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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33회] 핵에너지의 위험과 장공 김재준의 평화사상 / 김판임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24 10:09
조회
1909

[제33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4년 4월 24일(목) 오후 5~7시

핵에너지의 위험과 장공 김재준의 평화 사상

김판임
(세종대 교양학부)

목차 [1] 들어가는 말: 글의 목적과 범위
[2] 장공의 전쟁과 평화 이해
[3] 우리시대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 우리 시대의 우상
[4] 나오는 말: 오직 사랑 뿐

[1] 들어가는 말

“생명 평화 정의”

장공께서 남기신 이 세 마디 말씀은 기독교 정신, 혹은 성서정신을 요약하신 것이다. 장공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장공이 친필로 쓰신 생명 평화 정의의 휘호 글씨만 보아도 필자는 가슴이 뛴다. 내 심장이 뛰는 이유는 아마도 서체에서 장공의 생명력, 직관력, 그의 정신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내용적으로 성서에 나타난 신의 뜻을 너무나 정확하게 파악해 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인간을 신이 창조하셨다고 진술한다. 창조주께서 존재에게 생명을 주셨기에 모든 생명은 신적 기원을 가진 존귀한 존재들이다. 이처럼 생명은 창조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반면에 평화는 종말사상과 관련이 깊다. 사람이 살고 있는 현재는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지만, 마지막 때, 신이 정하신 그 날에는 신이 직접 통치하시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온갖 악과 죄가 사라지고 평화가 올 것이다.

임박한 종말을 의식하고 종말 시 구원을 준비하는 데 집중했던 이스라엘의 에세네파-쿰란공동체가 애용한 이사야서는 종말에 관한 많은 표상들이 발견된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사 2:11-12)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어 어린 아이에게 글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명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5-7)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 그들이 분 내어 여러 민족을 치되 치기를 마지아니하였고 노하여 열방을 억압하여도 그 억압을 막을 자 없었더니 이제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니 무리가 소리 질러 노래하는도다.”(사 14:5-7)

신께서 창조하신 직후 보시고 만족하셨던 조화와 질서, 평화의 세계는 무너졌다. 이러한 세계에 신은 마지막 때에 개입하셔서 현존하고 있는 인간의 포악함과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고 평화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며 유대인들은 종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소망사항에 속한다. 신약성서시대 유대교의 종말론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폴츠(Volz)라는 학자는 유대문헌에서 종말론적 은사로서 “세계 평화”가 제시되었음을 말하고 있다.1)

1) Paul Volz, Die Eschatologie der jüdischen Gemeinde im neutestamentlichen Zeitalter (Tübingen: Mohr, 1934= Hildesheim, 1966), 381-384.

신약성서도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고 종말에 세계의 악을 제거할 심판주라는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가 계시니) 그분에게서 만물과 우리가(창조되어) 그분에게로 (심판받으러 간다)”(고전 8:6a)

이 구절은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심판주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신은 역사의 시초자이고 완성자이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예외가 없다. 마지막 때 모든 존재자들은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으로 심판을 받기 위해 나아간다는 점에는 예외가 없다. 신은 창조와 종말을 주관하신다. 시초는 생명을 주심으로 시작하였다면, 종말은 생명을 죽이는 문화를 돌이켜 평화를 이룰 것이다. 이 역사의 시초와 종말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역사는 신께서 정의로 다스리신다. 정의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 어떤 생명도 제대로 생명을 누릴 수 없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 평화, 정의’는 나누어질 수 없다. 이 셋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이 셋이 하나가 될 때, 신의 뜻이 온전히 실현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의 표어도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평화와 정의로 인도하소서”였고, 생명, 평화 정의를 중심으로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자리에서 생각을 나누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책임의식을 공유한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생명, 평화, 정의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평화를 중심으로 장공 김재준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평화를 이야기할 때마다 분명 생명과 정의의 중요성이 동반될 것이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과 고리 1호 등 국내의 노후된 원전의 위험, 지금도 유출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물질로 인해 연일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서 장공의 평화 사상이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자 한다.

[2] 장공의 평화 이해

장공이 “평화”라는 개념을 사용한 글들은 장공의 저작 모음인 『김재준 전집』 18권의 분량에 비할 때 매우 빈약하다. 제3권에 한 편 「크리스찬의 평화」, 제7권에 2 편 「평화에의 의지와 노력」, 「세계 평화의 문제 – 핵 공포와 인간 소외」, 제 9권에 한 편 「6.25와 세계 평화」, 제 10권에 두 편 「평화」, 「복음과 평화」, 총 여섯 편이다.

