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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강좌 제4회] 장공 김재준의 개혁정신 - 성서연구방법론을 중심으로 / 최영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4 10:33
조회
1529

[제4회] 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 일시 : 2004년 5월 20일(목) 오후 5-7시
장소 :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효촌관 2층 세미나실

장공 김재준의 개혁정신 - 성서연구방법론을 중심으로 -

최영 박사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

. 들어가는 말

한국의 장로교회는 해방 이후(1947년-1953년) ‘성서의 권위’ 문제에 관한 신학 논쟁을 통하여 교회의 분열이란 아픔을 겪게 되지만, 이 논쟁을 통하여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전수받은 근본주의적 신학에서 벗어나 장로교 본래의 복음의 자유정신과 종교개혁의 정신, 그리고 학문의 자유와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었고, 자주적인 한국 교회사의 제일보를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 논쟁은 신학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 신학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고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논쟁은 근본주의적 정통주의의 타율주의로부터 16세기 종교개혁의 때에 다시 발견된 복음의 자유에로의 해방의 사건, 곧 신학의 해방으로서 그 이후 한국 신학의 발전과 성숙에 매우 귀한 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 신학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장공 김재준의 성서관과 성서 역사비평학에 대한 견해와 활용을 살펴보고, 16세기 개혁자들의 정신이 그를 파문했던 장로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이 아니라 바로 그에게서 정당하게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비평학의 수용과 적용

계몽주의 시대 이후, 현대인간은 권위에 대한 모든 주장들을 자율 이성이라는 잣대로 비판적으로 검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예전에 권위적이라고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임의적이고 근거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자율적 이성과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서 기존에 세워진 모든 ‘권위의 집’1)이, 그것이 국가와 교회와 사회이든지 간에, 문제시되었다. 이와 같이 현대는 인간의 자기 발견에서 시작되고 현대적 학문은 비판 정신과 함께 발전하였다. 성서와 신학 역시 이러한 권위에 대한 보다 넓은 문화적인 비판으로부터 제외될 수 없었고, 또한 이 같은 비판의 세례를 받지 않고는 그 진실성을 과시하며 현대인간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비판학은 진리추구의 도구이고, 양심과 자유의 시금석이었다. 성서에 대한 비판적 이성의 적용이 이성자체의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채 행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당시 신학에 부과된 임무는 비판을 자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비판을 가해야 하는 것이었다.

1) Edward Farly, Ecclesial Reflec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2를 보라.

그러나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 Allen)의 입국과 함께 시작되는 한국 개신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이 같은 비판정신과는 거리가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국의 청교도적인 경건성과 복음적인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서 신학과 성서를 해석하는 비평학에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서문자무오설’ 혹은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며 19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비판적 성서 연구방법론, 즉 성서 역사비평학을 금단의 학문으로 간주하고, 성서에 대한 어떠한 비판적 접근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것은 1920-30년대 외국 유학을 다녀온 몇몇 한국 교회의 젊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성서의 역사비평학이 소개되기까지 한국 장로교회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한국인 신학자에 의한 최초의 성서 역사비평학은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였던 양주삼에 의해 소개되었다. 191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성서 서론의 제반 문제들을 다루는 “구신약전서 총론”을 전후 7회에 걸쳐 「신학세계」에 연재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경전사와 원문 비판 문제로부터 신구약 각론 및 내용 분류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구 신학계에서 연구된 결과들을 종합 소개하며, 성서의 문학적․역사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2) 이후 1930년대 들어서면서 유학파 신진 신학자들에 의해 성서 역사비평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된다. 그런데 개신교, 특히 장로교 신학자들의 역사비평학의 수용과 적용이 교회의 분열이라는 비극적 사태를 초래할 정도로 그토록 치열한 논쟁으로 발전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2)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다산, 2000년, 110.

그것은 단순히 학문의 연구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사활이 걸린 ‘성서의 권위’ 문제, 또한 복음의 자유정신과 신앙 양심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성서의 권위’ 문제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에 의해 새롭게 파악된 문제이다. 중세 후기에 사람들은 교회가 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에 성서는 권위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서가 권위 있는 것은 교회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의 저자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권위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최상의 증거는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그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3)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칼빈이 성서의 권위를 종교개혁 시대 직후의 정통주의자들과 20세기초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근본주의 신학자들이 했던 것처럼 성서의 문자 그 자체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는 성서의 확실성을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내적 증거’에서 발견하였다. 성서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은 문자 자체가 갖고 있는 신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감화․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役事)라는 것이다.

3)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tienne (1559), 1.7.4(이하 Inst로 표기).

