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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27회] 장공 김재준과 신천옹 함석헌의 상호조명 / 김경재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14 12:21
조회
1940

[27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2322(목) 오후 5~7

“장공 김재준과 신천옹 함석헌의 상호조명”

김경재 명예교수
(장공기념사업회 부이사장 / 한신대학교)

[1] 들어가는 말: 長空과 信天翁의 동시조명 필요성

장공 김재준(1901-1987)과 신천옹 함석헌(1901-1989)의 삶과 사상을 동시에 조명함으로써, 두 분의 삶과 사상의 화이부동(和而不同)한 특징과 차이를 살피고 21세기 첫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갖는 의미를 성찰하려고 한다. 장공과 신천옹, 그 두 사람은 특히 20세기 후반 시대에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격동하던 가치관의 혼란기에 한국사회의 정신적 ‘어른’으로서 우리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제시한 시대의 양심이었다.

두 분이 타계한 후, 두 분의 삶과 사상을 이어나가려는 기념사업회와 후학들이 각각 두 인물에 대한 삶과 사상을 연구·계승 해오고 있지만, 두 분을 동시조명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두 지성인을 동시에 조명할 필요성을 다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필요성은 한국 기독교 교회사의 맥락에서 연유한다. 장공과 신천옹 두 지성인은, 같은 해(1901)에 태어나서 거의 90년을 살아오면서 20세기 한국기독교의 보수화된 비주체적 신앙행태에 대하여 예언자적 비판을 통하여 기독교 변혁에 많은 노력을 해온 인물들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한국 기독교계의 보수적 풍토 속에서 항상 이단시 당해온 기피인물이었으며, ‘한기총’의 이름아래 집결된 다수의 보수계 기독교집단은 ‘불편한 진실’을 말해왔던 개혁적 두 사상가를 공론화 하는 것을 두려워해 왔다. 그들의 개혁적 사상과 주체적 기독교 이해를 비주류적 기독교 변두리 인물로서 단죄하거나, 세속적 정치사회문제에 연루된 일탈적 기독교 행동인이었다고 비난해 왔다. 한국 기독교계는 이젠 맘 문을 열고 두 선각자의 ‘지성적이고 미래지향적 영성’에 귀를 기울여야 오늘의 절대절명적 기독교 위기를 돌파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 필요성은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회사의 올바른 방향정립을 위해서, 1960-1980년대 한국사회의 가치관의 혼란시기에,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살아온 두 사람의 ‘정치신학적 영성’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연구할 가치와 긴급성으로부터 온다.

지난 인류문명사 과정에서 세계종교들이 신성한 것이라고 재가해 준 세 가지 가치들, 즉 가정·소유·국가의 3대 신성성이 근본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더불어 삶의 기본적 인간성 함양의 교육기관인 가정의 신성성은 혈연중심주의와 피부색으로 인간을 차별하려는 인종중심주의로 변질되었고, 소유의 신성성은 개인주의와 무노동의 금융자산 탐욕으로 변질되었고, 국가의 신성성은 합법적 전쟁 살상과 국가폭력의 권위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변질된 세 가지 신성한 사이비 가치들로 무장한 낡은 세계관은 하나뿐인 지구 생태계를 약육강식의 투쟁장과 반생명적 황폐화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에 기생 아부하는 기존의 호국종교들, 원죄설과 윤회설로 인간의 양심적 책임윤리를 말살하는 보수종교들, 자기종교의 계시적 권위만 주장하는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들로서는 문명치유가 불가능하다.

셋째, 장공과 신천옹을 동시에 조명해 볼 필요성은, 현재 지구촌 인류가 처한 문명사적 곤궁이 자못 심각하여, 삶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일대변혁을 요청하는 ‘문명전환기’이기 때문이다. 김재준과 함석헌을,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회복하라고 들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 혹은 생존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문명사회적 삶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영성가적 멘토로서,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사고의 지평을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의식’(장공) 혹은 ‘세계적 하나 의식’(신천옹)에로 우리들의 의식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두 분의 의식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예견한 생명진화곡선상의 임계점 곧 “3만 년 전에 시작한 인류의 공동사고(coreflection)의 진화가 비등점에 가까워지면서 한마음을 공유하는 초인류의 초사고(super-reflection toward Unanimisation)”에로 형태변화를 촉구하는 선견자들의 공동의 목소리이다. 그리하여, 새 시대의 영성의 화두를 장공은 ‘생명, 평화, 정의’로서 제시했고, 신천옹은 ‘자율, 상생, 비폭력평화’로서 제시하고 있다. 전자는 삶의 외면적 관계와 구조적 측면이 강조되고 후자는 생명의 내면적 관계와 역동적 측면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영성화두는 동시에 조명될 필요가 있다.

[2] 두 사상가에게서 삶의 자리의 특징과 실천적 삶의 공동지향성

1) 성장환경의 차이점이 끼친 영향

인걸은 산천에서 나며 산하의 지질풍세는 인간의 기본 바탈과 성격, 그리고 수명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동양의 풍수사상이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자연환경에 의해 결정론적으로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지나친 미신이지만, 인간도 우주와 지구 자연생태계의 하나인 이상 생명이 잉태되고 그 안에서 양육되는 자연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지당한 말인 것이다. 1901년 동갑인 장공과 신천옹이 동시대에 살면서 두 사람이 큰 족적을 남겼지만 인품의 특성, 사고방식의 특징, 역사와 종교와 공동체의 제도조직 등에 대한 기본관점에서 가치관의 공동지향성 못지않게 차이와 특성을 나타낸다. 그 가장 큰 이유로서 두 사람이 탄생하고 사춘기 시대까지 청소년기를 지낸 그들의 자연환경과 그 자연환경을 둘러싸고 발생했던 정치·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공은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를 부모로 하여 세상에 태어났다(1901년 음력 9월 26일). 오봉동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창꼴’이라 불렀는데 조선조 육진개척시대 군량미 비축창고가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장공의 고향회상을 들어보면 “둘레가 40마일 쯤 되는 분지에 산맥이 둘러쌌으니 어디를 보나 ‘산’의 능선이 하늘을 만진다”는 두만강가 평화롭고 조용한 산골마을이었다.1) 장공은 ‘산의 사람’이다. 산처럼 무겁고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이다. 그의 직계조상이 함북 척박한 산지에 들어와 화전으로 밭을 일궈 1-3만 평을 개간한 살림수준까지 이르렀는데, 장공 또한 개척정신과 불퇴진의 인내력이 강하지만 산 속의 나무처럼 그 성격이 질박(質朴)하고 깊은 계곡의 고요한 충기(充氣)처럼 정중동(靜中動)의 영성기질이다. 논어에도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산처럼 고요하다”(仁者樂山 仁者靜)고 했다.2)

1) 김재준, “어릴 때 추억”,「김재준 전집」제13권-「범용기(1)」(한신대학교출판부, 1992), 4-12쪽 참조. 2) 子曰 “知者樂水仁者樂山 知者動仁者靜 知者樂仁者壽”(논어, 術而).

장공의 아버지 김호병 씨는 한자로 시문에 능한 ‘글 하시는 분’이었고, 마을 서당 선생이었으며, 한 땐 산골마을에서 한약국을 차렸다. 어머니 혈통으로서 조선 실학파 거두 채향곡의 후손의 핏줄을 이은 채성녀 씨였는데, 어머니로부터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실사구시하는 실학적 정신을 양육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섭취하였다. 그의 최초의 선생님은 서당의 훈장이셨던 아버님이셨으며, 소년기에 무릎 꿇고 암송하고 익혔던 유교경전 특히「논어」의 인문주의와「맹자」의 왕도정치사상은 장공의 지성의 밭에 가장 중요한 기름진 퇴비가 되었다. 장공은 깊은 산 속의 나무가 서서히 자라듯이, 동시대 동갑내기(1901년생)인 함석헌, 박헌영, 이상 등에 비하면 아주 늦은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장공 자신이 말했듯이 ‘두만강 국경지대 유폐된 산촌’에서 탄생하여 청소년기까지 그 지경을 벗어나지 않고 지냈기 때문이다.

