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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3권] (215) 北美留記 第六年(1979) - 西獨에로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3-16 15:50
조회
539

[범용기 제3권] (215) 北美留記 第六年(1979) - 西獨에로

3월 9일(금) - Frankfurt의 손규태 목사로부터 그의 교회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모임에 초청해 왔다.

그 행사에서는 남ㆍ북통일을 주제로 한 기념강연회가 있어 나에게도 Keynote Speech 겸 “통일”문제 강연이 부탁됐었다.

그런데 그 때 내가 선우학원과 함께 제네바에 갔다. 경위와 각서의 사건 등등이 여러모로 문제가 됐기에 아래에 그 경위를 밝힌다.

일종의 신상발언이겠다.


첫머리말

근자에 長空과 그의 신념에 대하여, 특히 그와 선우학원과의 관계, 남북통일 문제에서의 그와 장공과의 관계성 등등을 두고 억측과 속단과 어떤 의미에서는 모략이 진행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솔직하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 두는 것이 건전한 여론을 위하여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늙은 선배로서 후배랄 수 있는 선우를 아끼는 심정은 진실하다.

그러나 그 선의가 어떤 술책에 악용되는 일은 더 큰 비극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그래서 내 기록의 일부를 공개한다.

1979년 2월 6일(월) - 선우학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3월 12일 쯤에 서독에로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보다 몇 주(?) 앞서 선우는 나에게 이런 말을 전화로 했다.

서독에는 아직도 미군이 많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주말이면 캐나다나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서독에로 면회를 하러 가는데 미군에서 편리를 보아줘서 반값으로 왕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독에 면회하러 가는 가족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거의 빈 비행기가 왕래한다고 했다. 그럴 바에는 보통 여객도 헐값으로 태워 같이 가도록 하면 경제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묵인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가면 여비도 절약되는데 그것은 선우가 책임지고 수속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데는 지식도 주선력도 없으니 합법적으로 싸게 왕래하는 길이 있다면 맘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서독행을 마음으로 작정했다.

3월 9일(금) - 정희(손녀) 차로 Toronto 공항에 가서 10시 30분에 탑승, 12시에 ‘라과디아’에 내렸다.

임순만 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박사 차로 곧장 국제공항에 갔다. 거기서 기다리는 선우학원을 만나 함께 서독기 Luthansa에 올랐다.

3월 10일(토) - 비행기가 비엔나 근처에 일시 착륙했을 때 선우는 내게 말했다.

“비엔나에 이북대사관이 있는데 거기 들러 잠시 인사하고 가시면 어떨까요?”

나는 거절했다.

거절하는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 혼자 생각으로서도 정상적이 아닐 것 같았다.

내가 일본, 미국, 서독, 북구 여러 나라를 한두번 여행한 것이 아니었지만 한국대사관에 들러 의례적으로 인사차린 일도 없었는데 이제 내가 “시민”으로 적을 둔 일도 없는 북한대사관에 먼저 찾아가 “인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고 그럴 의욕도 없었다.

선우는 말했다.

“그럼 나는 여기서 내려서 비엔나에 갔다가 내일 직접 푸랑크풀트에 가겠습니다.”

그는 내렸다.

나는 혼자서 푸랑크풀트에 갔다.

3월 11일(일) - 10AM에 손규태 목사가 목회하는 푸랑크풀트 한인교회에서 설교했다.

이어서 시국강연회가 그 지방 한국인교회 연합으로 주최되는 것이었다.

그 주요행사 강연 주제는 “기독교와 남북통일”이었다.

선우도 주요 강사였다.

내게는 개회 겸 주제강연(Keynote Speech)이란 것이 배당되었다.

내 강연 요지는 아래와 같다.

“지금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결하고 있다.

그 중간에 도색, 백색, 회색, 청색, 진홍색, 담홍색 등등이 엇갈려서 다채로운 데도 있지만 결국에는 어느 한편에 동조, 귀속, 또는 예속되어 일시 정리되고 말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기독교는 저쪽 진영에서 몰려나고 이쪽 진영에서 이용당하고 하여서 주체성(Identity)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 기독교의 ‘타락상’이고 그 ‘정상태’는 아니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앞잡이 ‘마몬’의 사동(使童)일 수도 없고 공산주의에의 ‘반동’으로 박멸의 대상일 수도 없다.

기독교는 어느 한편에 절대 충성을 서약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도덕적인 ‘선’과 ‘악’의 대립선(線)까지도 넘는다.

‘하나님이 해를 선한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꼭같이 비추어 주시고 비를 같이 내려주시는 것을 배우라’고 예수는 말했다. 크리스찬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했다.

