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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1081] 한국에서 기독교의 위치와 사명 / 1973년 9월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16 08:52
조회
753

한국에서 기독교의 위치와 사명

(1973년 9월)

기독교라면 세계적인 종교여서 어느 한 나라나 민족에 국한될 수가 없고 또 역사적인 종교여서 우주와 인류가 태어난 원초에서부터 오늘 그리고 역사의 종말까지 뻗친 종교다. 예수의 시절부터 헤아려도 2000년의 시간을 꾸준히 생동 발전해 왔다. 그러니까 공간이나 시간에 그 흥망성쇠의 운명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고 공간이나 시간을 초월한 신비종교도 아니다. 공간과 시간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소재로 하여 그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말하자면 우주와 역사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변혁 완성해 가는 역군으로 일하는 종교인 것이다.

이 기독교가 한국에도 들어왔다. 그러나 한국의 소위 5000년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 한 구석에 겨우 그 전래의 기록을 남긴 것이었다. 샤머니즘이나 불교, 유교 등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연령은 제일 어린 종교다. 그러나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에서 막내둥이인 요셉이 charter 역을 맡은 것과 같이 기독교도 한국 역사에서 그런 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똑똑하게 그런 것을 의식하고 있는 기독교인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도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누구에게나 소위 선민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했다는 것과 같이, 기독교인들 때문에 하나님이 남한을 남겨 놓았다는 생각이라든지, 신자들이 반드시 역사적 사건들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신자에게 유익하도록 섭리해 주신다는 얘기라든지는 그것이 아주 비역사적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특권과 그 책임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고민을 변명삼아 말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기독교 자체가 비역사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두 경전은 구약과 신약이다. 둘 다 히브리 전통에 속한다. 히브리인은 종교를 역사적으로 이해했다. 구약의 소위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인류가 갖고 있는 최초의 역사서라고 한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모두가 역사서다. 예언서들도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예언자들의 도전이었으며, 시와 문학작품도 역사적 현실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신약의 복음서며 서한도 역사적 현실 속에서 탄생된 기록이며, 심지어 묵시문학 같은 것도 역사적 권력의 횡포 속에서 그 역사의 심판과 희망을 보여준 역사를 위한 역사의 작품인 것이다. 다만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궁극적인 푯대가 주어져 있다는 데서 그 역사가 지평선에 매몰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어 역사 속에 들어와 지금도 역사의 속량과 변혁에 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현실과 대결하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신적인 원천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의 전진과 향상, 수평과 수직을 함께 가능케 한다는 데서 역사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공헌을 발견하는 것이라 하겠다.

[1]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우리가 기독교라 말할 때 기독교를 표방한 어떤 신앙적인 합의에 의해서 구성된 공동체적 집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어떤 교회생활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전통적인 조직교회만을 의미함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선 기성 교회로부터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선 말엽에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기독교는 가톨릭 교회였다. 개혁교회는 문호개방 이후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혁교회의 둘로 분류되었다. 가톨릭과 같은 반열인 ‘그릭 오소독스’가 있지만 소속 교회가 하나뿐이며, 6·25 이후에 각양 종파들이 들어왔고, 한국 안에서도 여러 가지 신흥종교 형태의 기독교가 생겨났지만 통틀어 개혁교 편에 치부해 두기로 한다. 가톨릭은 콘스탄틴 시대로부터 중세기에 걸쳐서 귀족적인 교회로 자신을 형성했으며, 개혁교는 16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부르주아적 형태에서 형성된 기독교회였다. 가톨릭은 주로 프랑스(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독일에서도)를 통하여, 개혁교는 주로 미국 자유교회를 통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가톨릭의 특징은 unity요, 개혁교의 특징은 liberty다. 가톨릭은 13세기에 그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봉건제도와 기사도가 완숙에 이르렀고 가장 장엄한 종합미의 표현인 고딕 건물, 최대의 중세기적 종교시인 단테, 최대의 신학자 아퀴나스, 가장 완숙한 성자 아시시 프란체스코–모두가 13세기 가톨릭의 풍작이었다. 개혁교는 19세기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지리적ㆍ천문학적 발견과 학적 탐구, 인간 행복과 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자유와 민주의 결실 등등이 개혁교의 아들들이다. 세계 선교도 그 시절에 단행되었다.