신천옹은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함형택 씨와 김형도 씨를 부모로 하여 세상에 태어났다(1901년 양력 3월 13일). 원성동은 본래 작은 섬 6개를 합하여 사자섬이라 민중은 불렀는데, 점차로 육지와 연결되어 실제론 섬이 아니지만, 정말 섬 이름의 예언처럼 평북 용천군 압록강 끝자락에서 ‘한국의 사자’가 나온 것이다. 신천옹의 고향 회고를 직접 들어보면 “평북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의 외진 바닷가였다. 땅은 살쪄 곡식은 풍부하고 고기잡이도 잘되나 교통이 불편하여 가난하고 하잘 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3) 신천옹은 바다의 사람이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무역을 해서가 아니라, 어릴 때 심성 형성기에 항상 출렁거리는 넓은 바다와 아스라이 먼 수평선을 보고 자란 것이다. 파도의 출렁거림은 만물의 변화와 약동을 가르쳤고, 뭇 강물과 빗물이 흘러 모아 결국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바다는 그에게 만물이 그리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상징이요(롬 11:36), 역사가 결국 거기에로 돌아가는 씨알의 상징이 된다.4) 장공의 성품이 정중동(靜中動)이라면 신천옹의 성품은 동중정(動中靜)의 그것에 가깝다. 장공의 문체는 짧은 단문형의 수필적이라면, 신천옹의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적이다. 그는 사실 존재와 역사와 씨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3) 함석헌, “씨의 소리로 동그라미를”,「나의 사상을 젊은이들에게」(대우출판공사, 1985), 13쪽; “한 동발목의 이야기”「함석헌 전집」제4권-「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한길사, 1983), 313쪽 참조. 4) 함석헌 “씨의 설움”,「함석헌 전집」제4권(1983), 66-67쪽.

신천옹 함석헌이 평북하고도 용천군 바닷가 사자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사상 형성에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인간 평등적 서민의식이요, 둘째는 개화의 바람에 먼저 접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일찍이 기독교에 접하여 자유사상의 혼을 받음이요, 셋째는 앞서 말한대로 바다의 연원한 출렁임과 수평선의 형상이 상징하는 것 곧 만유일체는 변하는 것이요, 창조적 과정이며, 겨룸과 대듦이라는 생명의 엄숙한 원리인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 평북, 함북, 전라, 제주는 정치적 유배지요, 중앙집권 군주 국가에서 보면 언제나 ‘이방의 갈릴리’였기에, 거기엔 저항의식과 반골의식과 평민의식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의 탄생지 용천이 서민성과 저항혼과 자유혼과 민족의식이 살아있는 고향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신천옹의 조부모님은 글을 모른 소작농이었으나 열심히 노동하여 사자섬 70호 집들 중에서 서당을 빼놓고서는 유일하게 기와집을 가지고 적잖은 농토를 가진 섬마을에서 부유한 집안을 이루었다. 함석헌의 조부는 농사짓는 이치와 사람도리와 의리에는 밝은 사람이었다.5) 함석헌의 아버지는 한의업을 한 의사였고, 함석헌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향할 무렵엔 고향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전도와 교육에 힘쓴 장로였던 것이다.6) 함석헌이 훗날 한국 교회의 교리적 도그마 신앙, 형식적 예배의식, 그리고 외형주의 신앙형태에 비판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25살 될 때까지 가족이 속한 장로교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조교육을 받은 것”을 고맙게 생각하였다.7) 왜냐하면, 그러한 절제의 훈련과 영성수행이 밑받침 되지 않는 자유신앙은 희생을 모르는 자기방종에 흐르고, 내면적 신비체험은 광신주의나 감상주의로 흐르고 말기 때문이다.

5)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함석헌 전집」제4권, 206-207쪽. 6) 위와 같음.
7) 위와 같음, 207쪽.

지금까지 장공과 신천옹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자연환경과 역사지정학적 조건이 그 두 사람의 성품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일별하였다. 공통점은 두 사람이 모두 각각 함북과 평북의 나라변방의 가난한 평민들이 살던 땅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비권위적이고 평등과 자유의 정신은 훗날 그 두 사람이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데 기층 뿌리가 된다. 부모는 개척적이고 양심적이고 실학적 기질을 가진 유교배경이었으며, 아버지는 양자 모두 한의학에 조예가 있었고, 어머니는 인자한 성품으로 자녀의 천성을 고이 자라도록 길러준 위대한 교육자였던 것이다. 성품상 근본적 차이는 장공은 깊은 산마을에서 거목을 보면서 자란 정중동의 성품을 길렀고, 포효하는 바닷물과 수평선을 보면서 자란 신천옹은 동중정의 성품을 길렀다.

두 사람의 고향이 모두 조선의 ‘갈릴리 변방’이었으나, 함석헌은 개화의 길목에 위치한 평안도인 관계로 일찍부터 기독교와 개화사상에 접하여 정규 신식 교육과정을 밟을 수 있었지만, 김재준은 함경도 백두산맥 높은 영들에 막혀 민족 독립의식이나 제도적 현대 정규교육에 접할 수 없었다. 가정의 경제형편은 두 사람 모두, 빈곤하지는 않았지만 소작인을 부리는 지주계급이 아닌 자작중농 정도 집안이지만, 함석헌 부모의 가정경제 형편은 아들을 일본에 유학시킬 정도의 경제적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장공은 무일푼의 고학생으로 경성에서 독학과 동경에서 ‘공사장의 흙짐을 지는 아르바이트’로서 식비와 학비를 조달해야 하는 가난한 산골마을 출신의 청년이었다. 경흥군 산골마을에서 개간한 밭 1만 평은 대가족의 기본 의식주 생계는 해결하지만, 돈으로 바꾸면 동경의 1년 유학비용도 못 되는 것이었다. 이제 장공과 신천옹의 삶과 세계관에 영향을 끼친 사상가 및 독서한 책들을 통해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비교관점에서 일별해 보려 한다.

2) 사상가와 독서가 끼친 영향

「논어」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지 않으면 없어지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공자의 말이 전해온다. 장공과 신천옹은 그 점에 있어서 전형적으로 배움과 생각함을, 독서와 사색을 평생 병행하며 지속해간 전형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장공은 젊은 시절 초등 중등 대학의 정규교육과정의 혜택을 순조롭게 누리지 못한 ‘늦깎이 낭인적 학도’였고, 그에 비하여 신천옹은 대학과정까지는 장공보다는 좋은 여건에서 공부한 ‘조숙한 사색적 학도’였다.

장공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신식 교육제도 기관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서당에서 전통적 동양고전을 암송 통독하는 교육을 받았다. 유학의 사서(四書)인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달달 암송할 정도로 통독했다. 개화바람이 함경도 산골에도 불어 신교육제도의 학교가 하나 둘 들어섰으나 평안도나 경성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약한 바람이었다. 장공은 9세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했고, 11-13세 때 고건원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요즘 중·고등학교 수준에 해당하는 중등교육과정은 13-16세 무렵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다. 함석헌이 평안도 엘리트들이 다니던 평양고보와 3.1만세운동에 뛰어들던 그 시기 즉 16세부터 20세까지, 장공은 회령군청 간접세과와 웅기 금융조합 말단 직원으로서 사회의 바닥 경험을 하고 있었다.

