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11회] 죽음에서 발생하는 윤리문제 / 박명철 박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20 08:54
조회
1774

[제11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6년 9월 28일(목) 오후 5-7시

“죽음에서 발생하는 윤리문제”

박명철 박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 본회 학술위원)

[I] 연구의 주제와 범위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철학적 이해, 각 민족과 문화전통에 따른 관습적 이해, 각 종교에 따른 종교학적 이해 등. 죽음 내지 생명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관에 대한 견해도 상이한 차이를 보일 수 있으며, 실재적 생활에서의 윤리적 적용에도 다양한 견해를 보일 수 있다. 여기서는 기독교의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죽음의 문제, 곧 죽음 혹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다음으로 고려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정의와 죽음의 시점에 관한 문제이다. “죽음”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를 달리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자살에 대한 의미부여, 임종 시 존엄사의 문제, 안락사 등에서 더욱 뚜렷하게 작용하고 있다. “죽음의 시점”에 대한 정의 또한 윤리문제에 주요한 요소가 된다. 죽음의 시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신체의 특정기관 내지 세포조직의 파괴 내지 죽음을 기점으로 하여 뇌사, 심장사, 폐사(맥박사), 세포사 등 다양한 입장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이것의 정당성 근거 또한 거론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자연사와 죽음의 시점에 대한 인위적 단축에서 발생하는 법적, 윤리적 문제는 이에 해당된다.

한 인간의 죽음을 기점으로 하여 우리사회에 문제점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상업적 요소들이 있다. 장례문화 내지 장례사업, 시신기증 혹은 장기매매, 자살사이트의 집단적 자살, 임종 시 (필요이상의) 의료비용 등, 이에 대한 문제는 여기에서 주제화하여 다루지 못하고 있다. 본 논문은 아래의 3가지 주제, 즉 자살, 안락사, 호스피스를 중심하여 제한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II] 죽음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

[1]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적 이해

기독교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죽음은 “죄의 값” 혹은 “죄의 결과”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의 수명은 숙명적으로 제한되었다.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창 3:19)으로 운명 지어졌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생명나무”에의 접근이 금지되었다.(창 3:22) 그리고 인간의 수명이 길어야 “80”(시 90:10) 혹은 “120”년(창 6:3)으로 제한되었다.

구약성서는 “흙으로 지은” 인간과 “생명의 기운”(生氣, Ruach)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존재(Nefesh)가 된 인간을 구분하고 있다.(창 2:7)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통하여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할 수 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한 인간이요, “산 존재”(lebendiges Wesen)로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인간 본래의 모습이 됨을 의미한다.1)

1) 참조, C. Westermann, Genesis Kapitel 1-11, 1976, 282-283쪽.

복음서 누가 9:25에서 예수는 인간 “자신”(“eauton”, 그러나 마태 16:26은 “psuche”/‘영혼’으로 기록함)을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자기 자신”이란 영혼과 같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어느 특정의 부분이나 기능을 의미하지 않는다. 총체로서의 인간, 곧 그의 인간 됨(존재)을 의미하는 산자의 삶(Leben) 자체라 할 수 있다. 마태 10:28과 누가 12:4는 이 세상에서 죽일 수 있는 것으로서 “몸”(soma)과 “그 이상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이 때 “그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란 죽거나 죽일 수 있는 목숨(soma)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2)

2) 참조, Evangelischer Erwachsenen Katechismus, 1975, 121쪽.

예수는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것을 부인하고 죽음이 정복되었음을 입증한다. 그의 부활은 “죄의 값”으로 숙명적으로 여겨왔던 죽음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므로 요한이 고백하듯,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 11:26)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이때 “나를 믿는 자”라는 의미는 ‘산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자리에 ‘산 자’로 대입하여 읽는다면 그 뜻이 더욱 뚜렷해 질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요한이 고백하듯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와 맥을 같이 한다 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현대 과학과 의술의 도전이다. 현대의술은 생명의 탄생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의 수명 도 연장하여 무한히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생물학적 인간생명의 한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여기에 도전할 것인가? 죽어도 살고 살아도 죽지 않는 인간 본연의 인생을 살 것인가? 이것은 이 논문의 중심 의제가 된다.

[2] 자살(suicide, Selbsttötung)

2.1. 자살에 대한 개념

“타살”은 행위 당사자와 피해자가 다르지만, “자살”은 그 행위의 장본인이 피해자 자신이 된다. 이에 따라 죽음의 희생자는 스스로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 된다.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에 따르면, “자살이라는 용어는 희생자 자신이 일어나게 될 결과를 알고 행하는 적극적 혹은 소극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결과로 일어나는 모든 죽음의 사례들에 적용된다.”3)

3) E. 뒤르켐(김충선 역), 『자살론』, 20쪽. 원저서명: Emile Durkheim, Le Suicide, 1897.

이상의 정의에서 살펴볼 때, 자살자는 - 그 동기가 어떻든 간에 - 행위의 순간에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뒤르켐은 자살자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은 죽음이나 무의식 속에서 행한 행동으로 인한 죽음을 자살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예를 들어 건강을 돌보지 않고 소홀히 하다 죽은 경우라든지, 자식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자신을 맹목적 혹은 본능적으로 행동한 어머니의 죽음. 정신질환 - 과대망상편집증(monomania), 조울증 등 -에서 사고와 행동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발생하는 죽음, 환각이나 착란에 기인한 광란증 자살(maniacal suicide), 우울증 자살(melancholy suicide), 강박적 자살(obsessive suicide), 충동 혹은 자동적 자살(impulsive or automatic suicide) 등 정신병적 상태에서 발생하는 죽음은 자살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이 같은 뒤르켐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심리학자 S. 프로이드는 자살을 보다 광의적인 의미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살은 자기 파괴적인 “죽음에로의 충동”에 의한 것으로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목표를 둔 일체의 공격적 행위(aggression) 자체를 자살의 범주로 보고 있다. 즉 알코올, 마약, 니코틴 오용 등을 자살의 행위에 포함시키고 있다.4)

4) 참조, S. Freud, Trauer und Melanchoie, 1917.

2.2. 자살의 유형

E. 뒤르켐에 의하면 자살은 사회적 괴리(deintegraion)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고, 높은 자살율의 원인을 가치관의 붕괴와 관련시켜 지적한다. 그는 사회와 개인 사이의 융합과 갈등 관계에서 자살을 파악하고, “자살은 개인들로 구성되는 사회집단의 통합(종교사회의 통합, 가족사회의 통합, 정치사회의 통합)의 정도에 반비례한다.”5)고 한다. 아래에서 그의 자살유형의 분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5) E. 뒤르켐(김충선 역), 『자살론』, 216쪽.