칼빈은 성령의 증거에 의하여 성서의 권위를 확신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 고전연구를 위해 발전시킨 비판적 연구방법을 자유롭게 성서 연구에 적용하여 성서 본문의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비판적으로 밝히고자 했다.4) 장로교회는 16세기 개혁자들 가운데, 특히 칼빈의 신학과 사상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이와 같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물려받은 개혁자들의 복음의 자유정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독교 전통 전반에 대하여 그것이 그 자체로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또한 그것의 주장이 진리의 영(성령)에 의해 증거된 성서에 입각하여 정당화될 수 없는 한 큰 불신과 근본적인 불만족을 표명했던 교회였다. 장로교회의 선구자들에게 역사적 과거의 유산은 감탄과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비판적인 검사를 요하는 것일 뿐이었다.5)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근본 정신은 17, 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현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되고 있는 현대의 비판정신과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 H. J. Kraus, Geschichte der kritisch-historischen Forschung des A.ts von Reformation bis zum Gegenwart(1956), 8-21; 김정준, “성서주석가로서의 칼빈”, 이장식 외 공저,「칼빈신학의 현대적 이해」, 한신대학 출판부, 1978, 77.
5) K. Barth, "The Doctrinal Task of the Reformed Churches",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eter Smith, 1978, 229.

그러나 1930년대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철의 장막”에 둘러싸인 채 그들의 정신적 노예상태 혹은 미성년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서 문자무오설’이란 교리를 절대시하고, 그로써 자기들의 해석을 절대화하여 성서와 동등한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고, 결국 성서를 우상화하고 말았다. 성서는 그들에게 ‘종이 교황’이 되었고, 그들은 이 ‘종이 교황’을 내세워 학문의 자유와 신앙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성서 역사비평학은 이러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신학 노선에 의해 육성된 보수적-근본주의 성향의 신학자와 목사들의 교도적 지배 시대를 마감하고 신학의 해방과 복음의 자유, 그리고 신앙 양심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김재준을 비롯한 몇몇 선구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도입되고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 근본주의 성향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김재준의 성서관이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후까지 지키려는 보루인 ‘성서 문자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치 중세의 종교재판과 같은 방식을 통하여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를 처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장로교회는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지만, 장로교 본래의 복음적 자유의 신학에로 되돌아갈 수 있었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한국 교회사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 김재준의 성서 역사비평학

1) 복음의 자유정신

김경재는 「김재준 평전」에서 복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해명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을, 기독교 교리에 충성하는 또 하나의 종교 교리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만들어준다.6) 이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기독교 신학이 종종 수동적이고 자주성이 없는 의존정신을 가르쳐 왔다고 비판받는 오늘의 상황에서 올바르게 해석되어 제시될 필요가 있다. 복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은 모든 노예적 의존성들로부터의 근본적인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7) 이 복음의 자유는 장로교 분열 당시 근본주의 신학 이념에 기초한 보수적 장로교에서 이탈하여, 새롭게 출발한 기독교장로회의 이념적 선언문 제1항에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8)

6) 김경재, 「김재준 평전」, 삼인, 2001, 82, 110.
7)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Das kreuz Christi als Grund und Kritik christlicher Theologie, 1972, 김균진 옮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8, 297-344를 참고.
8)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56, 42를 참고.

그런데 이 복음의 자유정신은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우상’이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상대적 가치가 절대적 가치 행세를 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몰수하고 그것에 경배하게 하며 종노릇하게 하는 일체의 것을 말하는데, 복음의 자유를 한번 맛본 사람은 어떤 상대적 가치를 절대시하여 우상화하는 일체의 강요에 저항한다. 바로 장공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이 성서해석의 한 방법에 불과한 상대적인 ‘성서 문자무오설’을 절대시하고, 그로써 자기들의 해석을 절대화하여 성서와 동등한 권위를 확보하려고 한 것은 성서를 우상화하는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9) 그들에게 성서는 마치 ‘종이 교황’과 같은 것이었다.10) 그들은 이 ‘종이 교황’을 내세워 성서해석의 어떠한 자유나 비판을 허락하지 않았고, 오로지 습관화된 전통이 교권을 전횡하며 이성과 양심을 유린하는 암흑시대를 만들었던 것이다.11)