평화라는 개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장공 말년에 저술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제16권), 혹은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제18권)에 장공 사상이 집결되고, 여기서 그의 결정적인 평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김경재 교수가 김재준 평전에서 올바르게 평가한대로,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그의 말년에 나오는 개념으로서 ‘김재준의 신앙과 신학의 결승점’으로 볼 수 있다.2) 평화 개념은 사용되지 않지만 여기서도 그의 평화 사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김경재, 『김재준 평전』(서울: 삼인, 2001), 199.

평화 개념이 사용된 장공의 저술을 중심으로 얼마 전 정지석이 ‘장공 김재준의 평화사상과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개관하였으므로, 본고는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장공의 평화 이해를 살피고, 핵에너지의 위험에 처해 있는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 살펴보겠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생존하였던 장공 김재준(1901-1987)은, 그래서인지 평화와 관련된 그의 글에는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이 기본을 이룬다. 평화에 관한 장공의 글을 보면, 그 당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세월이 흐른 후에 반추하는 성격을 띤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 직후에는 전쟁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는 급격히 변하는 교단 내 정치 상황과 새로운 신학교 설립에 집중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박형룡, 박윤선을 위시한 보수주의적 근본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당해 장로회 총회로부터 축출되는 과정과 조선신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의 창립 과정으로 여념이 없었을 것으로 사료된다.3)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나 6.25 한국전쟁에 관한 글은 차후에 나온다. 그러나 1965년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하게 될 때 장공은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3) 이에 관해서는 김경재, 『김재준 평전』(서울: 삼인, 2001), 67-111 참조.

1965년 2월, 《춘추》지에 실린 「평화에의 의지와 노력」이란 글은 1965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미국과 동맹국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결의하고 비전투 한국군 2000명을 파병한 직후에 기록한 것이다. 이 글에서 장공은 베트남 전쟁보다 앞선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에 대한 회고와 신학적 성찰로 시작한다. 장공은 유엔이 성립되고 전승국들이 전패국을 우대하며 식민지들을 독립시켰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인류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가졌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서 평화가 오는 것처럼 여겼다는 고백한다.

그러나 동서가,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대치하고 있는 국면을 보면서 평화가 다시 위협받고 있다고 파악한다. 핵무기를 미국만이 아니라 소련도 보유함으로써 대결하고, 세계는 평화가 아니라 더 심한 멸망의 공포에 떨게 되었다고 평화가 위협받는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핵무기가 냉전용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신경전에만 이용하고,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장공은 평화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 세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몸소 체험한 것 같다. 평화는 절대로 폭력과 살벌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4) 베트남전에 대해 장공은 전쟁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오직 이웃사랑의 실천에서만 기대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5) 즉, 미국이 월남전에서 전쟁 비용으로 사용하는 연간 140억 달러를 차라리 월남에서 평화적으로 사용한다면 전쟁에 의한 자유민주화보다 훨씬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6) 북한 공산주의와 625전쟁을 겪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개 공산화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의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것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이 많았지만,7) 장공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는 동의하면서도 전쟁이라는 방법은 기독교정신에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4) 김재준(1965), 「평화에의 의지와 노력」, 『김재준 전집』제17집,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284. 5) 김재준(1965), 앞의 글.
6) 김재준(1965), 앞의 글, 285. 미국의 무력 사용의 비효용성을 비판하면서 보다 실효성 잇는 평화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지석은 장공이 실용적 평화주의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정지석(2007), 「장공 김재준 목사의 평화사상과 신학」, 4.
7) 가령 NCC 총무 길진경 목사는 국가 정책이라는 차원에서, CCC 총무였던 김준곤목사는 월남전이 공산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교회가 참여해야 한다고 대학생들을 선동하였다.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는 전쟁 초기부터 미국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 입장을 밝혔다. 1961년 미국이 16000명 군대를 투입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100만 톤이 넘는 폭탄을 투입하고 1973년 파리평화협정으로 인해 미국이 철수하기까지 이 전쟁은 미국 병력 55만3000명 군 병력을 파견하여 5만8천명이 사망하고,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NLF 군) 100만 명 이상 사망, 한국군 5000명 이상 전사, 16000명 부상, 베트남 민간인 200만 이상 사망 내지 부상의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전쟁은 15년 전에 일어난 한국전쟁과 유사한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유사한 점을 들자면, 분단된 나라 안에서 일어난 전쟁이란 점,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전쟁이었다는 점, 미국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은 다행히 장공과 세계인이 염려하는 핵폭탄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6.25 한국 전쟁에 비해 다른 점이 있다면, 유엔 평화군이 한국전에는 참여한 반면, 베트남전에는 참여하지 않은 미국 중심의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에는 남한엔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이, 북한은 중공과 소련이 도왔다. 그리고 한국전이 3년 1개월의 전쟁 끝에 휴전으로 잠정 휴식에 들어간 반면, 베트남은 종전으로 막을 내렸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에 관해 장공은 전적으로 북한 공산군의 침입으로 인한 전쟁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맞서는 것은 정당방위였다. 장공은 공산주의자들이 공산혁명을 위해 전쟁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어느 나라라도 침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6.25전쟁도 그 실례라고 보았다.8) 북한의 남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시작한 것이어서 ‘더 이상 전쟁은 그만’하고자 했던 세계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미국의 맥아더의 지휘 아래, 유엔군의 참전과 함께 같은 해 11월에는 북진하여 평양과 원산을 수복하고 함경도 지역까지 향하여 갔으나 중공군들의 인해전술로 다시 남으로 후퇴, 이와 같이 남과 북을 오르락거리며 1953년 7월에 휴전이 되기까지 남북 쌍방이 150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부상자도 360만 명에 다하였고, 국토는 피폐화되었다. 민족 분단의 체제는 매우 강화되었고, 반공이데올로기는 초법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8) 김재준(1970), 「6.25와 세계 평화」, 『김재준 전집 제17집』, 216.

