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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209]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 - 1950년 10월 25일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7 10:24
조회
1341

《낙수(落穗)》 (1950년 10월 25일)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

무너져 가는 북왕국의 최후를 꾸린 호세아의 눈물겨운 활동에 이어 남왕국의 예루살렘에 전고미증유의 대예언자 이사야가 출현하였다. 화려한 어법, 풍부한 상상력, 다양한 표현방식, 웅혼강의(雄渾剛毅)하여 압도의 위엄을 보이는 한편으로 우아다정하여 고요한 눈물의 스며듦을 느끼게 하는 문장! 그는 참으로 히브리 예언사의 왕위를 점할 자였다. 그러나 그의 말, 그의 글보다도 그 자신은 더욱 큰 자였다. 이는 그가 그 자신보다 한없이 더 크신 하나님을 체험한 자인 까닭이다.

기원전 740년, 웃시아 왕이 죽은 해 어느 날 그가 성전에 들어가 깊은 명상에 잠겼을 때, 그는 홀연히 여호와의 임재를 보았다.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그의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하도다.”

하는 스랍들의 노래에 문턱은 흔들리고, 집안은 연기로 가득 찼다.

“거룩한 여호와 그의 오시는 때는”

이리하여 그는 거룩한, 접근할 수 없는, 그리고 전능한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전능왕 만군의 여호와시었다. 그의 보좌는 높이높이 들리었으며, 그의 영광은 온 땅에 넘쳤다. 그는 성성으로 초월하시고 영광으로 내재하신 하나님이시었다.

이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은 오직 스스로 낮추어 그를 절대 신뢰할 것뿐이다. 인간 생활의 가장 근본되는 원리는 곧 믿음이다. 신뢰의 염이 없는 북왕국 사람들이 자고오만하매(사 9:10) 그는 엄연한 선고를 내려 “앞에 아람 사람 뒤에 블레셋 사람이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고 말한 것이다.

이 예언이 선포된 역사적 배경

기원전 734년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때, 창황망극하여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 대해서도 그는 이 원리 위에 서서 왕을 격려하였다, ‘임로-태애미-누키로 테아메-누’, 네가 믿지 아니하면 결코 네가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사 7:9)고. 그러나 이 말은 이미 사기를 잃은 아하스 왕에게는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큰 말이었다. 아하스 왕의 생각에는 하나님을 믿느니보다도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셋 앞에 엎디어 청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요, 실제적인 것같이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의 믿음을 환기하기 위하여 ‘무에나(표적)’를 구할진대 여호와가 친히 보여주시리라고 하였으나, 아하스 왕은 완곡히 이를 사절 하였다. 이 불신의 태도에 격분한 이사야는 “들으라, 오! 다윗의 집아, 네 가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을 적은 일로 여기고 또 내 하나님까지 괴롭게 하느냐?”(사 7:13)고 어조를 높인 다음에 이어서 저 유명한 ‘임마누엘’의 예언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이 예언의 본문 비평

“그런고로 주께서 친히 너에게 표적을 주시리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 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사 7:14)

