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35회] 장공 신학에 있어서 인간과 역사, 그리고 계시의 상호관계 : 판넨베르크 신학과의 대화모색 / 박재형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9-01 10:59
조회
2165

[제35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4년 11월 27일(목) 오후 5~7시

장공 신학에 있어서 인간과 역사, 그리고 계시의 상호관계 : 판넨베르크 신학과의 대화모색

박 재 형 박사
(한신대/조직신학)

[0] 들어가며

2000여 년 동안 기독교 신학의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제기된 다양한 주제들 중, 가장 중대하면서도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물음은 바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인식/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 인식에 관한 물음은 결국 “만약 그것이 가능하거나, 혹은 불가능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의 물음으로 확장되었다. 소위 ‘자연신학’과 ‘계시신학’ 사이에 지속되어온,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역사와 계시’ 사이의 인식론적 상관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신학적 노력은 현재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장 근원적인 과제 중 하나로 남아있다.

사실 위의 질문들은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관한 물음(신론)과 직결되며, 동시에 “그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의 근원과 목적은 무엇인가?”의 물음(인간론)으로 연결되고, 종국에는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이 만나는 마당(場)인 역사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어디로 향하는가?”의 물음(구원/종말론)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신학적 물음들은 세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에 관한’ 물음이며, 동시에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인간에 관한’ 물음이고, 그러한 한에서 그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는 ‘역사에 관한’ 물음이 된다. 이렇듯 기독교 신학의 기본 토대가 되는 위의 세 가지 주제는 서로 따로 분리해 다룰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한 개인을 올바로 알기 위해 그 자신과, 그의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가 처한 삶의 정황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앎이 필요하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각각의 주제가 상호 연관성 속에서 서로에 대한 전제가 되며, 동시에 결과가 되는 방식의 통전적인 인식의 틀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미 지난 수세기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준비해 왔으며, 그 싹을 틔워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현대 기독교 신학은 과거의 신학과 사상을 현재의 사상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절대 진리를 담는 불변의 도그마가 아님을 조금씩 깨우쳐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가운데 현대 기독교 신학은 – 일부 극단적 근본주의 경향들을 제외하고 - 비신학적 세속학문/사상들과의 부정적(negativ/passiv/unkritisch), 혹은 긍정적(positiv/aktiv/kritisch) 방식의 연계를 통해 성서가 증언하는 “계시의 진리”를 각자가 처한 현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해 내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방식은 과거가 현재의 전제이며, 현재와 과거의 결과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과거는 현재를 통해 다시금 미래로 정향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더 나아가서 과거는 현재를 통해 의미를 갖고 현재는 미래를 향해 의미를 갖지만, 그 과거와 미래는 결국 현재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의 방식은 단지 각 개별자들의 시간적 인식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각 개별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와 더불어 모든 사고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대상과 대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론적 관계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적 사고의 방법에 있어서 ‘통전적’이라는 것은 ‘자기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한에서 각 주제들과 그에 대한 각 사상/학문적 통찰들에 대한 ‘사회적’ 성찰의 다른 표현이 된다.

본 글은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장공 김재준(長空 金在俊, 1901. 9. 26. ~ 1987. 1.27.)의 신학과 독일의 대표적 현대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10. 2. ~ 2014. 9. 5.)의 역사신학적 구상과의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장공의 신학에서 드러나는 계시와 인간, 그리고 역사의 ‘통전적 상호연관성’을 밝히고 이를 통해 장공 신학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1] 장공 신학의 통전적 성격

장공의 삶과 사상에 대한 외적 평가는 이례적으로 극단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당시 한국 교계를 장악했던 편협하고 일방적인 ‘근본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한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그 개혁적 성향을 실재 삶을 통해 실천한 시대의 예언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소위 ‘근본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측에 의해 “자유주의/신(新) 신학자”로 교회의 전통과 질서를 파괴하는 급진적 이단 사상가로 낙인찍히기도 했다.1) 하지만 장공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은 사실 온전한 것은 아니다.2) 한편으로 그것은 그의 신학적 언사나 저작들을 통해 드러나는 일면을 평가자 나름의 신학적 노선을 토대로 한 단순화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이데올로기적, 혹은 정치적으로 대책점을 이루고 있는 적대자들을 통한 일방적인 폄훼로 생각된다. 어쩌면 한 인물의 삶, 혹은 그 사상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평가자 자신의 관점과 위치 그리고 사상이 전제되고, 그 전제를 잣대로 하는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장공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이러한 해석학적 한계의 원인을 우리는 당대의 한국신학적 바탕의 한계, 즉 서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용된 근본주의 신학의 편협성과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관철시키려는 보수주의적 피동성에서 찾을 수 있다.3)

1) 천사무엘,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김재준’”, 『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 33쪽 이하 참조. 2) 류장현, “김재준의 생활신학의 원리와 구조”, 『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 215쪽 참조: 류장현은 장공 신학에 대한 위의 두 가지 평가에 대해 모두 거부하고, 그의 신학을 “기독교의 실학파 구실을 하는 ‘생활신학’, 혹은 ‘인간의 신학’, 더 정확히 ‘인간의 생활’에 주목하는 ‘제4일의 신학’”으로 평가한다.
3) “신학사상과 신학교육”,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 396쪽 이하 비교: 여기서 장공은 이러한 당시 한국 신학계의 경향을 “고정주의”라 칭하고 있다. 주재용,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김재준의 사상적 위치”, 『장공 사상 연구 논문집』, 56-59쪽 참조.

