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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6권] (1608) 한국기독교의 선교와 사회적 사명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10-31 08:54
조회
1373

[범용기 제6권] (1608) 한국기독교의 선교와 사회적 사명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1885년부터 선교사의 도래에 의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겨우 90년 역사밖에 안됩니다.

한민족의 5천년 역사의 흐름에서 최근 100년도 못되는 한국 기독교는 아직 한국에 있어서 ‘신접살림’이라 하겠습니다. 선교사로서나 사회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시기상조의 감이 없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국기독교’란 것은 한국에 있는 기독교란 뜻이요 ‘한국적 기독교’란 뜻이 아닙니다. 어쨌든, 한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계에 있어서 상당히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 기독교의 성장률이 높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반세기도 못되는 동안에 모든 피선교지 교회 중에서 교인 수가 가장 많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장로교회가 수적으로 급속하게 자랐습니다.

그것은 초대 선교사들이 ‘네비어스’ 선교방법을 채용했기 때문이라고 ‘클락’ 선교사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 이유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종합적인 이유를 든다면 ! …

[1] 선교가 시작된 때가 한국역사의 종말적 위기에 접근한 때였으니만큼, 지금까지의 문화활동과 정치세력을 장악해온 유교가 신망을 잃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동시에 개화운동 지도자들이 서양문명의 수입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따라서 서양문명의 모체인 기독교를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2] 그래서 소수 개화운동 지성인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지성인 그룹도 양반층이었습니다만 나라를 망가먹는 ‘양반’들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거리의 대중과 시골의 농민들에게로 갔습니다.

그 당시 한국의 사회는 士, 農, 工, 商의 4업으로 나뉘어 귀천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일 밑바닥에는 ‘천민’이라는 권외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이 지성인들은 이 ‘서민’ 층에 흘러든 것입니다. 이상재 영감이 고향인 부여군 시골에 가서 전도하던 얘기같은 것도 재미있는 일화가 되겠습니다. 그때 그 지방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운 천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농민은 머리에 의관(갓)을 못 썼습니다. 이상재 영감은 우선 어느 농막을 이용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농민들을 “오라” 했습니다. “너희는 모두 도포 입고 갓 쓰고 예배당에 나오너라!”, “너희나 나나 어느 ‘양반’이나 하느님 앞에서는 동등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 딸이다. 임금이나 대신의 아들딸이 ‘양반’이라면 하느님 아들 딸은 더욱 높은 ‘양반’이 아니겠느냐 머리를 버쩍 들고 당당하게 살아라……” 했답니다.

서울에서도 인력거를 타고 오는 주인양반과 인력거를 끌고 온 인력거꾼이 예배당 안에서 나란히 앉아 아무 어색함 없이 예배했답니다. 인력거꾼이 먼저 믿었기 때문에 그는 ‘집사’로 주인양반을 지도하는 ‘믿음의 선생’ 노릇을 합니다. 그래도 기독교에서는 으레 그런 것으로 양해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이 아버지시고 우리는 다 형제자매다”하는 평등사상이 양해사건으로 통했던 것입니다.

[3] ‘샤마니즘’적인 종교 테두리를 선교방법의 하나로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무당종교에 의하면 사귀들이 인간을 괴롭히는데, 사귀는 인간보다 강하고 천신보다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강한 천신의 힘을 빌어서 사귀를 내쫓는다는 것입니다. 그 중개역할을 할 수 있는 기술자 또는 전문가가 ‘무당’입니다. 무당의 특권은 ‘접신’에 있습니다.

초대 선교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를 믿으면 하늘에 계신 최고의 ‘신’이 모든 사귀를 내쫓고 인간을 질병과 재난과 모든 불행에서 건져준다는 것이 전도의 중요한 메시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귀를 내쫓았다는 것과 흡사합니다.