9)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편, 「김재준 전집」, 제3권, 한신대학교출판부, 1992, 26(이하 김재준 전집은 「전집」으로 표기한다).
10) 「전집」, 제3권, 276.
11) 「전집」, 제4권, 300.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의 아성인 이 ‘성서 문자무오설’을 공격하는데 적합한 무기는 이미 서구에서 그 진가를 검증받은 성서 역사비평학이 제격이었다. 그러므로 장공은 단순히 서구의 선진 학문의 방법론을 국내에 소개하려는 차원이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의 정신적인 노예상태, 혹은 미성년자로 머물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신앙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확보하고, 나아가 한국 교회의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차원에서 현대의 역사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에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1930년대 중반 장로회 총회가 성서의 역사적 비판의 문제로 일대 소동이 일었을 때, 장공이「낙수」에 발표한 “주일학교교사에 대한 몇 가지 진언”(1935년)이란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며, 저들이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방법에 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성경은 역사이기도하며 문학이기도 하며 도덕훈이기도 하며 영적 지혜의 집성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보다도 성경은 영감의 서며 계시의 기록이다. 그 뿌리와 줄기와 잎과 열매가 형형색색의 시대시대에 그 특색을 드러내었으나 그 중심을 통하여 전체기구를 살린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이 중심생명을 성경에서 감득한 자라야 비로소 성경을 알기 시작한 자라 할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전체적으로 깊이 음미하기 위해서는 성경 그것만 읽는 것으로는 극히 부족하다. 차라리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측광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건이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그 당시의 지리, 제민족의 역사, 문화, 풍속, 습관, 성경 구성의 내력 등이 절대 필요한 학습제목이 되는 것이다.”12)

12) 「전집」, 제1권, 66-67.

2) 성서 역사비평학과 김재준

193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박형룡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의거하여 성서의 완전영감설을 주장하였다. 성서의 저자는 성령이며,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성서 기자는 단지 그들의 인격과 내용에 있어서만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글자에 있어서도 영감을 받아 성서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성서는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이나 다름없고, 하나님이 저자인 성서에 오류란 있을 수 없다. 성서에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실까지도 완전하다. 여기에 기계적 축자영감설과 성서 문자무오설이 있고 근본주의의 교리적 기초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박형룡은 역사적․문학적 연구인 성서의 고등비판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성서를 파괴하는 연구라고 공격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오경이 네 가지 문서들의 편집에 의한 것이고, 모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문학적 비판에 대해서 이를 신앙타락자의 소치라 하여 적극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장로교 신학자 장공 김재준의 성서이해는 전혀 달랐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격적이며 대화적인 관계가 있다. 따라서 성서의 기록 역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인간의 주체적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성서의 본문의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말과 글자들의 순서가 한 점의 획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자의식을 잃은 인간의 무의식상태의 작업을 전제하며, 과학적 무오설은 현대 학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의 저자들은 고대인의 세계관을 가진 시대적 환경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기록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고대의 문화적 요소와 그 안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곧 역사적․문학적 연구인 고등비판학이다. 이러한 고등비판학을 구사한 성서연구 가운데 장공은 특히 사회․역사적 배경 연구를 중요시했다.13)

13)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170이하.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하여, 역사비평적 방법이 성서연구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이 방법은 성서를 교회의 전통과 권위, 그리고 교리로부터 해방시켜줌으로써 성서연구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이 역사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성서 문서 자체는 다른 일반 문서와 같은 역사적 산물로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과 장소, 혹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에 의해서 기술된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역사 비평적 연구는 성서 저자를 규명하고, 나아가서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계기에서, 어떠한 목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으며, 저자 및 독자가 접했던 역사적 맥락으로서의 사회상황은 어떠했는가 등등의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한 문학 작품은 그것이 나왔던 시대의 흔적을 전해주기 때문에, 이 역사적 접근방법은 그 작품을 그 역사적 상황에 놓고 또한 그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그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성서본문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성서가 기록된 시대의 역사적 삶과 사상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1933년 장공이 「낙수」에 발표한 논문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은 이러한 역사비평적 성서이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이 글에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망하기 직전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소상히 해석하고 있다. 곧 시리아와의 관계에서 정치적 군사적 승리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것과, 지배층의 타락과 사회의 부정부패상, 그리고 종교가들마저 방관, 독선, 침묵주의로 일관했던 타락한 시대였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은 승리와 영예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다. 사회의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게 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모스의 예언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서연구는 단순히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오늘의 사회-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1930년대 당시 장공이 이미 역사 비평적 방법은 단지 성서해석의 예비적인 방법에 불과하다는 오늘날 성서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에 의하면 성서 본문의 보도된 사건들의 사실성 여부에 관한 규명이나 성서의 문서들의 성립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을 규명하는 것은 성서연구의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 그 당시 성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 본문이 오늘의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밝히는 것인데, 이것은 ‘역사적-신학적 해석’ 방법이다.14) 그러므로 그는 그 논문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끝맺는다. “이제 우리는 이 불의로 가득찬 세대에 있어 이 의의 예언자의 용기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이 예언자의 의를 이루어주신 그리스도의 의만을 선포하며 그를 위하여 분투하며 또 생명을 버림이 마땅할 것이다.”15)

14) 송순열, “설교를 위한 성서해석 방법”, 「신학연구」, 40호, 한신대학교출판부, 1999, 314.
15) 「전집」, 제1권, 33. 또한 「전집」, 제1권에 실린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1930년),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1933년) 등을 참고.

