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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501] 한국교회의 신학운동 - 1960년 1월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10 10:26
조회
712

한국 교회의 신학운동
– 그 회고와 전망

《기독교사상》(1960년 1월)

노후한 중국이 서양 문명의 파도에 흔들려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기회를 잘 잡아 서양 문명에 편승한 일본이 죽순처럼 싱싱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숙취미성이어서 쇄국수구의 당이 국사를 전횡하던 19세기 말 ‘은자의 나라’에 처음으로 공적인 선교사가 입국한 것이 1884년 9월이었다. 의사 호레이스 뉴턴 알렌이 중국으로 파송받아 임지로 가는 중에 상해, 남경 등지를 방황하다가 결국 우리나라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1885년에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두 청년 목사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복음은 본격적으로 이 ‘은자의 나라’를 변질시키기 시작하였다. 그 후 원군은 속속 상륙하여 10년 내외에 평양을 중심한 서부와, 원산, 함흥을 중심한 관북, 그리고 서울 이남에도 각기 선교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70년 만에 100만의 신도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한국은 선교사들의 성공 지역으로 인정되어 과분한 자랑거리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선교사측의 말에 의하면, 이 ‘성공’의 이유로서는 1) 강력한 정통주의 신학에 의한 주입식 단기 훈련으로 일관한 신학교육, 2) 부흥회에 의한 복음전도 운동의 강행, 3) 네비우스 선교 방법의 채택, 4) 한말시국의 변천 등을 열거한다. 그밖에 한국인의 종교적 진공 상태와 그 충전을 위한 갈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주어진 논제에 충실하려면 ‘신학과 신학교육’에 관한 항목만을 거론하면 족할 줄로 알아 거기에 국한시키기로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양대 교파인 장로교와 감리교 중에서 감리교는 신학의 추이에 대하여 상당히 융통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문제 되지도 않았다. 결국 신학, 특히 정통주의 신학 지상주의를 고집하기 위하여 극성부린 교파는 장로교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장로교에서 된 이야기를 들출 수밖에 없다.

1896년 리놀츠 선교사에 의하여 제시된 한국 목사훈련 요강에 의하면, 1) 선교사가 어떤 한인에게 목사 공부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당사자에게 그런 뜻을 알리지 말 것, 2) 될 수만 있으면 외국 돈으로 교역자를 사용하지 말 것, 3) 미국에 보내 교육시키지 말 것(적어도 선교사업 초기에 있어서는), 4) 영적 경험의 높은 영역에 적응되도록 할 것, 무엇보다도 ‘성신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할 것, 5)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사실에 철저히 근거하도록 할 것, 6) 젊은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병정으로서 고난에 참을 수 있도록 훈련할 것, 7) 한국 신자의 문화와 현대 문명이 진전함에 따라, 한국 목사의 교육 정도를 높일 것, 그가 국민의 존경과 위신을 확보하기에 족한 정도로, 일반보다 높은 교육을 시킬 것, 그러나 동떨어지게 높아서 남의 선망을 자극시킨다든가 분리감을 주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지어 말하기를 ‘한국 교회를 위한 한국 목사’란 것이 우리의 표어여야 한다. 반 외국식의, 죽도 밥도 아닌 설먹은 목사를 만들어낼 생각은 없다. 자립, 자치, 자력 선전을 표어 삼고 매진하는 한국 교회에 자기희생적이고 자신 있는 자존심 가진 한국 목사를 제공할 것이라 하였다(Dr. L.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이에 대한 백낙준 박사의 평을 잠깐 소개하기로 한다.

“우리는 한국 목사 양성 방침에 대한 선교사들의 신중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상에 열거한 신학교육 정책에 품긴 높은 동기도 인정한다. 그러나 최선의 의도까지도 그것이 극단으로 실시될 때에는 흔히 악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 정책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이 먼 장래를 바라보는 백년대계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존과 자신이란 교육받은 지도자들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목사들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를 위하여 바친 봉사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다. 한국 목사의 지적 훈련과 문화적 품격이 높은 선까지 올라감으로 말미암아서만 외국 선교사들과 그들과의 사이에 생기는 불유쾌한 차별적 비교와 넓은 간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한국 목사의 지적 수준을 될 수 있는 대로 저하시키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선교사들은 대학과 신학에서 훈련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후계자인 한국 목사는 겨우 일반 교인보다 조금 높은 교육밖에 받지 못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보는 대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하층의 무식한 대중 속에 그 뿌리를 뻗었다. 그러므로 그들보다 조금 높은 지식 수준이란 것은 그리 높은 것이 못 된다. 자라나는 청년들은 일본 기타 외국에 가서 문리며 과학 방면에 높은 교육을 받고 온다. 그런데 한국 교회 목사들은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 목사들이 국민에게서 ‘존경과 위신’을 확보하도록 한다는 그 선언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위의 책, 205, 206면)