사실 장공의 신학은 이러한 ‘신학적 이데올로기들’과의 투쟁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4) 그는 언제나 이렇게 절대화된 거짓 진리에 대항하여 참 진리를 추구했다. 장공은 어떠한 ‘-주의(-ism)’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국에 “그리스도의 심정을 제외하고 이데올로기만으로 심판”5)하려는 행위로 귀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정신’6)이외의 그 어떠한 인위적인 것도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공은 신학함에 있어서 “관념(사고의 지향: 필자)으로서의 정통을 안고 몸부림”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자유로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는” 자유롭고 적극적인 진리 추구의 방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7) 장공 자신의 신학함의 자세에서 드러나듯, 그가 이해하는 신학은 결코 폐쇄적이거나 일방적인 성격의 학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 역사와의 관계를 맺었듯이8), 신학은 학문으로서 교회를 매개로 세상을 향해 개방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학문으로서 신학이 각각의 교파 간, 종파 간, 문화와 영토 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개별 학문/사상 간의 통전적 연관성을 견지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9)

4) “편지에 대신하여(1948년)”,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 316-334쪽 참조. 5) 위의 책, 324쪽.
6) 전철, “장공 김재준의 ‘사랑의 실재론’ 연구”, 『신학논단』, 제 76집(2014), 344쪽: 여기서 전철은 장공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정신’을 ‘사랑’이라 보고, 그의 신학을 이러한 “사랑의 실재론을 기반으로 한 ‘자연의 신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김재준, 위의 책, 323쪽 이하 참조.
7) 김재준, 위의 책, 333쪽.
8) “신학 사상과 신학 교육”, 위의 책, 401쪽 이하: 여기서 장공은 그리스도의 3중직을 정통적 방식의 ‘왕’,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로 이해하지 않고, 섬기는 자(종)로서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제자직으로 부름을 받은 각 인간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론을 교회와 직결함으로써, 다시금 그 교회를 섬기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주어진 3가지 과제 즉,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하는 교회, 그리고 그 교회를 위한 학문으로서 신학은 결국 그 3가지 과제 앞에서 자신을 개방하고 그러함으로써 지속적인 자기 성찰적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9) “신학 사상과 신학 교육”, 위의 책, 403쪽 이하, 특별히 406쪽: 장공은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이러한 통전적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학 교육 지향을 역설하고 있다. “정확한 그리스도 지식, 성경과 교회 전통 안에서 구체화한 기독교적 공동사회에 대한 지식, 그리고 현 세계에 대한 지식 등 이런 지식을 하나님 나라 확장에 구사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우리의 신학교육을 통하여 배출되기를 바란다.” 류장현, 위의 책, 218쪽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장공은 소위 ‘정통주의’라는 것을 일관성 있게 비판해왔다. 그리고 그 비판의 지점은 바로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거짓 절대에 의존하려는”10) 정통주의적 경향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정통주의가 수호하고 전수하려는 ‘전통’은 “더 좋은 미래를 전취하려는” “현재의 인간 활동”을 위한 “밑천”으로서 보존하고 계승할 가치가 있는 것일 뿐, 결코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 통제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 ‘절대화’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며, 모든 방식의 인위적인 대상에 대한 절대화, 혹은 이데올로기화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11) 이것은 결코 정통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이거나, 그 정통주의가 지켜내려고 하는 기독교 전통을 거부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정통주의가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정통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즉, 정통주의가 자신의 신학체계를 통해 주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교설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라고 믿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공은 같은 맥락에서 소위 ‘자유주의’ 신학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즉, 이성을 통한 인간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 가능성을 절대화함으로써, 모든 성서의 증언과 기독교 공동체의 고백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더 나아가서 ‘실증 가능한 것’과 ‘실증 불가능한 신화적인 것’으로 양분하여, 단순화한 것에 관하여 장공은 분명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자유주의 신학의 “희박하고 방자한 막연성”이라 지적한다.12) 장공은 신학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것”13)이라 말하며, 그러한 한에서 인간은 단지 “주 앞에서 다시 얻은 겸손한 자유로 진리에 대하여 질문하며 탐구”14)할 수 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10) “정통과 이단”, 위의 책, 782쪽. 11) 위의 책, 779-781쪽.
12) “한국 교회의 신학운동”, 위의 책, 444쪽.
13) “편지에 대신하여”, 위의 책, 330쪽.
14) “한국 교회의 신학운동”, 위의 책, 444쪽.

위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장공이 이해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갖는 성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장공은 ‘하나의 객관적 학문(eine objektive Wissenschaft)’으로서의 신학은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학문으로서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임시적이고 간접적인 지식만을 전달해 줄뿐, 결코 하나님에 관한 궁극적이며 직접적인 앎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본다. 신학은 그 어떠한 학문적 체계화 작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인식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공은 모든 체계는 잠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결코 하나의 체계에 대해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신학적 체계화는 궁극적 진리 자체가 될 수 없으며, 단지 그 진리를 향한 과정일 뿐이다. 그러한 학문적 체계화는 단지 ‘몸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머리를 통한 앎’의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신학은 “비록 그것이 체계화 했다 할지라도 그 체계가 항구히 불변할 수 없”기에 “날마다 달마다 새로운 진리 탐구에 의하여 부단히 검토되며 시정되어야 한다”.