3) 본문비평과 문학적․역사적 비평

장공에 의하면 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해석방법에는 본문비판과 문학적․역사적 비판이 있다. 본문비판에 관하여 그는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본래의 원본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본에서 베껴서 만든 사본들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본들의 내용이 대체로 같은 것이나 부분적으로는 다른 것이 많기 때문에 여러 사본들을 비교 연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원본에 가까운 내용의 것을 발견하려는 비판을 말함이다”16) 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가 신약성서에 인용된 구약성서를 히브리 사본(마소라)와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마소라 사본과 헬라어 70인역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7) 이것은 그가 본문비평의 기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공에 의하면 이 본문비평은 ‘저등비판’이라고 하여 ‘정통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18)

16) 「전집」, 제6권, 9.
17) 「전집」, 제2권, 21.
18) 「전집」, 제2권, 58.

그런데 정통주의자들이 이른바 ‘고등비판’이라고 하여 거부했던 문학적․역사적 비판은 무엇을 말함인가? 장공의 글 “성서해설”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문학적 비판이란 것은 구약이 쓰여진 히브리말, 신약이 쓰여진 그리시야말에 대하여 그 용어의 본 뜻, 문법적으로 본 정확한 의미, 그 문맥 등을 있는 그대로 연구하는 것이며, 역사적 비판이란 것은 성서 각 책의 저자, 저작 연대, 저작 장소, 저작 목적 등등을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 성서 이외의 다른 문서 등에 비추어가며 역사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이에 의하여 성서 각 문서의 역사적 정황이 명백하게 된 것을 사계에 노력한 학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이 역사 비평적 방법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사과학적 연구와 해석은 그것만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 정확한 역사적 정황 안에 자리잡은 문서에 나타난 종교적 의미,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한다.”19) 이 같이 성서해석에서 당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역사과학적 연구와 해석을 전제하나, 그 역사적 정황 안에 자리잡은 문서에 나타난 신앙적 의미,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일이 성서해석의 관건이라는 장공의 성서이해는 오늘날의 성서해석과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성서해석 방법이라 할 수 있다.20) 그러므로 장공에게 고등비판은 성서의 기원과 원형과 원저자의 의도 등을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연구하는 성서 연구방법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따라서 어떤 철학적 전제를 갖거나 혹은 어떤 교리를 시인하거나 반대하기 위한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21) 물론, 장공은 비판학자들 가운데 자기의 선입견에 지배되어 온갖 발견된 사실을 자신의 관념에 부합되도록 설명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판정신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최악의 것으로 인하여 비평학 전체가 정죄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22)

19) 「전집」, 제6권, 9이하. 20) 송순열, “장공의 신약성서 해석”, 「신학연구」, 제42호,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49.
21) 「전집」, 제2권, 59.
22) 「전집」, 제2권, 65.

장공은 중세기에 문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에 대하여 사람들이 비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루터를 고등비판의 하나의 사례로 제시한다. 루터는 “열왕기는 역사기보다 더 신빙할 만하다 하였으며 ‘모세오경이 모세의 친작이 아닌들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였고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전도서 등은 가필자의 손을 거쳐서 현존형에 이르렀다 하였으며 시편의 부제와 연대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고 말하였다. 구약에서는 어느 부분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으며, 에스더 같은 책은 빼버리고 마카비서를 대신 넣었더라면 좋을 뻔했다고까지 말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지나친 ‘고등비판’이 아니었는가?”13)

23) 「전집」, 제2권, 61.

그러므로 장공에게 고등비판은 “개신교 정신의 당연한 발로”였고 “최초의 개혁자 자신에서부터 이어온 운동이었다.”24) 따라서 그는 고등비판을 근대 독일 합리주의자나 영국의 자연신론자 혹은 신앙타락자들의 소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며, 성서비판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종래에는 사이비적 신학자들이 자기가 추상해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편할대로 성경을 왜곡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문학적-역사적 비판의 결과 그런 불경건을 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소위 우의적 해석이니 교리적 해석이니 하는 것 때문에 성경기자의 본의가 무시를 당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25) 이런 연유로 그는 “고등비판을 애초부터 파괴를 목적한 학문인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확신 있게 말했던 것이고, 보수 정통주의자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고등비판’은 사실에 있어서는 성서계시의 가장 유력한 답변자”라고 한 것이다.26)

24) Ibid. 이점은 에벨링에 의해서 논증되었다. 그에 따르면,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학적 연구방법과 그리고 믿음에 의한 은혜를 강조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의인 교리(Justification) 사이에는 “깊은 내적인 연결”이 있는데, 그 “깊은 내적인 연결”은 양자 모두 모든 거짓된 확실성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G. Ebeling, "The Significance of the Critical Historical Method for Church and Theology in Protestantism", Word and Fait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3, 17-61를 참고.
25) 「전집」, 제2권, 65.
26) 「전집」, 제2권, 59, 65이하.