가) 이기적 자살

이기적 자살은 자신이 사회에 올바르게 통합되지 않아서 고립되었을 때 발생한다. 사회적 통합, 즉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개인들을 결합시키는 사회의 집합적인 힘은 자살을 가장 잘 제한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기적”이란 말은 개인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 보다 강력하고, 사회적 자아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주장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극단의 이기주의는 자살에 기여하는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자살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 경우 개인은 그와 사회를 연결하는 유대가 끊어짐으로 그와 그의 삶 사이의 유대 또한 이완된다. 이기적 자살자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무가치하고 목적이 없는 존재로 느끼고 삶을 포기한다. 이기적 자살의 직접적 동인이 마치 그가 겪는 생활고나 고뇌, 좌절 등 사적 생활의 여건과 사건에 기인한 우발적이고 특정 개인의 충격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것은 사회자체의 해체상태 내지 사회적 질병이 자살동기의 온상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사회적 목적과 의무와 관련하여 행해진다.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의무와 강제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낸다. 개인의 인격은 사회에 비해 작은 가치 밖에 가질 수 없으며, 개인의 인격은 그 존재의 권한을 사회에 맡긴다. 이 경우 개인은 집합적 생활에 완전히 흡수된 상태이다. 이타적 자살은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정열과 극단적 에너지로 넘치며, 그 행동은 희망과 신념으로 차있다. 혁명기에 빈번한 자살 경향이나 민족운동에서의 열정, 종교적 열광에서 개인 인격의 상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국가와 정당, 종교의 이익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타적 자살은 집단의 목적이나 정체성에 대한 의무로 요구된다.

다) 아노미성 자살(anomic suicide)

아노미(anomy) 현상은 가장 규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욕망의 규제를 받지 못함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무규율 상태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를 아노미 현상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집합적 질서가 흔들리고 모든 균형의 상실은 - 이것이 비록 사회적 활력소를 증대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하더라도 - 자살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 사회질서 안에서 중대한 재적응이 일어날 때, 그것이 급작스러운 성장이든 예기치 않은 재난이든 간에 인간은 더욱 자살하기 쉽다.

아노미성 자살은 이기적 자살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불충분의 조건에 기인한다. 이기적 자살이 인간 삶의 존재근거를 자기의 삶에서 찾지 못함에 기인하고 있다면, 이타적 자살은 존재의 근거를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 이기적 자살이 사회와의 관계에서 개인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경우라면, 아노미성 자살은 개인적 열망에 대한 사회적 영향의 결핍으로 개인을 제동 없이 방치함으로 일어난다.

아노미성 자살은 “숙명적 자살”(fatalistic suicide)과는 구별되는데, 숙명적 자살은 강압적 규율에 의해 미래가 무자비하게 제한되고, 욕망이 난폭하게 제압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엄격한 가정규례 하에 남아선호가 강조되는 전통사회에서 자녀 없는 기혼녀의 자살이나 노예제도 하의 노예의 자살 등이 그러하다.

아노미성 자살의 형태는 열정적이다. 이 열정은 이타적 자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종교적 열정도 아니요 정치적, 도덕적 신념도 아니다. 이것은 좌절과 관련된 모든 감정이며 분노이다. 아노미성 자살은 자신에게 자살을 가져온 불행에 대한 책임을 특정 개인이나 대상을 향한 위협과 비난으로 행사한다. 이런 분노가 자신을 향할 경우에는 자살에 이르고, 다른 사람이나 대상으로 향할 경우에는 살인이나 폭력으로 나타난다.

뒤르켐은 자살의 기본적 유형으로 이상 3가지,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성 자살”로 분류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엄격하게 각각의 영역이 구분된 형태가 아니라 상호 관계를 맺고 작용하며, 그 혼합유형의 가능성이 제시 되고 있다. 즉 “이기적-아노미성 자살”, “아노미성-이타적 자살”, “이기적-이타적 자살”의 형태이다.6)

6) 뒤르켐, 상게서, 314쪽.

2.3. 자살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접근

가) 자살에 대한 공교회의 이해

고대 희랍사회에서 자살은 안락사와 함께 상류층을 중심으로 만연한 한 현상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간수를 매수하고 도주할 것을 권하는 친구들의 권유를 거부하고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 육신의 안일보다 영혼의 자유함을 더 소중히 여겼고,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진정한 삶을 누리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 에피쿠러스(Epicurus) 학파나 쾌락주의 사조는 고통은 악이고 쾌락은 선으로 보았으며, 고통이 없는 경지를 죽음으로 보았다. 이들은 삶의 고통을 끝내는 자살행위를 선으로 보는 경향이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경우, 투우장에서 보듯 죽음에 대한 공포란 없다. 경기장에서의 영웅적 죽음은 예찬되고, 관중은 죽음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았다. 단, 노예의 자살이나 병사의 자살은 주인에게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기에 금지되었다.

초대 기독교는 자살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물론 기독교 박해가 가혹해 짐에 따라 순교를 미화하고 죽음을 구원받기 위한 지름길로 예찬된 부분이 있다. 중세교회는 자살을 자연법에 반하는 것으로 금지하였다. 신체는 자연히 보존되어야 하고, 자살은 공중생활의 손상이 됨으로 도덕률에 위배되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공교회의 자살금지는 더욱 강화되어 452년 아를(Arles) 회의에서는 자살을 범죄로 규정한 바 있고, 563년 프라하 회의에서는 형벌적 규제를 받도록 했다. 공교회의 규례에 대한 예를 들면,

“성스러운 미사를 통한 추도의 영예를 받지 못하며, 시체를 묘에 묻을 때에도 성가를 불러 주어서는 안 된다.”7)

7) 상게서, 351쪽.

이 같은 자살에 대한 교회의 규제는 불란서 혁명(1789년) 이후 달라지게 되는데, 혁명이후 모든 재판규정은 철폐되고 자살을 법적 범죄로부터 제외시켰다.