「6.25와 세계 평화」라는 글에서 장공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의해 발생한 6.25 전쟁이 3년 안에 끝나게 된 데에는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인의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를 위한 국제 연합 (UN)이 창설되었는데, 장공은 이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상부상조의 세계로 역사의 방향을 전향시키려는 인류의 노력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는 예수의 원수 사랑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국세 관계에 적용한, 매우 훌륭한 역사로 보았다. 전쟁 방지와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인 유엔이 ‘집단 안전 보장제도를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 본 것이 한국전쟁에서였다’. 장공은 한국전쟁이 유엔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 사건으로 보았다. 즉 한국전쟁을 통해 유엔은 그 생사의 고비를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9)

9) 김재준(1970), 앞의 글, 220.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군 사망자 3배, 민간인 사망자의 5배의 피해를 가져왔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가 대독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고, 독일의 유대인 600만 학살이라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며,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일어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었고 일분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인에게 영향력을 크게 미친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초로 핵폭탄이 투여된 사건이기도 하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죽음의 여행”이란 뜻의 한 사막지에서 역사상 첫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다. 엄청난 괴성과 충격파가 사막을 집어 삼켰다. 상공 9 Km까지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실험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 보이’란 암호명의 두 번째 핵폭탄이 투하되었고, 며칠 후 나가사키 상공에 ‘팻맨(뚱보)’라는 이름의 세 번째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16만 명, 8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부상당한 많은 사람들의 후유증이 2세 3세에 까지 이어지고 있는 참혹한 역사를 남기고 있다. 핵의 위력을 알게 되자 미국에 이어 소련이 핵무장했고(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 중국(1966년)이 뒤를 이었다. 동서냉전이 절정이 이르렀던 1985년에 지구촌에는 약 6만 기의 핵탄두가 발사대기 상태에 있었다.

장공은 핵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을 떨치며 미국과 견제하는 소련을 두고 ‘핵무기 경쟁’이란 표현을 사용한다.10) 핵을 가지고 견제만 하고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1985년 《사상계》에 실린 「세계평화의 문제」라는 글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평화를 위한 인류의 노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핵무기의 사용을 금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11) 장공은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을 경험한 세계인들과 함께 핵무기의 사용은 인류의 재앙, 전지구의 멸망을 초래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핵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광인의 소행일 것이며 그것은 전쟁행위가 아니라, 온전한 살인 행위, 즉 살인을 위한 살인 행위 밖에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12) 장공은 핵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도덕적 이상주의로 전세계인에게 호소하는 것만 아니라, 당시 세계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치적 차원에서 군사시설의 정보 교환이나 원전 사찰의 제안을 지지했다.13)

10) 김재준(1965), 「평화에의 의지와 노력」, 『김재준전집 제7권』, 283. 11) 김재준(1985), 「세계평화의 문제 -핵 공포와 인간소외」, 『김재준전집 제7권』, 323-324.
12) 앞의 글.
13) 앞의 글, 324-325.