송창근 선배의 강력한 권유를 받고, 장공이 서울 한양에 공부하러 온 것은 3.1만세운동이 지난 직후 1920년이었다. 우리 나이로 스물한 살의 ‘방랑청년’은 정규 중등교육 과정을 이수할 기회가 없었기에 경성 중동학교 속성과정 고등과에 학적을 두고 기하 대수등 신식교육과정을 밟았고. 인문교양 과정은 중앙YMCA ‘일요강좌’와 ‘잡지실’과 ‘영어전수과’에서 늦깎이 공부를 한 셈이다. 그 기간 장공은 세례를 받고 정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의 표현대로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8) 바로 이 무렵, 함석헌은 장래가 보장받는 평양고보를 ‘3.1만세운동’ 적극 참여자로서 반성문 쓰기를 양심상 거절한 후 자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속을 썩 힐 데로 썩히다가”, 남강 선생이 설립한 정주 땅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위대한 산 인격자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 그의 삶에 전향을 가져오는 시기였다.

8) 김재준, 「김재준 전집」 제13권, 48쪽.

이 무렵, 그러니까 대학교육과정 전후, 두 사람의 독서를 통한 성숙과정에서 우리는 두 인물의 관심과 품성적 특성의 단초를 읽을 수 있다. 20대 초반 비교적 양서구입이 가능한 경제여건을 갖춘 함석헌은 H.G.웰스, 마찌니, 앙리 베르그송, 톨스토이, 타고르, 간디, 윌리엄 블레이크, 로망롤라, 쉘리 등을 독서를 통하여 접하게 된다.9) 그리고, 함석헌은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찌무라 간죠의 ‘성경연구반’에 참여하여, 무교회 신앙과 우찌무라의 신앙적 인격을 배우게 된다. 적어도 함석헌은, 20세에서 28세 사이, 제2차 지성적 인격형성 시기에 이승훈, 유영모, 우찌무라 간죠 등 세 분의 선생을 만나는 복을 얻는다. 50세 이후엔 떼이야르 드 샤르뎅과 죠지 폭스와 마하트마 간디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9) 함석헌, 「함석헌 전집」 제4권, 213-214쪽.

같은 시기, 장공 김재준은 그의 인격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말하자면 사부(師父)라 할 만한 인격체를 만나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 다만, 독서를 통해서 특히 청년기에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의 청빈사상에 큰 감동을 받았고, 우찌무라 간죠의 지성적 신앙보다는 ‘보베빈민촌’에서 청빈한 봉사실천행동으로 가난한 자들 속에 들어가 사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에 더 맘이 끌렸던 것이다. 미국 유학 이후 신학계열에서는 칼 바르트, 리챠드 니버, 라인홀드 니버, 아놀드 토인비의 영향을 받았고, 생애말년엔 동학운동과 조선 상고사에 관심이 많았다.

거칠게 말하자면, 함석헌의 그리스도교적 영성엔 도미닉파 수도승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지성적 영성이 더 지배적이고, 장공의 그리스도교적 영성엔 프란시스코 수도회 창시자 성 프란시스의 실천적 청빈영성이 더 지배적이었다. 신천옹의 영성이 공관복음서보다는 요한복음서적인데 더 기울어진다면, 장공의 영성은 공관복음서의 역사적 예수에 더 이끌리며 야고보적 경건(약 1:27)이 헤브라이즘의 원뿌리라고 보는 셈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함석헌의 종교적 심성이 귀족적이라거나 민중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함석헌의 삶과 사상의 원형은 그의 어린 시절 고백 속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엘 진급하던 무렵 가난한 친구는 농사꾼이 되었고 자기는 중학교엘 가서 방학에 돌아와 그 친구를 만났을 때 감정의 회고이다.

“…중학교엘 가기로 되어있던 나는 무슨 죄나 지은 듯 미안해 무슨 말을 해줘야 할 듯 하면서도 하지도 못했던 때의 그 슬픈 기분이, 지금도 생각하면 끓는 솥뚜껑만 열면 훅하고 김이 치달아 오르듯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그는 그 다음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했다. 학교엘 갔다 방학에 돌아오면 그 얼굴과 손이 점점 시커먼 농사꾼이 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손을 좀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못했고, 천연히 서로 얘기는 하면서도 혹 뽐낸다 할 듯해서 두렵던 생각, 될수록 공부나 내가 가 있는 도회지의 예기는 피하려 했던 생각이 지금도 같이 있다.”10)

10) 함석헌, “씨의 설움”,「함석헌 전집」제4권, 55쪽.

장공과 신천옹, 이 두 사람의 독서와 청년기와 유학시절 삶의 체험에서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지향성에 우리는 주목한다. 첫째, 두 사람은 개화기의 신교육을 받기 전에 한문으로 쓰인 동양고전 특히 유교경전을 읽고 쓰는데 불편 없을 정도로 한문(漢文)정신문화가 그들의 정신세계 토양의 밑바탕에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훗날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통한 서구철학과 종교를 섭취하더라도 동양정신문화의 가치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성숙한 지성인이 될 수 있게 하였다.

둘째, 두 사람은 사회구성원의 바닥계층들에 대한 깊은 체험적 만남경험을 통하여 항상 민중, 서민, 씨들로 표현되는 사회의 기층민에 대한 근본적 배려심과 빚진 맘을 갖게 되었다. 장공은 훗날 술회하기를 역사적 종교로서 발전해왔던 그리스도교는, 로마가톨릭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시민사회 출현과 함께 발전해온 개신교마저도, 예수가 관심을 뒀던 ‘오클로스’를 포용하는 교회사가 아니라 ‘중산계층’의 종교가 되어왔기에 맑스-레닌의 종교비판적 유물론이 출현하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셋째, 두 사람은 그들의 종교사상이 우주적 지평으로 넓어지고 깊어짐에 따라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와 상호보완을 추구하게 되는데, 예수회 신부요 고생물학자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은 두 사람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넷째, 결국 두 사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 질문에 대하여 항상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연계시킴으로서 역사과정 자체를 떠난 추상적인 신론(神論)이나 인간론을 배제하게 되었다. ‘현실역사’ 한 복판에서의 ‘초월경험’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공통점들은 이제 두 사람의 인생 지도자로서 활동시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3) 교육자와 우상타파의 예언자적 개혁가로서 활동

장공과 신천옹의 일생을 큰 눈으로 조감할 때 떠오르는 그들 삶의 공통적 이미지는 본래적 의미에서 교육자이며 동시에 우상타파정신을 가슴에 품은 예언자적 개혁가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육자란 학교교사로서의 좁은 의미만이 아니라 ‘시대의 교사’라는 의미에서 인생과 역사의미를 동시대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지성인이었고, 인간혁명과 종교혁명과 사회혁명과 새나라 새문명 세우기 운동이 교육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이 가장 먼 길이면서도 가장 가까운 길이라고 본 점에서 통한다.

함석헌이 당시 수재들이 공부하는 고등교육기관 동경사범학교에서 ‘역사와 윤리’ 분야를 전공으로 4년간 학교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 일터에 몸을 던진 곳이 500명 정도 조선 학생이 공부하는 자신의 모교 오산중학교였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10년간(1928-1938) 역사와 수신을 가르치면서 ‘가장 좋은 날’을 보냈다. 동시에 학교 밖에서는 이 기간에「성서조선」독자들을 위한 제2회 동계성서강습회에서 저 유명한「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3일간 발표하였고(1933.12.30-1934.1.5) 그 내용의 글은 22회에 걸쳐「성서조선」에 연재하였다. 제3회 동계성서강습회(1934.12.30-1935.1.4) 때「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발표하였고, 그 내용이 마찬가지로 22회 걸쳐 같은 잡지에 연재되었다.11)

11) 이치석,「씨 함석헌 평전」, 함석헌년보참조(시대의 창, 2005), 649쪽.

