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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28회] 한경직과 김재준, 그들의 삶과 사역 / 김은섭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14 16:21
조회
3013

[28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253() 오후 5~7

한경직과 김재준, 그들의 삶과 사역

김은섭 박사
(사단법인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연구목사)

[1] 서 론

“만리장공 편운부동(萬里長空 片雲浮動) 만우일과후 추양가애(晩雨一過後 秋陽可愛)”. 이는 “만리장공에 한 조각 구름이 떠도는가 싶더니 늦은 비 한 차례 지난 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더욱 정겹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장공(長空)은 김재준(1901-1987), 편운(片雲)은 채필근(1885-1973), 만우(晩雨)는 송창근(1898-1951), 추양(秋陽)은 한경직(1902∼2000) 목사의 호다. 이들은 서로의 특성을 통해 한국교회에 갱신과 비전의 길을 제시하였다.1)

1) 서정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는 김재준이 1985년 9월 21일 한국기독교사연구회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네 사람의 호를 넣어서 짓고 서로 나누어 간직했다”고 밝힌 한시이다. “여주동행의 삶…영성․인생철학을 닮다”, 국민일보 2010. 8. 25.

본고는 이들 중에서 한경직과 김재준의 삶의 여정을 비교하고자 한다.2) 그들은 크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작게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함에 생명을 온전히 바친 우리의 본보기인 신앙의 선배들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우선 인식의 틀로서 역사인식의 구조를 제시하고, 다음으로 그들의 삶의 여정을 배움기와 사역기와 나누어 살핀 후에, 끝으로 그들에 관한 평을 그들과 함께 한 인물들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필자는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연구목사로서 한경직에 관하여 다년간 섭렵하였지만 김재준에 관하여는 그러하지 못했다. 따라서 김재준을 논하기에 심히 부족함을 느껴 한경직에 중점을 두고 김재준을 비교하고자 ‘한경직과 김재준’으로 하였다.

[2] 한경직과 김재준, 그 인식의 틀

1) 역사인식의 구조3)

3) 졸고, “역사의 성례적 구조와 그 적용”,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170회 정기월례세미나 자료집, 8-9.

한경직과 김재준은 역사적 인물이다. 그들을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 역사를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바라보는 시각, 곧 역사관에 따라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으며,4) 콜링우드(Robin George Collingwood, 1889-1943)는 ‘모든 역사는 사상의 역사’라고 했고,5) 카(E. H. Carr, 1892-1982)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으며,6) 젠킨스 (Keith Jenkins)는 ‘모든 역사는 역사가의 마음의 역사’라고 했다.7) 그리고 한국교회사의 큰 스승인 민경배는 ‘역사란 사건을 초월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하였다.

4) 에드워드 H. 카,『역사란 무엇인가?』이화승 역(서울: 베이직북스, 2011), 32. 5) R. G. 콜링우드,『역사학의 이상』이상현 역(서울: 박문사, 1993), 397.
6) 에드워드 H. 카,『역사란 무엇인가?』, 45.
7) 케이스 젠킨스,『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최용찬 역(서울: 혜안, 1999), 121.

민경배의 정의를 받아들여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구체적인 ‘사건(史件)’이 역사를 구성하는 첫 번째 기둥이다. ‘사건’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건’은 유일하고 독특하다. 이는 한 시간과 장소에 있는 인간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똑같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과 공간, 인간이라는 세 요소를 활용하여 역사적 사건을 만드는 주체가 있다. 역사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그 자리를 기꺼이 하나님께 드린다.8) 혹자가 주장하듯이 ‘사건’조차 역사가의 선택이며 마음에 재현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건 자체가 가진 힘과 파장이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임에는 틀림없다.

8) 역사가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한 요인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그런 완벽한 지적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버터필드,『기독교와 역사』주재용 역(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143;“온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로 운행되는 것이라면, 거기 일어나는 모든 일들 전부가 하나님이 직접 간여하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 閔庚培,『歷史와 信仰』, 4.

다음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두 번째 기둥은 ‘해석(解釋)’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나열한 연대기를 역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부여되는 해석이 있어야 그 사건은 비로소 역사가 되는 것이다.9) 이 해석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역사가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역사가 역시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자라난 지역, 그리고 영향을 끼친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곧 ‘사건’의 경우와 같이 그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라는 세 요소에 의해 제한을 받는 상대적 존재이며 인간성이 지닌 약점을 가진 사람이다.10) 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11)

9) 콜링우드는 “역사적 활동이란 과거의 사건을 해석을 덧붙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로날드 H. 내쉬,『기독교와 역사: 믿음과 이해』, 45. 10) 버터필드,『기독교와 역사』, 47;“역사해석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의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기독교사학연구소 편,『기독교 신앙과 역사인식』(서울: 솔로몬, 1994), 111;“현실적으로 역사가는 시공간의 신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역사가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역사서술에 영향을 미친다.” 데이빋 베빙톤,『역사관의 유형들』천진석·김진영 역(서울: 두란노서원, 1991), 25;필자의 경우 대학입학 전에는 예장 고신측에서, 대학입학 후에 상경하여서는 예장 통합측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신학수업은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수업하였고, 교회사학은 민경배 선생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지난 6년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에서 한경직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출판하거나, 한경직의 삶과 사역을 신학화 하고 대중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이 연구자로서의 필자의 위치이며 또한 한계이기도 하다.
11) 케이스 젠킨스,『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31.

끝으로, 역사에는 두 실체, 곧 사건과 해석의 연결이 전제되어 있다. 역사의 의미는 결코 사건의 증거와 분리될 수 없다.12) 또한 진정한 역사는 결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도 아니다.13) 역사의 사건 자체는 불변한다. 하지만 그것이 외적으로 현상화해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역사가에게 비쳐지게 되었을 때에는 각각 다른, 때로는 전혀 다른, 상반의 극단에까지 이르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 보여 줄 수 있다. 이는 그 내연의 동력이 자동으로 외연 이동한다는, 내연-외연 구조이다. 사건 자체는 반드시 어떤 움 솟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그 에너지가 방출될 때 그것이 곧 외연인데, 그 방출 에너지의 현상화가 진행되는 시간대나 지역,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서 그 에너지의 현상화 형태나 강도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14) 이처럼 역사의 구조에서 ‘사건’과 ‘해석’은 반드시 접점을 같이하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건’에서 도출되지 않은 ‘해석’이나, ‘해석’이 수행되지 않은 ‘사건’은 그 자체로 역사일 수 없다.

12) 기독교사학연구소 편,『기독교 신앙과 역사인식』, 22. 13) 한태동·현우식,『한태동의 역사학 방법론 강의』(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11), 17.
14) 閔庚培,『歷史와 信仰』, 81-82.

2) 역사인식의 구조도15)

15) 졸고, “역사의 성례적 구조와 그 적용”,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170회 정기월례세미나 자료집, 10-11.

위에서 설명한 역사의 구조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의 구조>

이를 삼일운동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삼일운동이란 역사적 사건은 1919년의 시대적 요소와 조선이라는 지역적 요소, 그리고 그 운동을 일으키고 참여한 조선의 백성들이라는 인적 요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이 역사적 사건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삼일운동이라는 이 역사적 사건은 그 해석의 주체자인 역사가가 어떤 시대와 지역에 속하였으며, 또한 어떤 역사관을 가진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진다. 곧 그 사건은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으로도, 민중봉기로도, 폭동으로도 해석된다.

이렇게 볼 때 역사는 성례적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16) 역사가 성례적 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는 ‘사건(史件)’과 ‘해석(解釋)’이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존재 여부이다. 두 번째는 이 둘은 각각의 개성이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차이를 초극한 하나17) 곧 합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끝으로 서로 다른 두 요소를 연결하는 매개 곧 도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도체는 우선 사건 쪽에서 뻗친 ‘외연력’이다. 다음으로 해석 쪽에서 이 힘을 감지하는 것은 ‘역사의식’이다. 이는 성육신의 분석에서 알 수 있는 도체인 성령과 마리아와 비교된다. 또한, 마리아가 성령의 역사를 믿음으로 순종하였듯이 이 사건 자체의 외연력을 역사가가 민감한 역사의식으로 반응하는 것과도 비교된다. 결국 성례는 이와 같이 이중도체를 가진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믿음이 없는 역사의식은 그 사건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역사의 구조에서 심층적 도체18)는 결국 ‘믿음’인 것으로 파악된다. 즉, 믿음은 역사의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실체이다.

16) 여기서 성례란 “두 이질적 차원의 연결과 교섭 내지는 합일”로 정의한다.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123. 17) 사건과 해석이 과연 질적으로 다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사건조차 역사가의 선택에 의하여 구성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볼 때 역사에는 엄연히 사건과 해석이 존재한다. 역사가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발생한 역사적 사건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18) 도체의 이중 구조에서 믿음은 사건 쪽의 표면적 도체인 외연력과 인간 쪽의 역사의식을 연결하는 심층적 도체라고 할 수 있다.

[3] 한경직과 김재준, 그 삶의 여정들

1) 한경직의 삶의 여정19)

19) 졸고, “한경직, 그 삶의 여정” 한국교회사학회 제114차 학술대회 자료집, 58-70.