우리는 한국 교회의 신학교육이 몹시 근시안적이었다는 것을 개탄한다. 그것이 선교사들이 범한 본의 아닌 과오였는지 또는 의식적인 식민정책이었는지는 여기서 캐지 않기로 하거니와 50년이 지난 그때에도 이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심한 무반성의 자기 교만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대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나도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광경을 목도한 일이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0년이 지난 그때도 어느 한 사람이 그 과거를 밝혀 비판하고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 없었다. 멀찌감치 서서 거의 절망하는 심정으로 나는 그 대회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특별히 공로 있는 목사님들을 올려 모신 원두막 비슷하게 가설한 이층이 무너져서 보기도 창피스러웠던 것을 하나의 ‘예표’같이 느꼈던 일이 있다.

무엇이 한국 교회를 이렇게 가라앉게 했는가? 그것은 선교사들이 교역자 양성기관을 세울 때 한국인에게 스스로 생각하여 결단할 능력보다도 선교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너무 과도히 주입시킨 까닭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때의 선교사가 과연 어떤 신학을 강요했는가가 문제다. 그들이 겸손하게 세계 교회의 동향을 살피며 한국 교회도 그 지체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함께 배우고 함께 일할 수 있게 지도했다면 선교사들에게 복종하는 것 자체가 악덕일 것은 없겠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유일한 신학교육 기관은 온전히 선교회의 직영으로 되어 있던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였다. 그들은 이상에 소개한 교육 정책에 의하여 강력한 정통주의 신학을 주입시켰다. 미국에서의 근본주의 그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믿으려면 무엇보다도 교리, 신조를 정통적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교리제일주의를 강조한다.

그러면 교리 중에는 어떤 것이 제일 기본적인 것이냐 하면,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2)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 3) 피로써의 속죄, 4) 성경의 절대 무오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표준으로 모든 교역자며 신자를 심판한다. 그중에서도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데 온 정력을 다한다. 그것이 정통주의 신학 옹호의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그 전술로 그들은 폴리누스(1609)가 제창한 성경 축자영감설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걱정한다. 만일 성경의 어느 한 점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하고, 그리스도의 신성도 의심하고, 구원의 확실성도 의심하고, 신자도 윤리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 무오를 믿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의 전체를 옹호하는 것이 된다고 자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의 역사적 비판을 악마시한다. 그것은 성경이 비판의 대상이 될 때 그들의 공식적인 체계가 그 터전에서부터 무너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체계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표했을 때 플로렌스의 천문학자 ‘씨지’는 이것을 반박해 말하기를 “사람의 머리에는 일곱 구멍이 열려 있는데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한 입이 그것이다. 일주일에는 일곱 요일이 있다. 그와 같이 하늘에는 일곱 별이 있다. 이렇게 7수로 오묘하게 체계화한데다가 또 하나의 다른 별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수인 ‘7’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전 체계가 붕괴된다.”고 부르짖었다 한다. 그는 자기가 꾸민 체계에 하늘의 별들이 들어맞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우리 신학에서도 어떤 체계를 세운 교리, 특히 그들의 성경관에 성경 자체의 실존이 얌전하게 들어맞아야 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체계에 맞지 않을 때, 체계는 물론 붕괴한다. 그러나 체계의 붕괴가 별의 붕괴나 성경 또는 그리스도교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하여튼 한국 교회는 50년 동안, 선교사들의 강력한 사상 통제 아래서 정통주의 신학의 전성시대를 지내왔다. 말하자면, 그만치 다른 나라 교회보다 사상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50주년째를 계기로 한 폭탄이 던져졌다. 그것은 1934년에 감리교 유형기 목사의 편저로 된 『단권 성경주석』의 출판이었다. 그것은 주로 『어빙던 바이블 콤멘터리』를 역출한 것이었으나 내용은 필자들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았다. 이것은 물론 성서의 역사적 비판을 전적으로 도입한 주석이었으므로 장로교 총회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로교 측의 집필자도 많았으므로 총회에서는 그들에게 성명서를 내게 하고, 그 책이 재판될 때에는 필자 자신이 집필한 부분을 빼겠다고 약속할 것과, 유감의 뜻을 표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장로교인으로서는 이 책을 구독하지 못한다는 구매 금지령까지 내렸다. 그 후 소식을 듣건대, 이 금지령이 내린 지 수주일 만에 그 책이 매진되었다는 것이다.

