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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203]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 1950년 3월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6 19:33
조회
5316

[0203]
《십자군》 (1950년 3월)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1] 성서가 하나님의 영이 감동함으로 말미암아 된 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영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함인가 하는 데 있어서는 모름지기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최대한으로 활동하고 사람은 최소한으로 활동하는 경우에 영감은 더 커진다고 믿는 것이 보통 민속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영감이란 그 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주 기계처럼 되어서 자기의식까지 잃어버리고 접신(接神)하였다는 무당같이 되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소위 축자영감설이 생겨난 것이니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은 차츰 규명해 보기로 하자.

1961년에 버르곤(Burgon)은 『영감과 해석(Inspiration and Interpretation)』이란 책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주장하였다.

“성경은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그이의 목소리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매책, 매장, 매절, 매어, 매음절, 매자가 예외 없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직접 발언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니 어떤 데는 더하고 어떤 데는 덜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이 다 똑같이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그이의 발언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나 성경은 절대 무오한 최고의 권위다.”

그 후 미국의 대신학자들 중에도 이런 해설을 그대로 채용하여 아래와 같은 말을 발표한 적이 있다.

“교회의 역사적 신앙은 언제나 성서의 절대 무오를 확신하였다. 즉 신령한 교리에 있어서나 도덕적 의무에 있어서나 또는 자연계나 역사상의 사실에 있어서나 심리학적, 철학적 원리에 있어서나 성경에 기록된 한 절 대로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함이다. 자자구구가 하나님이 저자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의미에서 본의대로 확인되고 해석된다면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Presbyterian Review》, 1881, 238. Quoted by Eiselen)

이런 말이 성경의 사실이라면 우리는 구태여 딴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 사실 그대로가 아닐 뿐 아니라 이런 무모한 과신 때문에 이미 확립된 과학적 진리와 무용(無用)의 충돌을 일으켜 감정적으로 타방에 대하여 포학을 가하다가 결국은 패퇴의 치욕을 자취한 것이 부증(不證)의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을 재연하지 말자는 것이다. 파아라(Farrar)는 이렇게 말하였다.

“근대 과학사의 대부분은 이러하였다. 과학자들의 발견은 거의 예외 없이 추방, 저주, 금지, 또는 박해를 당하였다. 그러나 이런 횡포를 감행한 위조 정통주의 신학자들도 불과 수십 년 이내에 자기들의 과오를 자인하고 만 것이다. 다만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공공연하게 사과하는 일 없이 능청스럽게 딴 소리를 할 수 있는 철면을 잘 이용한 것뿐이다.”(The Bible: Its Meaning and Supremacy)

이제 다시 본제로 돌아가기로 하자. 성서 절대 무오설, 즉 성서의 축자적 무오설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이 요청되며, 따라서 축자영감설이 득세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비위에 맞는 어떤 학설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그 학설에 맞추어 보려고 억지로 애쓰는 것은 불경건한 태도임과 동시에 비진실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운(Bowne) 교수는 말하기를 “우리는 영감설에 의하여 성서의 성격을 작정할 것이 아니라 성서의 사실에 의하여 영감의 성질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Christian Revelation, 44, 54)

[2] 그러면 성서의 사실은 어떠한가?

1)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를 계시하실 때에는 그 받을 사람에게 영감으로 임하시되 결코 그의 인격을 억압하거나 무의식 상태로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더욱 앙양하고 순결케 하여 어디까지나 자기로서의 인격적 반응을 철저하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이 다 자기로서의 똑똑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똑똑한 정신으로 선포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다.”고 외쳤다. 어디까지나 ‘여호와’와 ‘나’의 주격적인 관계를 의식 했다.

2) 성경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기존한 모든 재료를 참고하며 그것을 비판, 정리, 취사하는 저술가로서의 정칙을 무시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기자의 서문을 읽어보라.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 된 자들에게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을 줄 알았노라…….”(눅 1:1~4)

그러므로 누가가 제정신 없이 복음서를 쓴 것이 아닐뿐더러 그의 앞에 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존 문서들도 많이 수집되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의 저술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정밀히 고찰, 비판, 정리하여 그 확실성을 확인한 다음에 데오빌로에게 발표하려 한 것이다. 즉 그는 복음서 기술에 있어서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추리 양식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것이요,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서적인 면으로 볼지라도 가령 시편의 온갖 찬양과 흠앙, 희열과 비탄, 그리고 원한과 저주 등이 그 시를 쓴 시인의 감격과 경련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것을 그가 필기한 데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공허한 설명인가?