함석헌이 사범학교를 졸업한(1928) 후 해방(1945)이 될 때까지 일제식민통치하에서 갖은 고난을 겪었으나, 위의 두 책을 세상에 남김으로서 그 자신의 존재의미를 들어냈고, 고난의 용광로 안에서 정금을 정련해 내었다. 넓고 깊은 인격형성도 되기 전에 남을 가르치고 설교하려는 직업교사 혹은 직업목사 되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의 경박함을 경고하고, 그런 전문직업인을 양산해내는 사범학교와 신학교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함석헌이지만, ‘교육’그 자체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넓고 깊은 의미에서 생각 할 때 사람의 하는 일의 모든 일이 결국 교육입니다. 사람의 일만 아니라 생명의 전(全) 과정이 곧 교육입니다. 진화는 곧 생명의 자기키움이요 자기 고쳐감입니다. 정신을 곧 생명의 저 돌아봄 이란다면 하나님은 자기교육을 영원히 하시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교육이야 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입니다. 절대입니다. 하는 줄 알면서도 하고, 하는 줄 모르면서도 합니다.12)

12) 함석헌,「함석헌 전집」제4권, 227쪽.

함석헌이 동경에서 사범학교를 다니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10년간 오산학교에서 ‘선한 목자’ 같은 심정으로 교사 일에 전념했을 동안, 김재준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범용기」에 장공은 자신의 청년시대 생활상을 남이야기 하듯 덤덤하게 기록해 놓았다. ‘늦깎이 방랑청년’ 김재준은 웅기항에서 배를 타고 하관(下寬)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동경 역에 내렸다. 함석헌이 동경사범에 입학한 해(1924)보다 2년 늦은 해(1926) 봄이었다.

그의 주머니엔 오원오십전이 남아있었다. 당시 막노동현장의 하루 품삯이 일원이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동경 청산학원(아오야마) 신학부에 재학 중인 송창근 학형을 찾아갔고 송창근은 돌연이 연락도 없이 찾아온 동향후배 김재준을 기숙사 규칙을 어기면서 자기 방에 며칠 잠재우다가 고학생 합숙소 ‘근우관’에 입소시키는 친절을 베풀었다. 장공은 ‘춥고 배고픈’ 고학을 하면서 당시 자유로운 신학학풍이 넘치는 동경 청산학원 신학교에 ‘청강생’으로 시작해서 졸업생 명단에 끼어든 특별 학생대우를 받았다. 당시 청산학원대학엔 영문과 고등사범과 신학과 등이 있었는데, 신학과 교수들이 ‘늦깎이 조선청년’의 학구열과 진지한 성실성을 4년간 눈여겨 보아온 터라 교수들의 합의된 결정이었으리라. 김재준의 이 무렵 회고록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속말을 듣는다. 한 가지는 가난한 노동자의 임금에 관한 속말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교육에 대한 비전의 속말이다.

나는 다른 학생 하나와 짝하여 이 일을(건축공사장 지하실 흙 실어 내는 일) 한다고 갔다.…저녁 때 돈 일원 갖고 숙소에 왔다. 녹초가 됐다. 돈 일원이 핏값이었다. 나는 노동꾼의 임금은 영락없이 핏값이라고 느끼었다. 노임(勞賃)을 떼먹는 놈은 ‘식인귀’라고 단정했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슨 일 시킬 때 내가 노임 깎는 법은 없다. 달라는 대로 주고도 더 줘야 덜 미안하다.13)

13) 김재준,「김재준 전집」제13권, 80쪽.

장공의 제자들과 후배들이 1970년대에 민중신학을 시작하기 전, 장공은 1920년대 중반에 특히 노동하는 ‘민중’의 고달픔과 애환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장공은 청산학원 신학부엘 들어갔지만,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 때만 해도 목사가 되거나 장차 한국의 신학교 교수나 학장이 되어 신학교를 해 볼 생각은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방학 땐 철학이나 신학서적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등 문학책을 더 많이 읽었고, 관념적으로 정리되고 추상화된 인간론보다는 소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마 접촉하는 생동하는 인간실재에 더 관심이 있었다. 청년 김재준은 자신의 평생일감을 교육에서 찾고 있었다.

신학에 들어온 것도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이고 목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교회에 충성할 용의도 없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 그래도 교육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게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후진에게 뭔가 ‘혼’을 넣어줄 접촉점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유치원부터 소, 중·고, 대학까지의 교육왕국을 세워 본다고 맘 먹었다.14)

14) 위와 같은 책, 84쪽.

장공은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신천옹은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라고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 삶에 신비하게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손길을 고백했다. 함석헌이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듯이 김재준은, 청산학원신학부 졸업 후 미국유학 3년 동안 더 공부하고 귀국하여, 평양의 숭인상업중학교(5년제)에 교사겸 교목으로 부임했다. 조만식 장로 등이 이사였고, 조만식 선생의 제자 김항복 씨가 교장이었다. 김재준으로서도 첫 직장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함경도 창꼴에 남겨놓고 10여 년간 유랑한 가장으로서 김재준은 오랜만에 안정된 ‘가정 맛’을 부인과 자녀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정된 가족 울타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깐이어서 숭인중학교 교사 3년 만에, 김재준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지 말아달라는 것과 신사참배 때 행동을 같이 해달라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 학교장의 난처한 호소를 듣고 교사직 사표를 낸다.15) 그것은 함석헌이 오산학교 교사직 10년을 자진사퇴한 이유와 흡사하다.16) 조선역사를 조선어로 가르치지 못하게 하며, 졸업식에서는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하도록 조선총독부의 교육지침이 교사 함석헌의 양심을 옥죄였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숭인중학교에 사표를 내고 ‘순교자 열전’의 번역에 집중하면서 내적 위로와 용기를 얻고 있을 때, 캐나다 선교부가 개설한 간도 용정중학교 교사겸 교목으로 부임해달라는 청빙을 받고 그곳에서 몇 년간 장차 한국사회에서 한 몫을 담당할 ‘작은 사자새끼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한다. 이때 학생들로서 강원용, 김영규, 전은진, 안병무, 김기주, 신영희 등등, 그리고 캐나다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을 지낸 이상철이 있었다.

15) 위와 같은 책, 146쪽. 16) 이치석, “마지막 역사시간”,「씨 함석헌 평전」, 198-205쪽 참조.

장공과 신천옹이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에 본격적인 참여를 시작하고 삶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종교와 철학사상을 펼치려 활동하던 시기는 1960년 4.19 이후부터이다. 물론, 함석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장준하의「사상계」잡지를 통하여 “한국 기독교는 무얼 하고 있는가?”(1956) 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를 발표하면서 현실 속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게 보아서 두 사람이 제도적 학교 교사로서 활동을 접고 난 이후, 특별히 1940-1960년도 까지는 ‘하늘이 그들을 크게 쓰시려고’ 아주 심한 대내외적 고난의 시련을 겪게 하신 기간이다. 두 사람은 학문에서 배운 지식을 현실 속에서 새김질 하면서 ‘배워 들은 지식’을 ‘주체적 확신과 양식’으로서 변화시켜간 시기이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중요사건을 예로 든다면, 이 기간 20년(1940-1960) 동안 함석헌은「성서조선」잡지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1942) ‘인생대학’을 경험하면서 불경이나 노장 사상을 깊게 연구하게 되어 기독교신앙 지평을 넓히고, 해방정국에서는 ‘신의주 학생사건’ 주범으로 지목되어 소련군에 의해 50일간 신의주 형무소에 투옥하게 되고(1945), 남하를 결단하여 실행하고(1947), 민족상잔의 한국전쟁(1950)을 겪으면서 종교관과 국가관과 문명사관에 획기적 변화를 겪게 되고, ‘흰손’(1952), ‘대선언’(1953)과 같은 장편 극시를 발표함으로서 정통기독교는 물론이요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신앙 마저 넘어서서 스스로 ‘이단자’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다석에게서 ‘씨알’이라는 어휘의 중요성을 전수받고(1956) 주체적인 씨사상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에 장공의 삶은 겉으로 보면 조선신학교 설립사업에 부름을 받고(1940), 빈곤과 일제감시 속에서 조선신학교를 지켜가며(1940-1944), 해방정국에서 최초로 “기독교의 건국이념” 강연을 하고(1945), 교권주의자들에게 시달리면서 장로교총회의 ‘이단재판’ 피고석에 불림당하며(1951-1953), 교권에 의해 파문당하고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창립된 기독교장로회 창립에 관여하며(1953), 신신학자요 인본주의 신학자요 이단신학자라는 모함과 비판의 총탄세례를 받으면서 한국 신학계에 ‘성서의 비판적 학문연구와 신학연구에서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데 진력하였다(1953-1959). 그가 제도적 신학교육기관의 개혁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를 개혁하고, 교회의 개혁을 통해서 세상을 개혁하려는 웅대한 꿈을 갖고 기초적 준비를 갖추자마자, 5.16군사혁명위원회는 60세 나이 이상 된 자들의 퇴임규정을 만들어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에서 장공을 내어 쫓아 야인이 되게 했다(1961). 그 결과는 도리어 대학과 기독교계 울타리를 넘어 그가 평생 이념으로 추구하던 ‘세상 속에 말씀의 성육화’를 실천에 옮기는 역사변혁에 참여하는 투사가 되게 했다.