선교자는 무당의 위치에 있고, 성경 읽고 찬송가 부르는 것은 송 읽고 주문 외우는 것과 통하고, 성령의 강림은 접신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종교적 구조는 기독교와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뚜렷한 신학체계가 있고 높은 윤리가 있고 신앙공동체적인 교회가 있고 전세계와 우주를 포괄한 범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종말론적 ‘비전’이 있는데 ‘샤마니즘’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 한국 기독교인들이 쉽게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대중에게 나면서부터 내재해 있던 이런 무당종교의 테두리가 기독교를 토착시킬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나라가 망하려는 무렵, 또 나라가 망한 다음에 원한, 허무, 울분, 반항, 광복의욕 등등의 ‘센티멘트’에 착잡했던 애국인사들에게 교회가 안식처와, 다른 의미에서의 소망 즉 정신적 위안, 내세적 보상 등과 어울려 높은 윤리생활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긍지를 갖고 교회에 나왔으며 기독교를 통하여 해방과 독립도 기대했던 것입니다.

[5] 유교가 높은 윤리적 훈련을 유산으로 남겼기 때문에 기독교 윤리가 그들에게 아주 생소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독교 선교에 좋은 길닦이가 되었다 하겠습니다. 사실, 초대 전도인들이 유교경전에서 기독교적인 구절을 많이 인용하였기 때문에 유학도들의 경멸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1909년 이래의 열광적인 부흥운동, Revivalism이 교인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7] 신학교육이 교수와 학생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과 판단을 통과하지 않고 주입적이고 강박적인 정통ㆍ보수신학 일색으로 짜여있었기 때문에 신자가 사상적 방황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도 교인수 증가에 보탬이 됐을 것입니다.

교회와 사회 관게에 있어서 :

한국교회에 처음부터 숨어 흐르는 두 지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비기호증역사참여와의 두 조류였습니다. 역사참여에 대해서는 3ㆍ1운동을 위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자들이 교회를 통하여 ‘독립’을 성숙시키려는 교회 운동이었고, ‘신비기호증’은 역사에 얽매임 없이 ‘낙원’이나 ‘천당’의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경험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적어도 일년에 한두 번 부흥회를 여는 것이 한 연중행사로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김익두 목사님 같은 유명한 부흥목사님도 등장하게 되었고, 길선주 목사님, 김선두 목사님 등 자주 부흥목사로 초빙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기술학적 시대가 접근해 올수록 신비경험 보다도 합리적인 사고가 더 많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흥회는 ‘사경회’로 바뀌어지고 성령의 감화도 고요한 내적 확신과 사죄의 은총에 집중되어 갔습니다.

‘사경회’란, 성경공부가 집회의 중심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성서비판학이 한국에도 수입되어 성경 자체의 문자무오설이 확신을 잃게 되자 사경회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특별집회라는 이름의 모임이 사경회를 대신했습니다.

특별집회에서는 교회의 사회관심, 문화관심, 정치적 책임 등등이 다루어집니다. 사계의 전문지식을 갖춘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두 번씩 학문적인 강연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적인 신도는 타계주의에서 교회주의에로 농성합니다. 사회관심편의 의식분자들은 적극적인 역사참여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사회참여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대략 이런 것을 주장합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역사에 책임을 진다.”

한국역사를 그리스도 모습으로 변질시킨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역사에 involve될 뿐 아니라, 실지로 participate해야 한다.

한국역사가 독재자의 압박 아래서 국민의 주권이 탈취되고, 기본권이 유린되고, 이권이 짓밟히고, 어느 한 인간이 자기를 절대화하여 ‘신’의 자리에 앉고, 그리고 그에 대하여는 비판도 시정도 못하게 하고 자신을 법 위에 앉혀 스스로 ‘법’이 된다. 그런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역사를 그리스도 모습으로 변질시킬 의무를 가진 한국교회가 대안의 화제 보듯 할 수 있겠는가? …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걸고 항거의 전선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이요, 선교요, 동시에 사회참여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저류였던 ‘신비파’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타계주의에서 교회주의에로 농성했습니다.

그들은 ‘천당’을 교회 안에 끌어들였습니다. “교회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다. 교회가 세속정치에 관영하는 것은 ‘외도’요 ‘타락’이다. 정치참여는 고사하고 정치관심도 가지지 않아야 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속되니까 교회는 속화를 방지함으로써 거룩을 수호해야 한다.” …… 이런 선언입니다.