3)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을 주실 때 그는 그 말씀을 무슨 기성품처럼 완성시켜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후닥닥 집어넣어서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 말씀을 외치는 축음기처럼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선 그 사람 자신을 영으로 감동시킨 후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깨닫게 하여 그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통하여 그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택함을 받은 그 ‘사람’이란 그 시대의 아들이요, 개성과 전통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는 자이므로 그 자신의 지식과 특성과 그 처해 있는 환경과 시대색 등이 그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절대 무오하나 그것을 표현하는 양식과 그 표현에 사용된 소재 등은 사람과 시대에 따라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그 시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계시하기 위하여 갑자기 고대인에게 현대 천문학적 지식을 부여하신 일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대에서 습득한 천문학적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설명한 것이다.

4) 영감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주요 내용은 두 가지다. 즉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그가 사람을 향하여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가 하는 그것이다. 우리가 받은 대로를 요약한다면 계시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죄인을 구속하시려는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신다는 그것이다. 영감을 통하여 받은 온갖 계시는 다 이 두 가지에 집중되고 있다. 그는 결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5) 그러므로 그는 성경에서 역사나 과학이나 연대표 등에 절대 무오를 기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지식 정도에 맡겨 두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문자적 무오를 기하지도 않으셨다. 그것은 다소의 문자적 오류나 역사, 과학 등 지식 부문의 불완전 때문에 구속의 경륜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그러면 이런 결론을 내린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이제 성경의 문자무오설과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축자영감설이 사실은 성경 정신에 충실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려 한다.

1) 만일 성경 문자의 절대 무오가 하나님께서 기어코 원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기적으로라도 원본을 보존하셨을 것이며, 모든 구원받을 자에게는 다 그 원본의 문자 하나하나를 예외 없이 해득할 능력까지도 부여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성경의 원본은 없어졌고 얼마 있는 사본도 그 내용이 서로 맞지 않으며 그것조차 본문 그대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성경은 오직 자국어로 된 역본뿐인데 얼마나 부정확한가에 관해서는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부정확한 우리말 번역 성경을 읽고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사본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원문은 히브리어로 된 소위 ‘맛소라’ 사본이요, 바울이 항상 애독하며 인용하던 구약은 70인역 헬라어 역본이었다. 그런데 이 두 구약 책을 대조해 보면 그 내용에 많은 상위가 있으며, 특히 예레미야서에 와서는 히브리어 본문의 약 8분의 1이 70인역에는 없다.

그러면 현존 성경 자체가 문자적 무오를 부인하고 있는데, 인위적인 문자무오설을 아무리 주장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을 혹 베낀 사람이나 번역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필사인이나 역자가 아무리 겸손하다 할지라도 그런 억울한 일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본을 갖다 보이면서 원본이 이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베꼈느냐 한다면 그건 그럴 듯하지만 원본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베낀 사람이나 역자만 나무란다면 얼마나 억울한 처사인가!

2) 이 설은 신약기자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토이(Toy)의 책 『신약에 인용된 구약(Quotations from O. T.)』에 의하면, 신약에 인용된 구약은 도합 275개가 있는데, 그중에서 히브리 사본, 70인역 헬라어 역본, 신약 내 인용구의 셋이 다 정확하게 합치되는 것은 53개뿐이요, 히브리 본문에 의 하면 70인역을 고쳐서 인용한 것이 10개소이며, 부정확한 헬라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37개소요, 정확한 70인역을 부정확하게 인용한 것이 76개소, 그리고 히브리 본문이나 헬라어 역본이나 신약 인용구가 다 불합치한 것이 90개소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들이 성경의 문자 자체에 치중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 정신과 교훈의 소재에 치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한 4복음 기사를 대조해 볼지라도 서로 똑같지 않다. 가령 쉬운 예로 베드로의 고백을 대조한다면 마가복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 하였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9:20) 하였으며, 마태복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하였으니 베드로가 앉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세 가지 말을 했을 리가 없으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그중 어느 하나를 말했거나 어느 하나에도 문자적으로 똑같은 형식은 아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답한 내용은 명백하며 동일한 것이다. 그 문자의 형식은 어떻든 간에 베드로의 본의만 똑똑히 드러나면 자기로서의 목적은 이룬 것이다.