나) 자살에 대한 성서적 의미

성서에는 자살한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삼손(삿 16:30)은 과거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고 궁지에 빠진 민족을 구원키 위한 의미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제물로 내놓고 있다. 사울 왕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아히도벨(삼하 17:23)과 예수의 제자, 유다의 죽음(마 27:5)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으로 묘사되고 있다. 삼손의 경우, 희생적이고 영웅적 죽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에 다른 경우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의 결과에 따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 훼퍼는 자살을 죄의 결과로 묘사되는 성서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성서가 자살을 정당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살을 금하는 대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를 은총과 자비로 부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8)

8) 본 훼퍼(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145-146쪽.

성서 안에는 그 어떤 곳에도 문자적으로 자살을 금지한 곳은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경우 제6계명, “살인해서는 안 된다”를 확대해석하여 자살에 적용했다. 즉, 이 계명은 타인의 생명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에도 유효한 계명이라는 주장이다.9) 어거스틴은 그 당시 로마가 영웅적 죽음을 예찬하는 권리나 사조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본 훼퍼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을 희생할 자유가 존재하는 한, 자살을 금지하는 것은 절대화 될 수 없다.”10)

9) 비교, M. Honecker, Grundriß der Sozialethik, 131쪽. 10) 본 훼퍼, 상게서, 147쪽.

다) 자살에 대한 기독교윤리의 접근

E. 뒤르켐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사회적 가치관의 붕괴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이반(아노미 현상)을 그 주요인으로 보고 있다. F. 니체(F. Nietzsche)는 인간과 동물의 구별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유에 두고 있다. 그는 - 성서의 인간이해11)와 비슷하게 - 산자의 인생을 육체적 생명과 구별한다. 그는 육신의 목숨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한 죽음”을 찬양한다.12) 중세 스토아 학파는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자의 자살에 대하여 “자살은 자유의 마지막 가능성”으로 인정하고 있다.13)

11) 참조, 본 논문II.1. 항목. 12) 비교, M. Honecker, 상게서, 132쪽.
13) ebd.

자살에 대한 다양한 견해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 M. 호네카는 개념상의 차이점을 구분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자기살해”(Selbsttötung)와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Lebensopfer)을 구분하고, 자유에 있어서도 자살의 자유(Freiheit zur Selbsttötung)와 자기희생의 자유(Freiheit zum Lebensopfer)를 구분한다.14) 인간에겐 자신을 죽일 자유도 있지만, 자기 목숨을 희생할 자유 또한 있다. 정치적 저항운동이나 잔인한 고문과 같은 극한 상황의 경우, 자신의 순결과 동지를 위해 자기생명을 희생할 자유는 절실한 문제가 될 수 있다.

14) 상게서, 133쪽.

성서는 생물학적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비교, 마 6:25 ; 10:31, 눅 12:7) 그렇다고 육체적 생명 그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한 알 씨앗이 썩어 죽어야 함’이 복음이 지향하는 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인생의 제1되는 목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도 예루살렘 입성이 자신의 운명이 죽음으로 끝이 날 것임을 미리 알고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 형식적으로는 타살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 내용적으로는 자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으로서의 자살이 된다. 개신교 윤리에서 자살의 금지는 엄격한 규범으로 가능하지 않다.

D. 본훼퍼(D. Bonhoeffer)는 - 니체의 “자유한 죽음”에서와 같이 -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그의 운명의 주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거기에 자살의 합법적 가능성을 인정한다.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육체적 목숨을 고귀한 선을 위해 버릴 수 있다. 생명을 버림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자유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적 생명은 인간에 대해 마지막 권리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요, 최후의 가능성이다. 최후의 가능성으로서의 유효성, 마지막 시도에 대한 판단의 객관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으로서의 자살”과 자신을 위해 목숨을 끊는 “이기적 자살” 내지 “자유의 오용” 사이의 한계선은 인간의 눈으로는 거의 식별이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자살자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판단의 근거란 존재하기 어렵다. 자살은 의식적인 자기결단에 기인한다. 감추어진 자기결단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 결과만을 우리는 보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법정에서만 그 정당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살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는 자기행위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살이 자기 정당화 내지 의인화(義認化, Selbstrechtfertigung)를 위한 마지막 수단이 될 경우, 이것은 불신앙의 행위가 된다.15) 생명을 버릴 것인가의 행위에 대한 자유는 인간에게 있지만, 그 정당성은 자신의 권한 밖에 속한다. ‘의롭다’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고유영역이기 때문이다.

15) D. Bonhoeffer, Ethik, 1949, 112쪽.

[3] 안락사(euthanasia)

안락사는 임종 시기에 심각하게 대두되는 윤리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의사의 덕목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16)에 따라, 환자의 생명을 끊거나 환자가 죽도록 도와주는 일을 금기시 해 왔다. 현대의술의 발달에 따라 오늘날 의사는 산소호흡기, 인공심장기, 혈액순환기 등을 이용하여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게 되었다. 문제는 자연사(自然死) 이전에 생명단축의 의료행위에 대한 터부를 깰 수 있는가? 특히 안락사 부분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는 말기환자에게 불필요한 치료를 중단하고, 고통 없이 죽어가도록 도와주는 의료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윤리의 핵심적 이슈가 된다.

16) 히포크라테스 선언에는 아래의 부분이 있다. “... 환자는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죽음의 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자문에도 응하지 않을 것”.

3.1. 안락사(安樂死)의 개념

“안락사”는 희랍어 “Euthanasia”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eu+thanasia의 합성어이다. ‘eu’는 ‘eutuxes‘에서 온 것으로 ’좋은’ 혹은 ‘행복한’(good, glücklich)의 뜻이고 ‘thanasia’는 ‘thanatos’라는 단어에 기인한 것으로, ‘죽음’(death, Sterben)을 의미한다. 즉, 희랍어 안락사란 ‘아름다운’, ‘좋은’, ‘행복한’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희랍사람은 안락사에 대하여 거부감 없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17)

17) 참조, 본 논문, II.2.3.가) 항목.