‘온전’이라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는 ‘통일’ 문제를 주제로 삼고 거기 관련된 기독교의 사명과 책임을 논의의 Key로 택했다. ‘크리스찬’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니만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직’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속죄적인 사랑, ‘이웃을 내몸같이’란 이웃 사랑의 ‘인간’으로서 큼직하게 살아야 한다.

오른편 손에 자본주의 진영을 잡고, 왼편 손에 공산주의 진영을 잡고 전 우주적인 사랑의 찬가를 부르며 위로 앞으로 나아갈 의무와 사명이 있다. 7.4. 공동성명에 ‘무력이나 외세에 의한 것이 아닌 평화통일’을 내세워 남북의 당국자가 합의했다.

‘평화통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사상과 이념과 체제를 초월할 수 있다는 ‘장담’은 믿기 어렵다. 사상이 다르면 부자간에도 원수가 된다.

이념이 다르면 같은 이념의 사람들끼리만 뭉친다. 전 세계적으로 ‘대립’을 초월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한 초점에 두 편의 눈이 모여지고 두 편의 발이 엇갈려 걸어가고 두 편의 손이 서로 활개치며 행진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당’ 조직 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런 ‘기구’는 기계시설의 일부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민족애, 국가애, 인간애 등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 대하는 ‘인간주의’가 앞서야 한다.

남한동포나 북한동포나 ‘인간’이요, ‘鬼畜’이 아닌 것은 사실인데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닭싸움처럼 눈을 붉힌다면 언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념이나 체제나 사상 이전에 서로의 인간 발견, 인간 존엄, 인간권 인간자유(개인자유)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피차 존경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통일’을 위한 기독교의 사명은 크다. 기독교적 ‘출구’ 없는 ‘통일’은 남과 북을 막론하고 독재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통일 한국의 ‘혼’이다. …”

그때의 원고가 분실되었기 때문에 기억을 더듬어 적은 것이다.

문자 그대로 옮겨진 것은 아니겠지만 “意味”는 별로 다르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선우의 강연은 통일을 지향하는 중간 단계에서의 정치, 경제, 외교, 통일 노력 등등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설명이었다.

어쨌든 이 모임을 계기로 통일과 기독교와의 상관 관계는 훨씬 더 정상화된 것으로 보였다.

3월 17일(토) - 나는 보쿰 등 여러 교회를 역방하고 예배 모임과 그룹모임, 강연 등등도 성의껏 하노라고 했다.

이날 밤 10시쯤에 듀이스버어그의 장성환 목사 댁에 갔다. 거기서 유숙할 작정이다.

선우는 나보다 먼저 그리로 와 있었다. 청년 집회에서 강연하게 되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3월 19일(월) - 선우는 내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제네바에 가서 하루쯤 여관에서 쉬며 관광도 하고 하시면 기분전환도 되고 좋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니까 멀지도 않습니다.…”

그는 넌지시 나의 관광취미를 건드린다.

나는 무심코 “그럽시다” 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고 친척이 거의 전부 이북에 살고 500년래 조상들 모신 선영도 이북에 있고 직접 내 부모님 산소도 이북에 있다.

나의 이북에 대한 “센티멘트”는 간단하게 “센티멘탈리즘”으로 탈색(脫色)해 버리기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혈연적이다. 언제 마음놓고 두려움 없이 이북동포들과 만나 해방전과 같이 담담하게 사귈 수 있을까 하고 염원해 왔고 그런 심경을 친구들에게도 토로했었다.

선우에게 얘기했었는지는 기억에 똑똑칠 않다. 그너나 선우는 이미 내 심정을 주의깊게 진단해 두었을 것이다.

내가 “세까이”(世界)지에 발표한 “脫 6.25”란 논문도 물론 읽었을 것이고 ‘카터’가 중공의 ‘등소평’을 국빈으로 초청했을 때 내가 초안하고 동지들이 검토하여 발표한 UM으로서의 시국선언과 공개서한도 읽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한국의 38선도 이 국제 정세에서 어느 정도 해방무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관측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선우가 이번 제네바 여행이란 엉뚱한 설계까지 밀고 나간 것은 반드시 흉계라고만 할 수 없겠다.

어쨌든 나는 3월 19일에 듀이스버그에서 제네바로 갔다.

선우는 말했다.

“여기에 이북의 Second man이 와 있는데 잠깐 만나 이북소식도 듣고 가시면 어떨까요?” 한다.

나는 관광이래야 벌써 두세번 다녀본 데다가 고단하기도 하고 해서 내키지 않느 ㄴ판이었다. 그래서 이북대사관(?) 행을 속히 승낙했다.