“객관화(客觀化), 물상화(物相化)한 학으로서의 신학이란 것은 다른 어느 학문과도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학일 뿐 ... ... 신학이 객관화 물상화의 과정을 밟아 다시 인격적, 주체적인 생명에 화신(化身)하여 하나의 고백으로 선포되는 때 그 신학은 학문이면서도 학문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발언(發言)으로 선포되는 것이며 그것은 창백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피와 살이 꿈틀거리는 예언의 외침으로 된다는 그것이었다.”15)

15) “신변여적”, 『김재준 전집』, 제 8권, 182-183쪽.

장공에게 있어서 신학은 결국 “머리로 하는 학(Wissenschaft)”이며 동시에 “몸으로 하는 학(學)”이 만나는 통전적 학문으로 이해된다. 즉, 그에게 있어 신학은 “지식”과 “지혜”가, “인간에 대한 앎”과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삶을 매개로 하여 통전적으로 만나는 장인 것이다.

[2] 장공 신학에 있어서 계시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상호연관성

성육신적 계시와 인간의 진리 탐구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장공은 자신의 신학 사상을 전개함에 있어서 언제나 통전적 이해의 방식을 견지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와 역사 사이의 ‘사회적’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적 의미를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성육신 사건 속에서 찾고 있다.16)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성육신’ 사건은 단순히 거룩한 하나님의 ‘수직적 하강’로 이해되지 않는다. 성육신 사건은 본래 초월적이고 거룩한 것이 한계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내려와 삼키는 초월자의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러한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자기비하’는 인간의 비인간화를 초래할 뿐이라고 그는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월적이고 거룩한 것이 물화(物化)되어, 권위와 교리/전통의 이름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다.

16) 김희헌, “장공 김재준 목사의 신학과 지향”, 『농촌과 목회』, 2014년 봄호, 85쪽 이하.

그는 소위 ‘정통신학’이나 ‘정통교리’와 같은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는 모든 것들을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 성찰이 결여된 채 자기 중심적 진리 수호에 매몰된 종교 체제(System)로서 기독교는 그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성육신 사건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정신을 “인격적인 데서 관념적인 데로, 영적인 데서 율법적인 데로, 자유하는 데서 종 되는 데로 이끌어 갈” 뿐이며, 따라서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고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것이다.17)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종교는 결국 ‘우상’이며,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우상숭배’인 것이다. 따라서 ‘성육신’ 사건은 “물상적인 데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18) 비인간적인 것의 인간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 형성된 기독교는 결국 “‘너’와 ‘나’의 대좌에서 생기는 인간적인 종교”19)인 것이다.

17) “기독교의 기본 문제”,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 362쪽. 18) 위의 책, 360쪽.
19) 위의 책, 같은 쪽.

장공에 의하면, 성육신적 종교로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개인과 역사와 우주를 구원하여 그 안에서 대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신적인 생활운동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대책”20)을 촉구한다. 여기서 장공은 기독교의 두 가지 본질을 말하고 있다. 즉, 기독교 신앙이 지향하는 바는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며, 영원이면서 시간적이며, 종교적이면서 이론적이며, 타계적이면서 현세적이며, 예정적이면서 자유이고, 믿음이면서 행위인”21) 통전적인 삶의 방식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세계 안에서 드러나는 계시의 양면성을 이러한 기독교적 본질이 갖고 있는 ‘성(聖)’과 ‘육(肉)’의 두 요소로 보고 있다. 성육신적 종교로서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하나의 몸(身) 안에서 만남으로써 일치되고, 그 ‘성’과 ‘육’ 사이의 인격적인 조우를 매개로 삶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살아있는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성육신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에 화육된 사건으로서의 계시”22)로 정의한다.

20) 『김재준 전집』, 제 2권, 342쪽. 21) 『김재준 전집』, 제 2권, 207-208쪽
22) 김희헌, 위의 책, 86쪽.

이러한 의미에서 장공은 기독교적 진리가 갖고 있는 역사성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 자체가 역사의 과정을 거쳐, 역사의 사건들을 그 중심 주제로 삼으며, 역사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인간적 노력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장공은 예수의 사건을 하나님의 자신을 계시한 것으로 보고, (신약)성서는 그것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라고 정의한다.23)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 그 자신의 “성질과 경륜”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향한 “구속의 사업”을 역사 속에서 실현했다. 따라서 인간은 그 계시의 본래적 의미와 내용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그 성육신 사건을 신앙하고 그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친교”)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함을 얻는 경험을 갖게 됨”으로써 그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교리”의 틀에 가두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인격과 인격의 전적인 친교”만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을 획득하는 길이라고 본다.24)

23)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 348쪽: “신약은 예수라는 인물의 생과 사와 부활이라는 사건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 자신을 계시하셨는가를 증언한 것이다.” 24) 위의 책, 같은 쪽.