3.2. 안락사의 유형

안락사의 형태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환자가 의식이 있어 자기 결단이 가능한 경우의 “자의적 안락사”, 이에 비해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비임의적 안락사”, 환자의 반대에도 실시하는 강제에 의한 “타의적 안락사”가 있다. 환자를 죽게 하는 행동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아래와 같이 또한 분류할 수 있다. “적극적 안락사” - 이것은 환자의 요청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해서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행위로서 의사가 행위의 주체자가 되며 타살의 형태를 띤다. “조력사”(助力死) - 이것은 의사가 환자 스스로 생명을 끊도록 도와주는 행위자가 된다. 그러나 죽음의 주체는 환자 자신이 되며, 자살의 성격을 갖는다. “소극적 안락사” - 이것은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유지의 필수적인 영양공급, 약물 투여 등을 중단함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임상의학상 치료중단에 해당된다. 죽음의 주요원인은 질병이 되고, 자연사의 성격을 갖는다. 이상의 유형을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

도표: 안락사의 유형별 성격분류

3.3. 안락사의 윤리적 문제

가) 적극적 안락사 및 조력사의 유형에 따른 사례

우리는 안락사의 유형에 따라 윤리적인 문제가 되었던 역사적 사건과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 안락사의 가장 험악한 유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나치정권이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신체장애자와 정신질환자를 학살하는 비극을 들 수 있다. 우생학적 근거로 한 적극적 안락사는 허용될 수 없는 비윤리적 행위이다.

일본 도카이대학 부속병원사건의 경우, 1991년 4월 이 병원에 입원중인 58살의 남성환자는 골수암 진단을 받았다. 격렬한 통증을 수반하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는 약물요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부인과 장남은 부친의 고통을 지켜보며 의사에게 안락사를 요청하였고, 의사는 자기 판단 하에 염화칼륨 원액을 주사하여 환자를 죽게 했다. 의사는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본인이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안락사는 위법”이라는 판결이다.18)

18) Alfons Deeken(오진탁 역),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2003, 104쪽.

일본 교호쿠 병원의 안락사 사건의 경우, 1996년 4월 암말기의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주치의가 근육이완제를 투여하여 죽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담당의사가 다른 의사에게 판단을 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시행한 것이다. 판결문에는 아래의 4가지 판단기준을 열거하고 있다.

* 환자가 참기 힘든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 죽을 시간이 임박해 있다
* 환자의 육체적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으므로 더 이상 다른 대체 수단이 없다.
* 생명의 단축을 허락하는 환자의 의사표시가 분명하다.19)

19) 상게서, 105쪽.

마지막으로 미국 미시간주의 의사 케보키안의 경우인데, 그는 1990년 이래 30명이 넘는 말기 환자의 명확한 의사를 확인하고 나서 자발적인 안락사를 방조했다. 그는 그때까지 세 번 고소당했다. 그 중 두 번은 살인죄로, 한번은 자살방조죄로 기소되었지만, 1996년 5월 세 번째 기소사건은 무죄판결을 받았다.20)

20) 상게서, 106쪽.

나) 소극적 안락사와 존엄사(尊嚴死)

앞서 언급하였듯이 소극적 안락사란 말기환자에게 있어서 생명의 연장을 위한 인위적인 특별조치를 중지하기도 하고, 혹은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편으론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케 하는 의학적 조치를 거부하는 것이 되며, 다른 한편 환자가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죽을 권리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조치이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는 1981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열린 세계의사총회에서 선언문으로 채택된 바 있고, 1983년 일본에서는 “존엄한 죽음을 실천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에 있다. 이 모임의 선언서,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저는 제가 병에 걸려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한 경우를 대비하여 저의 가족, 친척, 저의 치료를 맡고 있는 분들께 다음과 같은 저의 희망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선언서는 저의 정신이 아직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적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정신이 온전할 때는 이 선언서를 저 자신이 파기할 수도 있지만, 철회하겠다는 문서를 재차 작성하지 않는 한 유효합니다.

* 저는 병이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고 곧 죽음이 임박하리라는 진단을 받은 경우, 죽는 시간을 뒤로 미루기 위한 연명조치는 일체 거부합니다. * 다만 그런 경우 저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는 최대한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로 인해 예를 들어 마약 등의 부작용으로 죽음을 일찍 맞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 제가 몇 개월 이상 이른바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을 때는 생명유지를 위한 연명조치를 중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저의 선언서를 통해 제가 바라는 사항을 충실하게 실행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저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모든 행위의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21)

21) 상게서, 96-97쪽. 이 선언문은 국제적으로 “Living Will”(생존유언)로 알려져 있으며, 1977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자연사(自然死) 법안이 가결되고, “Living Will”에 동의한다는 의사표시를 남겨 놓으면 인공적인 수명연장의 중지를 뜻하는 것으로 법조문에 명시하고 있다.

다) 기독교 윤리의 재고

A. 안락사에 관한 성서의 말씀

성서에는 이스라엘 사울 왕의 최후에 대하여 서로 상이한 보고를 기록하고 있다. 즉, 하나는 사울 왕이 자살한 기록이요 다른 하나는 안락사를 한 기록이다. 삼상 31장은 사울 왕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최후를 맞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울이 자기의 무기 당번 병사에게 명령하였다. ‘네 칼을 뽑아서 나를 찔러라. 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능욕하지 못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 무기 당번 병사는 너무 겁이 나서, 찌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어졌다. 그 무기 당번 병사는 사울이 죽은 것을 보고, 자기도 자기의 칼을 뽑아 그 위에 엎어져서, 사울과 함께 죽었다.”(삼상31:4-5)

여기서 사울의 죽음은 자살에 해당한다. 자신의 민족신(民族神)에게 충성을 다하고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모욕과 수치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숭고한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 자살의 형태 중세에서 “이타적 자살”이 되고 있다.

삼하 1장은 사울 왕의 최후에 대하여 아멜렉 사람이 다윗에게 보고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사울 임금님이 저더러 ‘어서 나를 죽여 다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하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일어나서 사실 것 같지 않아서, 다가가서 명령하신대로 하였습니다.”(삼하 1:9-10)

여기에서 사울 왕의 죽음은 안락사에 해당한다. 고통을 면키 위해 인위적인 생명단축을 아멜렉 사람에게 요청했고, 아멜렉 사람은 이를 이행한 것이다. 안락사 가운데서도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이 경우는 “일본 교호쿠 병원의 안락사 사건”22)과 유사하다. 즉, 환자의 상태에 대하여는 “일어나서 사실 것 같지 않아서”(1:10)라고 하는 조력자의 주관적 견해만이 있고, 그 행동은 독단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다윗은 이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주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살해했다”(1:14)는 종교적 이유에서 행해지고 있을 뿐 윤리적인 측면은 나타나 있지 않다.

22) 참조, 주 19.

B. 윤리적 문제로서 존엄사

안락사에서 고려되는 사항은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환자가 참기 힘든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 통증 극복의 문제이다. 말기환자에게서 고려되는 것은 생애를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이다. 조력사와 같은 자살의 형태로 마감할 것인지, 자연사의 형태로서 환자가 치료를 거부를 함으로 존엄사로 마감할 것인지? 이 두 가지는 생명을 스스로 단축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다음으론 고통을 생애의 마지막까지 가지고 가서 자연사하는 방법, 곧 호스피스로 갈 것인지 이다.