십자가 위에 써 붙인 죄패에 대한 보고도 마가복음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고(15:26), 누가복음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으며 (23:38), 마태복음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하였다(27:37). 그러면 한 죄 패에 세 가지가 쓰여 있을 리는 만무한 것이며, 그렇게 말할 아무 근거도 없으므로 이것은 기자의 기억에 가장 똑똑히 남아 있는 것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고, 그밖의 것은 이렇다는 사람, 저렇다는 사람이 제 각각이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하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따진다면 그중 하나만이 정확할 것이요, 다른 둘은 적어도 절대 정확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부활주일 기사를 보아도 서로 맞지 않는다. 요한복음에는 안식 후 첫 날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간 줄 알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그들을 데리고 왔다. 이 두 제자가 무덤에 들어가 보고 집으로 간 다음에 마리아만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천사들이 보였다 하였으며(요 20:1~12), 마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안식 후 첫날 미명에 무덤으로 찾아가 누가 그 큰 돌을 굴려 줄꼬 걱정하던 중 문득 보매 돌이 벌써 굴려져 있으므로 무덤에 들어가니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있어 부활의 소식을 전하며 베드로에게 가서 말하라고 했다 하였고(막 16:1~7), 누가복음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굴려진 것을 보고 그 속에 들어가니 시체는 없어졌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부활의 소식을 전했다 하였고(눅 24:1~8), 마태복음에는 안식 후 첫날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는데 마침 큰 지진이 나면서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옷은 눈 같이 흰데 수직하던 병정들은 질겁해서 죽은 사람같이 되었다. 그때 천사가 이 여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했다는 것이다(마 23:1~7).

이 기사를 대조하건대 (1) 마가, 누가, 요한은 마리아가 무덤에 가기 전에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벌써 굴려져 있었다 하였고, 마태는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극적인 장면이 전개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2)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둘째 번 무덤에 왔을 때에 천사를 보았다 하였으나 다른 복음에는 다 첫 번에 본 것으로 되어 있고, (3) 천사에 대한 것도 마가복음에는 “흰 옷 입은 한 청년”이라고 말했고,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 입은 두 사람”이라 하였으나, 요한복음에는 “두 천사”라 하고, 마태복음에는 굉장한 초자연적 능력으로 천사의 나타남을 기록하였는데 그 수는 하나뿐으로 되어 있다. 4) 천사가 부활을 전한 곳도 마태복음에는 굴려진 돌 위에 앉아서 전했다 하였고,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무덤 속에서 말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천사는 다만 “왜 우느냐?” 하는 질문을 할 뿐이요, 부활의 소식은 직접 주님께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활 기사 중의 일정 부분만을 대조할지라도 이렇게 서로 맞지 않으니 그 전체를 대조 연구하면 더욱 착잡해질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다. 그러면 그중의 어느 하나가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면 다른 셋은 역사적 기술로서는 부정확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맞게 하느라고 전후좌우로 깎아 맞추고 돌려 맞추고 해보는 해석가들이 있으나 그것은 성경을 제 비위에 맞도록 억지로 해석하는 부자연스럽고 불경건한 일을 감행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어쨌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만은 더 의심할 여지없이 제자들에게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것만은 기술의 상위 (相違)를 넘어 역력히 드러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실례를 만일 구약에서 들춰낸다면 그야말로 불황매거(不遑枚擧, 낱낱이 들어 말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4] 나는 이제 성경무오설을 문자적으로 변증하기 위하여 애쓰신 박형룡 박사의 소론을 참고해 보기로 한다.

1) 그는 『신학난제』 26~30면까지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우선 “성경은 과학서류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인데, 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라는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성경은 과학을 가르치려는 과학교본이나 과학교과서가 아니다.”라고 밝히 단언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만강의 찬의를 표하는 바이다.

2) 그러나 이어서 그는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경이 과연 과학적으로 절대 정확하다면 왜 “과학교본이나 과학교과서가 아니다.”라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는가? 천문, 지질, 생물 등에 관한 문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통속적 또는 시적 표현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본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사유의 범주를 혼동함으로 말미암아 용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학적’이라는 말과 ‘통속적’이라는 말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용어가 아니다. 통속적으로 탓할 것이 아니라고 과학적으로도 탓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건 논리에 맞지 않다.

가령 창세기 1장에 있는 대로 본다면, 땅은 태초에 혼돈 무형한 원시해로 싸여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 물 가운데서 궁창(딴딴한 유리 같은 물체)을 만들어 위로 떠받치니 그 원시해가 궁창 위엣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지고 궁창 아랫물은 한 데로 몰려 바다가 되고 육지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 궁창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달아 놓아 땅을 비추게 하였다. “땅은 물 위에 떠서 동하지 아니하며 궁창의 변은 지주에 의지하였고 땅속에 음부가 있어 별세한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 가 있다.”는 등의 생각은 통속적으로 별로 따질 것이 없으나, 이것을 과학적으로 검토할 때에는 결단코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성경에는 ‘통속적’ 의미에서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학의 관심처가 아니니 그대로 통과할 것이나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장담한다면 그때에는 천문, 지질, 물질 등 부문의 과학자가 각기 실증된 과학의 척도를 가지고 판단할 것이니 거기에 맞지 않을 때에는 ‘오류’라는 딱지가 붙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해가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간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나, 순수 과학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과학적으로는 ‘오류’인 것이다.