(1) 배움기

한경직은 음력 1902년 12월 29일(양력 1903년 1월 27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가난한 농부 한도풍과 청주 이씨를 부모로 하여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0) 간리는 평양에서 10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고 외딴 마을이었다. 원래 대대로 유교를 숭상하는 마을이었으나 원산에서 평양으로 가던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선교사와 한석진 조사가 길을 잘못 들어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895년 경에 교회가 세워졌다. 한경직의 아버지 한도풍은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열다섯 살이던 형이 가산을 모두 탕진하는 바람에 그의 사촌 형 집에서 심부름과 일을 하며 자랐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고, 서당에는 다녀 보지 못한 채 독학으로 한글을 익혔다. 늦은 결혼을 한 한도풍은 아들을 일찍 결혼시키고, 힘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키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한경직의 어머니는 그가 만 일곱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 어린 한경직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남겼으나, 1년 후쯤 후모를 맞이하였고 후모는 한경직과 자신이 낳은 자녀를 차별하지 않았다.

20) 청주(淸州) 한씨(韓氏) 장렬공파(壯烈公派) 29세 손.

한경직은 주일마다 자작교회에 나가 성경과 찬송을 배우며 기독교 분위기 속에 성장했다. 그가 제일 먼저 배운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다.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오촌 숙부21) 댁 대문에 크게 써 붙여있던 이 말씀을 접하며 처음으로 한글을 익히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운영하고, 대성학교 출신인 홍기주(洪箕疇)가 선생으로 있던 진광(眞光)소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전교생이 30-40명이었고 8년제였지만 월반제도가 있어서 한경직은 6년 만인 1916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아들의 진학을 망설이던 아버지는 홍기주 선생과 자작교회 우용진 전도사의 권고로 집에 있던 소를 팔아 가까운 숭실학교보다 멀지만 보다 민족적인 정주의 오산학교로 한경직을 보냈다. 한경직은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시험을 통과하고, 다음날 2학년 보결시험을 치러 곧바로 2학년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산에서 3년 동안 철저한 애국애족 정신과 기독교 신앙, 현대 학문과 기술을 배웠다. 특별히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과 그 당시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을 통해 민족정신을 배웠고, 평생 동안 인생의 큰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오산학교에 재학하면서 그는 주일에는 오산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공휴일에는 오산학생회에서 전도대를 조직하여 가까운 농촌을 다니며 전도활동을 펼쳤다.

21) 한서풍. 그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었고, 그의 아들 한병직은 그 마을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됨.

오산학교 졸업 후 한경직은 고향에서 부모의 농사일을 돕다가 1년 동안 영성소학교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평양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이 일어나 관련이 없었지만 고초를 당하였고,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봉사하려면 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숭실대학 이과(理科)에 진학했다. 당시 숭실대학은 구한말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이자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다. 한경직은 매학기 최우수 성적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YMCA운동에 참가해 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했고, 방학 때마다 순회전도대원으로 전도여행을 하며 설교를 하곤 했다. 또한 교내 웅변대회, 평양성 기독청년 웅변대회, 서울에서 열린 YMCA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하기도 했다. 그는 재학 중에 방위량(邦緯良, William N. Blair) 선교사의 비서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총회전도부 총무였던 그를 도우면서 자연히 한국교회 전체를 보는 시야와 행정적인 실무처리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3학년 여름방학 때 방위량 선교사의 번역작업을 돕기 위해 찾은 소래 해변에서 홀로 산책을 하며 묵상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한경직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일대사건이었다.22)

22) 한경직,『나의 감사』, 117-118.

그날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평소와 같이 해변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너무도 갑자기 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저는 주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해변에서 여러 시간 동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저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엎드려서 더 많은 기도를 드리고 오랜 시간 동안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23)

23) 한경직,「한경직 목사 템플턴상 수상 연설문」(서울: 영락교회, 1992), 2.

한경직은 숭실대학을 졸업하면서 방위량 선교사의 주선과 윤치호의 도움24)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그는 장로교에서 세운 엠포리아대학(College of Emporia)에 숭실대학의 학점을 인정받아 4학년으로 편입하여 심리학과 윤리학, 역사와 철학 등을 공부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학비는 학교 장학금과 엠포리아대학 학장의 추천으로 멕시코 선교사였던 필립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았고, 나머지 부족한 돈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했다. 그는 이곳에서 윤하영, 최윤관, 송창근, 김재준, 김성락 등과 함께 신학수업을 받았다.25) 그는 신약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쳤던 메첸(J.G.Machen) 교수와 교회사를 가르쳤던 뢰처(Loetcher) 교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메첸에게서 철저한 학문적 자세를 배우고, 뢰처에게서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박사과정에 진학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학교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던 ‘무명용사의 무덤’을 종종 찾았다. 이곳은 미국독립전쟁 때 전몰한 군인들의 무덤으로서 사방이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늑한 장소였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같이 오후에 그곳에 가서 죽음을 명상하며 영적인 기도를 하였다. 한경직은 후일의 회고에서 이곳을 ‘신앙의 샘터인 성소’라고 지칭한다.26)

24) 윤치호는 당시 미국 가는 배 삯 100원을 조건 없이 내주었고, 한경직이 갚겠다고 하자 “아니, 나한테 갚을 것 없다. 이 다음에 다른 사람들한테 갚아라”고 하였다. 윤치호 사후 한경직은 그의 아들에게 당시의 미국 여비를 환산하여 100만원으로 갚았다. 한경직,『나의 감사』, 122-123. 25) 이들은 대부분 특별학생으로 와 있었는데, 이후에 한경직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을 썼다. 한경직,『나의 감사』, 148.
26) 한경직,「나의 교우 반세기」, 288.

한경직이 프린스턴에 머무는 동안 역사적인 신조를 고수하려는 보수파와 진보성향의 신신학파 간에 극심한 논쟁이 일어나 결국 그가 졸업한 해인 1929년에 미국 북장로교가 분열하였다. 보수파의 수장은 그의 존경하는 선생인 메첸이었다. 한경직은 외국인 학생으로서 어느 한쪽에 가담하는 것이 조심스러웠고, 메첸을 좋은 선생으로 존경하였으나 그의 극단적인 투쟁심리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 그가 목도한 이 경험은 한국교회를 섬길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학교 분위기가 혼란스러웠지만 한경직은 학생회장으로 활약했고, 설교상을 받기도 했다.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한경직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교회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자 했다.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당시로서는 사형선고와 같았던 폐결핵 2기 판정을 받았다. 그때에는 자연요법인 요양 외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는데 다행히 미국결핵협회회장이자 결핵전문의를 만나 뉴멕시코 주 알버커키에 있던 장로교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그에게 입원실이 무료로 주어졌다. 소래 해변에서의 부르심에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여 민족의 영혼을 구원하겠다고 결단을 하였던 한경직에게 이 요양시절은 그 소명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시기였다. 그는 먼저 죄를 자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단하였다.27) 그리고, 성 안토니우스와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반복해서 읽고 톨스토이의『참회록』이나『나의 종교』등을 읽으며 은혜를 많이 받았다. 다음으로, 살든지 죽든지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앞으로 일할 기회를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처음에는 3년만이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으나 나중에는 그때까지 공부한 횟수가 17년이니 17년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끝으로, 요양원과 환자들을 위한 반 디벤터(J. Van Deventer) 여사의 섬김은 한경직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 부인의 신실한 신앙심과 참된 사랑, 남편을 향한 사랑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헌신은 한경직이 봉사사역을 하는 자세에 있어서 한 모델이 되었다.

27) 한경직,『나의 감사』, 189.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건강을 되찾은 한경직은 2년 후 퇴원한 다음, 송창근이 있던 콜로라도 덴버에서 6개월 동안 더 있었다. 몇 달간 여름학기를 수강하기도 했으나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3, 4개월 간 유대인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몇 년, 아니 몇 달 밖에 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늘나라에 가야 마땅하다 싶어서 죽을 각오로28) 7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2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엮음,「한국기독교와 역사」창간호, 147.

한경직이 태평양과 현해탄을 건너 조국 땅을 밟았을 때 그는 미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의 문초를 당해야 했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술회한다.

마치 고국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큰 감옥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자유로운 미국과 달리 삼엄한 경계와 감시 하에 죄도 없으면서 죄인 취급을 당했다.29)

29) 한경직,『나의 감사』, 205.

미국에서 돌아온 한경직은 오산학교 시절 은사인 고당 조만식의 권유로 숭인상업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그 당시 숭인상업학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한국 기독교인들의 힘으로 세워진 학교로서 고당 조만식이 이사장으로 있었다. 숭인상업학교는 성경을 가르치고 매일 기도회를 갖는 등 온전한 기독교 교육을 펼치고 있었다. 한경직은 이 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조회 시간에 설교를 하기도 했다. 주일에는 평양 남문밖교회에 가서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숭실대학 교장이던 윤산온(G. S. McCune) 선교사의 권유로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자 했지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 때문에 일제에 의해 교원인가가 갑자기 취소되었다. 하지만 짧은 기간의 교육 경험을 통하여 한경직은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 시절에 정성과 열의를 가지고 옳은 길로 인도하면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30) 차후 이 깨달음은 한경직이 교육사업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30) 한경직,『나의 감사』, 212.

(2) 사역기

일제의 방해로 교단에 서지 못하게 된 한경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본래 계획대로 교회로 돌아가서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비록 가난하고 교회건물도 제대로 없었으나 약 300명의 성도들이 모이고 있던 신의주 제2교회의 부름을 받아 1933년부터 그곳에서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했다.31) 그는 1934년 봄에 만주에 있던 안동 제1교회에서 열린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갈급한 많은 청년들이 신의주 제2교회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 청년들에게 온건한 신학적 기초와 지식이 필요함을 느낀 그는 그들이 신앙을 생활화할 수 있도록 돕고 건강한 사상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쳤다. 또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구체적인 애국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일념 하에 각종 세미나를 통하여 청년들을 계몽시켰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신의주 청년들은 유물론을 내세워 폭력으로 억압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1945년 11월에 일어나 반소(反蘇), 반공(反共)을 외친 신의주학생의거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32) 사회운동이 아주 드물었던 공산치하에서 격렬하게 저항한 신의주학생의거는 이후 평양, 함흥 등 북한 지역의 반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한경직,「템플턴상 수상 연설문」, 4. 32) 이 사건의 주동자들이 신의주 제2교회 출신이라는 김주영의 증언이 있다.