반전 반핵의 평화주의자 장공은 세계 평화의 문제에서 좀더 근본적인 평화 기반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1) 유럽 연방, 북미 연방, 남미 연방, 동남아 혹은 아시아 연방과 같이 하나의 독립국가를 넘어 지역별 연방제 구상 - 장공은, “선진국측의 이기적 사심을 버리고 함께 잘 살기 위한 봉사자로서 진실과 성의를 보인다면 갑자기 실현되지는 못할지라도 그런 새 역사의 여명은 보이기 시작될 것이 아닐까”14) 기대하고 있다. 2) 두 번째로 장공이 제안하는 것은 보편문화의 건설이다. 즉,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40여 년간 미국과 소련,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진영으로 세계가 나뉘어 냉전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장공이 제안한 보편문화란 두 이념과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이데올로기보다는 생활의 안정과 자유의 가치를 앞세우는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문화를 말한다. 이러한 보편문화를 제안하면서 장공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냉전을 만드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한다.

14) 앞의 글, 326.

먼저 공산주의에 대해: “공산주의란 것은 인간을 억지로 구사하는 체제이므로 항구할 수 없고 미구에 변할 것이며, 변한다면 인간 본연의 자태를 지향할 것이므로 좀 더 참아보자는 것이 세계 평화의 바른 길일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좀 참고 기다리자는 말이다. 공산주의의 멸망에 대한 장공의 예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현을 보았다. 1989년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며 통일을 이룸과 함께 동구권에 자유의 바람이 불었고, 1991년 러시아 혁명 이후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라는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중국도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현재 북한만이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공은 공산주의만 비판한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가 인간을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상품이나 돈벌이로 다룬다는 점을 간파하였다.15)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물건은 넘쳐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단지 소비자일 뿐이다. 인간이 만든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간은 그 기계의 조종사라기보다는 기계의 부분품 노릇을 하면서 인간은 소외된다는 것이다.16)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만족할 수 있는 소유욕의 한계가 없고, 사회는 더 열심히 일하라고 더 열심히 생산하라고 더 열심히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오늘날 인건비 절감이라는 이름하에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사회적 안전망에서 소외되는 것을 장공 생전에는 없었던 일인데, 이러한 미래까지 내다보신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15) 앞의 글, 327. 16) 앞의 글, 327-328.

장공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한다. “욕구대로 다 채우려면 한량이 없을 것이므로 어떤 제3의 궁극 목표를 세우고 모든 욕구를 그 목표에서 통일해야 할 것이다.”17) 장공이 생각하는 제3의 궁극 목표는 하나님이다. 장공은 니버를 인용하여 하나님과 나, 그리고 사회를 세 축으로 하는 공동체를 제시한다.18)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은 나와 사회만으로 형성되어 “개체주의와 전체주의 사이를 왕래하는 펜들렘을 조절할 손이 없다.”19) 인간소외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자기나 남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인간애에의 복귀, 거기에 평화가 있고. 거기에서 인간 소외가 해소된다고 우선 말해줄 밖에 없다.”20)

17) 앞의 글, 329. 18) 앞의 글.
19) 앞의 글.
20) 앞의 글.

1985년에 발표한 「세계평화의 문제」보다 2년 전에 토론토 연합교회에서 발표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란 제목의 글과 1986년에 발표된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장공은 핵의 위험 속에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를 이기고 평화를 구축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보호하는 대신 약탈하고 오염시켰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악보다 크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보내어 죄를 씻어 주셨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상실된 낙원인 이 땅을 하느님의 정원으로 회복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마물도록 해야 하는’21)일이다. 장공은 이를 지구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까지 확대해야 할 비전을 본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장공에게 자연은 살아있는 생명, 창조주의 영광이다. 지구가 우주의 낙원인 지구를 사랑한다면, 원자탄, 수소탄을 폭파함으로써 지구를 오염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21) 김재준(1983),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장공 김재준 논문 선집』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491.

지구를 살리는 길, 지구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지구를 사랑하는 길이다. 장공은 교회를 세계를 살리는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거점, 전선기지로 본다. 사랑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 사랑은 고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이웃이 없다면 이웃을 만듭니다.”22)

22) 김재준(1986),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장공 김재준 논문 선집』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499.

