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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5권] (96) 동경에서 – 일본인 기질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10-16 08:59
조회
623

[범용기 제5권] (96) 동경에서 – 일본인 기질

일본에서는 내가 참석한 단체도 그룹도 집회도 많았지만 지면에 공개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내놓고 떠들썩할 생각도 없기에 모두 기록을 생략한다. 그리고 나는 본래부터 관광과 역사의 유적들을 찾아 ‘구경’하기에 즐거운 습성이라서 그 면에서 얼마쯤 적어둘 작정이었다. 그것도 이제 갑작스레 파고들 시간도 정력도 없고 이미 파헤친 학문으로서의 깊이도 없기 때문에 나의 주관과 즉흥에 인연을 맺을 밖에 없었다.

짐은 우선 멀리 교외에 사는 노옥신 여사 ‘아파트’에 놓고 바로 대문밖이랄 수 있는 조그마한 공원엘 갔다. 어린이들 운동장의 부속정원이다. 그래도 ‘쓰바끼’(우리나라의 동백)는 피기 시작했고 매화숲이 언덕의 거의 전부를 덮었다. ‘송죽매란(松竹梅蘭)’을 ‘사군자’(四君子)라는데 소나무는 한국에서도 흔해빠졌고 대밭도 거제도나 완도, 목포 등 전라남도에 가면 간데마다 볼수 있다. 나는 그중 대밭을 좋아한다. 대란 놈은 한햇동안에 다 커버린다. 한 뿌리가 기어다니면서 숫한 자손을 탄생시킨다. 속이 비었으니 ‘허심’(虛心)의 도(道)가 몸에 깃들었다. 잎사귀도 파랗게 정결하다. 그러나 절개가 있어 눈속에서도 푸르다. 속은 비었지만 몸은 단단하다. 나는 대숲을 존경한다. 늘그막에 은퇴한다면 어느 죽림속에 ‘대’를 벗삼아 달 보며 호수 보며 조용히 살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이번에 일본을 다니며 일본의 대밭을 부러워했다. 아까 말한 ‘매화원’도 향기롭고 고상했다. 잎 피기 전에 꽃이 핀다. 훈훈한 매향(梅香)이 길손의 마음에 감긴다.

난초는 제주도 근방에 많다. 난초도 종류가 다양하다. 대체로 간 얇게 여성적이다. 거센 바람은 질색이고 반쯤 열린 들창 높은데서 아늑하게 어루만지는 미풍을 좋아한다. 하느적 늘어진 치맛자락이 어루만져질 때 담담한 청향(淸香)이 미소한다. 짙은 화장도 짙은 향기도 아니다. 그래서 고결한 인사들, 시인과 화가들, 덕 높은 지성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일본인도 난초를 무척 좋아한다.

아까 말한 매원(梅園)을 나오면 좁다란 장사골목이 나온다. 골목이란 골목은 모두 비슷하다. 겨우 자동차 하나가 비비대며 드나들 정도로 좁다. 거기에 올망졸망 구멍가게들이 빈틈 없이 박혀 있다.

사람이 얼신 접근만 해도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하고 최대의 경례를 한다.

‘합비’에 ‘몸베’ 차림으로 개미같이 부지런하다. 일하기 위해 사는 국민인 것 같다. 일하는 게 그들의 ‘도(道)’요 ‘낙(樂)’인 것 같았다. 어디서나 상품의 다양성이 놀랍다. 보아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옛날부터의 일본식 전통이 살아 있다. 음식품이고 선물용이고 간에 색깔이 일본식이고 모양이 일본식이고 상표도 포장지도 일본 전통이다. 그러나 거기에 어느 한 ‘텃취’가 서양풍미를 살렸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그 물건이 일본특유의 형태니까 희귀해 보이고 서양향기도 서렸으니까 생소하지 않다. 거기 다가 사기가 쉽다.

일본에도 물품세가 있고 써비스료도 있다. 그러나 그 법정세율이 모두 그 물건 정가 속에 품겨있기 때문에 고객은 군더더기 없이 물건값 자체만 물고 가져가는 인상이어서 기분이 가볍다. 음식점도 마찬가지다. 음식값만 메뉴에 쓰인대로 내면 그만이다. 어떤 특별한 대연석이라든가, VIP들만 드나드는 향연에서는 주최자의 체면으로라도 그럴 수는 없어 두툼한 예외가 생긴다. 그러나 법은 서민들 표준으로 대중화했단다.

‘염가’면서 실용적이다.

일본이란 나라는 부지런한 ‘살림꾼’이다. 빨랑빨랑하고 영리해서 번갯불 같이 서둔다. 미국은 몸집이 육중해서 그만큼 민첩하지 못하다. 뒷구멍의 물주(자본주)야 물론 미국의 다국적기업체겠지만, 일본 자체안에도 명치시대부터의 재벌이 있어서 뿌리가 깊다. ‘미쓰꼬시’(三越), ‘미쓰이’(三井), ‘야스다’(安田), ‘마루베니’(丸紅) 등등은 세계수준의 대재벌이다. 거기에 사원으로 취직한다면 그 관계는 ‘고용주’, ‘고용인’의 관계를 넘어서 오야붕(親分), 고붕(子分)의 의리관계가 맺어진다. 큰 과오가 없는 한 평생사업이 된다. 봉건적(?)인 자본주의랄까? 그래서 모두 맘 든든하게 충성한다.

중소기업과 대기업관계도 비슷하다. 중소기업이 실패하면 관계 대기업에서 도와준다. 아주 무의자로 자금을 빌려준다. 파산상태면 대기업에서 병합해버리고 다시 시작하게 한다.

내가 연구, 발견한 얘기는 아니지만 어느 경영학 전공의 학도가 그렇게 말해준 것인데 내 눈으로 본 것과 일치하는 사실인 것 같아서 그대로 적는 것이다. 잘못된 보고면 웃고 넘기고 잊어주기 바란다.

일본인은 과거를 현재에 살려는 삶의 묘미를 갖고 있다. 무던히 보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미군폭격에 온통 잿더미가 됐던 폐허를 재건할 때, 같은 값이면 넓직한 큰 거릿길로 ‘현대화’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한 도시에 한두줄 그런 거리가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옛날부터의 좁디좁은 골목길 뿐이다. 자동차 없을 때의 골목 그대로니만큼, 차 한 대만 들어오면 길이 꽉 찬다. 엄격한 일방통행도 아니다. 저쪽에서 오는 차나 트럭이 엇갈리는 경우, 한편에서는 차를 상점 창가에 바짝 들이댄다. 그리고 길이 트이는 대로 간다. 어느 차에서도 좀처럼 ‘뿡뿡’이나 ‘뺑뺑’ 소리는 없다. 지금은 어쩐지 모르지만, 서울 자동차가 함부로 불어대는 금속성 고음파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왜 그 좋은 기회에 일본서는 도시계획을 현대화하지 않았을까? 위에서 나는 일본인이 옛 것을 폐하지 않고 새 것 속에 함께 살리려는 보수성 때문이라고 지적했지만, 길가의 올망졸망한 구멍가게들을 온전히 매수하기 전에는 손댈 수 없는 관계성 때문이기도 하다. Sense of Property가 자본주의의 초석(礎石)이니만큼 함부로 수용령을 내릴 수도 없고, 기껏 고가(高價)를 제시해도 안 판다고 잡아떼면 어쩌지 못할 것이니 아예 첨부터 손대지 말자는 의견이었을 것으로도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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