따라서 신학은 학문적 논의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해명하는 “한 부분의 방편”일 뿐이며, 신학 자체가 “신앙을 규정짓는, 신앙 이상에서 신앙을 감독,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결국 신학의 학문적 의미는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계시의 내용과 그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질과 경륜”을 현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밝혀내는 역할을 감당할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과 인간의 실존이 역사라고 하는 현실 가운데서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신 인식을 위한 도구로서의 ‘신학의 매개성’을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성육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계시의 실제적 내용을 역사의 언어로 해석해내는 신적 “성질과 경륜”에 대한 해석학으로서의 ‘신학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장공은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신학을 자유로운 학문적 방법론과 신앙의 겸손함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밝혀내는 ‘인격적 학문’으로 정의함으로써 신학의 참 학문성을 강조한다:

“그들이 배타적인 데 반하여 우리는 협동적이며, 그들이 주입적인 데 반하여 우리는 비판적이며, 그들이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데 반하여 우리는 자유인 것이다. 우리의 이런 태도가 위험하다고 느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이 위험을 떠나서는 참된 의미에서 인격적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유, 자주, 비판, 진취 등 독립적 활동 없이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25)

25) 위의 책, 354쪽.

역사의 의미와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이러한 인격적 학문으로서 신학은 이제 그 대상을 더 이상 하나님 자신으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획득한 ‘인격적 앎’을 인간 역사 속에서 풀어내, 그 본질적 사건이 성취되어야 하는 인간의 역사가 실질적 대상이 된다.26)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인간 역사라는 소재(가루 서말)에 하나님 나라라는 속량 역사(누룩)를 심어 결국은 그 소재인 인간 역사 전체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 또는 그 감화 아래 있게 하는 ‘하나님-사람’의 운동”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기독교의 과제를 위해 봉사하는 학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27)

26) 위의 책, 355쪽: “우리는 이제 한국을 우리의 소재로 받았다. 우리는 한국 역사 안에 그리스도의 속량 역사를 조성하며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의 천국 역사로 바꾸는 업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27) “신학 사상과 신학 교육”,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 402쪽 참조.

물론 장공은 역사 그 자체가 본질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즉, 인간이 갖는 한계들을 역사도 함께 갖고 있다고 그는 본다. 그는 ‘윤리적 인간’에 대한 낭만주의적 낙관주의를 거부한다. 동시에 그는 ‘진보하는 역사’라고 하는 역사적 낭만주의 혹은 절대주의 또한 부정한다. 이러한 부정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부정(negativ)가 아닌, 변혁과 갱신을 위한 긍정적 비판이다. 그가 이해하는 기독교의 역사성은 단순히 기독교 혹은 그 정신이 “역사 자체 안에서 발생학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이상의 것이 역사 안에 들어와서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기록”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 한에서 “또 하나의 역사”란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영적, 윤리적 차원이 내려와 꽂혀서 종말론적인 새 것이 전개됨”을 의미한다.28) 여기서 장공은 역사를 단순한 의미의 보편사와 구속사로 분리하지 않는다. 분명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속성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정의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하나의 목적을 향한 경륜”과 그것을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구원론적 의지를 역사의 지평 속에서 해석하기 위한 관점의 구분일 뿐, 결코 역사를 천상과 지상의 ‘두 왕국’으로 이해하는 이분법의 표현은 아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에게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도성’ 개념도 이러한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장공은 인간의 자유 의지 실현으로서 일반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의 계시로서 구속사와 하나의 흐름으로 분리됨 없이 진행되지만, 그 양 역사가 갖고 있는 의미는 서로 다른 차원의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앙의 관점에서 구분될 수 있음을 말한다.

28) “역사 안에 임한 그리스도”,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 536쪽.

이러한 의미에서 장공은 참된 신앙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와 같은 하나님의 경륜과 의지에 상응하는 지향을 추구함으로써, 그 신앙의 담지자인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에서 도피하지도 않고 역사에 몰입하지도” 않게 이끄는 힘이 된다고 확언한다.29)

29) 위의 책, 539쪽.

“그는 영으로 다시 난 인간으로 역사 이상인 하늘나라에 속하면서 역사 안에 있어, 역사를 그 하늘나라, 즉 구원사의 전형에 의하여 조성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전 인류가 형제자매로서 서로 사랑으로 화육되어 가는 거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크리스찬이 지향하는 역사의 목표이다.”30)

30) 위의 책, 같은 쪽.

장공은 이러한 역사의 궁극적 목표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이미 밝혀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틸리히의 입을 빌어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간 역사는 심판을 받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 종국이 명백해졌음”을 의미한다. 장공에게 있어서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역사 이해는 그리스도 사건이 역사를 매개로 계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경륜이 “인간성의 그리스도적인 재창조”, 즉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준다. 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피조세계와의 통전적 합일을 이루는 공동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 세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전적(사회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장공은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31)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개념은 장공 신학의 “처음과 나중을 꿰뚫고 있는 중심사상”, 혹은 “총괄적 결정체”로서, 장공이 자신의 신학적 진술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의 지향, 그리고 그 두 존재가 만나는 역사의 목적에 대한 종합적 인식의 결과로 평가될 수 있다.32)

31) 장공의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개념에 대한 자세한 조직신학적 분석에 대하여, 김경재, “장공의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관하여”, 『장공 사상 연구 논문집』, 278-300쪽 참조. 본 글에서는 김경재의 제안에 따라 장공의 이 개념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로 명명한다. 32) 김재준, 위의 책, 278쪽.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역사적 구원활동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현실은 장공에게 있어서 ‘공동체’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공동체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 장공은 한 개인 속에서의 ‘영과 육’으로 표현되는 존재적 분열로부터 출발해, 그 개별적 인간과 인간, 그 개별자들이 형성하는 계급과 계급, 다양한 계급들로 구성된 사회와 사회, 국가/민족과 국가/민족, 사상과 사상 그리고 더 나아가 교파와 교파, 종교와 종교 사이의 극도로 분열된 관계성의 통전적 회복을 지향하고 있다.33)

33)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 594 쪽.