고난의 풀무불에 달구어진 장공과 신천옹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조감해 볼 때, 구체적 삶의 자리가 달랐으나 그들을 추동하던 삶의 열정과 목적지향성에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성경적 신앙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예언자적 신앙정신이다. 예언자적 정신은 반드시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온전한 예언자적 정신이다. 첫째,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서 예배할 것이며 결코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숭배 하는 일체행위를 금한다. 둘째,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긍휼하심(자비, 사랑)과 공의로우심(정의, 공공성)으로 보며,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눌린 자들’의 인간다움의 복권을 위해 자유와 해방의 사회윤리적 책임을 사회구성원 모두의 공동책임으로서 강조한다.

첫째 공통점인 ‘우상타파정신’이라는 관점에서 장공과 신천옹은 일치한다.

장공은 제도적 기독교 교단을 떠나지 않고 일했으나, 그는 교권주의와 신학적 도그마로 압축된 기독교의 우상숭배적 행위에 대하여 철저하게 비판하고 수난을 당했다. 장공의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자유를 한국교계에 확보하기 위해 ‘이단적 신신학자’라는 종교파문을 받았다. 김재준은 총회나 노회 등 교회의 조직적 협의체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행하는 권력기관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사무처리와 친교를 위한 것’이라고 보았고, 교권행사나 교리쟁론이나 교리재판기능이 주된 임무처럼 될 땐 언제나 ‘은혜’를 희생시켰고 ‘진리’ 자체도 상실했다고 경고한다.17)

17) 김재준,「김재준 전집」제2권, 42쪽; 김경재, “장공의 교회론 무엇이 새로운가?”, 숨밭아카이브(www.soombat.org), 논문번호. A155 참고.

교권주의에 대한 비판은 장공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줄여서 말하면, 기독교신앙이란 특히 개신교정신이란 “하나님만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다”는 것이며, 그때만이 역설적이게 인간이 그 어떤 권위나 제도 기구에 예속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거룩하다는 성자(聖字) 돌림의 실재들 성경(聖經),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직자(聖職者), 성신학(聖神學), 성전(聖戰), 성민(聖民), 성가(聖家) 등은 그 자체를 우상화하려는 경향 속에 항상 빠진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성경이나 성전 속에 유폐시키고, 특정 신학체계와 특정 정치이념을 절대화 하여 믿는 형제를 단죄하며, 거룩한 전쟁 혹은 거룩한 국가라는 명분으로 인간 살육을 정당시하며, 거룩한 성전을 짓고 성회를 단장하기 위하여 맘몬신과 야합을 관대하게 용인하기도 한다. 장공의 생애 후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투쟁도 그 깊은 동기에서 보면, 특정인물이나 정권을 절대시하는 권력 및 특정 인간의 우상화에 대한 신앙적 저항의 동기가 더 강한 것이다.

신천옹에게 있어서 우상타파정신은 장공처럼 철저하였다. 신천옹의 비판적 표현력은 더 날카롭고 신랄한 것이다. 신천옹의 우상타파운동은 결국 국가주의 권력비판과 시대에 뒤떨어진 채 과거의 영광에 도취해 있는 교회주의의 양심마비와 그 허위의식에 집중된다. 신천옹은 1930년대 이후부터 줄곧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목소리를 강화해 왔다. 1961년에『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고 개정판 서문에서 자신의 생각이 세 가지 점에서 특히 바뀌었음을 말하는데, 그 중 하나가 문명사적으로 세계가 이미 한 울타리 한 생명체계로 돌입한 이상 전통적인 “국가주의를 내쫒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18) 여기에서 말하는 ‘국가주의’란 정부형태가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 대의민주제, 입헌민주제 등등 어떤 형식적 국가구성원리를 채택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국가’라는 절대적 권력이 인간의 양심, 자유, 평화, 교류, 협력을 제한하고 명령하며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정치권력’의 우상화를 말한다.19)

18) 함석헌,「뜻으로 본 한국 역사」(1983), 18쪽. 19) 김경재, “함석헌의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서울대평화통일연구원주관심포지엄, 2011), 숨밭아카이브, 논문번호. A193.

기성의 제도적 종교가 우상화 되어 있는 것에 대한 신천옹의 비판은 신랄하다. 지난 2500여 년 동안 인류문명을 이끌어온 종교들이 위대하지만 ‘진리자체’이신 하나님은 더 위대하기 때문에, 기성종교의 교리, 제도, 성전, 경전, 성직제도, 의례 등등을 절대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나 다름없고, 종교전당을 높이 크게 짓는 것은 누에고치의 애벌레처럼 뽕잎을 먹고 자기 궁궐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 ‘낡아가는 종교의 증상’으로서 제 감옥과 제 묘혈을 파는 행위와 같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20) 종교는 온갖 귀중한 보물을 간직한 궁궐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새순이 돋아나는 거목과 같은 것이며, 하루하루 새롭게 새롭게 영원자 앞에 서야 하는 행위요 자세인 것이다. 특히, 현대 기독교가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수량적 사고에 빠진 것은 종교와 문화의 야합 중에서도 ‘상피(相避)붙는 야합’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21)

20) 함석헌,「함석헌 전집」제3권, 46쪽, 220-221쪽. 함석헌의 종교시 ‘대선언’과 ‘흰손’ 참조. 21) 위와 같은 책, 219쪽.

장공과 신천옹의 예언자적 우상타파정신은, 정치권력이 경제권력과 야합하여 국제질서나 한 국가사회 안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멸시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기본철학으로 하는 소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풍미했던 식민제국주의적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 가치관에 대하여 철저히 비판하며 맞선 것이다. 다윈의 생물학적 ‘자연선택법칙’ 혹은 생물진화법칙을 인간사회와 국제질서에 적용시킨 생물학적 사회진화론은, 인간존재를 순전히 생물학적 존재로서만 보고 생존경쟁을 통해 적자생존하는 법칙을 사회나 국가발전에 적용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제한적 경쟁,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기득권과 귀족주의를 옹호하는 정치적 보수주의, 인종차별주의, 정치패권주의, 부국강병주의, 식민지배 등이 정당화되고 찬양 고무된다.

‘사회진화론’의 근본철학적 오류는 ‘진화’를 촉매하고 촉진하는 동기와 승화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에만 있다고 한쪽 측면만을 보는 점이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자연 안에 생태적 공생질서, 상부상조 상생원리, 유기체적 ‘온 생명 시스템’이 엄존함을 보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생물학적 인간론에만 치우쳐서, 공맹의 ‘인의지심’(仁義之心)이나 붓다의 ‘연기론적 동체대비심’(緣起論的 同體大悲心)이나, 예수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심정’을 감상적 도덕주의자들의 가치판단 혹은 잘못 가르친 관념적 인간론으로서 비난대상이 되고 만다.