제2차 세계대전, 6.25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회고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장공의 평화사상에는 이처럼 창조신앙과 구속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나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이 근간을 이룬다.

[3] 우리 시대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

1) 우리들의 우상: 에너지의 과다 사용에 관한 욕망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즐겁게 잘 살고 싶어한다. 삼성과 엘지가 만든 스마트폰이 전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들려 있고, TV와 냉장고 에어컨이 각 가정마다 비치되어 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파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계인 모두에게 판매하고자 하는 것이 이들 기업의 꿈이다. 핸드폰, 컴퓨터, TV, 카메라, 에어컨 등 수많은 전자제품들이 현대인의 필수품으로 생각될 정도이다. 이 모든 것들은 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자동차가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하니 전기자동차를 개발하여 이미 시판되고 있다. 많은 회사들은 전기를 사용하여 공장들을 가동하여 물품을 생산하여 수출로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하철을 사용하여 서울과 근교도시들이 1-2시간 내에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 오늘날 한국에서 전기가 없다면, 갑자기 전기가 끊기기라도 하는 날이면, 필자와 같은 글 쓰는 이는 제대로 저장하지 않고 있다가 써놓은 글을 다 날려버릴 위험도 지대하다. 산업이 발달할수록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전기의 사용량은 늘어나야만 한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후반까지도 우리는 가끔씩 전기가 끊기는 경험도 했다. 지하철은 서울-인천을 연결하는 1호선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9호선까지, 분당선, 신분당선 등 많다. 현대인들은 지하철이 없다면 어떻게 살까 상상도 못할 것이다. 요즘은 전기가 끊기는 일도 거의 없다. 어찌된 일인가? 이 모두가 핵에너지 개발로 인해 전기가 풍족해진 덕분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핵시대라고 부른다. 핵에너지가 매력적인 것은 막강한 전기를 생산해준다는 것, 그 힘은 국력이고 산업을 일으킬 원동력이고, 세계 강대국 대열에 포함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기술개발이 가져온 온갖 전자제품들을 소유하고 사용해야 우리는 문명의 발달에 적응하는 현대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조그만 네모를 바라보며 무슨 학자인양 집중한다. 옆 사람에겐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다. 장공이 스마트폰 시대를 살지 않으면서 핵의 결과가 인간소외를 초래한다고 본 것은 탁월한 예언자적인 혜안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는 고리 1호이고 1978년에 처음 가동되었다. 두 번째 원자력 발전소 월성 1호는 1983년에 가동되기 시작했다. 체르노빌 참사가 있던 1986년 한국에서는 6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핵폭탄의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경험한 인류는 다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고 핵의 평화적 사용을 결의하였다. 1953년에 있던 일이다.

핵을 무기로 사용하든 평화적으로 사용하든, 플루토늄이나 우라늄이 분열될 때 나오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그 원리는 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싶어 한다. 에너지의 소유는 힘의 소유이다. 핵에너지를 아무리 평화적으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사실이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인해 분명해졌다.

2) 체르노빌 참사/후쿠시마 원전 사고

1986년 4월 26일(28년전) 체르노빌 원전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우리는 그저 위험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아직도 그 땅은 폐허로 남아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핵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원전 기술과 전기를 외국에 수출까지 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는 핵에너지의 위험성보다는 유용성을 홍보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르노빌 사건이 일어난 후 20년 동안 비밀에 붙였던 실제 사실을 2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며 한 영상을 만들었다. 실제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보다 10배 이상의 방사능이 배출된 위험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관련 영상을 2006년에 제작하고 2012년에 게시되어 전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23) 제목은 체르노빌의 전투( The battle of Chernobyl, 93분)이다. 이 영상은 원전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방사능 처리 작업하는 사람들을 ‘청산인’이라고 불렀고, 이들이 행한 일은 일반적인 전쟁보다 훨씬 나쁘다고 평가했다. 일반전쟁에선 대포, 기관총, 탱크와 적군들을 볼 수 있지만,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적’이라는 것이다. 방사능은 아무 곳이나 있으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사건은 핵에너지는 우리가 편리하게 살기 위해, 우리가 힘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우리가 만든 것으로 우리를 대량으로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살생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건이다.