장공은 인간 세계와 역사 속에서 자행되는 모든 비극적 분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중심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제안하고 있다. 그는 먼저 ‘사랑’의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이 개념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장공에 따르면 헬라어 ‘에로스’, ‘아가페’ 그리고 ‘필로스’ 등에서 함의하고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피상적 현상들은 본질적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일면만을 드러낸다고 본다. 즉, 모든 각 개별적 애정 관계의 현상들 심층에서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접착제”로서의 ‘사랑’의 본질성에 주목한다.34) 그 본질적 사랑은 “위로부터 오는” 성격의 것으로서 모든 인간의 한계들을 극복하게 하는 “성령의 생명”인 것이다.35) 이렇듯 장공이 사랑의 본질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이해함은 단순히 인간의 악한 속성과 그로인한 한계현실을 지적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의 어둠에 굴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빛을 보기 위한 노력이며 선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신학적 사고는 항상 구체적 역사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표출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모든 신학적 언술, 혹은 신앙적 고백들이 세상 너머 혹은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그것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향하도록 촉구하는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36)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는 이제 인간과 인간 사회를 넘어서 모든 피조세계를 통전적으로 아우르는 ‘우주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즉, “사랑의 의미를 전 우주적으로 넓히”고 그것을 통해 그 ‘사랑의 공동체’ 운동의 지향과 성격을 “우주적으로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공이 이해하는 역사 속에서 역사의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상이며, 동시에 역사와 세계를 초월하여 이 세계가 갖고 있는 모든 한계들이, 죽음까지도 전적으로 새롭게 극복되는 ‘하늘 나라’의 표상이다. 그리고 이 두 표상들은 장공에게 있어서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다시 통전적으로 만나고 있다.

34) 위의 책, 591쪽 이하. 여기서 장공은 그 사랑의 본질적 성격을 공자의 인(仁) 사상의 관련속에서 정의한다. 35) 위의 책, 593쪽.
36) 위의 책, 595쪽; 김희헌, 위의 책, 86쪽 참조.

[3] 판넨베르크 신학 안에서의 계시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상호연관성

위에서 제시한 장공의 신학적 관심, 혹은 접근 방식과는 사뭇 달리, 이성의 신학자, 혹은 철학적 신학자로 불리는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신학적 주된 관심을, 신학적 진술들로 하여금 역사적 진리로서 그 보편성을 확보케 하는 것에 두고 있다. 즉, 신학적 진술의 객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에서 그는 “계시의 역사성”, “신학의 보편 학문성” 그리고 “신학의 기초토대로서의 인간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 가지 주요 모티브는 그의 전체 신학적 작업 속에 상호 연관성을 유지하며 통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37)

37) 박재형, 『Minjung und Gottebenbildlichkeit: Versuch einer theologisch-anthropologischen Interpretation des Begriff ‘Minjung’ in der Theologie Byung-Mu Ahns unter Bezug auf das imago Dei-Verständnis Wolfhart Pannenberg』, 191-207쪽. 판넨베르크는 다음의 저서들을 통해 이러한 그의 전체 역사신학적 프로그램을 일관성 있게, 그리고 상호 연관성 속에서 전개하고 있다. “Offenbarung als Geschichte(1961)”, “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1973)”, “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1983)”

보편학문으로서의 신학과 계시의 성격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신학(Theologie)은 하나의 학문(eine Wissenschaft)으로서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학문으로서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신학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에 관하여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신학’은 그 ‘계시’와 “구성적으로 연관”38)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을 통한, 즉 그의 계시를 통한 하나님 인식을 향한 시도는 이미 신학 개념의 기본 전제 그 자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39)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관념 그 자체에 대한 재고 없이는 하나님 인식에 대한 가능성을 결코 확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40) 즉, 하나님에 관한 관념/개념 그 자체는 결코 인간의 하나님 인식 가능성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때로 그것을 방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을 통하여, 그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려 한다고 하는 모든 신학적 작업은 따라서 간접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한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신(神)적 관념들은 사실 직접적이지 않은 것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38)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Bd. 1, 12쪽. 39) 위의 책, 같은 쪽.
40) 위의 책, 같은 쪽.

그렇다면 피조물로서 인간은, 더 나아가 그러한 인간이 수행하는 신학은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있어서 판넨베르크는 본래 “신학이라고 하는 개념 안에는 신학적 진술의 진리성은 하나님 자신을 통해 확증된 그에 관한 진술인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41)고 본다. 이것은 신학에 있어서 결국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경우에 한에서,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그에 관하여 참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42)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서 신학의 진리성에 관한 요청과 관련해서 판넨베르크는 하나님 계시의 참된 내용에 대한 신학의 의존성 강조한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은 기독교 교의의 내용들을 실질적이며 근본적으로 형성할 뿐 아니라, 그에 선행하며, 동시에 선취하는 성격을 갖는다고 규정한다.43)

