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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3회]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김재준' / 천사무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4 09:22
조회
1267

[제3회] 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 일시 : 2004년 3월 25일(목) 오후 5-7시
장소 :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효촌관 2층 세미나실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김재준'

천사무엘 교수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 구약학)

1. 사상적 위치

장공 김재준(1901-1987)은 20세기 한국 기독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근본주의신학적 논쟁, 교회의 사회참여, 역사비평적 성서해석 등에 깊이 연관되었던 신학자였다. 또한, 그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경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했던 목회자였고,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한반도의 통일운동 등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변화에도 깊이 관여했던 사회운동가였다.1) 그러나 그는 20세기 한국 장로교 분열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즉 극찬에서부터 그 반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 김재준이 남긴 글은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편, 김재준 전집, 전 18권 (오산: 한신대학 출판부, 1992)에 모아져 있다. 또한 그의 저술 및 그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단행본 등 참고문헌은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장공사상 연구 논문집: 장공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2 (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555-564 에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김재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가 시대착오적인 근본주의신학2)에 맞서 싸운 신학자요, 선교사들을 추종하는 교권주의자들의 희생자이며,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정치개혁운동가, 대승적 기독교를 연 선구자, 그리고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목회자, 한국의 종교개혁자 등이라고 극찬한다. 한신대학교와 관련이 있는 김정준,3) 김경재,4) 손규태5) 등의 글에서 이와 같은 평가를 찾아 볼 수 있다.

2) 근본주의신학이란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을 강화하면서 고수하고자 하는 보수신학인데, 성서 문자의 절대무오를 보장하는 축자영감설을 믿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3) 김정준, 만수 김정준 전집 1: 역사와 신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418.
4) 김경재, 김재준 평전: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서울: 삼인, 2001), 3-4.
5)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01.

둘째로, 김재준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근본주의신학의 거두 박형룡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근본주의 신앙노선을 따른다고 자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김재준은 소위 “자유주의신학자”, “신(新)신학자”, “성경 파괴자”,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 “예수의 기적, 부활, 승천을 믿지 않는 자”, 심지어 “마귀”라고 불릴 정도의 이단자였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는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6)

6) 김길성, “총신 100년사 5: 총신의 분열 1 (1946-1950),” 총신대보 243 (2001).

셋째로, 김재준 계열과 박형룡 계열의 학자들이 김재준에 대한 평가를 극단적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감리교 신학자이자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였던 유동식은 그의 양면성을 다음과 같이 짧게 지적했다.

(김재준의) “진보주의적, 역사적 성서이해는 급변하는 현대 역사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는 일에 공헌했다. 그러나 한편 사회-정치적 연구에 치우치는 나머지 초월적인 하나님의 종교적 차원이 가려질 위험성이 또한 개재되어 있다. 여기에 공헌과 위험성을 함께 가진 한국 진보주의 신학의 초석이 있다.”7)

7)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서울: 전망사, 1982), 140.

김재준은 성서를 역사비평 방법에 근거하여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포되었는지를 밝히는 데는 공헌했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가려질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김재준은 신학사상사적인 면에서 어떻게 고려되어야 하는가? 흔히들 김재준을 “신신학자”, “자유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유주의신학을 “악마에게 절하고 천하를 얻으려는 식이어서 애초부터 (인본주의적인 현대주의와 현대문명에)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라고 비판했다.8) 그가 남긴 문서들 역시 19세기 독일의 신학사조인 자유주의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신학은 오히려 바르트, 불트만, 브루너 등 20세기 신정통주의자들의 신학에 가깝다.

8) 괄호 안은 필자의 것임.