‘표적’이라는 글자 ‘오-트’는 반드시 이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면 아하스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동정녀’란 글자 ‘앨마-’는 방년의 젊은 여자를 이름인 까닭에 보통 동정녀를 말함이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여기에 관사 ‘하-’를 붙여서 ‘하-’가 정관사도 되고 부정관사도 될 수 있는 까닭에 이것이 어느 특수한 개인 ‘그 젊은 여자’를 일컬음인지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앨마-’라는 글자에 관사 붙이고 안 붙인 관계를 구약 전편을 통하여 조사하여 보면, 아주 면밀하게 그 사용법이 구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가 1장 3절, 6장 8절, 시편 68편 26절, 잠언 30장 19절에 나타난 것은 모두 일반적 의미에서 씌어진 것임과 동시에 결코 관사를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창세기 24장 43절, 출애굽기 2장 8절에서는 관사를 붙여서 어떤 특수한 개인을 지적하였으니, 곧 전자는 리베까, 후자는 바로의 딸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고로 여기에서도 관사가 붙어 있는 이상 특수한 개인을 지목한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면 이 특수한 개인인 ‘젊은 여자’는 누구를 가리킨 것일까? 학자들 사이에 이설이 너무 많아서 거의 수습할 수 없을 지경이다. 1) 이사야의 처라는 학자가 상당히 많으나 당시 이사야의 처는 ‘방년의 젊은 여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늙었을 것이며,2) 이스라엘의 민족 혹 단체를 인격화 한 것이라 하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딸’이라는 글자 ‘뱃스’로 표명하는 것 이 상례(시온의 딸 등)이며, ‘젊은 여자’, ‘앨라-’로 표명한 데는 없다. 3) 당시 왕의 후궁에 있던, 이사야가 잘 아는 어느 여자였다는 자도 있으며, 4)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메시아 예언과 관계된 한 특수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며, 5) 스가랴의 딸, 히스기야의 어머니를 지칭한 것이라는 이도 있고, 6)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켜 예언한 것이라는 이도 있다. 이런 모든 제시가 각각 일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모두 너무 사색에 치우친 해석이 아닐까 한다. 그 여자가 메시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막연하게 어떤 여자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여자’라고 한 것이라 생각하면 족할 줄로 안다.

‘잉태하여’라는 글자 ‘하- 라-’는 상태동사(State Verb) ‘하- 라-’의 분사 로 ‘앨마’에 대한 형용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보아라’ 하는, 장차 나타날 ‘표현’을 지시하는, 첫 타개 말은 그 주력을 ‘잉태’한다는 사실에 향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낳으리라’ 한 구에 향한 것이다. 즉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표적’은 ‘임마누엘’의 탄생에 있는 것이요, 잉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창세기 16장 11절에 있는 이스마엘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읽어 보면 자연히 수긍할 것이다. 그러면 이 예언의 주인공인 ‘임마누엘’은 누구인가? 1) 신적 인격을 가진 메시아에 대한 상징적 명칭인가? 2) 이스라엘의 남은 자손들을 인격화한 상징적 명칭인가? 3)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것인가? 1) 그 출생한 아이는 보통아이와 다름없으나 그 아이 날 때에 국내 환경이 축복 중에 있음으로 그 어머니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감사와 기쁨을 나타내는 이름을 그 출생한 아이에게 붙이리란 말인가? 2) 그 탄생할 아이가 신적 인격인 까닭에 이렇게 명명한 것인가?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그 설이 퍽이나 구구하며, 많은 지엽적인 문제로 나간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당시 이사야의 심중에 비춰진 묵시의 중심점은 ‘이상적 왕자의 탄생’에 있었음이 확실하매, ‘임마누엘’은 그 왕자의 성격에 대한 상징적 명칭이라고 생각하면 족할 줄 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이상적 왕자’는 아하스와 같이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위대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생활 그의 사업은 두말없이 하나님 자신의 현현임을 표징한다는 예언일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시 ‘표적’은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를 규명하려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표적’의 소재는 동정녀의 잉태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동정녀’라는 글자가 반드시 동정녀를 의미한 것이 아니고, 구태여 이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우며, ‘잉태하여’는 동정녀를 형용한 분사이매 그 자체에 중요성이 없는 까닭이다. 다음 탄생시의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극도로 멸시하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끄트머리 같은 두 왕국의 침략에서 벗어난 것이 뭐 그다지 놀라워서 아이 낳은 어머니가 ‘임마누엘’이라는 그렇게 큰 이름을 아이에게 붙이기까지 할 것인가 하는 부자연한 점이 있는 까닭이다. 그런고로 불신의 아하스 왕을 놀라게 할 ‘이상왕’의 출현이 이 예상의 중심 이상임과 동시에 또 ‘표적’의 소재점인 줄 확신한다. 즉 ‘표적’은 ‘임마누엘’의 탄생에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강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소이연은 그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의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그를 그렇게 한 것이다. 당시 유다의 자매국인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무모하게도 예루살렘에 대하여 침략을 가한 때, 호기로운 이사야는 모멸의 나머지 “고요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다메섹의 머리는 레진이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레말리아의 아들이라.”하고 왕을 격려하였다. 이 말 가운데에는 “그렇지마는 유다의 머리는 만군의 여호와다.” 하는 말이 은연중에 첨가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확립하였을진대 두려울 것이 하나 없으나, 그렇지 못하면 결코 서지 못하리라고 전율하는 왕의 사기를 고무한 것이 었다.