우선 첫 번째 부분으로서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환자에게 “치료중단”을 요구할 권리가 요구된다. 치명적 병에 걸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환자 스스로 더 이상의 생명연장을 포기하여 생명을 유지해 주는 각종 치료를 그만두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여러 가지 첨단의료 기구들의 발달로 인하여 불필요하고 임의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죽는 과정을 연장시키기 위해 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식물인간인 경우,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고 의식을 다시 찾거나 인간의 자유를 다시 행사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의료기기를 이용하여 단순히 죽는 과정을 연장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환자로 하여금 품위 있게 죽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가톨릭교회는 “비상한 수단”으로 생명 연장하는 것을 중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23)

23) A.Deeken, “인간의 죽음과 죽어감”, 연세대간호대 창립100주년기념 알폰스 디켄 초청강연집, 2006년 5월3일-4일, 20쪽. 여기서 “비상한 수단”이란 “보통수단”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보통수단이 음식물을 먹이는 것 등 자연적인 방법이라고 한다면 비상수단은 산소호흡기, 인공팩, 인공심장 등 의료기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1959년 이래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되고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인간의 삶이란 단순히 목숨 부지(扶支)를 의미하지 않는다. 삶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실현해 나감으로 누리게 되는 인생의 가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엄한 삶을 누리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극적 안락사”에서 요구되는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에드윈 라이샤워는 목사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일본에서 주일미국대사로 일한 사람이다. 그는 1990년 9월 미국의 한 병원에서 간암으로 죽음을 맞았다. 임종을 앞두고 행한 그의 유언비적 말씀과 마지막 병상에서 취한 그의 존엄한 죽음은 신앙인과 그 외의 많은 분에게 교감이 되기에 여기에 부언하고자 한다.

“라이샤워 씨는 (병세가 악화된) 그 무렵 가족에게 ‘치유 불가능한 경우 인위적인 생명연장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생명은 신의 부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뒤 ... 병세가 위독해진 어느 날 그는 가족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의사에게 생명연장을 위한 의료기기를 떼어내라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의식을 잃었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24)

24) A. 디켄, 상게서, 103-104쪽.

임종시간이 임박하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말기환자에게 있어서 남은 시간의 여생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이와 같은 영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가 “호스피스”이다. 이에 대하여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4] 말기환자와 호스피스(Hospice)

4.1. 호스피스의 개념과 팀 활동(team-work)

불어 “hospice”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hospitum”, 즉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라는 말에 기원한다. 영어의 “hospital”이나 “hotel”, “hospitality”는 모두 라틴어의 어원을 같이한다.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C. 선더스(Cicely Saundes)는 현대 호스피스의 배경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중세기 호스피스는 순례자와 나그네들이 환영받는 곳이었다. 상처를 입거나 쇠약해진 길손이 보살핌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새 삶을 찾는 집’이었다. 특히 길고 고생스러운 성지순례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병을 얻거나 죽기까지 하였던 것인데 호스피스는 이들이 쉬고 새 삶을 찾는 피난처였다. 근대 들어와서 아일랜드의 애덕 수녀회 수녀들이 중세 호스피스를 계승하여 1879년에 더블린에 성모 호스피스(Our Ladýs Hospice)의 문을 열었고 1905년에는 런던에 성 요셉 호스피스(Saint Joseph́s Hospice)를 세웠다. 이 두 호스피스는 많은 장기 환자를 수용했고 그 중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특별히 보살피게 되자, 호스피스는 임종환자를 보살피는 곳이라는 뜻으로 정착, 사용되게 되었다.”25)

25) 재인용: 김옥라 편저, 『호스피스』, 1990, 23쪽.

오늘날 호스피스는 독립된 호스피스 병동이나, 일반 병원의 한 부속 병동, 혹은 가정 간호팀 등으로 세워져 있다. 활동은 “호스피스 팀”이 구성되어서 팀 활동으로 하고 있는데, 팀의 구성원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참여하는 방식이 된다. 전문가로는 호스피스 조정관(coordinator), 의사, 간호사, 가정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사목, 약사, 영양사, 임상심리사, 물리치료사, 언어치료사, 작업치료사, 미술치료사, 음악치료사 등이 되며, 비전문가로는 환자가족, 자원봉사자가 된다.26) 이런 의미에서 호스피스는 단순히 시설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호스피스 팀의 활동을 의미한다.

26) 고양곤, “노인복지측면에서의 죽음과 죽어감”, 한국죽음학회지, 죽음연구, 2005, 제1호, 62쪽.

이들은 불치의 병뿐만 아니라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이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생을 정리하고, 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환자와 그 가족의 보살핌에 관심을 쏟고 있다.

4.2. 안락사와 호스피스 사이에서

A. 디켄 교수는 말기환자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으로 ‘고통’과 ‘고독’을 지적한다. 고통은 육신의 통증을 의미하며, 고독은 ‘홀로있음’과 ‘버림받음’이라고 하는 정신적, 심리적 상처와 고뇌에 해당된다. A. 디켄 교수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고통 중 우선적으로 거론되어야 할 것은 통증에 대한 공포이고, 그 다음으로는 고독에 대한 불안이겠죠. 만일 이런 것들이 제거되리라는 확신이 서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적극적 안락사를 희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27)

27) A. 디켄(오진탁 역),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2003, 99쪽.

디켄 교수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활동하는 의사들이 하는 말을 인용하면서 환자의 통증에 대한 공포는 극복될 수 있고 정복해야 할 과제로 여기고 있다. 이를 위해 호스피스의 역할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만일 환자가 적극적 안락사를 희망한다면, 그것은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우리 관계자들의 전면적인 패배를 뜻합니다. 요컨대 환자의 통증이나 증상 완화 등을 위해 우리가 취하는 보살핌 전부가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기 때문에, 환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고 하기 보다는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되기 때문입니다.”28)

28) ebd.