김재준은 신학적으로 신정통주의와 맥을 같이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소위 “한국적 보수 신앙인들”의 신학이나 신앙 내용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다.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서 그가 체험한 성령체험과 감격, 길선주 목사가 강조한 새벽기도를 위해서 새벽마다 산에 올랐던 그의 열심, 주기철 목사처럼 십계명의 문자적 내용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사표를 내던졌던 그의 결단, 한경직 목사처럼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면서 청빈하게 지낸 그의 삶, 신비주의자들처럼 꿈이나 환상 등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려는 그의 태도 등은 그가 “한국적 보수 신앙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한국적”이고 “보수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의 신앙은 성경의 문자적 내용을 중요시하면서 삶으로 실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유교적 기독교”라는 20세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보수 신앙과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김재준을 “자유주의자”나 “신신학자”로 낙인하면서 판단하는 것은 그의 신앙이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혼동하는 결과이다.

2. 구약학자로서의 김재준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이 세 사람은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우의(友誼)를 돈독히 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공부한 뒤 한국에 돌아가 한국 신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다짐했고, 선교사 중심의 한국 신학교육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송창근은 목회신학, 한경직은 신약학과 교회사, 김재준은 구약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가 함께 일하기로 했다.

김재준의 구약학에 대한 공부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 - 현재는 피츠버그신학교 - 로 옮기면서 본격화되었다. 송창근의 영향으로 그는 1929년 9월 웨스턴신학교의 학부과정 2학년에 편입했다. 송창근은 웨스턴신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번 편입학에도 그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애초부터 송창근 없는 김재준의 신학공부란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신학수업 마지막까지 송창근의 도움을 받고 그가 공부한 학교를 세 번째 따라 간 것이다 - 청산학원,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

김재준은 웨스턴신학교의 학부과정부터 다시 시작했다.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전공은 구약학을 선택했다. 그는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구약 개론, 구약원전강독 등 구약학 과목은 모두 들었다. 부전공은 조직신학을 택했다. 학업 성적은 우수하여 한 과목만 B+학점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A학점을 받았다. 그리하여 1932년 졸업식 때에 김재준은 신학사(S.T.B.)와 신학석사(S.T.M.) 학위를 겸해서 받았다. 히브리어를 잘한 덕분에 ‘히브리어 특별상’도 받았다.

그의 신학사 졸업논문은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이었다.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면서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때가 언제였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구약학 분야의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슈(issue) 중의 하나였다. 신학석사 학위논문은 “오경 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었다.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구약성서 처음 다섯 권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대한 비평과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등 주전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동을 다룬 것이었다. 김재준은 구약성서학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모두 구약학에 관한 논문을 썼던 것이다.

귀국한 후에 그는 구약학에 관한 글을 주로 발표했다. 남궁혁,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등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평양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을 통해서였다.

1933년 5월호에 게재한 첫 학술 논문,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에서는 욥기 19장 25-27절(“내가 알거니와 나의 구주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땅 위에 서시리로다. 나의 이 가죽이 썩은 후에 내가 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을 보리로다”)을 주석하고 이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욥은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해서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전통적 신앙인 음산한 스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결론했다. 욥기에는 헬라 철학적인 영혼불멸 개념, 즉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념은 없고, 구약성서의 전통이자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죽음 개념인 음부(=히브리어로 ‘스올’이라고 함)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욥기에는 죽어서 천당간다는 개념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욥기에 영혼불멸 개념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구약학계의 정설(定說)로 되어 있다.

같은 해 9월호에 게재한 글,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에서 김재준은 민족의 타락과 다가오는 멸망을 바라보면서 아파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주요 메시지를 그의 생애와 연결했다. 그리고 예언자의 신앙적인 고뇌와 결단, 그의 하나님 말씀 선포 등을 논했다.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일어나 싸움할 때가 왔다. 그는 성전 문 어귀에 서서 의식주의와 성전 광신자들을 향하여 가장 날카로운 선언을 내렸다.…이 용감한 도전은 물론 탐심이 가득한 왕과 제사들이며 미로에 든 광신배들의 격노를 샀을 것이다.…이렇게 하여 당시의 지도계급과 정면 충돌한 그는 받은 것이 오직 능욕과 모독이었다. 동양인의 연한 감정을 가진 그는 또다시 의혹과 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그는 이 글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으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예레미야처럼 현실을 바라보고 고뇌와 결단을 하면서 살기를 촉구했다.