1943년, 이 사건 처리를 위한 평양노회 특별심사위원들 앞에서 내가 심사받던 광경을 소개하면 실감이 날 것 같아서 좀 쑥스럽지만 적어 보기로 한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시오.”

“편저자 유형기 씨가 부분적으로 뜯어 맡기는 대로 그 부분에 대하여 쓴 것뿐입니다.”

“이 책의 원본이 어떤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일에 승낙했습니까?”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재판될 때에는 귀하의 집필한 부분을 뺄 생각이 없습니까?”

“뺄 생각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하시오.”

“여러분은 내가 쓴 부분을 읽으셨습니까?”

위원들은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살피다가 결국 말하였다.

“읽은 사람이 없는 모양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내가 쓴 글에는 여기서 문제되어야 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체 편집에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쓴 부분에 대해서만 내가 책임질 것입니다.”

그때 곽안련 선교사가 가로맡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 선생은 그 책이 어떤 성질의 것인 줄 알면서 거기에 집필했으니까, 김 선생이 쓴 글뿐 아니라, 그 책 출판 전체에 대하여 공동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미국 법은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의 상식대로 말한다면, 집필자는 집필한 자기 글에만 책임을 지고 전체 책은 전체 편집자가 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 줄 압니다.”

이렇게 문답이 옥신각신하니까, 다른 한국 위원들이 가로맡아서 좋도록 결말을 내려 버렸다.

“성명서를 내겠습니까?”

“내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마칩시다. 좋습니다. 나가십시오.”

1933년 가을부터 당시 평양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에 특별기고자로 채필근, 송창근, 그리고 내가 위촉을 받게 되었다. 편집책임자인 남궁혁 박사님의 알선으로 영예를 가지게 된 것이다. 1년 동안 무사히 지내고 1935년 여름이었던가 「감격의 생활」이라는 송창근 박사의 글이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교계 평론이었는데, 전통신학자, 신비파, 경건주의자, 교권주의자 등을 모조리 통박한 것이었다. ‘정통이 밥통’이라는 속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배당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목사 주택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부흥회를 열어야겠습니다. 성신이여 강림하사! …… 그대들은 성신이 그대들의 소사인 줄 아느냐? …….” 등등의 신랄한 표현이었기 때문에 결국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선천노회, 강서노회(?) 등에서 문제되어 신학교에 항의가 들어오자, 편집책임자인 남궁혁 박사께서 몹시 거북하게 되었다. 결국 특별기고자로서의 세 사람은 그 특권을 상실함과 동시에 예의 단권 성경주석 건에 대한 ‘성명서’를 내라는 독촉이 자심해졌다. 그때까지도 나와 송창근, 한경직 3인은 성명서를 내지 않고 견뎌 왔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나서서 3인 연명하여 《신학 지남》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성명서란 이런 것이었다.

[1] 우리는 전체 편집에는 전혀 관여한 바 없습니다. [2] 우리가 쓴 글의 내용에는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3] 이 책의 출판이 교계에 파문을 일으키게 된 데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 3인 연서

그 후에 듣건대, 내나마나한 성명서라고 수군수군했다지만 그것으로 별고 없이 끝남과 동시에 《신학지남》과의 관계도 끝났다.