가톨릭은 조선의 쇄국시절에 들어왔기 때문에 수다한 순교의 피를 한국 역사에 심었다. 그만큼 한국 역사는 그들의 생리에 섭취되었다. 가톨릭에는 통일된 조직체와 그 안에서의 형제단적 의식이 있다. 가톨릭 역사도 무서운 유혈참극으로 오염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악랄한 승려계급 정치는 통하지 않는다.

개혁교는 ‘자유’를 표방하고 나섰으나 그 자유가 개체주의와 결탁하여 심한 분열을 조장했다. 부르주아, 돈벌이꾼들에게 맞는 체제이기 때문에 형제애 대신에 경쟁이 앞서며, 중산층적 자기 충족과 오만이 그 속에서 자란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잡다한 종파들이 이곳 저곳에서 ‘구멍가게’를 차리는 것은 unity의 원리에 반역한 자유의 악화가 아닌가 한다.

가톨릭교는 몰라도 개혁교는 한국에 들어와서 반드시 선한 열매만 거뒀다고 말할 수가 없다.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그렇다고 개인적 신앙 양심의 자유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자유 없이 크리스찬일 수가 없고 자유 없이 인간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톨릭에서 unity를 배워야 한다. 그 대신 가톨릭에서도 자유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가톨릭과 개혁교는 비교적 완화된 긴장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금후 가톨릭에서 더 많이 평민적 겸손을 택한다면 개혁교와의 친교는 조속한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금후의 바람직한 한국 교회

지금의 산업사회는 세계적으로 인간의 비인간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경제는 인간을 경제행위의 한 항목으로 다룬다. 정치는 인간을 정치 집권자의 한 꼭두각시로 다루려 한다. 인간 자신들의 인간 해석에 있어서도 유물론적이며 필연적인 방향을 택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것이지만, 인간 가치가 여지없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특히 예수는 인간 하나하나에서 전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엄을 보았다.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다. 예수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각개 인간성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현대적 사명이다.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무식한 사람, 병들어 골골하는 사람 등등 인간 대접을 못 받는 것이 보통이다. 공산 진영에서는 유산자가 인간 대접을 못 받으며, 모든 사람이 ‘주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득 동기에 이용가치를 제공하는 한에서만 하나의 힘, 또는 재산으로 인간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공통기반에서 인간 존엄을 찾는다. 그리고 그 인간 실존 자체가 ‘하나님이 형상’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이 학대받는 고장에서 기독교가 방관할 수는 없다. 그것이 빈민촌인 경우에는 그들 가운데 들어가 그들의 인간 회복에 필요한 모든 운동을 전개한다. 정치 권력이 대다수의 인간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에도 기독교는 이에 항쟁한다.

왜냐하면 인간 회복이 그들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비세간적, 순수 타계적인 신앙으로 신도를 역사 관심에서 유리시켜 마약적인 현실도피에로 유도하는 경우에도 기독교는 이에 도전한다. 그것은 인간 구원을 인간 마취와 혼동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화, 현실 역사에서의 인간화 운동이 기독교의 가장 주요한 사명이다.