“이리하여 불순한 의식적 국가적 종교를 도덕적, 영적, 개인적 종교로 정화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다. 우리는 이제 신의 위대한 경륜을 찬탄함과 동시에 불세출의 대예언자 예레미야의 일생을 앙모하여 마지않는다.”

같은 해 11월호에 게재한 글,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에서는 주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를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용기 있게 선포하다가 죽은 자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아모스 예언자의 의를 이루었다고 결론했다.

“‘공도는 물같이 흐르고 정의는 찌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5:24)는 것이 아모스의 갈망하는 바였다.… 그는 온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등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의 위에 세워지고 운행하여지기를 바라고 그를 위하여 싸우다가 그를 위하여 죽은 자이다. 이제 우리는 이 불의로 가득 찬 세대에 있어서 이 의의 예언자의 용기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이 예언자의 의를 이루어주신 그리스도의 의만을 선포하며 그를 위하여 분투하며 또 생명을 버림이 마땅할 것 아닌가 한다.”

그는 다음 해에, “실재의 탐구 - 전도서를 읽음”(1934/11)도 게재했는데, 비도덕적이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찾기 어려움을 불평하기보다는 다시금 창조주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로 전도서 저자의 모습을 그렸다.

“(전도자는) 이 모든 철칙의 배후에는 신의 예정이 계심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주재자이신 신은 오직 차디찬 집권자이어서 인정에 끌리며 인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이는 아니었다. 이렇게 숙명적이요 필연적인 우주와 인생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도덕적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새로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각일각으로 닥쳐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응시한 전도자는 모든 이론, 모든 지혜를 다 내어놓고 오직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한마디 말밖에 부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을 떠나 인생은 있지 못한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 쉴 때까지는 우리에게 안심이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모여 속죄의 은총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욥, 예레미야, 아모스, 전도자 등의 인간적인 고민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룬 김재준의 글들은 역사 비평학을 수용하는 당시 구미 성서학계 주류의 연구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읽기에는 별문제가 없는 내용이다. 그는 여기에서 성서 본문의 내용을 역사적, 사회적인 상황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의 말씀을 축자적이고 기계적으로 예언자 등 인간이 받아 적은 것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즉 그는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을 파괴하는 고등비평과 자유주의적 해석 방법”을 수용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 글들 중에서 예언자들에 관한 논문은 당시 부패하고 혼탁한 한국 사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지 못한 한국 교회에 외치고 싶은 내용이었다. 당시 많은 교회의 부흥회는 본래의 목적인 신앙의 강화와 전도를 목적으로 시행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이름으로 교인들을 흥분시켜 헌금을 강요했다. 마치 부패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성전제의를 강조하면서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처럼 말이다. 김재준은 이를 암시하면서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 중 근본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 가장 문제시하는 것은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1934/1)였다. 이 논문은 구약성경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내용을 주석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동정녀’라는 단어는 “방년의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마’를 번역한 것으로, 반드시 동정녀라고 번역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잉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라’는 히브리어 상태 동사 ‘하라’의 분사형태이므로 ‘엘마’(젊은 여자)의 형용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잉태한 방년의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재준의 주석은 히브리어 문법상 맞는 것으로 당시 역사비평학을 수용하는 구미 구약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내용이었다. 또한, “칠십인역”(LXX)이나 신약성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문과 비교 연구해 보면 왜 초대 교회가 본문을 동정녀 탄생으로 읽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또한, 김재준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다는 오해를 낳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김재준은 미국 유학 중 구약학을 주로 공부했고, 귀국한 직후에는 구약학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다. 그의 글들은 한국 장로교회에 편만해 있던 근본주의적 성서해석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던 미국장로교 파송 선교사들 대부분과 그의 추종자들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특히 성서 해석의 문제에 민감해 했으며, 구약의 역사비평학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성서관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3. 성서관

김재준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9) 따라서 그의 성경관 역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10) 그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구속주의 출현과 구속함 받고 영생 얻는 길을 계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역사와 방법, 하나님이 보낸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9) 신정통주의에 관해서는 김재준의 글 “신정통주의의 역사적 고찰”, 십자군(1960/4)을 보라.
10) 김재준의 성경관에 대해서는 그의 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십자군 (1950/3); “성서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 십자군 (1950/5) 등을 참조하라.