한경직은 초대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었던 전도사업, 교육사업, 봉사사업을 교회의 주요 과제로 삼았다. 특히 ‘복순’이라는 어린 고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고아들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신의주 보린원을 설립해 봉사사업에 더욱 힘썼다. 신의주 제2교회는 교인들이 많이 늘어나 예배공간이 부족함에 따라 2년 만에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일제는 한경직이 미국에서 공부한 것을 꼬투리 잡아 배일사상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를 교회에서 강제 추방시켰다.33) 그 후 그는 보린원에서 3년간 고아들, 노인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그들을 섬기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33) 한경직은 1992년 6월 18일 템플턴상 수상기념 축하예배 인사말에서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영락교회, 특히 신의주 제2교회 출신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한경직의 신사참배 고백이 우선 총회의 총대였기에 연대책임을 지는 태도 때문이었다고 보고, 다음으로는 김익환의 경우 실제로 하지 않았지만 윤하영 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를 허락하자고 하였던 일(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와 역사」창간호, 151-152 참조)에 대한 신앙적 양심 때문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리고 이동욱은 신의주 지역의 대단한 부자였던 김기범 집안의 정치적 영향으로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도 해석한다.

해방이 되자 한경직은 신의주자치위원회를 결성해 사회 치안을 담당하고 일본인들이 평화적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공산당에 맞서는 조직으로 윤하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세웠다. 소련군이 북한 땅에 진주하면서, 점점 세력을 확장해 가던 공산주의자들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민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움직임을 피해 한경직은 1945년 10월에 윤하영과 함께 월남하였다.34)

34) 한경직은 그때에 “잠깐 왔다 도로 갈 줄 알았다”고 회고한다. KBS 특별방문 87. 8. 14.

한경직은 월남한 지 약 2개월 뒤인 1945년 12월 2일, 서울 영락정(지금의 중구 저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교 건물에서 26명의 성도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베다니 전도교회’의 출발이었고, 1946년에 소속 노회의 방침에 따라 지역이름인 ‘영락’으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영락교회는 피난민들이 세운 ‘피난민 교회’로 소문나면서 38선을 넘어 남하한 피난민들, 만주를 비롯한 중국 일대에서 귀국한 동포들, 멀리 사할린 등지에서 온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는 이곳에 모여드는 피난민들을 위해 살 곳을 제공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영락교회는 사실상 예배처소이면서 동시에 피난민들의 생활처소였다. 탈출성도들의 만남의 장소, 피난민들의 상호 위로의 집, 신앙의 자유를 얻은 감사의 기도의 제단, 혈육이산의 아픔을 달래는 몸부림의 안방, 조국 분단의 분함을 호소하는 눈물의 밀실, 무너진 제단을 기필코 되찾아 수축하리라는 서원의 다락방이었다.35) 처음에 27명으로 시작한 영락교회는 급성장하여 1년 만에 재적교인이 1,000명을 넘어서고, 2년 뒤엔 4,500명이나 되었다. 그가 은퇴할 무렵에 영락교회는 전체 성도가 15,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는 깊은 복음의 진리를 평이한 말로 풀어가면서도 영적 카리스마를 지닌 한경직의 설교,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며 모범을 보인 그의 삶, 개인적 전도와 구원을 넘어 민족과 나라를 살리는 일을 강조하고 행동한 그의 목회활동이 이루어 낸 결과였다. 한경직은 27년간 영락교회를 목회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로 성장시켰다.

35) 송성찬,『흔적』(서울: 정문사, 1990), 138.

한경직은 영락교회를 목회할 때 신의주 제2교회에서처럼 전도, 교육, 봉사의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동시에 그는 네 가지 지도방침을 설정하였다. 이 3대 목표와 4대 지도방침은 영락교회의 실상을 설명하는 ‘씨’와 ‘날’이면서 영락교회의 근간이 되는 뿌리로서 한경직 목회의 핵심이며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36) 특별히 4대 지도지침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신학을 뚜렷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37)

36) 송성찬, 『흔적』, 248. 37) 민경배는 한경직을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교회 신앙전통사의 정점에 서 계신 분이다. 한국교회가 복음주의 신앙과 경건으로 근대세계사의 기적이라 할 만한 발전을 거듭한 그 역사의 주맥(主脈)에 서 계신 분이다”라고 평하여 한국교회사에서의 그의 위치를 자리매김하였다(『한경직목사설교전집 1권』, ⅲ-1). 한숭홍은 “한경직은 교부신학을 정립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지금의 양태대로 정립한 인물”이라고 하였다[한숭홍, “한경직 목사의 영성과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장신논단」제21집 (장로회신학대학, 2001), 571]. 필자도 이 주장에 동의하며, 구체적으로 한경직이 올바른 신앙노선으로 정리한 ‘복음주의 신앙, 청교도적 생활, 에큐메니칼 정신, 올바른 사회봉사와 사회참여’를 ‘한국교회 신학’의 요약이자 특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4대 지도지침을 그의 설교 “올바른 신앙노선”에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복음주의 신앙이다. 복음주의적 신앙은 개신교의 중심사상인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 때의 표현인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신앙이다. 이 신앙은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앙이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그 십자가의 진리이다. 한마디로 복음주의는 성경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신앙이다. 다음으로 청교도적 생활이다. 이는 성경의 말씀대로 새 사람의 새 생활을 의미한다. 복음을 믿으므로 거듭난 사람은 그 생활로 열매를 맺는데 이는 성결, 진실, 근면, 절제 그리고 사랑이다. 셋째로 에큐메니칼 정신이다. 쉽게 말하면 협동 정신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쳤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교파를 초월하여 온 교회가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온 교회가 당면하는 일 곧 민족 전체나 국가를 위한 봉사, 또는 복음전파에 있어서는 서로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사회봉사와 사회참여이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죄인을 불러 그 영혼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슬픈 자들을 위로하셨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이 모든 일을 계속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를 할 뿐만 아니라 의료사업, 복지사업, 교육사업 그리고 모든 문화사업에 노력해야 한다. 다만 이 사회참여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교회와 정치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8)

38) 한경직, “올바른 신앙노선”『한경직목사설교전집 15권』(서울: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09), 91-94.

한경직이 지향했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었다.39)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적 민주국가 건설로 구체화되었고, 이러한 3대 목표와 4대 신앙노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경직은 정신의 개혁 없이 사회의 변화와 나라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전도에 집중하여 민족복음화운동과 정신혁명운동을 일으켰다. 인재의 양성 없이는 국가의 미래도 없다고 보았기에 대광학원, 보성학원, 영락학원, 숭실대학, 영락여자신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등 많은 학교들을 설립하거나 재건하였고,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평화가 이 땅에 이룩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였기에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 등 다양한 사회복지시설40)을 설립하였으며, 한편으로 밥 피어스 선교사와 함께 오늘날 세계적인 구호단체로 발전한 월드비전을 세웠다.41)

39) 졸고, “한경직, 그 영성과 영향”「한국교회사학회지」제28집 (서울: 한국교회사학회, 2011. 5) 참조. 40) 한경직이 설립한 영락사회복지재단은 현재 아동복지사업으로 영락보린원, 영락그룹홈, 영락지역아동복지센터를, 노인복지사업으로 영락경로원, 영락요양원, 영락가정봉사원파견센터, 영락소규모요양원, 은빛사랑채 노인주간보호센터, 영락노인전문요양원을, 모자복지사업으로 영락모자원을, 영유아보육사업으로 합실어린이집, 영락어린이집을, 장애인복지사업으로 영락애니아의 집, 영락주간보호센터를, 장학사업으로는 금성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영락사회복지재단 홈페이지(www.ynswf.co.kr) 참조.
41) 월드비전은 한경직의 비전과 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증언이 있다. 밥 피어스가 죽기 전에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밥 피어스는 월드비전 설립에 관한 비사를 말하였다고 한다. 사실 한경직이 1950년 봄, 밥 피어스에게 한국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밥, 이 세상을 봐라. 이 세상은 비전을 필요로 한다”면서 그 기구의 설립을 제시했다. 밥 피어스는 한경직에게 “형님이 하셔야지 왜 내가 합니까?”라고 하였지만 한경직은 “나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 사람이 해봐야 안 된다. 미국사람이며 백인인 네가 하면 전 세계를 살릴 수 있다. 네가 해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그 자리에 영락교회 전도사로서 배석했던 이광순의 증언이다. 또한 밥 피어스의 딸인 던커(Marilee Pierce Dunker) 여사는 필자가 참석한 미국 월드비전 본사 직원예배에서 한경직이 월드비전의 “co-founder”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한경직은 ‘World Vision'이라는 말을 피어스가 지었다고 하며, 피어스는 미국에서 도움을 구하고 한경직은 본부를 한국에 두고 조직을 인도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한경직, “창설자 밥 피얼스 목사와 나” 『한국선명회 40년 발자취』15.