41) 위의 책, 17쪽. 42) 위의 책, 207쪽.
43) 위의 책, 19쪽. Wolfhart Pannenberg, “Was ist eine dogmatische Aussage?”, in: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Bd. 1, 159쪽 비교: “그러나 계시 그 자체는 교리(Dogma)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교리에 우선하는 규범, 즉 그것의 시금석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하는 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말할 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학을 수행하는 주체인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자연적 본질 상, 하나님에 관하여 그 어떠한 ‘직접적인 앎’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다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통해 전해 받은 그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들(dogmata theou)을 과연 진리로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44) 그리고 이러한 물음이 제기되는 곳은 기독교 신학 자체 혹은 교회가 아닌, 바로 그 밖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보편타당성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기독교의 가르침(Dogma)의 진리여부에 대한 물음은 더 이상 “신앙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동의”를 통해서만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45)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중세의 카톨리즘으로부터 벗어나, 종교개혁과 세속화의 과정을 지나온, 더 이상 기독교가 공적(公的)인 성격을 유지할 수 없는 현대의 사적(私的)종교 혹은 다(多)종교 사회 속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44) 위의 책, 24쪽 이하. “... 이 도그마는 인간에 의해서, 교회와 그 교직자들에 의해서 조성되고 선포된다. 따라서 도그마가 인간의 생각보다 우선인지 아닌지, 단순히 인간적인 발견이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 계시의 표현인지 아닌지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45) 위의 책, 27쪽.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확증된 사실로서 신학의 학문적 대상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의 실재는 오히려 “인간 경험의 여타 대상들과 함께 주어지는 것인 한”에서 단지 질문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46)

46) Wolfhart Pannenberg, 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 303쪽.

“하나님에 관한 관념은 그 개념 자체가 말해 주듯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실재로서,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확증되어야 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확증은, 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 그 하나님에 관한 관념에게 외적으로 부여되는 당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확증을 위한 수행 방식이 하나님의 자기증명으로서의 존재론적 신(神) 증명의 형식에 적합할 때 입증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관념에 대한 검토의 결과가 이 경험되어지는 현실에 있어서 여전히 열린 채로 남아있는 한에서, 그리고 그것이 제한된 인식의 현실인 한에서, 하나님에 관한 관념은 여전히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 대한 하나의 단순한 관념으로서 가설로 머물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하나님에 관한 관념이 신학 안에서도 역시 가설로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자신을 확증해야 하는 인간의 자기 경험과 세계 경험 앞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신학적 인식의 한계성을 말해주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그 개념에 따라 신학의 주제로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관념들을 재검토해야 하는 모든 경험적 현실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럼으로써 신학의 대상을 결정하고 있다.”47)

47) 위의 책, 302쪽. 괄호 안의 표현은 필자가 첨가함.

이러한 이유에서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실재는 인간적 인식노력으로서의 신학에 있어서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간접적 방식으로 접근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한 인간적 인식 가능성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기이해와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에 로의 우회”를 통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48)

48) 위의 책, 311쪽.

계시의 간접적 성격과 역사로서의 계시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으로서의 신적 본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 능력은 결국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간접적 성격’과 결부됨으로써, 그 계시에 대한 역사적 이해로 확장된다. 이와 동시에 그 계시의 수여자인 인간 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역사적 표명인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는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의 해석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전달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 그 자체를 내용으로 갖는다. 그에 반해 간접적인 전달은 본래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을 내용으로 갖는다. 직접전달에 있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발신자로부터 수신자에게로 곧장 전달된다. 하지만 간접전달에 있어서 그 방식은 왜곡되고 만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것이 하나의 다른 관점에서 관찰될 때, 비로소 그 본래의 의미가 밝혀진다. 따라서 간접전달은 더 높은 잠재력을 갖는 전달 방식이다: 간접전달은 언제나 직접전달을 본질적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간접전달은 전혀 새로운 관점 안에서 그것을 성취한다.”49)

49) Wolfhart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16쪽.

결국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수용 사이에 존재하는 매개가 필연적인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계시의 간접성, 즉 역사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념비 적인 저서 “역사로서의 계시(Offenbarung als Geschichte)”에서 다음의 7가지 논제(These)를 제시한다.50)

50) 위의 책, 91-114쪽 참조.


  • “성서적 진술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직접적인 방식, 즉 신적 현현(Theophanie) 방식이 아닌, 간접적인 방식, 즉 신의 역사적 행위를 통해 실현되었다.
  • “계시는 맨 처음이 아닌, 그 계시가 임하는 역사의 마지막에 드러난다.”
  • “신성(神性)의 특별한 현현들과는 달리, 역사적 계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역사적 계시는 보편적 성격을 갖는다.”
  •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보편적 계시는 아직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비로소 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 이유는 그 예수의 운명 속에서 모든 사건들의 결말이 미리 드러났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사건은 고립된 사건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신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 단지 이스라엘과 함께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한 부분인 한에서 그러한 것이다.”
  • “이방 기독교 공동체들 안에서 형성된 비유대교적 계시의 표상들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자기계시가 갖는 보편성은 비로소 예수의 운명을 통해 표출된다.”
  •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으로서, 명령으로서 그리고 선포로서 계시와 관련된다.”