이상의 인용문에서 디켄 교수는 “죽기를 바라는” 환자의 의지와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는” 환자의 의지를 대립구도로 놓고 있다. 전자의 형태가 “적극적 안락사”라면 후자의 형태는 “호스피스”가 된다. 그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에의 의지를 넘어서서 살려는 의지에로 그 인생을 전향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그 대안으로 호스피스가 제시되고 있고, 호스피스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4.3. 호스피스의 돌봄(care)

호스피스의 주요 역할은 “죽어감”(dying)의 과정에서 환자의 인생 반려자(파트너)가 되는 데 있다. “죽어감”이란 살아갈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죽어가는 과정, 즉 임종과정을 의미한다. 고양곤 교수는 죽어감을 죽음(death)과 비교하면서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죽음은 생물학적인 유기체(심장, 허파, 동공 등의 세포사)가 생존능력을 상실해 다시는 소생할 수 없는 죽은 상태를 말하고, 죽어감 또는 임종과정은 생물학적 죽음뿐만 아니라 의학적, 법적, 사회적 죽음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정의 될 수 있다.”29)

29) 고양곤, 상게서, 54쪽.

죽어감의 의미가 단순히 인간의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의학적, 법적, 사회적 차원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심리적, 문화적, 영적 차원에 까지 적용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총체적 인간의 문제에 해당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호스피스의 활동은 “죽어감”의 과정과 단계마다 해야 할 일이 많고 광범위하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호스피스의 서비스 내용을 보면 말기환자의 증상, 통증 상태의 측정, 투약 및 치료, 신체적, 정서적, 영적 상태의 관찰 및 케어, 상담 및 가족관리 그리고 환자 주변의 시설 및 환경관리, 환자가 필요로 하는 물품 및 도구제공, 의뢰서 작성 등 광범위하다.30)

30) 이 분야에 대한 것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1995), “말기환자 관리를 위한 호스피스 제도화 방안”을 참조바람.

디켄 교수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의 욕구 10가지를 제시한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1) 옆에 친구가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 (2) 자기 결정권을 갖기 원하다.
(3) 인간성장을 위한 요구를 갖고 있다.
(4) 죽는 행위의 주인공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원한다.
(5) 자신의 병에 대하여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6) 불필요한 생명의 연장, 인위적 생명의 연장 방법은 원하지 않는다.
(7) 자기의 전 생애를 돌아보는 하나의 정신요법을 원한다.
(8) 고통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한다.
(9) 유머나 웃음을 갖기 원한다.
(10) 죽음 후의 영생에 대하여 알기 원한다.31)

31) A. 디켄, “인간의 죽음과 죽어감”, 『연세간호대 창립100주년기념 강연집』, 2006, 7-8쪽.

이상의 10가지 항목 가운데 거의 모든 항목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이 되고 있다. 환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기를 원하고, 죽는 날까지 자기 성장을 원하며,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죽는 행위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차후의 생까지를 생각하며 미래를 예측, 기대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마감코자 하는 의지가 뚜렷하다. 호스피스의 돌봄은 말기환자가 ‘쓸모없는 존재’, ‘버림받은 인간’이 아니라,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에게 삶에 의욕을 주고 소중한 인격의 소유자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4.4. 호스피스 돌봄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

호스피스가 과제로 삼는 것은 안락사에서 문제가 되는 생명의 단축 - 이것이 타살의 형태든 자살의 형태든 - 을 극복하는 것이다. 시한부의 인생을 사는 환자에게 자연사의 길을 열고, 주어진 인생 기간의 과정을 동행하면서 환자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스피스는 안락사로 인한 인간의 죽음을 자신의 의무 소홀로 여기고 있다. 런던의 성 요셉병원(St. Joseph́s Hospital) 원장인 R. 라머턴(Richard Lamerton) 박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필요에 응해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기본의무를 져버리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너무나 자명한 요구는 아픈 증상을 조절해 주어 위엄 있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도록 돕는 일이다. 만약 환자가 제시하는 모든 어려움을 회피하고 그를 죽인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안락사가 환자의 자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정성스럽게 보살핌으로 환자가 안락사를 요구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32)

32) 김옥라 편저, 『호스피스』, 1990, 48쪽.

이상에서 R. 라머턴 박사가 말하는 “죽어가는 사람의 필요에 응하는 것”은 앞 단원에서 A. 디켄 교수가 언급한 “말기환자의 욕구 10가지”를 연상하게 한다. 여기에서 환자가 요구하는 “자기 결정권”의 요구(2번), 자신의 병에 대하여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요구(5번),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33)의 요구(6번) 등은 구체적인 윤리의 영역이다. 이것들은 환자들의 기본적인 요구이자 인간적인 권리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사회는 아직 자유스럽지 못하고 제도적인 장치가 되어 있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말기환자가 평화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다.

33)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은 안락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의학적으로 환자의 생명유지에 전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 등 생명연장의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말기 질환의 경과에 따라 자연적인 죽음의 과정을 따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참조: 윤영호, “의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고찰”, 한국죽음학회지, 죽음연구, 2005 제1호, 22쪽.

한 인간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소중한 만큼, 한 인간의 생명을 마감하는 것도 똑같이 소중하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생애 전체가 그 사람의 인격에 속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인가’ 라는 질문 속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의 죽음에 대한 질문은 살아갈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다 살고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A. 디켄 교수는 말기 환자가 경험하는 5가지 죽음의 과정. 즉,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부정의 단계-노여움의 단계-몸부림의 단계-우울의 단계-수용의 단계” 이상의 5단계 외에 “희망의 단계”를 첨부하고 있다.34) 말기환자에게 있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와 그 원초적인 힘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속한다. 인간이 살려고 하는 의지나 의미부여, 희망 등 새로운 삶에의 기회 제공은 새로운 영(靈)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임종을 앞두고 있는 환자를 위해 기독교 윤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34) A. 디켄, 『인간의 죽음과 죽어감』, 13쪽.

[5] 장공의 <죽음>에 대한 수상(隨想)

5.1. 죽음에 대한 장공의 이해

장공은 “몸”, “죽음”, “부활” 그리고 “죽기 전에 죽는” 인생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죽음의 유형과 차원을 3가지로 구분한다. 즉, “자연적인 죽음”, “인간적인 죽음”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다.35) 자연사(自然死)란 모든 생물들이 자연질서 안에서 신진대사(metabolism)의 법칙에 의해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사(人間死)는 ‘사육신’이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보듯 “죽음이 그들에게 최후의 권세를 부리지 못한” 형태이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윤리, 도덕 및 영적 차원이 포함된 것으로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에 근거하여 자기결단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그 차원을 달리한다. 즉 세상의 도덕적 가치나 선과 악의 이원적인 대립을 넘어서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죽음을 뜻한다. 장공은 예수의 죽음을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환원하기 위한 ‘인간 회복’에 필요한 희생제물로서”의 “속죄행위”로 규정한다.36) 이런 예수의 죽음을 장공은 “‘죽음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죽음, 살리는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37) 예수의 생애를 “죽기 전에 죽는” 삶으로 보고 있다.38) ‘남을 위한 자기희생으로서의 죽음’의 관점에서 볼 때, 장공에게 있어서 “자연사”, “존엄사”, “이타적 자살”은 비판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35) 장공, “제3일의 논리와 역사의 내일”, 『장공 김재준 논문선집』(이하: “장공논문선집”), 414쪽. 36) 상게서, 415쪽.
37) ebd.
38) 장공, “죽어서 산다는 삶”, 『인간이기에』, 13쪽.