그럭저럭 얼마 걷는 동안에 그는 벌써 이북대사관 현관 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 사람(Second man이란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은 벌써부터 대사관 현관 앞 멀지감치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포옹하며 반겼다. 선우는 내 뒤에 멀지감치 따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과 악수하는 동안에 내 뒤에 따라온 선우에게 나는 말했다.

“이제는 이북 동포를 한번 만나 반기고 싶다던 내 소원도 이루어진 셈이니 우리 돌아가서 관광이나 합시다….”

선우는 무언의 미소를 띠운다.

그 사람은 깜짝 놀라 당황하는 태도로 나를 부둥켜 끌다시피 현관 안에 밀고 들어간다.

“원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어른께서 저희 같은 사람을 찾아오셨는데 저희가 어떻게 문간에서 돌아가게 한단 말입니까? 어서 들어가십시다….”

큼직한 공간의 독방에 인도한다. 사면은 겹겹이 헝겊 은막(銀幕)으로 두르고 저 멀지감치에는 무대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 방 한 가운데 쯤에 그 사람이 앉고 그 앞에는 작은 Tea table이 놓여 있었다.

나를 자기와 마주 앉게 한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그는 말한다.

“우선 북조선의 현실을 소개하겠습니다” 하고 자기 뒤에 있는 “버튼”을 눌른다.

당대회 때 광경이 영화로 나온다.

부채춤, 아동극, 어린이들의 김일성 찬가, 선전이 끝나자 진짜 면담시간이다.

그 사람은 나와 대좌했다. 내 옆에는 선우가 사라지자 그 사람은 나에게 묻는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폐허에서 그만큼 자력으로 건설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 것 같소이다.”

대담은 계속된다. 대담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그 사람은 몰래 녹음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녹음한 것이 아니니까 “말” 그대로가 아니라 “뜻”만을 풀이해 적는다.

이번에는 내가 시작한다.

[문] 나는 기독교신자올시다. 북한에서는 종교말살 정책을 지금도 강행합니까? “종교아편설”은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일까요?

[답] 종교 박멸정책이라기보다는 종교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서 자멸한 것이지요. 종교가 아편이라는 것은 적어도 기성종교로서는 부정할 수 없는 실태일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면서 하늘만 쳐다보는 생활 태도는 게으른 자의 안식처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고생해도 죽어서 천당엘 가면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소위 믿음이라는 것도 비혁명적인 무기력형입니다.

이런 도피근성은 고쳐야 하겠지요.

[문] 북한에는 기독교 신자가 하나도 없다는데 사실입니까?

[답] 숨은 신자가 있을지 몰라도 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요.

[문] 전에 그렇게 많던 교회당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답]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가난하고 눌린 자를 해방하는 운동에 몸바친 분이고 지금은 전 세계에 7억의 신자가 있는데 그들의 신앙과 신념을 간단하게 ‘아편’으로만 다룰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답] 우리는 참 기독교인을 존경합니다. 강량욱 목사님은 기독교 연맹 책임자로서 국가의 부주석이 아닙니까?

[문] 이제부터 북한의 종교자유를 기대해도 좋을까요?

[답] 헌법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습니다.

[문]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데 개인 자유없이 “민주”가 성립될까요?

[답] 개인 자유가 남용되지 않는 것 뿐이지요. 우리 제도는 피라디드 같아서 그 선 자리는 “인민”입니다.

말단 조직은 “반”으로 되어 있어 4, 5인이 모여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발표하고 합의된 것을 그 위에 “조직”에 보고합니다.

거기서 그것을 토의하고 자기의 의견을 첨부하여 그 윗 조직에 올려보냅니다. 그것이 “당” 최고 위원회를 통하여 “주석님”께 상정됩니다. 주석님은 그것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니까 “독재”가 아니라 건전한 민주공화국이지요.

[문] 김일성 주석님은 “민족의 태양”, “위대한 수령”, “어버이” 등등으로 호칭하여 개인 숭배를 제이천성화하는 것은 독재를 영구화하기 위한 인간 신화(神化)를 기술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닐까요?

[답] 인민이 진심으로 우러러 보고 존경하고 신뢰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요. 사실 주석님이 위대한 혁명가요, 현명한 영도자십니다….

[문] 6.25의 무력 남침은 동족 상잔의 과오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답]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외치고 백두산에 태극기를 세운다고 공언하면서 미국의 침략정책에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6.25를 민족 해방으로 봅니다.

[문]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과의 교류를 자연스럽게 해야 할터인데 북한에서 너무 폐쇄정책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답] 우리는 언제나 환영합니다. 문제삼는 것은 오히려 남조선 당국이 아닐까요?