포장지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추종하는 한국의 보수 군부 정치세력에 대하여 장공과 신천옹의 사회참여적 행동은 단호하게 ‘아니!’ (Nein!)라는 신앙양심적 저항이요 증언이었다. 물질적 풍요와 부국강병을 가져오기 위해서 약자의 희생이 당연시 되고 혹은 어쩔 수 없이 요청된다는 경제발전 지상주의와 군비강화 남북대결구조를 당연시 했다. 21세기 세계를 뒤덮고 있는 ‘신자유주의’란 것도 그 혈통의 뿌리 속에는 19-20세기의 ‘사회진화론 철학’의 DNA가 다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사회도 양극화가 심화되고 기후붕괴와 정치붕괴와 교육붕괴와 기독교신뢰붕괴가 일어난 것이다.

장공과 신천옹은 맹자철학을 깊이 체득한 동아시아의 지성인으로서 맹자의 ‘인의철학’(仁義哲學)을 기독교 예언자들의 야훼신앙의 핵심과 연결시켜 지평융합시켰다. 하나님의 속성은 ‘긍휼이 여기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요청 역시 ‘인애(仁愛)와 공의(公義)’를 개인과 사회공동체 삶 속에 관철시키는 문제로 보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역사현실’에 신실하며 책임적이려고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 역사현실에 책임적인 참여가 지성인의 도리라고 생각한 점에서 장공과 신천옹은 견해를 같이한다.

‘불일불이란’ 인식론에서 이분법적적 사고는 물론이요, 심지어 단순한 변증법적 사유단계마저 넘어서는 매우 역설적인 실재관이자 인식론적 태도를 표현하려는 불교적 표현어구다. 예를 들면 구원사(聖)와 세속사(俗), 진여계(眞如界)와 생멸계(生滅界), 하늘나라와 세상나라, 영원과 시간, 비움과 충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총괄표현으로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불일불이적 관계’ 예들이다. ‘불일불이론’은 분별지(分別智)상태에서의 서로대립적인 두 가지 실재가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가로막고 차단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비췬다”(雙遮雙照)는 것을 확철(確徹)하는 선불교적 진리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장공과 신천옹은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시하거나 곧바로 일치시키지 않는다. 일단 ‘구별’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그리스도교적 사유’에 충실한 분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은 그 양자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은 ‘쌍차쌍조’관계라고 보는 셈이다. 칼빈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지식은 인간지식과 상호관계적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야 하고 그 반대도 그렇다. 하나님의 아픔과 민중의 아픔은 ‘불일불이론적 관계’이다. 민중의 고난을 외면한 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예배는 가식이고 자기기만이며 신성모독이다. 그래서, 그 근원적 두 범주실재가 만나고 함께 이뤄가는 고난의 ‘역사현실’ 혹은 ‘생명현실’을 절대로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장공과 신천옹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장공과 신천옹의 삶과 사상 속에서 인간의 삶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찾는 존재인 한, 특히 종교나 문화의 정신적 활동영역에서는 양(量)보다는 질(質)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갈릴리 민중 속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하나님의 임재를 예민하게 감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씨의 소리」복간호에 기고한 장공의 글에서 양보다 질의 강조, 그리고 ‘씨의 설음’이라는 글 속에서 신천옹의 ‘하나님과 민중’의 불일불이론적 사고(不一不二論的 思考)의 핵심을 음미할 수 있다.

무릇 정신적인 것은 량(量)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質)에 있는 것이다. 그 바탕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하고 깨끗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천배 만배의 열매가 기대된다. 그 천이라 만이라 하는 것도 량산(量産)이라는 각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량(量)으로서의 부피가 아니라 질(質)로서의 부피를 말함이다.「씨알」의 장래에 영광이 있기를 빈다.22)

22) 김재준, “‘씨알’은 죽지 않는다”, 「씨의 소리」복간에 부쳐, 복간호, 1971. 8월호.

씨로 감은 결국 하나님으로 감이다. 바다가 하늘 물의 내려온 것이듯이, 그리하여 바다의 길은 올라가는데 있듯이, 씨은 하늘말씀의 내려온 것이요 씨의 운동은 곧 하늘로 올라가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언제나 바다의 품에 깃들여 있듯이 하늘의 뜻은 언제나 씨의 가슴에 내려와 있다.…씨을 받듦이 하늘나라 섬김이요, 씨을 노래함이 하나님을 찬양함이다.23)

23) 함석헌, “씨의 설움”,「함석헌 전집」제4권, 67쪽.

[3] 두 사상가에서 미묘한 편차가 지닌 특징과 그 의미

위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장공과 신천옹, 두 거목의 삶속에 나타난 공통지향성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공통지향성 못지않게 특징과 차이가 있음도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특징과 차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이거나 우열의 문제가 아니고, 삶 속에 다양성과 새로움을 선물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바르게 향유함이다. 아래에서 세 가지 소주제를 가지고 두 선각자의 특징과 차이를 좀 더 부연해서 살펴본다.

(1)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의 관계

장공과 신천옹의 사유세계에서 이성과 신앙 그리고 과학과 종교가 상호배타적이거나 갈등구조 속에 있지 않다고 본 점에서 같은 입장을 취한다. 이성과 신앙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고, 과학과 종교가 모두 진리를 밝혀 참되고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라는 점에서, 비록 양자의 연구대상이 다르고 연구방법이 다를지라도 충돌할 필요가 없으며, 상호경청하고 협동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전제아래서, 깊이 보면 신천옹과 장공의 입장엔 약간의 차이와 특징이 나타난다. 신천옹은 장공보다 인간의 이성의 기능과 과학의 역할에 훨씬 더 적극적인 평가와 기대를 갖는다. 신천옹은 세계주의와 과학주의에 더 많은 영향을 미래문명이 받는다는 것을 직시한다. 이성보다 더 높은 초월차원에서부터 계시가 오지만, 그 계시가 인간의 마음에 받아지고 의미 있는 지혜와 영감으로서 가치를 가지려면 이성이라는 기능을 통과해야만 한다.24) 그렇지 않으면 영감 받고 성령 받았다는 황홀경은 신들림의 빙의 현상, 광신적 열광주의, 감상적 집단최면에 빠진다. 과학과 종교가 인류역사와 생명현상 속에서 다투는 문제에서 신천옹은 과학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성과 신앙 혹은 과학과 종교관계성에 대한 신천옹의 생각을 아래 인용문에서 압축하여 볼 수 있다.

24) 함석헌, “새 시대의 종교”,「함석헌 전집」제3권, 226쪽,

이성적이라함은 감정을 무시하잔 말도 아니요, 영적인 면을 몰라서 하는 것도 아니다. 감정이 중요한 일을 하는고로 그것을 이성의 빛으로 비추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요, 영계(靈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일은 감정으로 취해 감정의 고조된 것을 영으로 속단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아니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이성(理性)은 이(理)라는 글자가 표시하는 대로 개개의 현상을 초월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인격적 힘이 발전하는 것은 이것으로 될 것이다.…이성이 갈 곳까지 간 연후에 신앙의 세계가 열린다.…지(知)는 신(信)이 아니지만, 신(信)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지(知)임을 알게 된다. 종교는 이성을 반대할 것이 아니요, 도리어 완전히 자라도록 자유의 분야를 주어야 한다.25)

25) 함석헌, “새 시대의 종교”,「함석헌 전집」제3권, 231-232쪽,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함석헌의 종교이해가 소위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완성자라고 평가하는 임마누엘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추종하는 입장이 아님은 분명하다. 함석헌은 영계나 영적실재나 인간의 영성이나 계시적 체험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초극된 이성주의자이다. 인간의 인격성을 이성적 능력에서 본다. 영성도 이성 없이는 소박한 감성차원에 떨어진다고 본다. 그러한 신천옹의 새로운 종교체험의 경지 혹은 새종교의 특징을 “환히 뚫려 비취는 종교”26)라고 그는 불렀다. 이것은 영과 육, 안과 밖, 지성과 영성, 과학과 종교가 서로 분열대립 되거나 막힘과 갈등관계에 있지 않고 통전(通全), 융화(融和), 상보(相補)관계에 들어간 경지를 말한다.