이때 이사야의 마음속에 가득 찬 생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었다. 한데 아하스 왕의 불신이 그의 잠재의식을 격동시켜서 그 뜨겁기가 초점에까지 이르게 한 때, 영원한 성신의 영화가 이에 불붙어 자연히 구체적 예언으로 화하여 선포된 것인 줄 안다. 다시 말하면, 지극히 가까운 장래에 ‘임마누엘’이 탄생할 것이니, 이것이 여호와의 권능의 표징이 되어 믿지 않는 아하스 왕을 놀라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탄생할 시기와 환경

그가 언짢은 것을 마다하고 좋은 것을 가릴 줄 알 때 젖기름과 꿀을 그가 먹으리라. 이는 그 아이가 언짢은 것을 마다하고 좋은 것을 가릴 줄 알기 전에 네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버림받을 것임이니라.

언짢고 좋은 것을 가리는 때는 아이가 약 2, 3세 되어서 사물에 대한 선택의 능력이 생기는 때를 이름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장래, 즉 이 아이가 두 살도 될까 말까 할 때 벌써 시리아와 북왕국은 망하리라는 예언이 다. 이로 보면, 이사야는 이 두 왕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임마누엘’이 탄생 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에 가로막힌 난제는 이 두 왕국이 망한다고 왜 이 아이가 젖기름과 꿀을 먹을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이 예언과 7장 21~22절에 있는 예언, “즉 그때에 한 사람이 한 암송아지와 두 양을 기를 제 저들이 내는 젖이 많음으로 젖기름을 먹으리니 무릇 이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다 젖기름과 꿀을 먹을 것임이니라.”고 한 것과를 연결시켜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7장 21~22의 예언 자체가 역시 같은 정도로 난해한 구이니, 왜 송아지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게서 나는 젖을 가지고 젖기름을 먹기까지 넉넉하게 될 것인가. 어떤 학자는 심판 후의 황폐로 인하여 소비할 자가 적어진 까닭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심판 후에 남은 자손에게 대한 여호와의 축 복 때문에 생산과잉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하여간 여기 나타난 것으로 본다면 ‘임마누엘’이 어린아이로 있을 때는 나라가 이미 황폐한 때라는 것만은 공통된 사실이다. 젖기름과 꿀을 먹을 것이라는 것은 아무렇게 해석한대도 이 예언의 본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줄 안다. 물론 우의적 해석을 좇는다면 한정이 없겠지마는.