그는 말을 이어 “자연계에 관한 성경 기사는 저서 당시의 지식 정도보다 훨씬 뛰어난 과학적 서술이라고 보아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현대의 자연과학의 예시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여기서 또다시 논리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즉 그는 성경의 기사를 ‘통속적’ 서술이라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그것이 당시의 과학적 지식보다는 훨씬 앞선 것이었으나 현대과학에 대해서는 한 개의 예시에 불과한 것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불안감을 느낀 그는 “과학이 더욱 발달 된다면 결국 성경과 합치될 것이다.”는 어떤 이의 관측에 일루의 소망을 부치었다. 성경을 사랑하는 그의 고충을 상상할 수 있으나 성경의 권위는 이런 구차한 변호를 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3) 성경에 역사적 오류가 있다는 것도 같은 논리로 답변하였다. 즉 그 오류라는 것은 등사인의 실수거나 수의 약산 혹은 사실의 약술에 기인한 것이라 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을 의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원인이야 ‘실수’거나 ‘약산’이거나 간에 오류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가장 비근한 예를 하나 든다면, 창세기 6장 13~22절과 7장 1~5절의 노아 방주의 기사는 같은 사건이 두 번 기록된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자에는 “혈육 있는 자를 매 종류에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 에 들이라.”고 하였고, 후자에는 “모든 짐승 중 정결한 자는 암수 일곱씩, 부정한 자는 암수 둘씩 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것은 역사적으로 둘 다 채용될 수는 없다.

창세기 5장의 족보로부터 시작하여 연대를 따져가면 천지창조로부터 약 6000년이 된다. 거기에는 약산이라고 말할 아무 흔적도 없다. 역사적 기술에 정확을 주장하려면 우선 연대부터 정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애굽 문화만 해도 기원전 6000년으로 소급하는데 천지창조 후 6000년밖에 안 됐다고 역사적으로 주장할 수가 있겠는가?

히브리 본문 구약 사무엘상 13장 1절에는 사울이 한 살에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영역에는 30세, 미국역에는 40세라고 삽입하였다. 실수라면 너무 과한 실수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왕으로 장립된 기사, 다윗이 사울의 궁정에 출세하게 된 동기 등은 다 각이한 두 가지 기록이 수집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역사적으로 다 정확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명의 논리가 허락지 않는다.

4) 성경 기사 중 도덕적 오류가 있다는 데 대하여 그가 “그 시대의 도덕 정도에 감하여 임시처변된 것뿐이다.”고 한 것에 나도 동의한다.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는 시대상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까닭이다. 바울도 “율법은 소학선생”이라고 하였다.

[5] 나는 이상에서 소극적인 비판을 하였으나 그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성서 문자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기 위해서다.

성경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해 주지 않는데도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이다. 그러므로 스턴스 박사(Dr. Stearns)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이 절대 무오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심히 선하고 경건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시킴으로써 선한 것도 없으며 경건한 것도 없다.”

또는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또는 문장적 오류가 다소 있다고 말한대서 무슨 큰일이나 난 것같이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프레데릭 데니슨 모리스(Frederick Denison Maurice)는 격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의 연대나 역사적 기록에 다소 착오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아들 믿는 것을 그만둘 듯이 야단하는 크리스찬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잘 믿노라고 자증한다 할지라도 나는 결코 그를 신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행로 중에서 성경 기사를 여지없이 혹평하는 친구만 만나게 합소서 하고 기도할 것이다. 그따위 믿음은 하루 속히 무너지는 것이 그를 위하여 더 좋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간단하게 건설적인 결론을 지으려 한다. 우선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자. 성경에 원본은 없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사본이 원본과 똑같다고는 못할지라도 크게 틀린 것은 없으리라고 믿고 보면 사실 성경에는 문자적 오류, 과학적, 역사적 등 부문의 오류가 있다. 그렇게 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오류는 오류이다.