26) 위와 같은 책, 234-235쪽.

과학과 종교의 상호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은 장공에 있어서도 신천옹과 거의 같다. 특히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에서 지성을 무시하고 감정적 흥분상태만을 강조한 경향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으로 경고했다. “요새 우리교회의 일부에서는 성신의 역사라면 으레 ‘감정적’ 흥분만을 예상하고 투철한 지성적 활동은 성신과는 무관한 것같이 여기는 일이 많다.…지식이 수반되지 못한 감정이란 가장 위험한 것이다. 지식의 냉철함보다도 감정의 열광은 더욱 위험하고 저열하다”27)고 종교에 있어서 지성의 중요성을 신천옹처럼 강조한다.

27) 김재준, “성신과 신비경험의 제상”,「김재준 전집」제4권, 204-205쪽.

장공은 ‘진리’ 혹은 ‘실재’에 대한 진리담론엔 차원을 달리하는 세 가지 차원이 있음을 강조한다. 물질세계를 탐구하는 감각적 지식 및 실험에 기초한 자연과학 영역, 논리적 수학적 명증성을 기초로 하는 이성 철학적 형이상학 영역,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직관체험을 통한 영적인 진리영역이 그것이다. 현대 과학주의가 물질론적 환원주의에 경도하여 과학이 말할 수 있는 실재영역의 발언범위를 넘어서, 형이상학적 담론과 종교적 담론의 진리의 타당성까지 판단하려는 월권적 ‘과학지성’을 향하여 보다 겸허할 것을 충고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체’와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자연과학적 법칙과 원리에 기초하여 그 가능성이나 진실성을 판단하려는 것은 잘못임을 명백히 한다.28) 그러므로, 장공은 신천옹에 비하여 보다 ‘성서적 실재론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장공의 입장과 비교할 때, 신천옹은 그리스도의 ‘부활체’나 ‘역사의 종말론적 성취’에 관하여 ‘여기·오늘’에 갖는 실존적 의미를 강조한다.

28) 김재준,「김재준 전집」제1권, 75쪽; 김경재, 숨밭아카이브, 논문번호. A191,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에서 부활체와 사후생 이해”.

(2) 종교 다원사회에서 기독교의 자기정체성 이해에 대하여

장공과 신천옹이 한국의 이웃종교들에 대하여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두 분이 보편적 종교인으로서 평생을 살고 간 사람이 아니고 진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았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삶과 사상에서 뚜렷이 드러낸 분이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타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를 가지면서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고 갔을 때, 타종교에 대한 개방성(openness)과 자신의 종교에 성실성(commitment)을 동시적으로 살려나가는 태도와 입장에서 두 분은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먼저 함석헌의 삶에서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세계종교 중 유일한 계시종교가 아니고 참진리를 드러내는 위대한 종교들 중 하나라는 인식은 옥중생활(1942-1943) 중 불경과 동양고전을 읽고, 한국동란(1950)을 거치면서 분명해졌지만, 공개적으로 뚜렷하게 말한 것은「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책명을 바꾸면서 쓴 서문에서 나타난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 기독교가 유일의 참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 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29)

29) 함석헌, “서문 ‘넷째 판에 부치는 말’”,「함석헌 전집」제1권, 18쪽.

위 인용문에서 “모든 종교는”라는 말은 보편적 세계 6대 종교들(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도교)은 물론이요, 민족종교이면서 보편성을 지닌 다른 종교들도 모두 포함한 말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그 알짬에서 하나이며 그 참에 있어서 다름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왜 종교의 형식이 다르게 나타나는가? 두 가지 중요한 이유를 말한다. 첫째는 ‘진리’를 체험하고 표현하는 민족이 다르고 역사적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해석학적 이해의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수용자의 영성특징이 문화와 역사경험’에 따라 다름으로 ‘진리’가 다양하게 언표되고 상징된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들의 알짬되는 참을 말한다면 다름이 없지만, ‘그 밝히는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평생 그리스도인임을 자기 정체성으로서 고백하고 산 것은 결국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개화기에 평북지방에 살던 한 민중으로서 가정과 마을이 기독교를 일찍부터 받아드려 그 문화와 종교분위기에 일찍 접촉한 ‘문화 역사적 우연성’이다. 둘째는 그가 경험한 삶의 모순과 문제가 무수하게 많지만, 그의 실존적 문제를 풀어주는 진리의 투명성과 온전성의 ‘밝히는 정도’ 측면에서 ‘환하게 뚫려 비취는 진리의 말씀’을 예수의 생애와 말씀 속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함석헌은 종교다원론의 입장을 분명히 취하되 개인신앙은 실존이 문제제기하는 ‘궁극적 관심’의 문제성격을 보다 명료하게 해명해 주는 종교를 종교적 자기정체성의 근본으로 결단하게 된다는 입장이다. ‘궁극적 관심’의 문제성격이 신천옹과 다른 법정스님은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이 불교도가 아니고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자기정체성을 고백할 때, 그의 궁극적 관심의 문제성격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할 수 없지만, 불교보다도 그리스도교가 역사의 의미, 인격적 책임성, 사회참여적 관심, 철학적 이성종교를 넘어서는 영의 종교로서 특성, 고난의 현실성을 무명(無明)의 해탈로서만 아니라 의지의 회개를 통하여 ‘돌파승화’하려는 ‘십자가 못 박힘의 영성’(spirituality of crucifixtion)의 열정(compassion) 등이라고 열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공의 이웃종교에 대한 입장은 다원론과 성취론의 경계선상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그 점에 있어서 장공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는 신천옹의 그것과 호흡을 같이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장공의 ‘비기독교적 종교에 대한 이해’(1965)라는 중요한 논문에서 그의 기본입장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동양고전에도 ‘天生萬民, 作之君, 作之師’라 하여 어진임금 고명한 스승들이 다 하늘의 명을 받들어 만민을 교도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이라 했다. 우리는 타종교가 악마의 소산이라는 것보다도 자유하시는 성령의 역사(役事)에 의한 하나님의 단편적인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받는 인간의 정황(情況)이 어스름 달빛처럼 희미한데서 그 나타남이 흐리고 또 단편적인 것으로 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함을 이루었다.30)

30) 김재준, “비기독교적 종교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제7권, 342쪽,

위 인용문이 내포된 논문의 집필연대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끝나던 해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당시 한국 보수적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일반적 입장은 ‘배타적 태도’ 입장보다 훨씬 부정적 생각이어서 한국 전통종교 유산을 ‘비진리’일 뿐 아니라 ‘우상종교, 마귀종교’라고 폄훼하는 몰지식한 상태였음을 감안해야 할 때, 장공의 견해는 신학자로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장공의 타종교이해는 종교신학에서 흔히 분류하는 다원론과 성취론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타종교에 대하여 포월론(包越論)의 입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이웃종교의 훌륭한 점을 포용하면서도, 복음진리는 그것들을 초월하는 차원이 있음을 고백하는 입장이다. 장공의 포월론적 입장은 세계의 종교들이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단편적인 말씀”의 결실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힌두교, 이슬람교, 유교, 심지어 철학적 종교인 불교마저도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役事)’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계시를 인정함과 동시에 종교란 본질적으로 ‘인간이 만든 작위적 산물’이 아니라 ‘초월적 진리와의 관계적 산물’이라고 보는 입장을 나타낸다. 종교간의 참을 드러내는 정도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신천옹과 생각을 같이 한다.