김재준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선포했다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영으로 감동시킨 후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그의 인격과 개성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감동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서 숨을 쉬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개인적인 특성과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사람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에는 히브리어라는 언어와 이스라엘 사회의 문화, 그리고 그의 언어 습관 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하나님은 고대인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현대 천문학이나 물리학 등의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와 그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김재준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사람에게 계시되는 주요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이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자한 분이고, 그분은 죄인을 구속하려는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문자의 형식이나 문화가 어떻든간에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이 전달하려고 하는 본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의 내용이 문자적으로,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가 하고 따지거나 모든 면에서 절대로 정확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에 대한 김재준의 이러한 주장은 근본주의자들의 성경관과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자면,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절대 무오설, 즉 성경에는 현재의 과학이나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틀린 내용이 절대로 없다는 주장이나, 성서의 축자적 무오설, 즉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에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나,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말씀을 계시하실 때 사람을 기계처럼 작동하게 하셔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받아쓰게 하셨다는 주장이나, 성서의 축자영감설, 즉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 토씨 하나하나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이 부여되어 있어서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 등을 믿었다. 그러나 김재준은 이러한 관점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한다.

김재준에 의하면, 성경 본문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절대시하는 근본주의적 성경관은 “신앙의 중심이 살아 계신 인격이신 하나님과 그 독생자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서 기록된 문서로서의 인격 아닌 성경으로 옮겨졌으며, 그 때문에 영의 종교가 책의 종교로, 인격의 종교가 물상의 숭배로, 자유하는 복음의 종교가 노예화하는 율법의 종교로 전락”하게 한다고 비판했다.11) 근본주의적 성경관은 기독교를 정체시키고 율법화하며 비인격화한다는 것이다.

11)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 (1956).

김재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성경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비평(criticism)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비평이란 비난이나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진리의 탐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비평을 통해서 성경은 그 진가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즉 진리를 드러내는 성경은 비평을 할수록 그 진리가 더욱 빛나게 된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성경에 대한 비평이 신학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논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 사용하는 일을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경비평은 인간이 체계를 세운 교리에 성경 자체의 실존이 얌전하게 들어맞게 하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교리보다 더 우위에 놓기 위해서라도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포함하는 비평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성경관은 종교개혁자들이 교리와 성경의 권위를 동일시한 로마 카톨릭교회를 반박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교리보다 우위에 놓았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칼빈도 성경은 쓰여질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계시되고 집필되었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서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의미에서 김재준은 칼빈적이며 신정통주의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김재준은 세계 성서학계의 주류적 경향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이의 타당성을 논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헌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성경관은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기독교의 정치참여 신학, 그리고 민중신학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역사비평적 성경관은 역사비평을 포함하는 통시적(diachronic) 성경 해석방법 자체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을 동반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즉 당시 세계 성서학계에서처럼 역사비평을 절대시하면서 저자 중심의 성경해석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비평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이 김재준의 성경관에 대한 비판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비평이 절대시 되었던 20세기 중반까지의 성서해석은 오늘날 공시적(synchronic) 해석방법에 의하여 보완․보충되고 있는 실정이다.