[문] 통일은 어느 한편에서 다른 한편에까지 자기 빛깔로 칠해 버리려는 전략에서 이루어질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북한 당국에서는 “남조선 해방”, “평화통일” 등등을 주장하여 6.25 재판이란 인상을 남한 국민에게 퍼뜨리고 있습니다.

통일회담 자체가 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래의 방식대로 본다면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제안하고 남한은 이에 가부를 대답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일종의 “항복권고” 같아서 남한 국민은 개운찮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 그러기에 “민족대회”를 열어 전 민족 단위로 상담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라는 팜플렛을 준다. 나와 문답할 때에는 그걸 뒤져보면서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의 신성한 교본(敎本)으로 쓰는 모양이다.

“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심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한다.

옆에 넓은 식당이 붙어 있었다.

선우도 참석했고 전 직원이 둘러앉는다. 한국요리에 한국 아가씨들의 “써비스”였다.

마치고 떠나려 할 때, 그 사람은 봉투 하나를 내게 넘겨준다(나중에 보니 미화 7천불이었다).

“저희들 적은 정성입니다. 여행하실 때 잡비로라도 써 주십시오.”

나는 거절했다.

“여비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러실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희들 ‘인사’입니다. 어른을 모셨다가 빈손으로 가시게 할 수 있습니까?”

“이건 상식입니다….”

그때 선우는 윗층에 있었으니까 이 장면의 직접 목격자랄 수는 없다.

선우와 나는 그들과 작별하고 나왔다.

6월 10일(일) - N.Y. 교외에 큰 저택과 임야를 가지고 사는 김홍준 동지의 생일날이란다.

어제 밤에 N.Y.의 민주동지들이 부부 동반하여 김홍준 댁에 왔다.

선우학원 부부도 동반했다. 모두들 그 댁에서 유숙하고 내일 아침 김홍준 장로 생일축하 예배를 드릴 작정이었다.

다 같이 호반과 임간을 산책하기도 했다.

오후에 선우학원과 나는 단둘이서 숲속 길을 거닐었다.

나는 그동안에 제네바 그 사람과의 관계가 께름할 뿐 아니라 내 양심의 고민도 겹쳐서 온통 즐겁지가 않았었다.

그러나 그 돈을 돌려보낼 “루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선우학원을 통하여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선우는 그간 이북에 있는 내 친척의 편지와 사진을 전달해준 일도 있었고 나와 이북 사람과의 만남도 주선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네바에서 받은 돈 7천불 중에서 6천 5백불을 선우에게 수교하면서 비엔나의 이북대사관에 돌려주라고 했다.

그는 말없이 받았다. 그 중 5백불은 “제3일” 출판에 보태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79년 8월 31일에 그것도 국제수표로 선우에게 돌렸다.

선우에게서 그 후에 그 돈을 비엔나 이북대사관에 돌렸노라는 회답이 오지 않았다.

일체 언급이 없었다.

“사건”은 이것으로 끝났지만 남과 북 양편에서 자기류, 또는 자기 본위의 “조작” 또는 “창작”에 이용할 수 있는 구실은 제공된 셈이다.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자조(自嘲)한다.

凡庸記의 “庸”자는 그래서 쓰여진 것이다.

“전략”과 “순정”을 분간할 줄 모르는 “장군”이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은퇴” 제도가 생겼을 것이고 은퇴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제 이후 교오 속에 “은사”(隱士)가 되어 풍월과 시문을 즐길 수 있다면 과분한 축복이겠다.

어쨌든 이런 얘기는 나 자신의 “참회록”으로 적어 두는 것이요 후배인 선우에게 시비를 거는 의미의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민중신문”을 걸어 고소하는 것은 결국 나를 걸어 고소하는 것이라는 말로 들었다.

고소하면 법정에 설 밖에 없다. 그러나 선우 자신에게도 유익보다 손해가 더 클 것이 아닐까.

선우가 기어코 고소사건을 취하하지 않는다면 나도 증인이나 무슨 명목으로 법정에 불려나갈지 모를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김일성의 대남선전에 북한을 돕는 전략이 될 것이고 남한의 경우에서는 민주진영 인사들의 “이미지 다운”에 군사 독재자를 돕는 것도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선우를 미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나에 대한 태도에까지 내가 언명할 지식도 권리도 없다.

다 아시는대로 선우는 고소를 취하했다.

3월 19일 – 밤과 3월 20일(화) - 밤은 제네바시의 어느 호텔에 유숙하면서 잠시 거리 구경도 하고 20일에는 W.C.C.에도 들러보고 했다고 기억된다.

3월 21일(수) - Frankfult의 손규태 목사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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