그런데 장공이 성서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사실’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 3월, 장공은 장로교 총회 개회를 앞두고 총회에 ‘진언하는 글’을 보낸 바가 있다.27) 그가 진언한 글의 내용은 두 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정통신학’에 대한 과신이 범할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조와 신앙양심의 자유’ 사이의 긴장을 유지할 필요를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전자는 성서 역사비평학과 관련하여 ‘성서의 권위’ 문제, 그리고 후자는 ‘신조’에 대한 장공의 신학적 입장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

27) 「전집」, 제2권, 31-36.

우선, 장공에 의하면 ‘정통신학’이 성립된 근거는 다음과 같다. 개신교에서 성서는 최고 최종의 권위이다. 이 성서는 문자 그대로 절대 무오하다. 정통신학은 이 성서를 문자적으로 정돈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따라서 정통신학은 절대무오하다. 그러나 장공은 ‘성서의 사실’ 자체가 성서 문자무오설을 부인한다고 주장한다. 이 ‘성서의 사실’이란 무엇인가?

장공은 같은 해 3월에 「십자군」에 게재한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란 논문에서 ‘성서의 사실’을 많은 예증자료를 제시하면서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한다. (1) 하나님은 성서 기록의 영감을 받은 사람을 결코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셨다. (2) 성서기자는 성서를 기록할 때, 기존의 모든 자료를 참고, 비판, 정리, 취사하는 기록자의 정칙을 무시하지 않고 잘 지켰다(눅 1:1-4). (3) 하나님의 말씀 계시는 기성품처럼 완성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시대환경 속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4) 영감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과 그가 사람을 향하여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가 하는 이 두 가지이다. (5) 하나님은 성서를 통하여 결코 기록의 절대무오한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기록의 불완전성이 성서의 구속적 목적을 좌우하지는 않는다.28)

28) 「전집」, 제2권, 19-20.

장공은 이러한 ‘성서의 사실’에 대한 강조, 즉 성서는 어디까지나 구속적 목적을 가진 책이라는 그 사실성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문자보다도 정신, 나타난 말보다도 저자의 본의를 옳게 이해하는 것이 성서를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성서의 문자적 무오를 고집하는 것은 성서의 기록된 문자와 형식에 충실했던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고 ‘정통주의 신학’을 논박한다.29)

29) 「전집」, 제2권, 32.

‘신조’ 문제와 관련하여 장공은 정통주의자들의 문제는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대상으로 격상시켜 신앙과 삶의 절대적 권위로 인정하고,30) 그것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도덕의 규범과 양심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에서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칙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오직 성서뿐’이었다. 교회는 모든 교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에서 16세기 개혁교회는 모든 신앙고백들의 잠정적 성격을 확인했던 것이고,31) 이 점은 박해받고 있는 조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위하여 칼빈이 기초한 「프랑스 신앙고백서」(1559년) 제5항에서 분명히 진술된다: “오직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검토되고 규정되며 개혁되어야 한다.”32) 정확히 이것이 모든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과 가르침의 전제였고, 성서의 신적 권위만을 인정하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서를 제외한 그 어떤 것에 객관적 절대권위를 부여하는 일을 지양하고, 성서나 그 근본교리를 해석하는 경우에는 그 해석자의 ‘신앙양심의 자유’를 허락하고 보장해야 한다는 장공의 주장은 개혁자들의 정신을 정당하게 계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공의 진언에 깔려 있는 그 기본 정신은 ‘성서의 진정한 사실’에 대한 그의 확고한 학문적, 신앙적 확신과 이 확신에 기초한 그의 ‘성서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 박봉랑, 「신학의 해방」, 대한기독교서회, 1991, 49.
31) K. Barth, Church Dogmatics Ⅰ/2, 657.
32) A. Cochrane(ed.), Reformed Confessions of 16th Century, London: SCM Press Ltd., 1966, 145.