한경직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으며, 20세기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발전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이 나라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는 좌익과 우익의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그런데 좌익은 38선 이북에서 소련의 무력에 힘입어 비교적 쉽게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 우익의 정부 수립은 수월하지 않았다. ‘누구나 평등하게 잘 살자’라는 좌익의 구호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구호가 허구인 것을 북한에서 이미 공산당 체제를 경험한 월남청년들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익의 선봉에 섰고, 그 결과 우익정부가 수립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 땅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이룬 월남청년들의 주류는 영락교회에 있었다. 그들은 한경직의 ‘무산자의 복음,’ ‘기독교와 정치,’ ‘건국과 기독교,’ ‘기독교와 공산주의’ 등의 설교를 통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사상적인 토대를 갖출 수 있었다.42)

42) 한경직,『건국과 기독교』(서울: 마포형무소, 1949) 참조. 한경직은 이승만으로부터 부통령 제의도 받은 바 있다.

6·25 전쟁 중에 한경직은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전시에 필요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큰 집회를 가져 계몽강연을 통해 주민들에게 반공사상을 불러일으키고, 전시에 필요한 용기와 단결, 인내와 국민적인 책임이 무엇인지를 호소하였다. 동시에 선무공작대를 조직하여 각처에 파송하고 선무, 구호, 계몽 사업을 하였다.43) 다음으로, 기독청년지원군을 모집하여 낙동강 전선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미국유학을 통해 영어구사가 자유로웠던 한경직은 외국민간원조기관(Korea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들의 한국측 창구역할을 감당하였다. 당시 한국을 찾아 온 50여개의 외원기관들은 전재민 응급구호사업을 펼치고 고아원 운영, 해외 입양, 전쟁미망인에 대한 원조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교회는 외원기관을 통해 얻은 구호품(식량과 의료)을 나눠 주는 통로가 되었고, 그 당시 한경직은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3)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한경직 목사 성역 50년』(서울: 한경직목사기념사업출판위원회, 1986), 49.

한경직은 전도로서 국가의 이념과 국민이 가져야 할 태도를 설교하고, 교육을 통하여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고, 사회봉사를 통하여 나라가 잘되도록 애를 썼다. 그는 교회운동 곧 목회를 통하여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였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44) 그리고 그는 신의주에서 13년, 영락교회에서 27년, 모두 40년간의 목회와 그 밖의 다양한 사역을 열정적으로 감당한 후 1973년 1월 2일에 은퇴하여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44) 홍경만, “한경직,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를 외친 목회자”,「한국사시민강좌」43호 (서울: 일조각, 2008), 388.「한국사시민강좌」는 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종교 부문의 한 사람으로 한경직을 선정하였다.

한경직은 은퇴 후 교회에서 마련한 좋은 집을 마다하고 남한산성 영락여자신학원 근처에 있는 대여섯 평 남짓한 국민주택의 한 방을 거처로 삼았다. 목회자는 돈과 여자와 근검절약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는 남의 집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는 뜻의 '한경직 우거처'라는 팻말을 붙여 놓고 지냈다. 그는 이 우거처와 근처 기도바위에서 우리나라와 민족,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다.

한경직은 민족복음화 운동의 일환으로 펼쳐 온 ‘군 선교활동’을 확대해 군복음화 운동에 힘썼다. 1966년 베를린세계선교대회에서 학교, 군대, 공장이 전도의 황금어장임을 깨달은 그는 이 세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선에서 물러난 다음부터는 집중적으로 군복음화 운동에 투신했다. 1972년 전군 신자화 후원회 설립 발기인 대표를 역임한 것을 시작으로 은퇴한 다음해인 1974년에 전군 신자화 후원회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해 군복음화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민족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60만 군인을 복음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군대 내에 세워진 교회 가운데 약 절반 이상이 한경직이 이끌었던 영락교회를 통해 세워지거나 지원을 받았다.

제가 은퇴한 후에 “지금까지는 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지만 앞으로는 한국교회 전체와 우리나라를 위해서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저는 우선 우리 민족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새로워져야 사회가 안정이 되고 경제도 발전이 되고 문화도 발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정신면에 봉사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서 자연히 “어떻게 하면 우리민족을 복음화 할 수 있을까?” 그게 이제 제 머리에 제일 큰 과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제 다 이루지 못했지만 늘 이런 생각은 가지고 일하느라 그랬어요.45)

45) KBS 일요방담 1985. 12. 22.

또한 한경직은 한국 기독교 100주년 사업을 이끌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20개 교단, 26개 기독교 기관과 단체들로 이루어진 협의체였다. 한경직은 넓은 포용력을 발휘해 이 단체의 총재로서 그 임무를 감당하여 다양한 기념행사와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인천에 선교사 상륙기념비를, 용인에 순교자기념관을, 서울 양화진에 외국인묘지의 정비와 선교기념관을, 서울 등촌동에 실로암 안과병원을 각각 세웠다. 그리고 '84선교대회 여의도 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약 100만 명이 집회에 참석해 세계 기독교 역사상 한 장소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한경직은 이 집회를 통해 한국 교회가 지난 100년 동안 ‘받는 교회’였지만 앞으로 ‘주는 교회'로 전환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 외에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결성하여 교파간의 벽을 넘어 대화하는 장을 만들었으며,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명예회장으로 섬기면서 북한에 쌀을 보내어 북한과의 민간교역을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92년에 우리나라 종교인으로는 유일하게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고 그 상금전액을 북한선교헌금으로 기탁하여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세상에 알렸다.

한경직은 민족복음화를 추구해 나가면서도 아세아복음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밥 피어스 목사의 도움을 받아 아세아교회진흥원을 세웠다. 그는 회교국 또는 불교국이 대부분인 동남아의 복음화를 한국 교회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세아교회진흥원을 통해 보다 폭넓은 사업을 펼쳤고 그 결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한경직은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로서 세계 각국의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의 교회를 찾아다녔다.46) 이처럼 한경직은 세계복음화를 위한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세계복음화를 위해 많은 일들을 감당하였는지는 남아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46) 은퇴 전 한경직이 참여한 주요대회는 다음과 같다. 1952년 인도 Lucknow의 세계교회협의회 주최 동아시아 에큐메니칼연구대회, 1954년 에반스톤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1956년 미국북장로교회 주최 레이크모홍크 선교협의회, 1957년 가나 국제선교협의회 대회, 1958년 브라질 장로교 대회, 1962년 미국남장로교회 주최 몬트리어트 선교협의회, 1964년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 주최 존 모트 강연, 1966년 베를린 대회, 1968년 베를린 대회 후속 아시아-남태평양 전도대회 등(안교성, “한경직 목사의 국외선교사역” 『한경직 목사 10주기 추모자료집』, 134). 그리고 은퇴 후 자료가 남아있는 1970년대의 활동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3년 2월부터 한 달 동안 싱가폴과 태국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 인도, 6월에는 2주 동안 오사카와 동경에서 열린 재일 한인교회 연합전도대회 인도. 1975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세계선명회 이사회에 참석하여 새로운 사업계획을 협의, 재미한인교회 연합집회 인도, 싱가폴 하가이 전도지도자훈련원에서 특강. 1975년 10월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대만과 홍콩에서 전도집회 인도, 11월에는 10일 동안 이란 기독교 교역자 세미나의 주강사로 활동. 1976년 1월에는 3개월 동안 국제선교협의회 강사로, 재미 한인교회 순회집회 인도자로 활동, 6월에는 동경에서 제9회 재림대망 전도대회 주강사로 말씀을 전함. 1978년 7월에는 1주일 동안 일본어판 설교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재림대망 전도대회 강사로 집회 인도, 11월에는 일주일 동안 싱가폴 하가이전도지도자훈련원 강사로 말씀을 전함.

2) 김재준의 삶의 여정

(1) 배움기47)

47) 주로 김재준,『범용기』(서울: 풀빛, 1983)를 참조하였다.

장공 김재준은 1901년 9월 26일(양력 11월 6일)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일명 ‘창꼴’이라고 부르는 두만강 지역 유폐된 산골마을에서 부 김호병 씨와 모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한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나 국운이 기울고 기강은 무너지고 출세가 도리어 욕이라고 생각하고 벼슬할 생각은 단념하고 창꼴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도 쓰고 마을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치며 농사일도 도우면서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낸 선비였고, 그의 어머니는 조선 말기 실학파에 속하고 있었던 경원의 채향곡의 집안에서 태어난 지극히 인자하면서도 위신어린 분이었다. 그는 아들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한마디라도 나오기만 하면 반드시 책망해 고쳐주시는 분이였고 항상 밥은 큰 그릇에 담아 주도록 하신 분이었다. 그것은 그래야 사람도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이었다.48) 살림은 10만 평의 산림과 만 평의 농토를 가진 중농이었다.

48)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이용도 김재준 함석헌 탄신백주년 특집논문집』(서울: 한들출판사, 2001), 160-161.

장공은 다섯 살 때부터 부친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사서를 익히고, 아홉 살에는 맹자를 통독하였고, 외가에서 세운 향동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외가에서 생활하며 김희영으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특히 “정신 똑바로 가지고 대를 이어 싸우라!”는 선생의 말은 그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 2년을 마친 후 다시 고건원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12세)하여 2년을 공부하였는데 최두진 선생이 “너희들은 왜족이 아니라 조선민족인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정신 똑바로 가지고 제 혼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다시 외사촌 형의 손에 이끌리어 회령간이농업학교(13-16세)에 입학하여 3년을 공부하였다.