1935년 이래로 제2차 세계대전과 아울러 교계에도 근본적인 시련이 오기 시작했다. 신사참배의 강요와 이에 대한 여러 종류의 반응, 이것을 유형적으로 분류한다면, 1) 순교자의 정열을 가지고 이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극소수의 신자, 2) 스스로 숨어서 소극적으로 이 강요된 죄를 피하려는 좀 더 많은 수의 신자, 3) 전국이 불리했을 때 포로로 잡혀가는 셈치고 이에 외면적으로 복종하는 대다수의 신자, 4)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바에는 적극적으로 적에게 순응하는 것이 영리하다는 측의 극소수 신자 등이었다고 본다. 하여간 1935년에서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10년간은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신학 문제는 한국 교회 안에서 온전히 종적을 감추고 오직 일제의 일본화 운동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됨과 동시에 이왕의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옴에 따라, 60년래의 구태를 회복하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탈각하고 ‘자유 한국에 자유 교회’를 건설해 보려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각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후자를 위해서는 1940년에 개교한 현 한국신학대학이 그 사상적인 근거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구파에서는 그 본거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전투 결과는 ‘전력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셈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 15년을 지낸 오늘에, 한국 교회 신학운동의 현상을 본다면, 종래의 정통주의 신학은 일부 교권주의자들에 의하여 겨우 그 잔해를 유지하고 있는 정도요, 기여의 신진세력은 세계 교회 운동과 아울러 세계적인 신학 운동에 마음대로 동참하여 그 자유로운 연구와 발표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의 새로운 한국 장로교회는 어떤 신학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사는 신앙생활을 그 핵심으로 삼는다. 그가 우리 죄를 밝혀 심판하심과 동시에 그 죄를 속량하신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심정과 이성을 밝히셔서 주 앞에서 다시 얻은 겸손한 자유로 진리에 대하여 질문하며 탐구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경을 해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 더군다나 어떤 성경관이 그리스도를 규정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과 그의 심정으로 성경을 재평가하며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정통주의자의 성경에 대한 축자적인 광신을 피함과 동시에 자유주의자의 희박하고 방자한 막연성을 막는다. 성경의 그리스도가 또한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성경의 객관성과 우리의 주관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소재를 찾는 것이다.

교리 신조에 대한 것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사도시대부터 내려온 교회의 공동 고백을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빛과 심정으로 나 자신의 인격적인 음미를 통하여 나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으로 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 신앙의 창조적인 고백을 과거의 신조 속에 억지로 동결시키려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지하게 교리를 연구하며 될 수만 있으면 거기에 체계도 세워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거기에 ‘지상’ 또는 ‘절대’ 등의 개념은 결코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인격적인 신앙을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격적인 자유를 절대 존중한다. 따라서 추상화한 관념체계나 신조를 가지고 어떤 진지한 신자의 신앙 또는 학문의 양심을 외부적으로 억압하려는 정통주의 신학 태도를 배격한다.

정통 신학자들은 흔히 말하기를 자기들은 초자연주의요, 우리는 자연주의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신본주의고, 우리는 인본주의라고 평한다. 그리고 흔히 기적과 초자연적 계시와를 직접 연결시켜서 성경의 기적 기사를 하나하나 문자적으로 승인하지 않으면 다짜고짜로 자연주의니 인본주의니 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초자연’과 ‘자연’을 그렇게 관념적으로 구별하여, 초자연 편에 섬으로 스스로 신앙을 자랑하려는 일은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우리 심정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참하나님이시요 또 참 사람이신’ 그의 안에 초자연과 자연이 하나의 실존으로 되어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를 모시고 있는 우리의 새 실존에서도 그러한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관념적인 ‘초자연주의’니 ‘자연주의’니 하는 데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가시덤불 하나하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불탄다.”던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소명 경험으로 우리는 만족할 뿐이다.

기적의 문제에 있어서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하나의 기적 기록을 문자적으로 승인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쯤은 우리에게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 된’ 그리스도 자신이 최대의 기적이요, 이 절망과 공허와 죄책에 침륜된 죽을 인간인 ‘내’가 속죄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이 지금 내 실존에서 샘솟고 있다는 그것이 또한 최대의 기적인데, 이것저것을 꼬집어 그것의 기적 여부를 논쟁하는 좀스러운 흥분이 차지할 고장이 어디 있겠는가?

신본주의니 인본주의니 하는데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의 안에 있으면, 신본이니 인본이니 할 필요조차 없다. ‘하나님–사람’이신 그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불러 일 시키시는 한, 우리는 소위 ‘신율’적인 의미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통주의 신학 편에서는 요새 흔히 에반젤리컬이란 말을 자파의 독점인 것같이 사용한다. ‘에반젤리컬’이란 말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함인지는 구체적인 해명이 없으므로 속단하기 어렵겠지만, 그것이 만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소식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데 주력한다는 의미의 것이라면, 그것은 그들의 독점일 수 없음과 동시에 그것을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소위 ‘정통신학’을 시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다. 그것이 하나의 ‘죽은 교리적 공식’의 전달이 아니고 참 ‘증언’이 되려면 ‘살아 계신 그리스도 신앙’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교리 지상, 성경 절대 등의 주장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운동은 지금 이런 정도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지면 관계로 그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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