4. 인간의 자유

김재준은 기독교가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종교라고 보았다.12)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인간의 자유를 증언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노예상태에서 자유를 얻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나라인 신정왕국을 건설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어떤 인간이 정권을 가지고 다른 모든 인간을 압박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느님이 주장하시는 나라, 자유와 정의와 자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인간 해방의 기록”이었다. “그 주동은 하느님 자신이었고 그 일을 하느님으로부터 맡은 인물은 ‘모세’라는 지도자”였다. 출애굽 이후, 고대 이스라엘에서 자유와 해방에 대한 기대는 장차 올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어졌다.

12)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와 인간 자유” (1973)를 참조하라.

그는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인간의 자유를 선언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갖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행동을 속박하는 율법주의로부터의 자유 등을 선언하면서 인간 해방을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자유란 인간의 내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문화, 종교 등을 포함한 외적인 자유도 포괄하는 것이었다. 또한, 바울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얽매는 율법, 규칙, 제도, 정치, 경제, 윤리 등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선포했다고 보았다.

김재준에 의하면, 오늘날 인간도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령의 증언으로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물질적 탐욕, 또는 어떤 인조 ism에 종이 될 만큼 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과 자각을 통하여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자유란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피로 증거해 주신 자유, 인간에 대한 최후의 속박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으로 인간의 자유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자유의 값이 정해진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데서 값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번 돈을 어떤 데 쓰느냐에서 그 돈과 그 돈 번 사람과의 값이 결정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자유를 얻은 인간은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 자유를 가장 값있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적 자유를 가진 자만이 빈곤이나 시련이나 유혹이나 죽음의 모든 것을 이기고 오직 하느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계명을 지키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건설적인 자유 봉사를 즐겨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13)

“우리가 진정 우리의 자유를 높은 차원에까지 올리려면 ‘자유하는 봉사’ ‘나는 아무에게도 종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 하는 탁 트인 인간성으로서의 ‘자유’까지 가져야 할 것이다. 자유하면서 봉사하는 기쁨을 가진 자유인만이 참 자유인이라 생각된다.”14)

13) “기독교의 기본 문제” (1955).

14) 인간이기에, 137. “나는 아무에게도…종이 된다”는 루터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김재준이 제시한 자유란 한마디로 죄의식이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인 인간의 내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외교 등의 자유를 포괄하는 인간의 외적인 자유도 포함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체험한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답으로서 이 땅에서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 자유에 대한 김재준의 이러한 사고는 그로 하여금 가난과 물질을 초월한 청빈의 삶, 불의에 맞서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삶,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삶, 두려움 없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삶 등을 살게 했다. 또한, 그의 자유에 대한 사고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자유란 “보수 신앙인”들이 주장하는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외적인 것도 포함한다는 것을 일반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계몽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인간의 외적 자유에 대한 강조는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 항거하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관은 인간의 내적 자유보다 외적 자유를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균형을 잃고 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그의 사고가 당시 사회의 필요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역사 이해

김재준은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역사를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무대라고 보았다. 이 무대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역사란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 세속세계다.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그 속에서 일하시는 무대다.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활동을 내포한 세속활동이다. 역사는 동시대적인 그리스도(contemporary Christ)가 일하는(operate) 영역이다.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동적(dynamic) 행동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의복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자의적이면서 신실하다. 다이내믹하면서 그리스도론적이다.”15)

15) “역사참여의 신학” (1971).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하나님이 역사 현실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지향하고 계신가 하는 것을 분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그 지향하는 역사 과정에서 그것을 위하여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그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구속사적 입장에서 이 현실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 역사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지향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과 지향에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16)

16) “역사참여의 문제와 우리의 실존”, 기독교사상 (1958/3).

김재준은 한국의 역사도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관계성 속에서 이해했다. 예를 들자면, 그는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것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과 유사하다고 평가하면서 8․15 해방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1945년 8월 15일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값없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국제정치의 세력 균형과 일본 군벌에 대한 응징 등을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그 배후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봅니다(단 5:24-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보다도 위로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경위와 우리 민족이 일제의 합방에서 풀려난 것과는 그 과정과 성질과 상황이 비슷합니다.”17)

17)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 (1962).