회령간이농업학교 졸업 직후 김희영의 추천으로 회령군청 간접세과에 임시고원으로 채용되어 주세와 연초세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18세 되던 8월 29일에 성격이 무던히 대륙적이고 좀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아무리 어려워도 말없이 오래 참는 장씨 맏딸(분여)과 결혼하였다. 결혼하자마자 1920년에 웅기금융조합 서기로 전직하였다. 웅기는 만주나 시베리아에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이 통과하는 관문이어서 상해 독립신문을 읽기도 하며 비록 사회적으로 있으나마나 하였지만 민족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럭저럭 웅기에서 3년이 되었는데 서울 남대문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독립운동으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고 웅상49)에 내려와 있던 송창근이 그의 하숙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튿날 길거리에서 그를 만난 송창근은 “지금 삼일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 시대가 옵니다. 김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합니까? 서울 올라와 공부하십시오! 서울에는 유명하신 백부님이 계시잖습니까?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오!” 라고 권면했다. 이후 장공은 송창근의 이끌림으로 일본유학과 미국유학을 단행하였으며, 조선신학교 설립에도 참여하게 된다. 마침 나진 개발계획이 있어서 거간꾼 역할을 통해 유학자금을 마련한 장공은 아내에게 알리지도 않고 서울로 떠났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작을 할 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웅기의 생활이 장공의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문 두드림’의 시기였다면 서울에서의 생활은 ‘문이 열리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50)

49) 웅기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진 해변가에 위치한 송창근의 고향. 50)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62.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공부하고 하기방학을 맞아 고향에 갔다가 서울에 호열자가 발생함으로 발이 묶여 거의 한 학년이 뒤처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서울시내 장로교회 연합사경회로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웬일인가 싶어 참석한 장공은 마지막 날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고 사람의 이치 따짐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 여러분! 믿으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 하나님으로, 당신 생명 속에 말씀하실 것이오! 그때부터 여러분은 ‘새 사람’으로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것이오!”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발을 들여놓았다.

“옳다! 나도 믿겠다!” 하고 결단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 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장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51)

51) 김재준,『범용기』, 43.

장공은 삼일운동을 의식화시킨 본산인 서울 중앙 YMCA에 거의 매일 나가 ‘개조’나 ‘중앙공론’을 비롯하여 일본잡지들도 읽었다. 그리고 영어전수과 삼학년에 정경옥과 함께 일 년을 다녔다. 한편으로 그의 백부가 설립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돕고, 장도빈의 조수로 ‘조선지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톨스토이의 십이경, 성 프란시스전, 가가와 도요히꼬 등을 읽으며 그들을 흠모하였고, 하숙집에서 쫓겨나 눈 오는 밤을 날이 새도록 걸으면서 이 ‘돈을 멸시하고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청빈을 살자’ 결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향친구 김영구가 장질부사로 죽으면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인 “주님!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주님, 용서하고 나를 불러 주소서”를 들으면서 “남긴 일은 내가 대신 최선을 다해 볼 테니 상심마오”라고 응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의 강권으로 세례를 받았다.

3년의 서울 생활에서 만성대장염, 이질, 기침까지 몸을 크게 상한 장공은 형에게 거의 납치당하다시피 고향에 끌려가서 6개월간 정양을 하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용현학교(6개월),52) 귀낙동학교(1년),53) 신아산학교(6개월)54)에서 교사로 지냈다. 마침내 일본 갈 여비가 마련되자 임신한 부인을 친정에 맡기고 동경으로 떠났다. 그런데 웅기에서 폭풍우와 홍수로 발이 묶여 유학을 떠나야 할지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갈등하는 가운데 비전을 보았다. “큰 호랑이가 그의 뒤에서 앞발을 그의 어깨에 걸고 뒤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다! 네 떠나는 건 하나님 뜻이다!’ 그 순간 호랑이는 어디론가 물러가고 나는 비전에서 깨어났다.” 그때부터 장공에게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로 간다는 신념이 생겼다.

52) 용현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강가 마을인데, 장공은 쉬는 날에 톨스토이 저작들을 읽으며 배운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 물질을 소유한다는 데 대한 바른 태도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김재준, 『범용기』, 57. 53) 창꼴 집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마을에 세워진 학교인데, 장공이 헌병파출소장의 도움을 받아 서당을 없애고 학생 110여명을 모아 초, 중, 고 세 반으로 재건하였다. 그는 다음해부터 일요일에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청년들과 예배도 보았다. 여기서 키운 제자로 목사된 이는 LA 장기형, 서울의 안세민, 북의 농촌선교하다 결국 순교한 김내명 등이 있다고 한다. 김재준,『범용기』, 58-60.
54) 장공이 귀낙동학교에 있을 때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덮어놓고 동경에 오라”는 송창근의 편지를 받고 여비 마련을 위해 사례를 주는 신아산학교로 옮겼다. 그리고 부수입으로 당시 거주하고 있던 일본 경찰간부, 헌병장교, 육군장교들에게 진급에 유리한 이유로 조선어 학습 붐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조선어 강습을 하여 여비를 또한 마련하였다. 김재준,『범용기』, 62.

동경 청산학원 졸업반에 있던 송창근을 찾아간 장공은 청강생으로 2학기에 입학 하였다. 비교종교학에서 120점을 받기도 하고, 아리지마 전집, 토스토예프스키 전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참회록을 탐독하기도 하였으며, “내 할 일은 교육밖에 없다. 기독교 사상을 주축으로 하는 초, 중,고, 대의 교육왕국을 세우리라”고 결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건축공사장에서 노동하고 1원을 받았을 때 “임금은 핏 값, 노임 떼먹는 놈은 식인귀”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바르트의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에 관심을 가져 ‘바르트의 초월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청강생인데도 불구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청산학원에서 ‘자유’ 곧 개인의 자유, 학원의 자유,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체득했다.

그때 송창근은 미국에 있었는데 ‘졸업하면 곧장 미국에 오라’며 프린스턴 입학 허가증과 1년 200불의 장학금 허락서를 보내왔다. 장공은 서울에 와서 승동교회의 김대현 장로, 이재향 목사에게서 재정보증을 받고 여권을 구비한 다음55) 형으로부터 50원, 윤치호로부터 100원을 받아 여비로 하여 20여 일 만에 프린스턴에 도착하였다. 미리 와 있던 김성락과 한경직이 그를 마중 나왔다. 그는 대학원 코스에 등록하고 일본에서는 신신학 일변도로 지냈기에 프린스턴에서는 보수신학 계열을 주로 택했으며, 특히 메첸의 강의를 듣고 메첸의 저서는 다 읽었다.56) 비록 강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나 B이하로 내려간 적은 없다고 한다. 겨울이 닥쳤을 때 김성락이 박형룡이 입다 두고 간 외투를 줘서 얻어 입기도 하고, 김성락과 함께 무명용사들의 무덤에 가서 한국과 한국민족의 자주독립,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도 하였다.

55) 당시 본적지 조서에는 “겉으로는 온순한 척하면서 속은 다소 음험하다”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김재준,『범용기』, 80. 56) 장공은 청산학원을 졸업할 때 ‘자유주의 신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마를 부딪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프린스턴을 떠날 때는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발악하는 고민상’을 보았다고 하였다. 김재준, “대전전후 신학사조의 변천”,『김재준 전집』1권 (서울: 한신대출판부, 1992), 375.

프린스턴에서 1년을 공부한 다음에 장공은 송창근이 석사(Master)과정으로 있던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에 가서 2학년에 등록하여 학부(undergraduate)과목을 주로 들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히브리어 시간은 모조리 택해 들었다. 구약을 전공한(부전공: 조직신학) 장공은 졸업할 때 히브리어 특별상을 받았으며, B+ 한 과목 외에는 모두 A 학점의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와 석사를 겸해 받았다.57) 한편, 졸업을 앞두고 어느 선교사로부터 “네가 근본주의냐?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라야 취직이 될 것이니 그렇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다음과 같이 회답하므로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선언하였다.

57) 김재준,『범용기』, 95. 사단법인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www.changgong.or.kr)의 연보에 의하면, 1931년 5월에 신학사(STB), 1932년 5월에 신학석사(STM)를 취득했다.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 박을 수가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 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대로 써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58)

58) 김재준,『범용기』, 96-97.

장공이 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2년에 미국은 갑작스런 경제대공황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학교들도 기금이 모두 산업기관에 투자되었기 때문에 파산상태에 접근했다. 장학기금이 통째로 없어지고 직장은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고학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3년, 미국에서 4년 등 모두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학업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귀국했다.

(2) 사역기

장공과 조선신학교는 한경직과 영락교회와 비교된다. 장공의 사역을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조선신학교 이전의 사역, 조선신학교 사역, 조선신학교 은퇴 후 사역으로 구분하여 알아보고자 한다.59)

59) 주재용은 장공의 생애를 제1기: 1901-1920. 유교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길을 따라 믿음의 결단을 한 시기, 제2기: 1920-1932. 신학 순례의 시기, 제3기: 1932-1939. 내가 설 땅을 찾아 순례하는 삶의 시기, 제4기: 1939-1961. 자유의 신학을 위해 투쟁하며 신학교육에 전념한 시기, 제5기: 1961-(1987). 생활신앙과 생활신학의 기수로서 역사에 참여한 시기로 구분하였다. 본고는 제1기와 제2기를 배움기로, 제3기에서 제5기를 사역기로 설정한 바 그 맥락은 같다.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60.

첫째로, 조선신학교 이전의 사역을 살펴보자.