4) 목적론적 성서무오설

보수 정통주의자들은 말하기를, 고등비판을 시인한다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딤후 3:16)이라는 성서의 증언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공은 성서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이른바 ‘성서무오설’이 결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우리는 장공이 ‘성서문자무오설’과 ‘성서무오설’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서문자무오설’은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서의 사실’이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장공이 주장하는 ‘성서무오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장공은 1947년 총회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나는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라는 영역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다”라고 진술한 바 있고, 같은 해 5월 12-15일까지 피어선 신학교에서 모인 총회 조사위원회 앞에서 자신은 “성경에 다소 오류가 있으나 그 속에 구속하는 이치가 있기에 성경의 무오함을 믿는다”33)고 답했던 적이 있다. 이러한 진술들은 그가 17, 8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의 깊은 단절을 넘어서 16세기 개혁자들의 성서적-신학적 노선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장로교회의 창시자 칼빈의 성서영감론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3)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 222-224, 225-226.

칼빈은, 성서의 권위를 성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러한 확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성서의 참된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확신, 그러므로 성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에서부터 왔다. 칼빈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성서의 권위에 대한 최상의 증거는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그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34)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두 그룹의 사람들에 대항하여 성서의 권위를 옹호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에는, 성서의 권위는 교회에 의해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은 것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좀더 가톨릭적인 교회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모든 개인이 어떤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성서를 전적으로 무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좀더 과격한 복음주의적 저술가들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성령은 과격파의 주장처럼 성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 일하고, 성서에 영감을 줌으로써 성서에 직접적인 권위를 부여하며, 또 그와 함께 교회의 권위 같은 성서의 권위를 지지할 어떤 외적 권위를 위한 필요를 제거한다고 주장한다.35)

34) Inst. 1.7.4.
35) Inst. 1.7.1-5.

이 점은 개혁자들, 특히 칼빈이 영감의 문제를 성서 본문의 절대적인 역사적 신빙성이나 사실적 무오성과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칼빈은 딤후 3장 16-17절을 주석하면서 영감의 교리를 설명한다: “성서로부터 유익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율법과 예언서들의 가르침은 인간의 의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받아쓴’ 것으로서 우리에게 왔다는 것을 무엇보다 첫째로 그리고 확고하게 주장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36)

36) Calvin, Commentary, L.C.C., ⅩⅩⅢ, 84.

사실 칼빈은 “받아쓰기”의 개념을 여러 곳에서 표현하였다. 구약의 역사서들은 성령의 말을 받아서 된 것이다.37) “사도들은 성령의 말씀을 틀림없이 받아썼고 따라서 그들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38) 그러나 이런 말들에 근거하여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수립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칼빈이 성서의 권위를 전개시킨 그 배경과 주제는 결코 성서의 문자가 아니었다. 그는 소위 17, 8세기 정통주의자들의 ‘축자영감설’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성서의 증언자들을 성령의 기관과 도구로 보았으나 성서의 확실성을 문자에서 발견하지 않고 성령의 증거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에 있는 인간의 말 사이에 그 어떤 본질적인 일치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계시된 말씀을 성서의 기록된 말씀과 조화시키고, 그로써 그것의 기록된 형식을 심오하게 계약적이고 성례전적인 방식으로 그의 자기 계시에 적응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말과 진술의 형식으로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39)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은 하나님이 그의 성서적 증언과 그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들에 대하여 동시적으로 부여하는 자기 증거의 ‘계시’에 있었다. 이것은 그가 성서의 신적 권위의 ‘증거’를 인간의 이성과 판단 이외의 어떤 다른 장소, 즉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에 근거시켰다는 것을 말해준다.40) 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성서 저자와 독자를 공통의 목표에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을 뜻하는데, 칼빈은 바로 이 “성령의 증거와 내적 조명”에 의하여 우리는 성서를 교회의 다른 문서들과 구별할 수 있다고「프랑스 신앙고백」제4항에서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다.41)

37) Inst, 4.8.6.
38) Inst, 4.8.9.
39) 칼빈의 성서 영감론에 대하여, K. Barth, The Theology of the Reformed Confessions, 58-64; T. F. Torrance, Karl Barth: Biblical and Evangelical Theologian, 1990, 최 영 옮김, 「칼 바르트, 성서적 복음적 신학자」, 한들, 1997, 114-117참고.
40) Inst. 1.7.4.
41) A. Cochrane(ed.), Reformed Confessions of 16th Century, 145.

칼빈은 이같이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성서의 권위를 확신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인문주의가 마련해 준 역사적, 언어학적 도구들을 가지고 성서의 인간적 형식들을 검토하면서,42) 성서의 언어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구절들이 있으며 또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43) 그러나 그에 의하면 성서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은 성서의 권위에 전혀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권위는 그 자체의 문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구속적인 내용에서 발견되고, 그것의 인간적 형식들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신적 기능들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44) 말하자면, 성령이 성서의 내용을 증거하기 때문에, 성서는 그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서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42) Jack B. Rogers, "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Reformed Tradition", Donald K. McKim(ed.), Major Themes in the Reformed Tradition,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8, 56. P. Stuhlmacher, Vom Verstehen des Neuen Testaments Eine Hermeneutik, 1979, 전경연 옮김, 「신약성서해석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6, 117.
43) 칼빈의 성서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만출판사(편), 「칼빈의 성경관」, 풍만출판사, 1986을 참고하라.
44) Donald K. McKim(ed.), Encyclopedia of The Reformed Faith, Edinburgh, Westminster, 1992, 348.