장공의 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매우 진지하다. 그에게서 “삶이란 ‘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39) 몸 없는 영혼만의 삶은 인정되지 않는다. 몸은 구체적으로 기쁨과 슬픔, 행복을 느끼고 표현하고 체험하며, 이웃과 더불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이 땅에서 구현해 나가는 실체이다. 그러므로 장공에게 몸은 “삶의 거점(strategic point)이요, 삶의 표현 기관이요, 따라서 삶의 ‘실체’”40)가 되고 있다.

39) Ibid., 413쪽. 40) 상게서, 413쪽.

그러나 이 몸은 죽음이 그 종착점이 아니라, 사후(死後)에 전개될 부활할 몸을 의미한다. 부활한 몸은 생리적 존재였던 혈육을 가진 몸으로서 그 동일성을 잃지 않는 몸이다.41) 이것은 마치 “철이 그 동일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내외가 아울러 변하여 영광과 열을 발함”에 비유한다. 부활의 몸은 영적 질서에 속한 “영의 몸”(靈體), “영화(榮化) 영원화(永遠化)한 몸”으로서 “영의 생명”이다.42) 장공은 영의 생명을 창조설화를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41) 장공,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 『장공논문선집』, 190쪽. 42) ebd.

“창세기 창조설화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도 영적 존대자일 것이며, 하나님은 시간 공간에 구애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도 시공간에서 자유하는 존재자였을 것이다. ‘몸’도 영적 질서에 속한 영의 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시며,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죽음’이 없다. 영원한 삶이 있을 뿐이다.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죽을 자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생명이 정상태요 죽음은 변태라 하겠다.”43)

43) 재인용: 김경재,『김재준평전』, 182-183쪽.

장공은 죽어도 죽지 않는 “영의 몸”, 곧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생애를 사셨고, “자유하는 존재자”의 이상과 꿈을 품고 살았다 할 수 있다.

5.2. 죽음을 대하는 장공의 자세

이제 구체적으로 장공의 삶의 자세를 그가 남겼던 고백적인 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장공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육신이 허약해짐을 의식하고 있고 이에 따라 남은 생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청장년 시절에는 설날이 올 때마다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데에 아무의의도 없었다. 나이와 함께 몸으로 마음으로 무언가 보탬이 되고 기가 승해지며 속이 알차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 수년 동안에는 위치가 좀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나를 먹는다’는 그것이다. ... 나이가 더할수록 이런 현상(기가 허술하고 패기가 침전하는 현상 등)이 늘어 가니 ‘내가 나이에 먹히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 혼은 이에 도전한다. ... 나이가 나를 먹는 것을 호락호락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경고하며 몸을 쳐 복종시킨다는 결의를 다시 해 본다.”44)

44) 장공, “나이를 먹는다”, 『인간이기에』, 56-57쪽.

“인생의 봄, 여름도 중요하겠지만 ‘晩秋’가 더욱 중요하다. 결론이 거기서 지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五, 六십대를 ‘晩秋’라고 본다. 아주 겨울이 오기 전에 겨울맞이 마감 고비를 잘 치러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五, 六十년 살았으면 무슨 기록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리 푸진 것은 못 된다 해도 흉작이면 흉작인 그대로 알뜰히 긁어모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 긁어모아 보았자 넝마 조각 밖에 남는 것이 없다 셈 치더라도 왜 그렇게 된 이유는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것 자체도 정돈이며 결산이겠기 때문이다.”45)

45) 장공, “人生의 晩秋”, 상게서, 198쪽.

장공은 죽음을 대하는 그의 자세를 <낙엽>에 비유하면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고생은 무조건 싫다. 죽는다는 것은 저주다. 나는 절대적으로 <나>요 남은 온전히 <남>이다. 고생도 싫지만 남을 <위해>라는 말은 메스꺼운 위선이다 하고 기름진 고독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도 하나님도 문 밖에 소외된다. 그렇다고 <통하지 않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반항>만 하는 심정에는 <해결이 없다>. 죽어서 거름 되는 <낙엽>이 많아지라. 그리고 그 낙엽을 긁어다 때지 말라, 나라와 민족이 그걸 먹고 사는 것이 아니냐?”46)

46) 장공, “落葉”, 상게서, 247쪽.

“어디선가도 말한바 있지만, 내가 주님 시키시는 일을 하노라 하다가 기진맥진해서 어느 땅바닥에 누어 버리는 순간에라도 그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며 <별하나 나하나> 혜다 혜다 눈을 감는 행복만은 뺏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은퇴>를 했으니 요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하고 한참은 <걱정> 비슷한 생각도 해 봤다. 그러나 그것도 주님께 맡겼다. 그랬더니 부탁이 쇄도해서 오히려 더 바쁘게 지낸다. 물론 일정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무의미한 일은 하나도 없다. 내게 별로 시키실 만한 일이 없을 때에는 주님께서 데려가실 것이다. 주님이 데려가시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해서임을 나는 확신한다.”47)

47) 장공, “回甲隨想”, 『하늘과 땅의 邂逅』, 291-292쪽.

장공은 노년기에 와서 나이듬을 의식하고 인정하고 있으며, 회갑과 은퇴를 전후하여 더욱 진지하게 “만추의 인생”을 준비하고 정리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준비의 내용은 무엇보다 육신은 쇄해 가지만 영혼은 더욱 해맑고, 겉사람은 낡아 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데 맞추어져 있다.