1932-1933년 어간, 미국에서 귀국한 프린스턴의 삼총사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이 모두 평양에 모였다. 이들은 미국 유학시절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복음으로 조선 민족을 생명으로 살려내자고 피차 격려하고 다짐하던 믿음의 형제들이었다. 장공을 언제나 한 발 앞서서 이끌고 염려해 주던 송창근은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평양 숭실중학교 성경 강사를 맡고 있으면서 조만식 장로가 당회원 중 한 분으로 시무하던 평양의 대표적 장로교회 산정현교회에 초빙되어 목사안수를 받고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한경직은 숭인상업학교 성경교사로 일하다가 신의주 제2교회 담임으로 청빙 받아 신의주로 떠났다.60) 이때 김재준은 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매큔의 교수 요청이 있었으나 거부하였고,61) 평양시내 장로교회 당회원연합회에서 경영하는 숭인상업학교 교사 겸 교목으로 갔다. 그는 건축기금을 모금하여 강당을 짓고 채플장소와 실내 체육관으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 숭인상업학교 농구부가 동경 명치신궁경기 전일본중학생농구선구권대회에 2년을 연속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한편으로 그는 매일 새벽마다 모란봉 꼭대기 솔밭 속 바위 밑에서 기도하였으며, 가고 오는 길에서도 기도하는 생활을 습관화 하였다.

60) 김경재,『김재준 평전』(서울: 삼인, 2001), 52. 여기서 김경재는 ‘이미 2천 명 신도수를 가진 신의주 제2교회’라고 기록하였으나 한경직의 증언에 의하면 ‘약 300명’ 신도수를 가진 교회였다. 아마 김재준, 『범용기』, 104에서 그대로 인용한 오류인 듯하다. 사실 김재준의 한경직에 대한『범용기』의 기록은 오류가 조금 있는 것 같다. 이 부분 외에도 86쪽에서 정주 오산학교 졸업을 숭실중학 졸업으로, 17년을 13년으로 오기(誤記)하고 있다. 그는 왜 13년인지 의아해 하는데 한경직은 진광소학교 6년, 오산학교 3년, 숭실대학 4년, 엠포리아 1년, 프린스턴 3년 등 모두 17년을 공부하였기에 공부한 연수인 17년만큼 일하고 싶다고 기도한 것이다. 141쪽에서 실업상태라고 하였지만 당시 한경직은 신의주 제2교회를 사임하고 보린원에서 원장으로 있었다. 184쪽의 ‘5층 목조건물’은 사실 2층 목조건물이었다. 188쪽 영락교회의 이중 임대차 계약과 교회당 건축에 대한 기억도 시간적으로 뭔가 착각한 듯하다. 김재준은 한경직이 계약직후 일본식 정원과 부속건물을 허물고 교회당 건축을 시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부속건물은 내부 구조만 변경해서 계속 사용하였으며, 본관 건축은 천막을 치고 예배드리던 공원용지 빈 공터 자리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석조예배당 기공예배(1949. 3. 24)를 드리고, 기초공사 완료(1949. 7), 정초식예배(1949. 8. 15), 입당예배(1950. 6. 4) 등으로 진행되었다(『영락교회50년사』, 75-93 참조). 61) 숭실전문학교의 여자부를 신설할 계획으로 교수 청빙을 하였으나 장공이 내막을 알아보니 총독부에서는 숭실의 폐교를 노리고 있고, 메큔의 교장직도 풍전등화라고 하였다. 메큔은 저녁식사에 초청하고 단독 설득을 시작했으나 장공이 끝까지 거부하자 “함경도 고집 못쓰겠소”하며 노했다고 한다. 김재준, 『범용기』, 105.

숭인상업학교에 재직 중에 남궁혁의 요청으로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 등과 함께 장공은 평양신학교 기관지인《신학지남》의 동인격의 기고인이 되었다. 그리고 류형기의 청탁으로 그들과 함께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을 번역했는데62) 그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차원에서 금서가 되었고 채필근을 제외한 세 사람은 ‘자신들이 쓴 글에는 문제가 없으나 그 글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다는 데 대하여 유감’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숭인상업학교 재직 3년째에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가 학교마다 본격화 되었고, 그에게도 그 압력이 있게 되자 그는 미련없이 사표를 내었다. 장공은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초대교회 때 로마황제예배 강요와 유를 같이한 것이라 생각하고, 황제 예배를 거부하며 순교한 초대신자들의 모습을 사모하여『순교자열전』을 썼다.63)

62) 김재준은 요나서를 제외한 열두 소선지서를 번역했다. 김재준,『범용기』, 108. 63) 원고를 다 썼으나 출판은 하지 못했다. 용정에서 출판을 하러 일본영사관을 찾았지만 원고를 압수당하고 말았다. 이 일을 겪은 후 장공은 검열이 필요 없었던 정기간행물인《십자군》을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발간하였다. 김재준,『범용기』, 125.

그즈음 웨스턴신학교 출신으로 동창이었던 숭실의 마우리 교장이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의 교목 겸 성경교사로 장공을 추천하여 그곳으로 갔다. 당시 용정은 온전히 한국인 도시어서 만주라고도 중국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용정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신중학교와 좌익이 주류를 이룬 동흥중학교가 있었으며, 기독교학교로 은진중학교가 있었다. 거기서 장공은 평생을 함께 한 동지인 제자들, 곧 강원룡, 김영규, 전은진, 안병무를 만났으며, 다음 해인 1937년 3월 동만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하였다.

둘째로, 조선신학교 사역을 살펴보자.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평양신학교가 1938년 5월 무기휴학을 선언한 이후, 사태의 악화로 선교사의 인퇴까지 발생하자 선교사의 통제와 간섭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신학교의 설립이 교회여론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선교사의 퇴장과 벽위척사의 박형룡 박사의 망명, 그리고 보수적인 신학의 저명한 목사들의 투옥과 순교로 말미암아, 이 신학교의 설립은 자연 진취적인 자유주의적 신학의 진영에 의해서 경영, 교육될 가능성이 이미 농후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채필근 목사의 제안에 동감한 서울의 김영주, 차재명 목사, 그리고 김대현 장로가 중심이 되어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한 것이 1939년 3월의 일이었다.64)

64)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507.

그리고 그 설립 사무는 송창근이 맡았었는데 그는 흥사단 사건으로 보석중이어서 당국의 경고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장공을 서울에 불러 이일을 맡기고 자신은 김천읍 황금정교회 목사로 가려했다. 송창근의 전보와 설립자 김대현 장로의 초청서한을 받고 장공은 은진학교를 사임, 서울로 와서 조선신학원 설립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940년 3월 경기도청으로부터 조선신학원이 설립인가 되어 승동교회 지하실에서 역사적인 개강을 하게 되었다. 이 신학교육의 시작은 장공에게는 곧 ‘내가 설 땅에 서게 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신학사상은 신학 교육기관을 통하여 줄기차게 흘러왔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신학교를 개강하면서 교육이념 5개항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의 신학사상의 기초이념이기도 하다.65)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66)

➀ 세계적인 수준의 신학 사상과 복음의 전파 ➁ 경건과 연찬을 통한 자율적 신앙
➂ 교수의 자유와 학설의 자유로운 소개를 통한 칼빈신학의 재확인
➃ 성서연구 방법에서의 비판학의 채택
➄ 한국신학의 건설적인 면의 실현과 덕을 통한 교권이용의 근신

65)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69. 66)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508. 그 설립목적은 “복음적 신앙에 기(基)해서 기독교 신앙을 연구하고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이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1회 졸업생을 내고, 조선의 각 기독교파를 통합하여 ‘조선 기독교단’으로 단일화한 다음에 일본 기독교단과 연합하여 내선일체를 실현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을 적극 협력한 전필순의 ‘혁신교단’에 감리교신학교와 함께 흡수되었다. 장공은 다시 새로운 이사회를 열고 실무진을 짜 조선신학교를 일본기독교 정동교회당에 옮겨 재개교하였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장공은 조선신학교의 교장으로서, 교수로서, 교무주임으로서, 경리주임으로서, 그리고 소사로서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며 학교의 숨결을 이어갔다.67)

67) 김경재,『김재준 평전』, 72.

1945년 8월 15일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하고 김천의 송창근, 신의주의 한경직, 그리고 서울의 김재준은 모두 조선신학교에 모였다. 한경직과 장공은 조선신학교 교육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미군정청 산하의 서울시장격인 미 육군대령 윌손을 찾아가 천리교 재산 일부에 대한 ‘임대차계약’을 요청하고 두 곳의 중요한 ‘적산’ 시설과 땅을 조선신학교가 넘겨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원하여 결정을 얻어냈다. 지금 서울역 앞 벽산빌딩 뒤편 언덕에 세워진 동자동 성남교회 터 일대가 당시 천리교 본부가 있던 곳인데 이곳에 남자 신학교 교사와 기숙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영락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영락정의 천리교회 터와 건물은 여자신학교와 여자기숙사 용도로 접수하고 한경직이 여자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68) 그리고 장충동 천리교 숙사는 장공이 접수하고 경동교회를 시작했다.

68) 김경재,『김재준 평전』, 73.

해방직후 조선신학교에는 평양신학교, 봉천신학교, 일본신학교, 북경이나 남경신학교 등에 재학 중이던 신학생들이 모두 조선신학교에 등록하여 학생이 3백 명으로 불었다. 장공은 구약개론과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모세5경도 역사비판학적으로 해석했고, 창세기도 문서설을 그대로 소개했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신학적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었다.69) 한편, 6.25로 인해 신학교가 부산으로 옮기게 되었지만 전쟁의 혼란 중에서도 신학교육을 계속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캐나다 선교부와 협력하여 이우정과 강원룡을 유학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정 때 이미 대학령에 의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신학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기도 하였다.