이러한 ‘성서의 사실’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문자보다도 정신, 나타난 말보다도 저자의 본의를 옳게 이해하는 것이 성서를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역설한 장공의 성서이해는 칼빈 신학 사상의 현대적 표현이며, 참된 신학적 전통의 재확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공이 말하고자 하는 성서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장공은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요 5:39)는 말씀을 인용하며, 성서의 목적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요……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이와 같이 장공은 성서를 성서 본연의 자리에 서게 하고 그 목적론적인 면에서 성서무오설의 수립을 역설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은 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도 아니다. 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철학개론도 아니다. 성경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지향 증언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만나 그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가 성경에 기대한 것은 다 얻은 셈이다. 성경이 자기 목적을 어김없이 달성하는데 성경이 틀렸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성서무오설’은 버젓하게 주장되는 것이다.”45)

45) 「전집」, 제2권, 27.

그러므로 장공은 성서비평학을 통하여 수립된 ‘목적론적인 성서무오설’의 토대 위에서 성인이 된 성숙한 세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다: “과학자여 그대의 과학을 가지고(버리고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오라! 그리스도에게로 오라! 그대에게 과학은 있으나 그대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여기로 오라! 역사가여 그대들의 지식이 그대들의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이니 이리로 오라! 성경은 하나님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한다.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여기 있다! 하고 얼마든지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성경 절대무오설을 믿어야 그리스도교가 권위 있게 되고 교회도 잘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믿어야 구원 얻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화석된 바리새인에 불과한 것이다.”46)

46) 「전집」, 제2권, 29.

. 장공 김재준의 성서 역사비평학의 신학사적 의의

역사적 비평방법은 성서 본문이 기록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근거하여 그 본문의 올바른 의미를 결정하려고 함으로써 성서연구와 해석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관심을 보이는 역사비평학은 본문이 현재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만, 본문이 최초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추론하기 위하여 작품에서 저자의 의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역사비평학은 성서 본문이 보도하는 사건들의 사실성 여부에 관한 규명이나 성서의 문서들의 성립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에 관한 지식들을 획득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성서의 본문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현대인의 오성의 판단에 굴복시키는 것이 역사비평학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성서의 해석학은 성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성서와의 대화를 여는 것만을 지향해야 하는데, 역사비평학은 애당초 이런 면에 어떤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서구 신학계에서는 이미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바 있다. 이것은 장공이 소위 ‘신정통’으로 소개한 신학운동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것인데,47) 그들은 역사비평학을 단지 성서 본문의 해석을 위한 “예비적인 작업”으로 받아들였던 자들이다.48) 지난 세기 후반에 나타난 성서이해를 위한 다양한 해석방법들은 이러한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49)

47) 「전집」, 제1권, 377이하.
48) K. Barth, Der Römerbrief(1922), 조남홍 옮김, 「로마서 강해」, 서울: 한들, 1997, 제2판 서문, XIII. 역사비평학이 이 예비적인 작업에 만족할 때, 성서의 역사적 비평방법은 여러 가지 그릇된 이해와 전이해로부터 성서 본문들을 다시 해방시켜 주고 성서로부터 역사적으로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도와준다.
49) 성서해석의 다양한 해석방법들에 대하여는, 송순열, “설교를 위한 성서해석 방법”을 참고.

논쟁 당시의 장공이 이러한 전 세계 교회의 사상적 동향을 감지하고 거기에 병진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점은 신학논쟁이 한창 진행되던 1949년 11월, 제1회 장로교청년전국대회에서 행한 “대전전후 신학사상의 변천”이란 제목의 강연에 분명히 나타난다. 강연을 마치고 질문시간에 한 청중이 “강연자는 ‘성경을 비판한다’는 데 동감인 모양인데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감히 비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 금강석은 갈면 더욱 빛나는 것처럼 성경은 비판함으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가가 더욱 드러납니다. 극단적인 정통주의 신학자들도 다 성경의 본문비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본문비판을 인정한다면 역사비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더 철저히 알기 위하여 비판하는 것이요, …… 성경을 무시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 성경을 비판할 수 있느냐? 하고 물을 시기는 벌써 지난 지 오랩니다. 성경은 벌써 그야말로 철저히 비판을 받은 지 오랩니다. 이제 더 비판할 제목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비판을 그만 두고 그 비판의 결과를 신앙적인 경건을 가지고 정리하여 참된 성서신학이 재건설되고 있는 시대입니다.”50)

50) 「전집」, 제1권, 387.

