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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1250] 문익환 옥중서신 / 1981년 2월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03 08:44
조회
888

문익환 옥중서신

“당신에게…”

거의 날마다 만나기는 해도 글로만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만남인 것 같군요. 더 그윽하고 더 여물린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라 해도 좋겠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 신앙 아닌 인생의 궁극적인 경지는 기쁨이기는 해도, 바우와 보라가 손잡고 다니는 것을 보는 할아버지의 기쁨이기는 해도, 기쁨이라는 게 늘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나의 기쁨은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소. 웃으려다 말고 기쁘려다 마는 것이 인생인 것 같군요. “그러면 그러기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이 세상에 슬픔이 있는 한”이라는 말이 되겠는데, 이게 정말 마음을 깜껌하게 만드는 이야기죠. 첫 번 감옥 생활에서 기쁨을 인생의 본질, 우주의 낮이라고 깨닫기는 했는데, 나의 마음은 끝내 “기쁨의 신학”을 발전시킬 심정이 되지 않았던 거요. 그러다가 두 번째 감옥에 가면서 나는 “눈물”을 주제로 하는 연작시를 지었거든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슬픔”의 깊이를 언뜻 들여다 보게 되었구료. 그것은 정말 순간이었소. 그러나 그 순간은 나를 아주 돌려 세우는 순간이었소.

천길 벼랑 밑에 버티고 서서 절망해선 안된다.
아니 절망해서
차라리 떨어져야 한다.

굳게 닫힌 님의 방문 앞에서 절망해선 안된다.

아니 숨이 막혀 차라리 쓰러져야 한다.
어린 심정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동주”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느냐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은 심정이구려.

눈물겨운 귀절이요, 그의 자화상, 참회록 뿐 아니라, 그의 시에서는 온통 “단풍 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지고 있군요. 그래서 동주가 읽은 “팔복”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였소.

시편을 읽으면 “언제 까지……”라는 울부짖음이 자꾸 들려 오지요. 히부리어로 “아드 마타어”, 그런데 이 “언제까지가” 동주에게 있어선 “영원히”였구료. 나는 이제야 그걸 알 것 같군요. 나는 이 영원한 슬픔이 잠깐 내 방을 찾아왔다 간 다음, 내 방 왼편 벽 앞에 노랑 담요를 접어 슬픔이라는 손님이 언제라도 와서 앉으라고 빈 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자리에 마주 앉아도 보고, 그 자리에 내가 앉아도 보곤 해요.

이 나 혼자만의 방, 왼쪽 벽 앞에 담요를 접어
빈 손님 자리 하나 마련해 놓으니,
외롭지 않으이
눈만 감으면 숨소리만으로 앉아
몸을 흔드시는 당신
우리는 말을 주고 받을 필요가 없군요
사랑하는 아내, 아들 딸, 바우도 보라도
눈물겨운 벗들도 못 들어오는
이 방에
당신만은 소리없이 들어오시는구료.
반가운 손님이여
아 당신의 이름 “슬픔”이여
내가 마지막 세상을 하직할 때도
당신만은 나를 떠나지 않으리.

나는 요새 틈틈이 “타골”고 서정주를 읽는데 타골의 시적인 감성에 감탄하기는 하면서도 그리도 “인도”의 슬픔이 그의 시에는 묻어 있지 않을까?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그의 시는 인도인보다는 서구인들이 더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는 아침 해의 빛나는 은빛이 풀잎파리들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는데 해의 마음이 풀잎파리들 밑에 슬픔으로 고여 있는 것을 못 보고 있는 것 같군요. 그의 시에 비하면 동주의 시들에서는 민족적, 우주적 슬픔의 울림이 번져 나오는 것 같군요. 서정주의 시에도 자화상, 문둥이,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등 상당히 짙은 슬픔을 읊은 시들이 있긴 한데 동주의 민족적, 우주적 슬픔의 가락에 비해, 私的인 가락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김 목사님, 익환이는 건재합니다. 슬픔과 함께 무척 자란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린애라서 자라는 것이 좋군요. 언제 귀국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 미국에 있는 모든 동지들에게 슬픔을 선물로 보냅니다. 우리 모두 모두 조국의 슬픔 앞에서 목놓아 울면서 모든 것을 쓸어보내고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찾지 않으시렵니까? 사람은 진정으로 슬플 때에만 순수할 수 있고 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민족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다같이 한없는 슬픔, 절망도 그 앞에 가서는 한낱 감상이 되어버리는 슬픔에 부딪혀야 인생을 알고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일까! ……

익환은 김대중 바로 다음가는 중형인 이십년 언도 받고 지금 감옥에 있다. 나이 칠십고개를 바라보는 오늘에도 한점 흐린 데 없는 시혼을 안고 상록수 같이 젊게 싸운다. 주를 위한 수난의 고비에서 하늘의 기쁨을 읊어 감방에 하늘을 가져오던 그가 이제는 감방 속 더 깊은 밑바닥에서 불우한 겨레, 하나되지 못해 갈라서는 동지, 선배 후배들 보고싶은 그리움 …… 기쁨의 ‘지성소’인 ‘슬픔’을 안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부르짖던 십자가의 예수를, 같은 슬픔으로 손잡아 보려는 하늘 높이 자란 “혼”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은 반드시 온다. 영원한 슬픔은 역시 영원한 기쁨에의 통로가 아닐까?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걸으면서도, 날마다 죽음을 모험하면서도, “믿고 바라며 사랑하자!”고 했겠지.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하고 예수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1981. 2. 제3일 속간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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