23)

원전 사고의 위험은 핵에너지의 위력 외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작용한다.
(1) 무지: 사고를 당한 소련의 책임자들조차 그 위험의 진실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2) 은폐: 사고가 일어나도 국내나 해외에 잘 알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3) 사고처리 능력: 사고처리 능력이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안전신화의 붕괴: 아무리 잘 관리해도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사건이 터졌을 때 소련의 최고지도자는 고르바초프였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원전 사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한다. 사고가 일어난 줄도 모르는 시민들은 평상시와 같이 활동하였고, 세계 어디에도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고 알리지 않았다. 사고의 시발점은 4월 25일 원자로 4호기 정기 점검을 위해 가동을 중단하려는 과정에서 발전기들이 충분히 전력을 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 때문에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던 중 4호기에 연결된 주 발전기가 분리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그 결과 낮은 출력 상태가 지속되면서 노심에 있던 중성자의 수가 줄어드는 사고가 발생하며 제논-135가 중성자를 흡수하지 목하고 축적되기 시작한 것이 원전 사고의 시발점이다. 그 다음날 오전 1시 24분 경 폭발하여 반응로를 대기에 직접 노출시켰고, 이어 이차 폭발 에서는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을 파괴하면서 파편들이 주변지역으로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4호기 반응로 3호기 건물의 30개소 이상에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는 열흘간 계속되었는데 불기둥은 50m까지 치솟았다.

이런 와중에도 소련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고 할 뿐 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틀 후인 4월 28일에 1200Km 떨어진 스웨덴에 위치한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한 과학자들의 의복에서 검출한 방사능수치가 평소의 6배나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소련에 연락하자 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4월 28일에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위험천만한 사고를 은폐하고 더 큰 재앙을 낳았을지 모른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지금도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는데, 어느 지역에 어느 정도로 유출되고 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서는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의 학자들이 위험성을 알리면서 소련이 후속처리를 할 수 있도록 막대한 금액을 지원해주었다. 처음엔 사고 근접지역인 프리피아트주민과 야노프 지역주민을 키예프로 이주시켰고, 스웨덴에서 위험을 알리자 5월2일까지 사고 30Km 이내 다른 주민들도 모두 대피시키고 사고를 처리하는 9월까지 11만 6천명, 6만 마리 가축을 대피시켰다.

진짜 어려운 일은 사고 처리 과정이다.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나자 또 다른 폭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195만 톤의 핵에너지가 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폭발될 경우 3-5메가톤의 방사능이 방출되면 유럽은 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대한 핵재앙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군인, 시민, 관리 등이 사태를 막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참여하였다. 당시 열을 내리기 위해 핵에너지가 타고 있는 열기둥 안으로 납을 투입했던 비행기 조종사 600명은 모두 죽었다고 한다. 열은 식었지만 액체 상태의 방사능 물질이 지하수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냉각 장치가 내장된 콘크리트판을 4호기 지하에 설치하는데 400명의 작업자들이 15일간 설치 완료하였다. 또한 지상에 노출된 노심에 남아있는 핵연료와 방사성 물질에 의한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 석관이라는 콘크리트제 봉인 시설을 건설하는 매우 위험한 작업 및, 사고 지점 근처에 있는 댐과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등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들을 두고 해체 작업자 혹은 청산인이라고 부르는데, 50만 명 정도의 사람이 동원되었다. 이들이 모은 방사성 폐기물은 체르노빌 30Km 이내 출입금지 지역에 나뉘어 매립되고, 1986년 10월에 납과 콘크리트로 된 봉인 시설은 완료되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위험은 유럽인들에게 인식되어 이 사건을 처리하는데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드는 고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비용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체르노빌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52세의 나이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해체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보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후 소련이 이루어진 이후 대학교육을 받은 최초의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이 사건을 통해 비용도 많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고의 원인이 은폐성과 권력의 보수성에 있음을 파악하고 공개성을 요구하면서 개혁을 시도하지만 보수파의 반격으로 실격을 하게 된다. 1989년 동독이 무너질 때 공산주의를 지키기 위해 병사를 보내기에는 너무나 많은 군인들을 체르노빌 사건 후속처리를 위해 동원하였고, 서독으로부터 비용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독일의 통일과 함께 동유럽에 자유의 바람이 불고 소련은 15개 나라로 나뉘어졌으며,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의미가 없어졌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념보다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봉인 작업이 끝나자 50만 명의 소련군이 ‘방사능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했다고 하는 이 봉인시설도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30년이 지나면 재 봉인해야 안전하다고 한다. 이제 2년 후 2016년이면 30년이 된다. 그러나 소련으로부터 해체된 현 우크라이나의 경제 사정은 봉인시설을 건설할 만한 인력도 재력도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체르노빌 원전의 위험을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4500명이 관리하고 있다.