그렇다면 지금이 비판의 시대가 아니라 비판 이후의 시대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던 장공은 왜 역사적 비평방법을 성서에 적용하여 성서를 해석하고자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역사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성서해석이야말로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미국 장로교회의 식민지적인 교회로부터 벗어나 한국 교회의 신앙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확보하고, 나아가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한국 교회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다는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예언자를 연구한 구약학자로서 역사참여 의식이 강한 신학교육자였다. 그는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타계적, 반문화적인 정통주의 신학이 우리를 역사에서 유리하게 하였으며, 이런 것을 거룩한 일로 오인하게 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한국을 우리의 소재로 받았다. 우리는 한국 역사 안에 그리스도의 속량역사를 조성하여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의 천국 역사로 변질시키는 업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어진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각 부문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 조형이념이 되며 ‘혼’이 되게 하는 데 책임적으로 전력해야 한다.”51) 이 역사의식은 일제 강점기 하에서는 그에게 성서연구에서 단순히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사회적-역사적 상황만을 이해하는데 만족하게 하지 않고, 그 말씀이 오늘의 사회적-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역사적-신학적 해석”에 관심을 갖게 하였던 것이고, 1970․80년대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어두운 시대에는 예언자적 비판과 역사 참여의 신학 운동을 전개하게 하였던 것이다.

51) 「전집」, 제4권, 304.

물론 그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성서학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당대에 역사 비판적 해석과 더불어 상황적인 전제에 있어서 오늘날의 성서해석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성서이해를 하고 있었다. 다만 역사적 비판이란 해석방법 자체가 교리적-문자적 해석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해석학의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미의 다양한 해석보다는 지나치게 실증적인 하나의 의미를 추구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의 성서해석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성서의 확실성을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증거에서 발견하였던 16세기 개혁자들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비판의 장애를 극복하고 성서로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는 일에 관심을 가졌고, 그 점에서 오늘날 한국 성서신학의 학문적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52)

52) 송순열, “장공의 신약성서 해석”, 38-49.

마지막으로 장공 김재준의 개혁정신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강연(장로교청년전국대회)에서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양극단을 지양하며 새롭게 신학계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로 대표되는 소위 ‘신정통’ 신학운동을 소개하고 “여러분은 모름지기 안계를 넓혀 전세계 교회의 사상적 방향을 전망하고 그 주류를 잃지 말고 거기에 병진하여야 할 것” 이라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지었다. 이어 어떤 질문자가 질문했다. “강연자는 ‘신정통’ 신학에 관심이 큰 모양인데 그 학파에 속하였습니까?” 장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거기에 예속하여 제자가 될 의도는 없습니다. 대체로 같아도 꼭 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 신학자들의 건설세력과 아울러 우리 자신도 오직 더 건실한 신학운동에 최선을 다할 것뿐입니다. 어느 것에 속한다는 것은 벌써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으로서 생명의 정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53)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대상으로 격상시켜 신앙과 삶의 절대적 권위로 삼고 있던 그 당시 교권주의자들과 정확히 대조되는 것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정신, 곧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교회는 어떤 경직된 교리체계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항상 성서에 비추어 “개혁하는” 교회를 뜻하고, 선배들이 물려준 신학을 “조심스럽게 개정하는 것을 교회의 교리적 과제”로 삼는 교회54)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를 제외한 그 어떤 것에 객관적 절대 권위를 부여하는 일을 지양하고 성서나 그 근본교리를 해석하는 경우에는 그 해석자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고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장공의 입장은 개혁자들의 정신을 온전하게 계승하는 것이며, 그의 신학사상은 개혁신학의 전통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53) 「전집」제1집, 373-385, 389.
54) K. Barth, "The Doctrinal Task of the Reformed Churches", 229이하.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인권, 민주화, 평화통일운동의 과정에서 장공이 보여준 우상타파적인 예언자적 비판정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영광”이라는 개혁파 교회 전통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강조점을 되살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장공의 삶의 한 특정한 측면, 곧 그의 사회․정치적 참여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강사 : 최영 박사 한신대학교 신학부와 대학원에서 학위과정(Th.M / Th.D)을 마쳤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한신대와 기장 총회 교육원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신대학교 학술원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칼 바르트의 화해론 연구>,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 역서로는 <칼 바르트 : 성서적-복음적 신학자>, <칼 바르트의 생애와 사상>,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 기도 / 사도신조>가 있으며, 그 외 다수의 논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