다음으로는 사회화운동이다. 인간화와 사회화는 일체양면으로 분리될 수 없다. 개인이라면 고독한 ‘나’로서의 인간을 말함이라고 추상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실제로 온전히 고립된 나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아니, 나기 전부터 타인 관계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비사회적일수록 인간은 오그라들고 말라빠진다. 사회적이라 해도 폐쇄사회보다 개방사회에서 인간은 성장 발전한다. 인간의 자유 비판을 억압하는 폐쇄사회는 제 눈을 제 손으로 찌르는 것과 같다. 결국 그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사랑을 최대의 생명으로 평가한다. 사랑하는 삶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사랑이란 것은 사회화한 인간관계의 표현이다. 사랑은 자기 속에서 자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자기를 찾는 것이다. 사랑이 클수록 더 많은 남과 일체화한다. 기독교가 사랑을 말하면서 사회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사회화란 남과 어울리는 공동체 형성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는 교리 체계도 있고 조직된 기관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반면에 사랑이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이 없어도 무방하다. 그리스도는 인간 구원, 인간 회복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던졌다. 그것은 유대교의 율법이나 유대 사회의 산헤드린(70인 의회)이나, 성전이나 회당이나 귀중하다는 모든 것을 인간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그리고 그 모든 것 이상의 것이 무덤을 헤치고 영광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회화의 원점이다. 기독교에서의 사회화란 내가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사랑에 의한 인간관계를 수립하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개혁교회는 교회주의는 있어도 사회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분산된 경쟁은 있어도 연합된 형제단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회, 총회 등이 있지만 그것은 제일의적으로 교권적 필요에 의한 집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에 대하여 책임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사회가 다 망해도 자기만 천당 가면 불바다를 내려다보며 쾌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도의 비사회적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들의 의 이상으로 완전한 의일 것이니까 최고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크리스찬 현세 생활의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고 행동강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으로 불의가 판을 친다고 해도 기독교인은 거기 대하여 ‘예’도 ‘아니오’도 못하고 있다면 ‘의’가 부각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 자체도 맛 잃은 소금으로 역사 밖에 버림받아 가고 오는 악당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사회화는 기독교 자신의 생존문제가 된다. 개인 자유와 사회 정의는 인간화의 기본적인 요청이다. 한국 기독교의 분파 작용은 지양되어야 하며, 그 분파의 명분으로 사용되는 교리지상주의는 철저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종교의 관념화는 18세기의 유물이다.

모든 신흥종교적 유사 기독교는 종교학, 사회학, 신학, 철학의 각계 학자들의 공정한 비판의 도가니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도들의 원초적인 감정도 비판의 도가니 속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남는 것을 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철저한 자유 비판을 통과하지 아니한 종교는 부조리한 독재 정권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에큐메니컬 정신과 운동에 본격적으로 협동함으로써 unity의 재건을 촉진시켜야 할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독교는 모험적으로 용감해야 한다. 그러나 무궤도적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자신의 원초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이가 우리의 역사 현실에 지금 오신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상해 본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갇힌 자를 놓아주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메시아의 흥겨운 시대를 도입한다.”고 선언한 그가 지금 와서는 눌린 자, 포로 된 자를 자장가로 잠재우고 가난한 자는 내세복락으로 위로를 받게 하고, 스스로는 거리의 대중을 떠나 으리으리한 교회당 제단 지성소에 부처님처럼 안치되어 우상 같이 절이나 받는 위치를 택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모를 바도 아닌 것 같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에 또 하나의 기성 종교로 판테온에 모셔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그렇게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내산 가시덤불에 붙는 하늘의 불이다. 가시덤불을 재로 만드는 불이 아니라 가시덤불 그대로가 사명의 심벌로 작렬하는 현실이다. 노예 상태에서 인간을 구출하여 자유인으로 만들고 그 인간들이 가나안에 모여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일체되어 운영되는 ‘약속의 나라’를 세운다는 이상적인 사회화의 전진 신호로서의 불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로 돌아가려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청산해야 했다. 그들은 새 나라를 썩게 하는 생산신 바알과도 싸워야 했다.

지금의 한국 교회, 아니 지금부터의 진짜 한국 교회는 출애굽의 교회요, 광야의 교회요, 요단강을 건너야 할 교회며, 건넌 다음에도 유토피아는 오지 않을 교회다. 수난의 교회! 그러나 수난의 교회만이 참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데에 한국 교회의 영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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