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장공의 글

[범용기 제4권] (75)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방랑의 꿈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9-13 14:34
조회
425

[범용기 제4권] (75)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방랑의 꿈

나보다 나이가 5, 6년 앞선 선배를 이역만리라는 북미주에서 만났다. 그는 얼마전만 해도 백세를 살리라는 ‘신화’가 붙을 정도로 건강했었다. 거대한 체구에 이글이글 타는 정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년 되나마나한 사이에 초절음 김치가 됐다. 눈동자는 짙은 안개 속에 풀어졌다. 귀 속의 북(Drum)은 석고처럼 굳어졌다. 턱이 내려앉고 등이 굽었다. 명저를 써 내던 머리가 초두부처럼 흐들흐들해졌다. 생ㆍ노ㆍ병ㆍ사에서 하염없는 ‘인간고’를 보고 입산수도한 석가모니의 현명을 되새겨본다.

나도 80이니 “길손이여 오라!”하며 같은 운명의 신이 손짓하는 것 같다. 늙은 것은 사실이지만 추하게 늙지는 말자고 다짐해 본다.

저 하늘 깊은 푸름이 내 눈의 스크린에 영상되는 동안, 배부르도록 하늘을 먹자. 담청색과 연록색이 수평선에서 입맞추는 저 바다의 넓은 푸름을 싫도록 빨아들이자. 내 발바닥이 흙향기를 밟을 수 있는 동안, 벗은 발로 백사와 향토를 걷자. 내 다리가 공간을 잴 수 있는 동안, 논뚝의 오솔길, 숲속의 행길을 걷고 걷다가 느티나무 그늘에서 촌로의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는 낭만도 나쁘지 않을 거다. 내 염통이 조심조심 ‘펌핑’을 해주고, 내 위가 먹이를 새겨주고, 내 허파가 풀무지를해 주는 동안, 그리고 내 기억이 바닥나기 전, 내 생각이 어둔밤 반딧불만큼이라도 빛의 선을 그려주는 동안에 내 고국의 눈익은 산천을 만나고 싶다. 천년세월 거듭한 옛 절들을 순례하고도 싶다. 백두산 정수리에 억만년 고여, 그 깊이 지심에 닿은 무시무시한 ‘심연’ 옆에 짜릿 전율하고도 싶다.

우리 국토가 제사람, 남의 사람에게 무지스레 짓밟히고 민족이 군화바닥에 짓이겨지고 인간으로의 생존권마저 짓씹힌다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산과 가람과 바다에서 푸름을 탈색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묵중한 뫼들을 뽑아갈 수는 없다. 그 흐르는 강은 막아도 막아도 어디선가 넘쳐 제 갈길을 갈거다. 우리의 강산과 역사와 문화는 쓴대로 무릉의 도인처럼, 형해밖엣 선인처럼 방랑하고 싶다는 것도 내 강산, 내 역사가 내게 닿은 ‘인연’ 때문일 것이다.

[1980. 6]

전체 966
번호제목작성자작성일추천조회
공지사항
[귀국이후] (1) 머리말 - 범용기 속편
장공 | 2019.02.14 | 추천 0 | 조회 8656
장공2019.02.1408656
공지사항
[범용기 제6권] (1601) 첫머리에
장공 | 2018.10.29 | 추천 0 | 조회 9145
장공2018.10.2909145
공지사항
[범용기 제5권] (1)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설날과 그 언저리
장공 | 2018.10.01 | 추천 0 | 조회 8730
장공2018.10.0108730
공지사항
[범용기 제4권] (1) 序章 - 글을 쓴다는 것
장공 | 2018.04.16 | 추천 0 | 조회 9340
장공2018.04.1609340
공지사항
[범용기 제3권] (1) 머리말
장공 | 2017.10.10 | 추천 0 | 조회 9766
장공2017.10.1009766
공지사항
[범용기 제2권] (1) 머리말
장공 | 2017.08.02 | 추천 0 | 조회 9662
장공2017.08.0209662
공지사항
[범용기 제1권] (1) 첫머리
changgong | 2017.06.26 | 추천 0 | 조회 10961
changgong2017.06.26010961
709
[범용기 제4권] (8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車內風景(차내풍경)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659
장공2018.09.130659
708
[범용기 제4권] (8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市內楓林(시내풍림)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594
장공2018.09.130594
707
[범용기 제4권] (80)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홍엽속의 이틀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604
장공2018.09.130604
706
[범용기 제4권] (79)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車窓一日(차창일일)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518
장공2018.09.130518
705
[범용기 제4권] (78)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落照(낙조)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625
장공2018.09.130625
704
[범용기 제4권] (77)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구름과 바람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531
장공2018.09.130531
703
[범용기 제4권] (76)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눈 내리던 날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522
장공2018.09.130522
702
[범용기 제4권] (75)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방랑의 꿈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425
장공2018.09.130425
701
[범용기 제4권] (74)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숲과 호수
장공 | 2018.09.13 | 추천 0 | 조회 505
장공2018.09.130505
700
[범용기 제4권] (72)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발코니의 단상
장공 | 2018.09.12 | 추천 0 | 조회 450
장공2018.09.120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