장공은 어떤 자세로 최후를 맞이했을까? 그는 본훼퍼의 주기도문 해석을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독일의 세계적인 신학자 <본훼퍼>는 그의 강연 <유혹>에서 이런 말을 했다. 주기도문에 ‘유혹(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한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죽음이나 악에 대결하여 그것을 극복한다는 원칙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의 모든 힘이 온전히 자기를 반역하고, 나의 선하고 경건한 힘, 신앙의 힘까지도 적의 수중에 사로잡혀, 나는 온전히 몰려나 있다는 것, 내 힘은 한번 겨뤄 본다는 결단이 있기 전에 벌써 온전히 탈취돼 버렸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즉 나는 버림받은 자, 나의 모든 힘에서 버림받은 자,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힘으로부터 <공격>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제외된 자, 나는 <無>요, 적이 <전부>라는 데서부터 인생은 재출발한다는 말이라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의 십자가상의 절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온전한 고독이요 실패요 절망이다. ... 인간이 자기 힘으로 모든 악과 비참을 일소하고, 집권만 한다면 <유토피아>를 당장에 실현할 것 같이 생각하는 한, 그는 <유혹>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풋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포기한 삶’이라든지 ‘의미 없는 삶’이 라든지를 되새기면서 고독하게 산다는 분들은 그만큼 성숙한 분들일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무의미>를 자각한 그 자체에 무언가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48)

48) 장공, “고독, 의미, 신앙”, 『인간이기에』, 64-65쪽.

이상에서 장공은 세상에 대한 집착이나 자신의 노력과 업적에 메이지 않는 작업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완성하시는 분”은 그분으로 믿고 그 일을 그에게 위탁하고 자기의 길, 즉 부단히 자유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아래의 두 인용문은 장공이 어떤 자세로 최후를 맞이하고 있는가를 암시하는 글이 된다.

“인생이란 의복처럼 해지고 낡아지게 마련이어서 나이 먹어 갈수록 고깃덩이는 마르고, 찌부러지고, 남는 것은 그야 말로 넝마 조각 정도도 못 되는 ‘송장’일 것이 아닌가! 좀 알아 뒀노라 던 소위 지성도 희미해지고 배운 언어도 다 잊어지고 분간 없이 망령을 부리고, 닦아둔 덕도 없이 천대를 받는다면, 그때 가서 내게 남는 재산이 무엇일까? ‘인제 정말 걸레조각 밖에 남은 것이 없구려!’ 하는 것이 내 무덤 앞에 적힌 비명(碑銘)이 아닐까?”49)

49) 재인용: 이우정, “날마다 죽음을 사는 심정으로 사신 분”, 『장공 이야기』, 67쪽; 김재준, 『하늘과 땅의 邂逅』, 4-5쪽.

“이 우주는 하나님의 집 하늘 위, 하늘 아래
땅 위 땅 아래
모두 모두 하나님의 집

땅에서 소임 받아 주님나라 섬기다가
주님 오라 하실 때에
주님 품에 안기나니

(후렴)

새벽 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 켠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50)(1983년 캐나다에서 귀국을 앞둔 83세의 글)

50) 재인용: 김경재, 『김재준 평전』, 165-166쪽.

장공은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만추(晩秋)의 <낙엽>에 비유하고 다 낡아 헤어진 <걸레조각>에 비유하면서 인생을 마감하고 있다. 그가 생존 시 말씀하셨듯이, 그는 “죽어서 거름 되는 <낙엽>이 되어” 땅에 묻히고 있다. 자기의 사명을 다해 그 용도가 소실된 <걸레조각>이 되어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가지에서 떨어져 내딩굴고 있는 낙엽도 아직 쓸모가 있어, 우리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그 낙엽을 긁어다 때지 말라, 나라와 민족이 그걸 먹고 사는 것이 아니냐?”라고. 이 말은 그가 그렇게 그리던 세계, 인간을 포함한 온 피조물이 누리게 될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위해 자기의 몫으로서 한 잎 낙엽이 되어 그 밑거름이 되고 있음을 함축한다. 그리고 장공은 “주님 오라 하실 때에” 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자신의 운명을 그에게 내 맡기고 있다.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하여 장공의 생애를 평가한다면, 그의 생애는 남을 위한 희생제물로서 날마다 죽으며 산 인생길을 걸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최후는 “나이가 나를 먹는” 이런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연장하거나 단축하는 인위적인 시도를 용납하지도 않는다. 그는 가야 할 인생길을 다 달린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으로서 자연사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참고서적>

Martin Honecker, Grundriß, WdeG, 1995 Dietrich Bonhoeffer, Ethik, München, 1966
Claus Westermann, Genesis Kapitel 1-11. Biblischer Kommentar Altes Testament, Neukirchener Verl., 1976
Evangelischer Erwachsenen Katechismus, Güntersloher Verl., 1995
D. Bonhoeffer(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기독교서회, 1995
E. Durkheim(김충선 역), 『자살론』, 청아, 1995, 원저서명: Le suicide, 1897
A. Deeken(오진탁 역), 『죽음을 어떻게 맞이한 것인가』, 궁리, 2003
A. Deeken, 『인간의 죽음과 죽어감』, 연세대간호대학 창립100주년 / 한국죽음학회 창립1주년 기념 A. Deeken 교수초청 강연집, 2006년 5월
J. Hollman(박재형 역), 『의료윤리의 새로운 문제들』, 예영, 1997, 원저서명: New Issues in Medical Ethics, 1995
김옥라 편저, 『호스피스』, 수문사, 1990
한국죽음학회지, 『죽음연구』, 2005 제1호
장공 김재준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편, 『장공 김재준 논문선집』, 한신대출판부, 2001
장공 김재준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편, 『장공 이야기』, 한신대출판부, 2001
김재준, 『인간이기에』, 김재준 수상집, 향린사, 1968
김재준, 『하늘과 땅의 邂逅』, 김재준 수상집, 동양, 1962
김경재, 『김재준 평전』, 삼인, 2001

강사 : 박명철 박사

한국신학대학(신학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신학석사)
독일 Universitӓt Hamburg(신학박사)
1995 - 현재 : 연세대 교목,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1997 - 2000 :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대학교회 담임목사
2002 : 한국기독교윤리학회 회장
2003 - 현재 : 연세대 의료원 원목실장

“21세기 선교와 세계윤리의 요청”, 『지구화시대의 한국신학』, 1997 “독일통일에 비추어본 우리의 통일현실 - 독일통일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 『기독교사상』, 1997 외 다수
『기독교대학생의 신앙실태와 대학선교시론』(서울: 연세대출판부, 1998)
『민중신학과 한국민족운동 및 주제사회주의와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