임마누엘 예언의 전제

기원전 733년 디글랏 빌레셋의 말발굽이 북이스라엘 왕국을 짓밟음과 동시에 첫 번째 포로로 수많은 사람이 잡혀갔다. 여호와의 대예언자인 이사야가 이 일을 대안의 화재시 하였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이사야의 묵상은 늘 이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때부터 다사한 10년을 지나 사마리아는 다시 포위를 당하여 기원전 722년 그 앙업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였다. 국토의 황폐, 포로, 노역, 천시 이런 것이 그 백성의 운명이었다. 여호와의 심판이 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심판이 지난 후에는 어찌될까. 그는 이스라엘의 동북 변경에 비취어 오는 위대한 사명을 보았다. (우리말 성경에 ‘옛적’ 스불론 운운의 ‘옛적’은 ‘전번’ 혹 ‘첫 번’으로 택할 것이요, ‘이후에 영화롭게’ 운운은 ‘나중 번에 영화롭게’로 택하면 어떨까 한다.) 그리하여 어두운데 있어서 압박과 낙망에 시달렸던 백성에게 미디안의 개선과 같은 대승리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사 9:15) 왜? 한 아이 이상왕이 탄생할 것이므로! 계획을 세우는 데 대한 경이할 만한 지혜, 이 계획을 집행하는 데 대한 용사와 같은 권능, 약탈물, 분배자, 승리 후의 평화 왕이실 왕자가 출생할 것이므로 대 승리를 예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전 ‘임마누엘’의 탄생에 대한 예언과 이번 ‘이상왕’의 탄생에 대한 예언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 아이’가 역사적 인물인가 상상의 인물인가 하는데 대하여서 많은 문제가 있으나 이 예언이 당시의 역사적 기록이 아닌 이상이 아이도 당시에 있은 역사적 인물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고로 여기 있는 완전과거를 의미하는 완료형이 아니요, 소위 예언적 완료형(Perfect of prophecy)임에 분명하다. 즉 이 아이는 당시에 이미 있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장차 올 예언 중의 인물이란 말이다. 그러면 이 아이가 이전 임마누엘과 동일인물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학자들의 대다수가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탄생기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팔레스타인에 나타남과 동시대일 것이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왕’인 아이의 탄생은 북이스라엘 왕국이 이미 황폐한 얼마 후에 있을 것이라고 한 까닭이다.

그러나 많은 학도들은 너무나 외면에 나타난 기록에 연연하여 이사야의 본심에 대한 동정적 통찰이 부족하지 않은가 한다. 이 예언들에 있어서 사건이 발생할 정확한 시일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이사야의 본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예언의 주지는 임마누엘 예언에서나 이번 예언에 있어서나 ‘이상적 왕자의 출현’에 대한 신앙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가 임마누엘 예언을 선포한 후 북왕국의 도성은 황폐하고 백성은 죽음의 그늘에서 울고 있으며, 유다는 의연히 패역하고 아하스 왕은 약한 대로 있었다. 이런 쓰린 정경이 이사야로 하여금 더 깊이 임마누엘의 속성과 사업에 대하여 심사케 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이 유명한 ‘네 이름 왕자’는 ‘임마누엘’의 근본 품격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에서 발전된 것으로, 이 두 예언은 동일 계통의 유기적 전개임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이사야가 아마 이 ‘이상왕 임마누엘’의 출현은 시리아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략사변 직후이리라고 기대하였는 줄 안다. 그러나 이것이 실현되지 않은 때 그는 ‘이상왕의 출현’이란 근본신앙만은 변치 않고 다만 그 출현의 시기만 지연된다고 믿게 됨에 따라 그 시기를 북왕국의 멸망 후로 밀리게 된 줄 안다. 이런 신앙 형편은 초대교인들 중에서의 예수 재림 기대에서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우리 신자 중에서 종종 이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이 예언의 성취

모든 예언을 분석함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그를 당시의 역사와 예언자 자신의 개성을 배경으로 한 인간성을 분석의 중심점으로 삼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의 시대적 한 토막을 엿보려 함이요, 또 하나는 아주 하나님 편에 서서 모든 예언을 순목적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예언을 참으로 이해함에는 두 가지 방면을 구비하여야 할 것이다. 예언의 위기를 이해함은 결코 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 스스로도 자기의 예언한 것을 참된 의미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하신 대로 성취하신 다음에 그 성취로 말미암아 계몽된 우리의 이성의 빛을 다시 옛날 예언에 반조하는 때 비로소 환연빙석(渙然氷釋)의 경에 이르는 것이다. 이제 ‘임마누엘’, ‘이상왕’의 탄생,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 지방에서 비취는 위대한 여명 등을 본 이사야 자신도 이것이 700여 년 후에 탄생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인 것과, 또 그로 말미암아서만 성취될 것이었음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에 접촉한 후에 다시 이 예언을 회고한다면, 이사야 자신도 마태복음 기자와 함께 또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찬탄하며, 그리스도만이 참으로 메시아이심을 다시 한번 선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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