위의 7가지 논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판넨베르크는 하나님 계시의 속성을 간접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간접성의 근거로 계시의 역사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계시를 신의 직접 현현으로 이해하지 않고,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활동과 그것을 경험한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해석학적 상호작용을 통한 간접전달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결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 드러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며, 그 계시의 내용이 본질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모든 계시를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갖는 직접성은 그것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매개를 거치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에 따르면, 간접계시는 직접계시와 다음의 지점에서 구분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본래 전달하고자 하는 계시의 본질적 내용 그 자체가 그 계시의 수용자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전적으로 그가 경험한 역사적 사건들을 매개로 한, 의미화를 통해 비로소 접근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모든 각각의 역사적 사건들에 있어서 그것을 일으키는 근원자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그러한 사건들을 매개로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그의 활동과 행위의 의도가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활동과 행위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단지 그 자기계시의 실질적 내용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적 의지만이 사실상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있을 뿐, 그의 본질 자체는 결코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51) 반면 이와는 다르게 계시의 직접전달이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서는 그 계시의 내용이 하나님 자신을 직접 다룬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럼으로써 그 계시가 자신의 수용자인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의 본질 전체를 직접 전달한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의 “직접적이며 매개를 필요치 않는 방식의 자기 드러냄은 그 한 하나님이 갖는 본질적 통일성을 고려할 때, 결코 성서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52)

51) 위의 책, 17쪽. 52) 위의 책, 12쪽 이하.

이와 관련해서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냄(Erschließung seines Wesens)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 개념과 자기표명(Manifestation)로서의 하나님의 나타냄(Erscheinung Gottes) 사이의 명확한 개념 구분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신적 표명(Manifestation)에 대한 단순한 ‘구체화(Handgreiflichwerden)’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에서 진술하고 있는 야훼의 현현에 대한 모든 표상들은 – 야훼의 이름 표명 사건, 예언자 전통과 원시기독교적 전통들 속에서의 ‘하나님 말씀’ 표상을 포함하여 – 비록 그것들이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계시의 형태로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계시 사건은 아닌 것이다.53) 여기서 그는 특별히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야훼의 이름 표명 사건이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소명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적 본질의 드러냄은 계시 행위 그 자체, 혹은 이러한 신적 행위의 매개 그 자체, 혹은 그러한 행위와 그 행위의 매개 자체를 그 내용으로 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53) 위의 책, 13쪽 이하, 특별히 15쪽 이하 참조.

이렇듯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간접적 성격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계시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즉, 계시는 ‘역사를 매개로 한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 본질적으로 역사성을 띤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간접적 계시와 직접적 계시를 구분하는 지점은 그것이 단순히 간접 혹은 직접 전달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닌, 그 계시의 내용이 “그것이 담고 있는 지향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54)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의 역사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결국 그가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55)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위를 매개로 한, 역사적인 관여를 통해 발현되는 구체적 사건들 속에서 모든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54) 위의 책, 16쪽. 55) 위의 책, 91쪽 이하.

역사의 보편성과 신학적 토대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계시의 간접적 성격을 그것이 갖는 역사적 상관관계의 토대로 이해함으로써, 그 계시의 매개가 되는 역사의 보편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하나님 됨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표상들은 다음의 사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드러냄’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계시됨은 각 역사적 사건들의 목적을 결정한다”56)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관련된 역사적 행위들의 결말로서 그 계시됨이 (역사 속에서) 획득한 지위는 그 자신의 간접적 성격 안에서 그 근거를 갖는다”57)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계시가 갖는 간접성은 단순히 그 전달 방식에 있어서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계시행위의 궁극적 목적과 본래적 내용이 비로소 마지막에 가서야, 즉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성취된 후에 가서야 온전히 밝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계시의 종말론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경험되는 현실들에 대한 의미의 총체’로서 전체 역사의 ‘보편적 성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전히 과정 속에 있고, 따라서 그 궁극적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개방되어 있는 전체 역사의 본질적 목적이 “모든 경험되는 현실들의 의미총체로서 단지 선취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58) 이러한 선취는 모든 경험들과 관련이 있으며, 모든 각각의 경험적 내용들에 대한 확실성의 여부에 대해 본질적인 성격을 갖는다.59)

56) 위의 책, 96쪽. 57) 위의 책, 같은 쪽. 괄호 안의 표현은 필자가 첨가함.
58) Wolfhart Pannenberg, “Wie wahr ist das Reden von Gott?”, 38쪽.
59) 위의 책, 같은 쪽.

이러한 역사의 보편성과 관련해서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신론에 관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열려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다음의 사실과 긴밀히 연관되는데, 즉,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전적으로 신론(新論)적 이해를 바탕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가정이 현대의 사상사적 맥락 속에서는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인간에 대한 신학적 주제들이 여타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의 실재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관념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시 재생 가능한 일시적 소여(Gegebenheit)이 듯이 사용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적 주장들이 그 신 관념에 적합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식의 생각은 만물을 규정하는 실재인 하나님의 하나님 됨 자체에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60)

60) 위의 책, 34쪽.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실재에 관한 모든 신학적 진술들은 기존의 신 관념을 하나의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이는 한 더 이상 직접적으로는 확증될 수 없고, 단지 모든 각각의 경험되는 역사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의미총체성과의 관련 속에서만 확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역사적 사건들의 총체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갖는 본질적인 내용으로서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자신을 스스로 드러냄에 있어서 자신의 역사적 활동을 매개로한 간접적 방식을 통해 자신의 목적과 의도를 인간을 향해 계시한다. 즉, 하나님의 모든 계시 행위는 역사의 매개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며, 인간은 다시 역사적 사건을 매개로 하나님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본질적 내용을 간접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학문이론적(wissenschaftstheoretisch)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된다. 즉, 하나님과 그의 활동 혹은 계시행위에 대한 신학적 주장들은 직접적으로 그 자신의 대상을 통해선 검증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들은 자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에 대해서 검증될 수 있을 뿐이다. 신적 실제 혹은 신적 활동에 대한 주장들은 그 자신이 갖는 함의에 대해서 그와 대비되는 유한한 인간적 실재의 이해를 위해 검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실재’로 규정되기 때문이다.61)

