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장공의 글

[1844] 내가 믿는 하나님 / 1985년 7월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6-01 13:04
조회
934

내가 믿는 하나님

(1985년 7월)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란 말인데,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유신론이니 무신론이니 하는 것은 자신의 제한된 지성의 한계 안에서 하는 상대적인 또는 주관적인 추리에 불과하다. 인간이 무신론을 주창한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인간이 유신론을 주창한다고 하나님이 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절대 단절의 상태에 있는 것이냐?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절대 타자’다. 그런데 실제에서 인간이 자기가 절대자로 자처할 수는 없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나를 낳은 부모가 있다는 것이고, 그 부모는 또 그 윗대의 소산이란 것을 의미한다. 원자, 단자, 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존자일 수는 없다. 그 최초의 무엇을 존재하게 한 절대 존재자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량없이 연쇄관계를 더듬을 능력도 없고 더듬어봤자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추리에서 발견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자기계시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하고 이스라엘에게 자기를 선포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하는 성경 맨 처음 구절도 하나님의 선포요, 인간의 추리가 아니다. “나는 나다.”라는 것은 주격으로서의 존재자임을 선언함과 아울러 객격화(客格化)·물격화(物格化)를 거부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절대주격이고 인간은 상대주격이다. 그러나 인간도 주격이기 때문에 물건 다루듯 맘대로 취급할 수가 없다. 잡아가면 잡혀갈 수밖에 없고,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속에서 하나님 형상, 그 도덕성과 영성을 박탈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통하는 주격성을 없앨 수는 없다는 말이다. 단종 때의 사육신의 경우도 그랬다. 그들은 세조의 가혹한 고문에 항거하여 죽는 순간까지도 그들 주체성을 흠없이 지켰고 세조의 불의를 규탄했다. 세조는 그들을 이기지 못했다.

여기에 인간과 자유의 근본원리가 있다. 개인 자유 없이 인간일 수가 없다. 인간을 유물론적으로 다루는 공산주의자나 탐욕적인 자본주의자는 인간의 존엄, 감히 범할 수 없는 하나님 형상을 목석같이 다루려 한다. 사회구조와 유구한 문명사의 전승 때문에 조포한 만행을 못하는 것뿐이다. 생래(生來)의 인간으로서의 행악성과 범죄성은 냉혹하고 집요하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일부 독재자에게서 본다. 그러므로 무정부주의자였던 크로포트킨도 “악정부도 무정부보다는 낫다.”는 일화를 남겼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바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가피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그 살아 계신 참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통하여 자신을 열어 보이시고, 때가 오자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내어 인간의 죄와 죽음을 대속하시고 새 인간성을 창조하셔서 새 인류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 나는 그에게서 하나님을 만났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게 됐다. 그것은 나의 신앙 경험이 나의 신관을 그렇게 정립시킨 것이었다. 내 신앙 경험대로 고백한다면 내가 예수를 믿노라 할 때에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되었고, 내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예수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믿게 됐다는 그 자체가 성령의 내주(內住)를 말한다. 어느 한 분이 나를 부르고 사랑하신다면 동시에 세 분이 나에게 인지되는 것이었다. 그분들은 죽은 신이 아니었다. 살아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이시었다.

나는 성령의 내주를 경험했다. 맨 처음 믿기로 작정했을 때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성령의 하늘 위로와 기쁨, 그리고 복음 증거 때문에 사람 없는 외딴 집 독방에서 핍박자의 쇄도를 기다리던 깊은 자정에 내 생명 속에 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던 그 형언할 수 없는 영의 기쁨이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성령 안에서 고요히 살고 있다. 오히려 살려주심을 받고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내가 산다.”는 바울의 체험 비슷한 것이 내게도 조금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 하나님의 살아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전체 966
번호제목작성자작성일추천조회
공지사항
[귀국이후] (1) 머리말 - 범용기 속편
장공 | 2019.02.14 | 추천 0 | 조회 10554
장공2019.02.14010554
공지사항
[범용기 제6권] (1601) 첫머리에
장공 | 2018.10.29 | 추천 0 | 조회 11140
장공2018.10.29011140
공지사항
[범용기 제5권] (1)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설날과 그 언저리
장공 | 2018.10.01 | 추천 0 | 조회 10594
장공2018.10.01010594
공지사항
[범용기 제4권] (1) 序章 - 글을 쓴다는 것
장공 | 2018.04.16 | 추천 0 | 조회 11323
장공2018.04.16011323
공지사항
[범용기 제3권] (1) 머리말
장공 | 2017.10.10 | 추천 0 | 조회 11573
장공2017.10.10011573
공지사항
[범용기 제2권] (1) 머리말
장공 | 2017.08.02 | 추천 0 | 조회 11491
장공2017.08.02011491
공지사항
[범용기 제1권] (1) 첫머리
changgong | 2017.06.26 | 추천 0 | 조회 12869
changgong2017.06.26012869
959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1987년 1월 19일]
장공 | 2021.01.25 | 추천 1 | 조회 1691
장공2021.01.2511691
958
[귀국이후] (15) [1722] 都市文明(도시문명) 안에서의 감사절
장공 | 2019.05.24 | 추천 0 | 조회 2150
장공2019.05.2402150
957
[귀국이후] (14) [1721] 山川(산천)에 歸國(귀국)인사
장공 | 2019.05.24 | 추천 0 | 조회 1956
장공2019.05.2401956
956
[귀국이후] (13) [1720] 水原(수원)에서
장공 | 2019.05.24 | 추천 0 | 조회 1991
장공2019.05.2401991
955
[귀국이후] (12) [1719] 答禮(답례)의 宴(연)
장공 | 2019.05.24 | 추천 0 | 조회 1921
장공2019.05.2401921
954
[귀국이후] (11) [1718] 凡庸記(범용기) 1, 2권 合本(합본) 國內版(국내판) 出版記念會(출판기념회)
장공 | 2019.05.20 | 추천 0 | 조회 1978
장공2019.05.2001978
953
[귀국이후] (10) [1717] 1983년 晩秋(만추)
장공 | 2019.05.20 | 추천 0 | 조회 2228
장공2019.05.2002228
952
[귀국이후] (9) [1716] 書(서)라는 것
장공 | 2019.05.20 | 추천 0 | 조회 2088
장공2019.05.2002088
951
[귀국이후] (8) [1715] 글씨 쓰는 시간
장공 | 2019.05.20 | 추천 0 | 조회 2063
장공2019.05.2002063
950
[귀국이후] (7) [1714] 첫 환영의 모임
장공 | 2019.05.20 | 추천 0 | 조회 2220
장공2019.05.200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