69) 분열에 관한 세부적 사항은 연규홍의 논문들을 참조 바람. 단, 장공은 “그것을 분열이 아니라 분지(分枝)라고 설명했다. 나무가 자라려면 줄기에서 가지가 새로 뻗어 나가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기장은 분지 중에서도 결과지다. 밋밋하게 자라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과수원 농부는 끝을 베어내고 못 견디게 가위질한다. 고난을 겪게 한다. 그래야 열매가 맺기 때문이다. 기장은 결과지다. 소망 없는 수난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부활의 서곡이다. 부활한 생명에는 숱한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재준,『범용기』, 246.

환도 후에 한신대학은 동자동 터를 감리교 배지학당 재단에 팔고, 일인들이 고급 주택 후보지로 입수했다가 버리고 간 수유리 화계사 주변의 약 10만 평 기지로 옮겼다. 한편 장공은 1958년에 1년 동안 캐나다연합교회 외지선교부의 초청으로 캐나다를 방문하여 한신대학을 위하여 3만 불, 기장 총회를 위하여 2만 불, 기장총회직영 중․고등학교인 ‘청주세광학원’을 위하여 6만 불의 지원약속을 받고, 여선교부 임원 및 지방회장들의 기도회에 참석하여 3만 불의 지원약속을 받는 등 모두 14만 불의 모금을 끌어내었다. 그리고 1958년 10월,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 김재준은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을 맡아 새로 마련된 서울 수유리 캠퍼스에서 모처럼 본격적인 신학교육 비전을 실천에 옮겨보고 싶은 열망에 차 있었으며, 신학교육 갱신을 통하여 한국 개신교를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포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5·16 군사정부는 한국의 고등 교육계를 완전 장악하려는 장기적 음모 아래, 일차로 교육법에 의한 각 대학의 정관이나 자치적 이사회 활동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폭거를 단행했다. 대학의 총․학장 중 만 60세 이상은 총사퇴하라는 지시가 일방적으로 내려졌다. 김재준은 갑작스레 아무 대책도 없이 평생 몸 바쳐 봉사해 온 한국신학대학을 떠나야만 했다.70)

70) 김경재,『김재준 평전』, 124.

셋째로, 장공의 조선신학교 은퇴 후 사역을 살펴보자.

1961년 이후 장공은 신학교육기관이란 제한된 삶의 자리를 떠나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인간의 삶의 한 복판에 몸소 뛰어 들어가서 5·16 군사혁명 이후 비민주주의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불의, 부정, 부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71)

71)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70.

장공은 우선 글로서 이러한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1962년부터 약 10년간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었는데, 그 일을 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하여 제1회 신문의 날 강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국의 신문은 주어진 재료의 보도만이 아니다. 소위 ‘경세의 목탁’이어야 한다. 언론이 자유와 정의를 위한 횃불이나 목탁이 될 수 없다면 한국 민족은 암흑 속에 비참할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기자’는 ‘예언자’ 구실을 해야 할 것.72)

72) 김재준,『범용기』, 334.

장공은 1971년 9월에《제3일》지를 창간하였다. 예전에 그가 발간한《십자군》이 보수 정통주의 신학과 교권주의의 아성을 향한 투쟁이었다고 한다면, 이 잡지는 오늘의 고난과 억압의 역사 현실에서 묵시문학적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의 전진을 하는 투쟁의 기록이었다. 제3일의 희망은 세상의 악의 세력이 꺾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진리)를 무덤에 묻고 ‘이제는 됐다’라고 할 때 ‘아니다’라고 말하는 진리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희망이 제3일의 역사이었다.73)

73)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71.

그리고 장공은 1965년 7월 1일 ‘한일 굴욕 외교 반대운동’을 한경직과 함께 영락교회에서 전개했다. 신학적 차이나 세대차, 교파별 등은 문제되지 않았다. 수백 명의 목사, 전도사, 문인, 재향군인, 장교 등 각계각층이 일체화했다. 장공의 책임 하에 성명서를 비롯하여 박정희 대통령, 국회의장, 일본정부, 일본국회, 일본교회, 미국 대통령, 국제연합본부 등에 보낼 공개서한들이 작성되었고 검토, 채택되었다. 1만 명에 가까운 청중이 운집한 집회에서 한경직은 설교를 하였고, 김재준은 강연을 하였다.

다음으로 1969년, 박정희 정권 10년에 다시 출마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자는 발표가 있자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장공은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투의 보람도 없이 삼선개헌안은 날치기로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국민투표도 부정조작으로 통과되어 그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다음으로 장공은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하여 10년 동안 있으면서 국제적인 민주화운동을 하였다. 그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회장직을 두 번이나 수행하였다. 토론토, 벤쿠버, 에드먼튼, 오타와에서 워싱턴, 필라델피아, 뉴욕으로, 다시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에서 달라스, 하와이, 도쿄까지, 때론 프랑크푸르트, 파리, 제네바까지 길고 먼 장거리 여행을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에 걸친 노구를 이끌고 오로지 민주화와 자유, 평화, 조국 통일을 위해 마치 용광로의 불덩이처럼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때론 강연하고 설교하고 회의를 이끌었는가 하면, 때로는 유엔본부와 워싱턴 거리에서 데모를 벌이기도 하였다.74)

74) 김경재,『김재준 평전』, 167.

끝으로 1983년 9월, 장공은 10년간 북미주를 중심으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 진력하다가 그리운 고국에 돌아왔다. 그때부터 1987년 1월27일 소천할 때까지 그는 조국의 산하와 불교사찰,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의 다산초당과 강화도의 참성단 등을 탐방하면서 조국의 산하를 어루만지듯 ‘고토를 거닐었다.’75) 그는 한국 정신의 원점을 반만년 전의 환단문화(桓檀文化)에서 찾았고, 기독교 정신의 오메가를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서 보았다. 그리하여 80년대의 그의 설교와 강연은 언제나 환단문화론과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와의 유기적 연계와 조화를 강조하는 데에 집중하였다.76)

75) 김경재,『김재준 평전』, 198. 76) 유동식,『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7), 265.

[4] 한경직과 김재준, 그 사역의 평가

1) 한경직 평77)

77) 졸고, “한경직, 그 삶의 여정”, 70-71.

우선, 한국 기독교계의 평가이다. 한경직과 동사목사로 영락교회를 섬기다 새문안교회 담임으로 간 강신명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성자라고 부른 말은 우리나라에서라기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부른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름은 한경직 목사가 원로목사가 되기 전후에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이름이 불리워질 때 이 땅에 선교 백주년을 앞두고 그와 같은 목회자가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 전체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한경직 목사는 겉사람보다 속사람을 단장한 사람이다. 한경직 목사는 그래서 영락교회 목사이기 전에 한국 교회 목사요, 이 나라를 대표할 지도자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78) 크리스천 아카데미 설립자인 기독교장로회 강원룡 목사는 “한 목사님은 내게 평생 큰 배움의 스승이자 아버님과 같은 분이셨고, 제자인 나를 사랑하셨다. 서로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목사님과 나 사이에는 보수와 진보의 의미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국 개신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치루면서 한 가지 분명한 건 한 목사님이 아니면 그렇게 조화롭게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목사님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사상이나 생각이 다르더라도 항상 열린 마음과 열린 자세로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점이다”라고 하였다.79)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는 “영적 지도자로서 당대만을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민족의 장래를 바라보시고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신 모습은 선지자적 통찰을 가져야 할 목회자의 사표입니다”라고 하였고,80)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명예총재인 김준곤 목사는 “한국 기독교 115년사의 밭 한복판에 유별나게 큰 거목 한 그루, 우리들 천만 이 땅 크리스천의 아버지요 스승이신 한경직 목사님!”이라고 하였다.81)

78) 강신명, “세계에서 성자로 불리는 목회자”, 김병희, 『한경직 목사』(서울: 규장, 1982), 105. 79) 강원용, “일보다 중요한 건 화합이에요”, 한경직목사탄신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엮음,『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서울: 샘터, 2002), 132.
80) 옥한흠, “진정한 목회자의 사표”,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엮음,『아름다운 사람 한경직』(서울: 규장, 2000), 92.
81) 김준곤, “편안하고 따뜻했던 스승,”『아름다운 사람 한경직』(서울: 규장, 2000), 16.