61) 위의 책, 같은 쪽.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즉, 신학은 세계의 모든 현실들과의 관련 속에서 인간 자신에 대하여, 더 나아가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과 그의 본질에 관하여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신학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갖는 기초적인(fundamental) 성격을 강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말하는 신학에 있어서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갖는 기초신학적(fundamentaltheologisch) 성격은 단순히 하나님 인식의 기초적 근거로서 인간학과 역사학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묘사하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다양한 표상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을 자명한 교리적 전제들로부터 직접 도출하는 방식이 아닌, “간접적인 방식으로 혹은 매개를 통한 방식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62)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기초신학적’이라는 표현은 한계적인 것에 관한 인식을 통해 영원에 관한 인식에 다가가는 것, 즉 인간과 역사, 그리고 세계의 경험적 실재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을 규정하는 유일한 실재인 하나님에 관한 인식에 다가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모든 신학적 교리적 진술들은 그 자체로 자명하고 완결된 하나님에 관한 절대적 인식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오직 그 신적 실재가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경험적 실재들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할 때만이 진리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잠정적인 성격을 갖는다.

62) Wolfhart Pannenberg, 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21쪽.

[4] 나가며

지금까지 장공의 신학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에서 드러나는 계시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상호연관성에 관하여 필자 나름의 관점으로 분석하여 제시했다. 사실, 두 신학자가 갖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만큼 많은 차이를 보인다. - 여기서 시대적 차이는 단순한 통시적 의미의 출생년도의 간격을 말하는 것이 아닌, 유럽과 아시아, 소위 1세계와 3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공시적 시대의 간극을 말하고 있다. - 장공의 신학적 상황은 전적으로 시대적 아픔과 불완전을 온전히 품고 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판넨베르크는 – 비록 그가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는 전 인류적 비극을 경험하긴 했지만 – 오히려 전후 유럽의 풍요로움을 자신의 신학 안에 담고 있다. 그것은 두 신학자가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 처했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에 대해 어떠한 문제의식을 갖느냐의 문제가 된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신학적 주된 관심사를 본격적으로 정상궤도에 오른 풍요한 문명세계 안에서 많은 부분 신화적 언어를 그대로 담지하고 있는 신학적 언어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에 두었다. 그는 자신의 신학의 주제들을 통해 세상을 변혁하고 갱신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적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신학과 비신학적 학문들, 교회와 교회 밖의 사회 그리고 종교와 비종교의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적 간극을 매우는 것이다.

하지만 두 신학자의 신학적 관심에 있어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세상 속에서의 기독교와 그 신학이 갖는 역할과 지위에 대한 고민이다. 이 두 신학자는 사실 그 학문적 방법론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한쪽은 모든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적 분석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다른 한쪽은 결국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적 수행을 본질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장공은 신학을 삶과 몸으로 하는 “생활학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학문적 작업을 통해서는 결코 실현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장공의 신학은 학문(Wissenschaft)라기 보다는 사상적 운동(Geistiges Engagement)에 가깝다. 하지만 그 수행의 대상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 계시의 궁극적 진리이다. 따라서 장공의 사상은 신학적이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일반 여타 비신학적 학문들의 방법들을 적극 수용한다. 어찌 보면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신학이기 보다는 철학 혹은 인문과학에 가깝다. 하지만 그도 분명히 자신의 신학함에 있어서 그 학문적 대상을 역사를 매개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궁극적 내용으로 삼고 있기에, 결국 신학적이다. 그리고 그 두 신학자 모두 자신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결코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의존하거나 혹은 전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어쩌면 하나님의 진리 앞에 겸손한 자세로 하지만 그 진리를 향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열망을 통해 신학적 작업을 전개한 신학자로 평가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신학사 속에서 언제나 뒷자리로 밀려났던 인간과 역사에 대한 주제들을 다시 신학의 중심으로 끌어와 신학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 소외의 현상들에 반기를 든 신학자로,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대해 언제나 무임승차를 조장하는 비사회적 신학들에 대한 비판을 한 신학자로 장공과 판넨베르크 사이의 신학적 대화는 충분히 의미를 갖는다.

이 두 신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학과 신앙 고백의 전제들에 대한 보다 겸손하고 개방된 자세를 갖게 되길 바란다. 교파, 교리 그리고 권위에 의존하는 모든 인위적 전통들은 우리가 고백하는 한 하나님의 속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닌, 그것을 찾아가도록 이끄는 길잡이(지도)가 될 뿐이다. 평소 친분이 있는 한 평신도 신학자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지도 그 자체는 영토가 아닙니다. 지도는 여행을 할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우리가 가는 궁극의 목적은 여행의 목적지 바로 그 곳이지, 우리가 들고 있는 지도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고 있는 신학과 신앙의 여정 속에서 고난 받는 민중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우는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정신 그 이외의 그 어떤 지도도 결코 우리의 영토가 될 수 없음을 필자의 졸고를 통해, 그리고 장공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통해 조금이나마 맛보길 바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