합의 일본, 그리고 기독교신구교 거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영국, 소련, 미국, 스칸디나비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화란 등 기독교 신구교가 비슷하게 차지한 독일, 기독교 구교가 대부분 차지한 이태리 서반아, 포르투칼, 불란서, 남아메리카제국, 기독교 그리스 정교가 차지한 러시아, 그리스 등 그 동안에 흥망성쇠가 무상하였으나 결국 지금에 와서 진열장에 전시된 결과를 보면 역시 헤겔이 말했다는 것과 같이 그 나라의 운명은 그 백성이 믿는 신이 어떤 성격의 신이냐 하는 데 달렸다는 말이 적중하는 것 같다. 정치, 경제 전쟁 등등의 물결이 가고 오며 이것 저것을 뒤흔든다. 그러나 그 물결들 밑에 놓여 있는 진정한 기반은 그 민족의 종교신앙이었다. 이제 우리는 새 나라를 건설한다고 가슴이 부풀어 있다. 경제제일주의, 무슨 제일주의 등등은 그 일시적인 급소를 막기 위한 구호요, 결코 만세반석같은 천년대계의 포석은 아니다. 4ㆍ19의 우리 학생의거는 일시적인 혁명의 물결에 그쳐서는 안된다. 오히려 민족생활의 근본적인 재건을 위한 국민정신의 정화, 재건, 그 아들을 제물 삼아 죄인을 속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그 영의 감화 아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전 국민생활의 정신적 기반이 된다면, 이 강산이 이렇게 벌거벗지 않을 것이며, 이 민족이 이렇게 살벌하지 않을 것이며, 이 나라가 이렇게 부패하지도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정해주신 이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동산이 이렇게 황량하고 초라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 합심협력하여 만세반석과 같은 국민의 정신적 도덕적 기반의 조성에 노력함과 동시에, 이를 전반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꾸준히 이를 추진해야 할 것으로 안다. 맹자에 「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임연선어 불여퇴이결망)」이라고 한다. 급한 대목을 막아야 하겠지만, 진정한 건설은 역시 터전부터 바로하는 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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