다음으로, 한국 종교인들의 반응이다.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은 “사랑과 용서의 사도, 한 민족의 정신적 지주”라고 하였다. 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이었던 송월주는 “한경직 목사는 이 나라 민중을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돌보신 목자와 같은 분이다. 특히 월남 피난민들과 6·25 전쟁에서 폐허가 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서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도덕적으로 일깨워 올바로 살도록 지도하신 민족의 지도자셨다. 종교 간의 대화와 교류를 증진하여 종교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도 선구적 역할을 하신 분이고, 사회정의와 안정을 위해서도 크게 애쓰신 분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와 안보를 바탕으로 하는 남북 간 화해와 교류,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일에도 기초를 마련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경직 목사를 존경한다”라고 하였고, 천도교의 김재중 교령은 “그분은 한마디로 성자였어요. 한경직 목사는 나라와 민족을 참으로 사랑하고 지도하신 민족의 지도자였고 20세기의 성자였지요”라고 고백하였다.82)

82) 김명혁, “목회자 한경직 목사”,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한경직목사탄신100주년기념행사자료집』(서울: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08), 219. 김명혁은 한경직목사탄신100주년기념강좌를 준비하면서 불교의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2002. 9. 17), 천도교의 김재중 교령(2002. 10. 4)에게 “한경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질문하였는데 그들의 답변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끝으로, 외국인의 평가를 보면, 먼저 한경직과 함께 동역한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으로 그분의 기도와 후원이 개인적으로나 제 사역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목사님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것입니다. 세계는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을 잃었지만 천국에서는 사도와 교부에 버금갈 신앙의 거장을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다.83) 그리고 프린스턴신학대학원 명예교수이자 초대 내한선교사 마포삼열의 아들인 사무엘 휴 마펫(馬三樂, Samuel H. Moffett)은 “한경직 목사는 성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진정한 지도자였다. 어떤 성자들은 그들이 순교한 죽음 때문에 성자로 불리기도 한다. 한경직 목사는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성자라고 부른다. 그는 아마도 20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이었을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다.84) 셋째로 한국을 방문하고『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저서를 남긴 코흐(Kurt E. Koch, 필명은 Rene Monod)는 “한경직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갖고 사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를 한 목사요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께 영광을 돌리는 그를 우리는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85) 넷째로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의 지도자인 헨리 할리(Henry Holley)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지도자라고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는 제 평생에 아마 한 사람에게 한 번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경직 목사님에게 그와 같은 찬사를 표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86) 한경직 목사 추모10주기 국제평화화해컨퍼런스 주발표자이며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총장인 이안 토렌스(Iain R. Torrance)는 “진실로 한경직 목사는 현대의 성자이며 우리 모두의 본보기입니다”라고 말하였다.87) 마지막으로 템플턴(Templeton) 재단은 1992년에 한경직을 수상자로 선정한 다음 이렇게 평가하였다. “한경직 박사는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 많은 교회가 서도록 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해외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선교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88)

83) 빌리 그래함, “전세계 크리스천의 귀감”,『아름다운 사람 한경직』, 12. 84) Samuel H. Moffett, "Rev. Kyung-Chik Han: A Leader of Yesterday for Our Tomorrow" 『한경직목사탄신100주년기념행사자료집』, 90.
85) 코흐,『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박빌립 역(서울: 세종문화사, 1970), 59.
86) 헨리 할리, “추모사”,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한경직목사1주기추모자료집: 한국교회와 한경직 목사』(서울: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02), 141.
87) 한경직목사추모10주기 제3회 국제평화화해컨퍼런스 저녁집회 설교, 2010.11.1.
88) 1992 Templeton Prize for Progress in Religion, "Dr. Kyung-Chik Han Awarded 1992 Templeton Prize" 1992. 3. 11.

2) 김재준 평89)

89) 김경재,『김재준 평전』, 208-229 참조.

장공의 후배 동역자였던 김정준은 그가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봉직하던 시절 다섯 권으로 펴낸『장공 전집』서문에서 “듣는 순간만의 감명보다 줄기찬 감격으로 우리를 고혹시켜, 읽고 또 읽고 더 읽게만 하도록 글을 쓰는 사람. 문장이 아름답고 매끈해서가 아니라, 낡은 것의 허점을 찌르고 잘못된 것을 ‘뽑으며 파괴하며 넘어뜨리는’ 폭발력을 가진 글을 써온 사람. 항상 역사의 수평선 저 너머 영원에다 눈길과 손길을 잇대어 장차 올 새로운 아침을 기대하고 그것을 기다리도록 70평생을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 보수와 진보 어느 하나에도 자기 발을 붙이지 않는 진보적 보수주의, 보수적인 진보주의 사상을 글귀마다 펴 나가는 폭넓은 진리의 탐구자. 신앙과 윤리, 교회와 사회, 신학과 철학, 전통과 혁신의 테두리를 자유스럽게 넘나드는 자유의 탐구자. 이런 진리와 자유에서도 높고 깊고 폭넓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그의 생활과 사상이 높고 넓고 푸르고 긴 창공 같아, 사람들이 그를 장공(長空) 선생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90)

90) 김정준,『장공김재준목사전집』서문 (서울: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5).

한국 신약학계의 원로요 연세대학교 교수로 청빙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장공의 삼고초려 정성을 받아들여 당시 교수대우가 연세대보다 형편없던 한국신학대학 교수 초빙을 수락하고 장공과 평생 한신의 신학교육을 위해 헌신한 전경연은 “그는 무슨 개론, 무슨 원론 같은 것을 쓰지 않았다. 오직 단신 빛의 붓끝으로 우러나오는 정직한 고백을 적어서 내던짐으로써 어둠의 물결을 막아내는 사명을 다하였다. ‘영원한 신학’을 찬란하게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길’의 사람으로서 비판하고 증언하고 항의하고 재해석을 내렸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감리교 신학자요 대표적 문화신학자로서 수많은 명저를 남긴 유동식 박사는 “일제 치하로부터 해방된 한국은 다시 6·25 동란의 비극을 겪고, 계속되는 독재정권 밑에서 국민의 인권이 억압되는 비운의 역사를 살아왔다. 이러한 격동기에 처해 있는 한민족을 향해 기독교의 선교는 마땅히 구원의 손길을 펴야 하는 것이다. 복음에 의한 민족선교 또는 민족목회를 담당해야 하는 것이 교회이다. 이러한 자각을 가진 전형적인 신학자요 목회자는 장공 김재준이었다. 장공의 삶과 사상의 전개는 세 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복음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교회의 자립을 위해 신학교육에 전념하던 해방 전후의 시기이다. 둘째는 박정희 정권을 전후한 독재정권 밑에서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민족을 목회한 시기이다. 셋째는 민족의 뿌리를 찾고,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바라보며 그의 행보를 옮기던 만년의 삶이다”91)라고 하였다.

91) 유동식,『한국 신학의 광맥』개정판 (서울: 다산글방, 2003), 165-166.

장공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둘째딸 김신자를 아내로 맞아 사위가 된 이요, 한국인으로서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이 된 분이며, 장공이 북미주에 10년 거주하면서 민주화 통일 운동을 할 때 늘 장공과 함께 한 이상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재준 목사님을 오래 접촉해 보면서 그분은 분명히 세계를 발코니 위에서 바라다보는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고 실감하게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그분의 이해도 어느 한 신학자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을 비판 수용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특히 장공 옹은 그의 삶 속에 짙게 아로새겨진 유교나 도교의 깨달음을 버리지 않고 기독교를 모든 진리와 문화를 축복하는 창조주의 넓은 품같이 받아들이는 분이라고 느껴지곤 했다.”92)

92) 이상철, “온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사신 분 – 장공 회상(24)”,「세계와 선교」제144호 (서울: 한신대학교, 1994), 11.

장공의 애제자로 한국신학대학 신약학 교수로 봉직했으며,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고, 한국 여성사회의 대표적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세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우정은 “장공 선생님은 그 자연 속의 한 그루 거목과 같으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지 잎이 무성하여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그늘에서 쉬고 갈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시다. 그분의 외모는 별로 위풍당당한 데가 없다. 오히려 초라한 편이다. 물질적으로 별로 여유 있는 생활을 못하신 그분은 옷차림도 초라한 편에 속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분의 인품과 마음은 항상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계셨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억지로 붙잡지 않는 유연함이 있으셨다”라고 회고한다.93)

93) 이우정, “선생님이 남기신 인상”,「세계와 선교」제123호 (서울: 한신대학교, 1990), 9.

한국 구세군 부령의 지냈으며,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 조선신학교에서 장공에게 배운바 있는 장형일은 “김 교수님은 전신전령(全身全靈)이 하나님의 성결과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온전히 거룩하여 거룩한 삶을 살았기에 그런 창작적 생명력은 보는 이의 심혼을 변개시키는 역사로 활용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94)

94) 장형일, “나의 분수를 깨우쳐 주신 스승”,「세계와 선교」제132호 (서울: 한신대학교, 1992), 11.

『김재준 평전』을 쓴 김경재는 “김재준 목사는 우리 시대를 살고 간 ‘신선’이요 ‘작은 예수’였다. 나에게 그 누군가가 김재준 목사라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여 구만 리 창공을 날아오른 자유인이 되고, 하늘 씨앗을 땅 속에 심는 성육신적 영성으로 영글어져,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지 200년 만에 대승적 기독교 시대를 연 선구자라고”95) 기록함으로 그 책을 마무리했다.

95) 김경재,『김재준 평전』, 229.

[5] 결 론

한경직과 김재준, 그들은 그들을 배제한 채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논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각각 평안도와 함경도의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서 지경의 한계를 넘어 일본으로, 미국으로 갔으며 선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서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과 민족의 유익을 위해 살았다. 비록 신앙의 색깔은 조금 달랐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였다.

오늘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예전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은 온통 비난이요, 질책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내부의 비판이다. 서로를 향한 공격이다. 한경직과 김재준에게 에큐메니칼 정신은 공동유산이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에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이제 우리 앞에 한경직이 꿈꾸었던 ‘기독교적 민주국가’의 건설이, 김재준이 추구했던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놓여있다. 그들처럼 그리스도와 평생 동행했노라고 고백하는 우리였으면 한다.

김 은 섭 박사

학력 [1987]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 졸업(B.D)
[1994]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Div)
[1998]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업(Th.M) 교회사 전공 - 한국교회의 신앙형성과 길선주
[2005]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Ph.D) 교회사 전공 – 김교신의 역사인식

경력 [1997 – 현재]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
[2005 – 현재] 명지대, 숭실대, 장신대 강사 등.
[2007 – 현재] (사)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연구목사(Research Director), 영락교회 부서담당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