그러나 정치는 모든 생활 부문을 외부적으로 규제하는 권력인데 기독교인이라고 정치권 외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도 정부에 세금을 바쳐야 하고, 병역에 징집되어야 하고, 전쟁이 나면 불려나가 싸워야 하고, 자녀를 교육시키려면 문교부 소관인 학교에 보내야 하고, 어디 다니려면 교통부 소관인 교통기관을 이용해야 하고 외국에라도 가려면 외국여행권을 외무부에서 발급받아야 합니다. 악당의 폭력행위에서 인명과 재산을 보호받으려면 경찰의 경비활동을 기대해야합니다. 이런 모든 생활태가 예외없이 정치의 그물 안에서 되는 것입니다. 독재정권이되면 기독교인도 일반사회인과 같이 시민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치를 안하노라고 장담하는 기독교인도 벌써부터 정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답지 못한 오염정치에 참여했다는 것 뿐입니다.

사실, 정치 불참을 간판으로 내걸고 스스로 거룩한 체 하는 교회인, 교회 자도자들 가운데 정권 아부자, 또는 ‘정상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빌리그레함’이니 ‘엑스푸로 74’니 하면서 막대한 정부지원을 받고 은근히 정부선동에 준동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부에서 잘하는 것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문제될 것 없겠지요. 국민으로서 자랑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는 것은 잘못한다고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독재권 강화라든지,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학생들 ‘데모’ 행위를 15년, 종신, 사형 등 엄청난 중형으로 탄압하는 일이라든지, 가난한 동포들 가운데 들어가 그들의 고난에 얼마라도 동참하면서 그들을 도우려는 산업선교 담당 성직자들을 공산당 혐의 또는 국가반란죄로 몰려는 정책이라든지는 기독교 윤리에 정반대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도 발언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철면피적인 행동을 취하는 기독교 지도자들도 있답니다. 말하자면 집권자의 대변자 노릇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고 악을 악이라, 불의를 불의라, 양심적으로 증언하는 소수 교인 또는 교직자는 정치참여란 죄명으로 소외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가 정치에 관여 안할 수도 없고 어차피 관여한다면 권력보다도 정의편에 서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만년 야당일 것입니다.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은 불가피한 천직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교회의 현실입니다.

최근의 한국교회가, 그것이 소수라 할지라도, 독재정권에 도전하여 인간 자유와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한국 민족사의 생명이요 한국교회사의 광명입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첨예화한 양단된 한국에서, 기독교가 제3의 차원에서 인간구원의 미래 역사를 지향하는 ‘새벽’의 고지자라고 생각되어 자뭇 자랑을 느낍니다. 한국신교에서 박형규 목사와 그 동지들, 카톨릭에서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 학원에서 김찬국, 김동길 등등 그리고 죽음과 종신징역과 KCIA의 잔학한 고문 등등 공포 정치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새롭게 ‘민주’를 부르짖는 젊은 학생들과 교직자들,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제2선의 중견층 지도자들, 두드러지게 발언은 안한다 해도 Silent Majority를 이룬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도들, 이 창조적인 사람들이 지금 한국 기독교의 횃불이 되어 세계사에 빛을 던지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캐나다 연합교회 토론토 Conference에서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표어 아래서 430명 가량의 회원이 모여 교회의 방향과 정책 모든 데에 걸쳐 의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이 역사의 현실에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는 교회가 어느 나라 어느 곳의 교회냐 하는 주제를 두고 토의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독재자의 무자비한 폭력탄압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한국교회다……” 하고 결론지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430교회가 일제히, 한 주일을 한국교회를 위한 주일로 정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한국교회의 수난교직자, 학생, 그리고 그 수난가족을 위해 헌금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빛이 된 것은 한국교회의 교회주의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인수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소수의 창조적인 한국교회가 한국역사의 현실을 묵과하지 않고 그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서 그들 면전에서 그리스도의 산 증언을 남기고 고난 속에 몸던져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지금 전세계 교회가 대체로 신비경험적인 교회주의와 신앙고백적인 역사참여와의 두 조류와 갈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장래선교의 way-out, 그리고 선교 대상으로서의 근로대중 본위 등등은 미래교회의 갈 길을 지시하는 하느님의 고지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1974년 12월 3일 오전 11시
서독 푸랭크풀트 한국학자 회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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