 3) 북한의 핵개발

 2014년 4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일주일간 세월호 참사 소식으로 멘붕 상태로 지낸 것 같다. 고등학생 325명이 수학여행으로 타고 가던 여객선이 전복되어 침몰되는데, 선장과 선원들이 제일 먼저 탈출하고 청소년 승객들은 제자리에 있느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 지시를 따르지 않은 75명은 구조되고 250명이 사망 아니면 실종이다. 타인의 생명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생명 구하는 것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이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에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허망하고 무서웠다.

딱 일주일 지난 4월 23일 신문에 떠오른 기사, 북한이 4월 중에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에 처음 시작된 핵실험은 2009년에 2차, 작년 2013년에 3차 실험을 하여 한반도를 긴장시키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핵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어서 핵개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1953년 제네바에서 열렸던 제1 회 원자력 평화 이용 국제회의에서 미국의 원자력 기술이 공개되었고, 1956년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발족되자 북한은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체결하고 원자로 건설과 농축 우라늄 개발에 착수한다. 1962년 영변에 원자력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였다. 북한은 1985년 핵확산 금지 조약(NPT)에 가입하고 1986년부터 영변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였다. 영변 원전은 플류토늄이 부산물로 생산되는 발전 양식이고, 플루토늄은 핵무기 원료로 사용될 수 있다. 1987년에 북한은 영변에 원전을 우가 건설하고, 1992년 최초로 핵시설을 보고하여 그 달 하순 임시사찰이 실시된다. 보고서와 사찰 결과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 불일치하였고, 사찰단이 영변 핵단지에 미신고된 2개의 시설에 대한 특별 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이 이에 반발하고 NPT 탈퇴를 선언한다. 이후 북한과 미국 간에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긴장감을 보여주었다. 북한은 NPT탈퇴를 유보하고 1994년 10.21.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동의한다. 이 합의서의 내용은 2003년까지 북한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대신 북한은 자체적인 핵개발을 포기한다.

어쩌면 4월25일이나 26일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북한이 어떤 수준의 핵개발을 하는지, 핵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 북한관계자들은 정확한 연구와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 한국의 위험한 원전들

2014년 4월 23일 뉴스에는 북한의 핵 실험 외에 또 하나의 소식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건설한 원전은 1978년 처음 가동을 시작한 고리 1호이다. 미국의 기술로 이루어졌고 수명은 30년이다. 수명은 이미 2008년이 다 되었다. 고리 1호기는 지속적인 고장으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 적이 종종 있었다.

국내 원전 사고에서 고장 및 사고로 가동이 중단된 경우는 전체 661 건인데, 그중 고리원전 1호기가 전체 사고의 20%에 집중되었다. 비상 발전기 고장으로 12분 간 전원 공급이 중단된 적도 있고, 냉각수 공급이 중단된 적도 있는데, 한 달 간 은폐했다. 이러한 현상은 원전의 말기적 증세이다. 2013년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고리 제1기를 완전 점검하여 재가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전 사고가 한국에서 일어날까봐 두렵다.

고리 제1기가 두려운 것은 발전소가 이미 수명을 다했는데 연장 사용하고 있다는 점 외에 또 다른 사실 때문이다. 고리 제1기가 안전하다고 홍보하기 위해 고리 주민들에게 원자력발전소를 공개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 고리에는 342만5300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한국의 두 번째 대도시 부산이 20K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원전 1Km 안에는 1명도 거주할 수 없으며, 5Km 이내에는 200명도 거주 할 수 없다, 20Km 이내에 사는 사람들은 주변 사고시 4시간 내에 모두 대피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원전 시설을 관람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북한 못지않게 한국도 핵무기 개발과 소지 의욕이 있었다. 고리원전은 가압경수로로 지어졌지만 월성 원전은 캐나다의 CANDU형 가압중수로로 지어졌다. 경수로에서는 핵물질을 추출할 때 사용할 연료봉 생성이 어렵지만, CANDU형 중수로는 원전을 멈추지 않고도 연료봉 교환이 가능하여 핵무기 생산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미국 포드 정부가 강력히 요구하여 한국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전두환 대통령 때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게 된다.