그러면 이 오류 때문에 ‘성경무오설’은 무너지고 마는가? 아니다! 성경의 목적은 무엇인가?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 속에 영생이 있는 줄 아는 것이니 이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하였으니 성경의 목적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요, 영생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확립하자. 그리고 똑똑히 외치자! ‘성경은 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가 아니다’, ‘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철학개론도 아니다’, ‘성경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지향 증언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만나 그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가 성경에서 기대한 것은 다 얻은 셈이다. 성경이 자기 목적을 어김없이 달성 하는데 성경이 틀렸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성서무오설’을 버젓하게 주장할 수 있다.

만일 덜 된 과학자가 와서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보아 이런 유치한 천문학, 생리학 등 기록이 있으며, 이런 연대적, 역사적 착오가 있으니 이런 것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냐 한다면 우리는 곧 대답할 수 있다. 성경은 그런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표현은 그 당시인의 아는 정도의 과학 또는 역사적 지식을 반영한 데 불과한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표현 양식의 배후에 있는 영원한 종교적 진리와 구속의 행위라고. 그 대신 종교인도 성경에 ‘땅이 물위에 든든히 서 있다’고 했는데, 땅이 돈다니 무슨 말이냐 하고 과학자에게 덤벼드는 따위 우맹은 철저히 버려야 한다.

이렇게 믿는 것이 장로교 신조 제1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나는 누차 설명하였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임을 의미한다. 신구약성경을 믿는 마음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속하시려는 그의 경륜과 성취를 보게 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육신을 이룬 말씀과 인격적으로 사귀게 된다. 그이 안에 하나님의 온갖 말씀이 인격화해 계시니 신구약성서도 그이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게 한 신구약성서일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신구약성경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문자나 의식으로의 양식에 사로잡힌 율법이 아니라, 영적 인격적인 복음의 자유로서의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말씀이다.

[6] 신구약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정확 무오한 확실한 법칙이다.’ 신앙은 영생을 얻는 구원의 길이니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부름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응답이다. 행위는 도덕적 규범과 책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행위에 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서 다른 온갖 학문에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선 그리스도의 정신을 옳게 파악하고 그 정신으로 그의 교훈을 읽고 신약을 읽고 구약을 읽어야 미로에 빠지지 않는다. 종교와 도덕을 그리스도께서 ‘완전케 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 특히 구약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간단없이 재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의 신앙, 규범, 도덕법 등을 빙자해 가지고 얼마든지 비기독교적이며 비복음적인 주장과 생활을 감행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

이렇게 성경을 성경의 설 자리에 서게 하고 그 목적론적인 면에서 성서무오설을 수립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을 향해서나 대담하게 전도할 수 있다. “과학자여, 그대의 과학을 가지고(버리고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오라! 그리스도에게로 오라! 그대에게 과학은 있으나 그대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여기로 오라! 역사가여, 그대들의 지식이 그대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리로 오라! 성경은 하나님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한다.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여기 있다!” 하고 얼마든지 외칠 수 있다.

우리가 전도하는 목적은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방법으로든지 예수를 믿어 예수와 인격적으로 사귀게 하면 그만이 아닌가? 왜 문자와 의문과 전통의 무거운 짐을 기어코 지우려는가? 성경 절대 무오설을 믿어야 그리스도교가 권위 있게 되고 교회도 잘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믿어야 구원 얻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화석화된 바리새인에 불과한 것이다. 스넬(Snel)은 『이익이냐 손해냐(Gain or Loss)』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성경 축자무오설에 그리스도교를 붙들어 매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다. 그것은 이 학설을 거부하는 것이 곧 성경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따라서 그들의 신앙에 근본적인 파멸을 가져오는 까닭이다. 정직한 학도에게 해결의 가망 없는 회의를 제공하는 것밖에 아무 효과도 없는 까닭이다.”

이런 학도들에게 건전한 성경관을 준다면 그 순간 그의 회의는 일소해 지고 신앙이 명랑하게 자라는 것이다. 성경 축자무오설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에 동요를 일으켜 타락한 사람보다도 이 설을 고집함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문턱까지 왔다가 물러간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성경 안에 과학이나 역사적 기술이나 기타 학문적으로 다소의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예수를 못 믿겠다는 사람은 마치 등산자가 땅이 조금 갈라진 데다가 일부러 다리를 넣어 비틀면서 못 빼겠다, 더 못 가겠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다고 마르커스 다즈(Marcus Dods)는 말하였다.(The Bible: Its Origin and Nature) 현대인으로서 그만한 장애를 극복 못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관해서는 진실하자! 경건을 위하여 비진실을 꾸미는 비겁을 범하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이시매 하나님께서 건사해 주실 줄 믿고 우리는 정직하게 성경을 대하고 사람을 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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