그렇기 때문에 해방과 더불어 주어지는 건국의 기회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조국이 해방된 것이 하나님의 연민으로 말미암은 은혜임을 절감하여 무엇으로 감사의 제물을 드릴지 마음에 넘쳐 말이 없음을 깨닫는다. 다만 이 나라 자체가 성별된 하나님의 성소가 되며 백성은 하나님의 뭇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길이길이 이 땅에 머물러 천하만국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바라보고 감히 천과로 범치 못하는 에덴이 되기까지 빌고 또 일하며 이를 위하여 살고 또 죽는 것이 만일의 보은임을 다시 다시 생각하는 바이다.”18)

18) “기독교의 건국이념” (1945).

다른 한편, 그는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했다.19) 이 심판은 교회나 일반 국민이 자유의 선풍에 휘둘리고 부수어져 혼란과 분열의 시대를 이룬 것에 대한 심판이었다. 하나님이 은혜로 해방을 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는 건국의 기회로 삼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19) “한국신학대학 25년 회고”, 신학연구 (1965).

그는 정치적, 경제적 불의가 자행되고 있는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의 상황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입장에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역사를 바르고 정의롭게 하려는 노력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부정, 부패가 나라 전체에 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그러나 부패한 집권층의 귀에 거슬리면 신변이 위험하다 해서 불의를 불의라고도 못하고 잠잠하기만 한다면 결국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 활동에 외면하는 불신앙자가 된다. 노동 대중이 기업주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고 경제성장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왔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일 수가 없다.”20)

20) “역사참여의 신학” (1971).

김재준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구속사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약성서의 구속사적 이해는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국 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의 활동 무대로 표현하면서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여긴다.

김재준은 구속사적 역사이해를 한국 역사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면서 실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구속사적 성서해석을 해석 그 자체로만 끝내지 아니하고 이를 한국 역사에 적용하여 한국사를 성경의 구속사적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헌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이해와 실천은 독재정권의 핍박과 박해 속에 있는 역사 참여자들에게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참여를 신앙적 책임감과 소명감으로 이해하게 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에는 역사와 역사 참여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낙관론, 역사를 구속사라는 틀 속에서 도식화하는 것, 역사 속의 인간이나 체제 등을 선과 악으로 예리하게 나누는 이분법 등이 내재한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지적될 수 있다.

6. 맺는 말

김재준은 미국 유학시절 구약학자가 되기를 원했다.21) 그의 삶은 이러한 그의 바람을 반영하고 있다. 즉 구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로서 그의 초기 삶은 글을 통하여 근본주의와 맞서는 것이었고, 후기 삶은 행동을 통하여 독재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즉 구약학자로서의 초기 삶은 글을 통하여 성서문자주의를 신봉하는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고, 후기 삶은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고 교회의 사회화를 이끌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김재준의 삶은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고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양심을 계승하려는 그의 생각은 그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교육받은 한국 유학의 선비정신에 기초했기 때문에 더욱 확고해 질 수 있었을 것이다. 유교식 교육이 경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그 내용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가 기독교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기를 원했고, 그 경전의 내용을 삶에서 표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자연스런 현상이었을 것이다.

21)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받은 유학 교육은 경전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성서학자가 되기를 원했고, 유교 경전이 강조하는 법과 윤리에 대한 영향으로 구약학자가 되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강사 : 천사무엘 교수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M.Div.)를 받았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예일대학교 신학부(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를 졸업(S.T.M.)하고,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중에 미국 장로교(PCUSA) Southern New England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하트포드 한인교회, 새크라멘토 연합장로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구약외경의 이해>(한국신학연구소, 1996), <창세기주석 -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주석 시리즈>(대한기독교서회, 2001),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살림, 2003), The Exodus Story in the Wisdom of Solomon(Sheffield Academic Press, 1997)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Anonymity in the Wisdom of Solomon”, “Three Characters in the Wisdom of Solomon 3-4”, “구약성서의 시각에서 본 새로운 국가권력형태”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