현재 한국은 1986년까지 고리와 월성에 6개가 가동되었으며 그 후로 영광원전, 울진 원전, 2011년 2월 28일 가동을 시작한 신고리 원전 1호까지 사용하는 원전은 23기이고, 앞으로 9기가 건설되어 32기가 가동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세계에서 원전 생산하고 사용하는 국가는 31개국인데, 사용량으로는 우리나라가 그중 5위에 해당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세계의 여러 나라는 원전 폐기 결정을 내리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나는 날이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이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벨기에 프랑스 등의 2025년까지 원전을 점차적으로 폐쇄하고 전체 사용에너지에서 원전 의존도를 75%이서 50%로 감축하고자 하고, 독일의 경우는 2050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고자 한다. 일본과 대만은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우리 정부는 앞으로 원전을 더 건설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원전을 더 많이 건설하여 더 많은 전기를 만들어 기업이 육성되기를 바라지만, 탈핵을 외치는 여러 시민단체들은 핵에너지의 위험성을 연구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탈핵운동을 하는 기관으로는 환경재단은 말할 것도 없고, 탈핵 에너지 교수 모임,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 행동, 탈핵 법률가 모임 등이 있으며, 기독교단체로는 한국NCCK, 한국교회 여성연합회, YWCA, 한국기독교환경문제연구소 등 많다.

건국대학교 법학과 이계수 교수는 「원자력 발전과 인권」에서 원자력 발전으로 인한 생명, 건강권 침해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1)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방사능 피폭이다. 2) 원전 노동이 비정규직이나 하청노동으로 이루어지며, 우라늄 채굴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라듐 가스에, 미세 먼지에 오염되는 속에 중노동 하고 있어 폐암으로 이어진다는 것, 3) 원자력 시설의 건설과 유지 확장에서 오는 위험과 핵폐기물 의 재처리 문제, 4) 원자력 발전 자체를 추진 확장해온 권력에 대항하며 민주적인 에너지 생산을 가능케 할 정치 체제의 실현 문제.

이계수는 원자력 발전으로 인한 평화적 생존권 침해에서 가장 위험한 가능성으로서 원자력 시설을 다른 나라나 테러 집단이 무력 공격함으로써 받게 될 생명과 건강의 훼손 혹은 전멸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에는 후쿠시마 4호기의 폐연료봉 개수의 만 배에 해당하는 1500만 개의 사용 후 핵연료봉이 있다.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많은 사용 후 핵연료를 쌓아두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격납용기 외부에 있는 사용후 핵연료 저장소의 냉각시스템은 재래식 무기에 의해서도 쉽게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전사고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고, 사고가 난다면 현세대의 국민 개개인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평화적 생존권은 인권 차원과 함께 핵무기는 물론 원자력 시설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탈핵 주권’의 근거가 될 수 있다.

[4] 나오는 말: 오직 사랑 뿐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났던 1986년이 장공의 마지막 해이다. 아마도 장공은 생전에 체르노빌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핵무기만 인류의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 사용이라는 핵에너지도 핵무기와 똑같은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해준 사건이다. 체르노빌과 같은 사건은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곳이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장공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핵폭탄의 위험을 겪었고, 또한 평화를 원하는 세계인들의 노력을 보았다. 그것은 전승국들이 전패국들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고 오히려 전후 폐허 지역을 복구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으며, 식민지로 있던 나라들을 독립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전쟁을 방지하고 세계 평화를 지키려는 유엔의 창설이었다. 장공의 눈에는 한국전은 유엔의 창설 의미가 실현된 계기이다. 장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동서의 냉전 시대를 살면서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해 핵무기의 사용 금지를 외친 반핵 평화주의자이다.

체르노빌 사건 이후 소련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결국 해체되었다. 긴장감 넘치던 냉전의 기우는 사라졌지만, 자본주의의 횡포는 제어할 길 없이 세계의 힘 있는 나라들을 중심으로 고조되었다. 전 세계를 시장으로 하려는 세계적 기업들의 생산과 운송, 판매를 위해 인류는 더 많은 자원을 사용하고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이란 미명하에 많은 핵발전소를 세우고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위험을 방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핵에너지는 핵폭탄과 똑같은 원리로 작동되는 것으로서 폭발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핵에너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길만이 이 지구가 지속가능한 삶의 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장공이 말하던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를 바라보며 하나의 구심점을 목표로 나아간다면 지구에 발 붙이고 사는 수십 억 지구인을 내 이웃을 여기고, 창조주께서 만드신 지구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