그러나, 신천옹과 차이점은 장공은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교리적 논쟁이나 학문적 비교연구를 통해 논증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는 고백적으로 세계종교사에서 드러난 진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삶과 죽음과 부활의 실재성’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고백하는 ‘성취설’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공은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려는 선교적 고자세(高姿勢)를 서구 문화제국주의적 우월의식이라고 비판하고,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은 오직 겸허, 봉사, 사랑, 자기희생 등의 ‘생활신앙’을 통해서 삶으로서 실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31)

31) 위와 같은 책, 345쪽.

(3) 비폭력적 저항의 윤리, 개체 씨의 내면적 혁명, 그리고 공동체의 사회변혁에 대하여

장공과 신천옹은, 그들의 사유지평이 넓고 깊고 높아서 흔히 전문지식인들이 빠지는 일방적 경향성 혹은 편파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실재와 생명현상을 이해할 때에도, 폴 틸리히가 분류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세 가지 ‘양극성적 통합’(兩極性的 統合), 즉 인간존재방식의 ‘개체성과 사회적 참여성’, 생명활동에서 ‘역동성과 형태성’, 한계상황에서 ‘자유와 운명적 제약성’을 동시에 살려내는 사유구조와 삶의 행동을 살아왔다.32) 그야말로 군자가 이루기 어렵다는 참된 ‘중도’(中道)와 불일불이(不一不二)적 실재관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32)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3. pp.30-99(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장공과 신천옹의 특징을 신중하고 면밀히 살펴볼 때 두 사람 사이엔 차이가 있다. 몇 가지 사회적 지도자로서, 정신적 지도자로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차이의 강조점이다.

첫째, 신천옹 함석헌은 인간의 개인적 삶과 역사적 공동체 삶의 양면성 관계를 ‘나무’와 ‘숲’의 관계성 유비로 말했다. “씨를 매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33) 민족이라는 더 큰 생명의 모태 없이는 예수나 석가라는 위대한 인물도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함석헌의 강조점은 “씨이 안으로 영글어지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반면, 장공은 개인의 인간다움의 자기실현은 공동체가 자유, 정의, 사랑, 질서 등 건강한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천옹은 퀘이커신앙의 ‘내면의 빛’을 강조하고, 장공은 성령안에서 거듭난 인간들이 세상 속에 성육화 하여 ‘역사전체의 질적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천옹에게 있어서 교회는 최소한의 형태조직을 선호하여 무교회신앙공동체나 퀘이커신앙공동체에 몸을 담았다. 그에 비하여, 장공은 종교집단체의 타락과 우상화를 끊임없이 탈바꿈하며 개혁해 가면서 제도적 교회형태와 교단의 형성에 몸을 담았다.

33) 함석헌,「뜻으로 본 한국역사」 (1983), 28쪽.

둘째, 신천옹은 역사의 발전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을 철저히 비신화하여 현재 역사가 ‘나선형적인 무한한 상승’을 무한히 계속함을 강조하였다. 하나님도 영원히 새로움으로 더해 가시는 ‘창조적 과정적 하나님’이시고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는 역사완성고백은 실존적 의미로서만 받아드린다.34) 신천옹에게 있어서 역사는 앞으로 위로 층계를 올라가는 영원한 운동이다. 장공에게 있어서는 인간존재의 원점은 창조주이시고, 인간구원의 원점은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고, 역사의 원점이자 종국점은 ‘하나님의 나라’ 곧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이다.35)

34) 위와 같은 책, 43, 47, 57-58쪽. 35) 김재준, “역사의 원점을 찾아서”,「김재준 전집」제18권, 99-101쪽,

신천옹과 장공이 동양고전에 친숙했고, 특히 그리스도교적 예언자사상과 맹자의 정치철학을 그들의 삶 속에서 통전했다는 점을 이미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신천옹이 동양고전 중에서 노장철학의 특징 즉 일체의 인위적 체계와 규범과 제약을 부정하고 개인의 무위자연적 창의성과 예술성과 자유를 확보하려는 갈망이 장공보다 더 강했다는 점에서부터 연유한다. 물론 신천옹은 노자나 장자가 도달한 춘추전국시대의 ‘개인적인 자유와 해방’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그리스도교 신앙이 공동체와 역사를 중시하도록 그를 붙들었고, 불교 화엄사상의 ‘일즉다, 다즉일’의 연기적 실재관이 개인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전체를 항상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천옹의 정신세계는 장공의 그것과 비교할 때 보다 더 노장철학적이었고 개체가 지닌 인격적 내면세계에 대한 ‘절대적 무간섭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특징을 지닌다.36)

36) 노장사상이 발생하고 주창되었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적 삶의 자리에서, 노장철학의 위대성과 동시에 한계성을 밝힌 송영배 교수의 글을 참조하였다. 송영배,「제자백가의 사상」제9장과 제10장(현음사, 1994), 233-359쪽.

장공은 그의 아호가 상징하듯 정신적 자유인으로서 노자의 ‘도충이용지혹불영’(道沖而用之或不盈)의 진리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예술적 자유혼을 가진 이였지만, 그의 정신적 뿌리는 맹자의 인의철학과 예언자들의 구원사 신앙과 예수의 성육신정신 토양 속에 더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노장철학적인 몰역사적, 탈공동체적, 개인적 안심입명의 경향성에 경도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러한 노장철학의 장점인 탈속적이고도 예술적 자유혼은 장공의 역사참여 신학으로 하여금 서구의 그것처럼 역사주의 폭력성과 과잉의욕적 성장주의나 실적주의 유혹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안전핀과 방파제 역할을 했다. 요점을 말하자면, 장공의 ‘소요유’(逍遙遊)는 대자연에로 귀향함으로서가 아니라 세속적 역사 한 복판에서의 ‘소요유’를 누렸다는 말이며, 역사전체와 범우주적 피조세계의 구원을 앙망했다.

셋째, 신천옹과 장공의 특징은 폭력적 세상 질서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 및 투쟁’에서의 묘한 입장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인이 폭력사용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 특히 정치이념을 정당시하면서 국가가 인간을 ‘합법적 살상행위’에로 내몰아가는 전쟁의 폭력성과 독재정치가의 정치폭력 정당성 주장을 절대 반대하였다. 그런데, 함석헌은 예수와 마하트마 간디와 죠지 폭스 등의 영향을 받아 보다 철저한 ‘비폭력적 저항과 투쟁’을 강조한다. 이것은 철저한 종교적 신념투쟁이다. 자기의 죽음마저 각오하는 진리투쟁이다. 소극적인 폭력의 회피가 아니다.

장공에 있어서 원론적으로는 함석헌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보다 라인홀드 니버나 본 훼퍼의 ‘크리스천 리얼리즘 윤리의 상황적 문제’로서 본다. 하나님 앞에서, 산상수훈의 계명 앞에서 ‘정의롭거나 떳떳한 폭력’이란 있을 수 없지만, 보다 더 큰 생명의 희생을 막고 악의 세기말적 횡포를 저지하기 위해서 ‘대응적 폭력’을 사용해야 할 경우를 열어 놓는다.

[4] 나가는 말: 장공과 신천옹의 삶과 사상이 오늘에 주는 의미

1970년대는 한국 정치사회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본래 군사혁명 공약을 어긴 것은 물론이요, 박정희 씨라는 특정인물을 계속 대통령으로 연임시키고 그와 결탁한 보수정치인들과 정치군부세력이 영구집권 욕망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근간에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언론에는 족쇄와 재갈이 물리었고, 양심적 언론인과 지식인들과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투옥되거나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런 암흑의 시대에 1970년 4월, 4.19정신을 이어가면서 두 개의 개인잡지가 세상에 출현했으니 그것이 함석헌의「씨의 소리」와 김재준의「제3일」월간지였다.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달에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양심과 언론의 자유, 인권의 존엄성, 약육강식이 아닌 상생적 삶, 불의에 대한 저항의 권리와 책임성,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강조하는 공통적 비전이 돋보였다. 잡지의 제호(題號) 자체를 두 분이 각각 한글 붓글씨로 써낸 것도 공통이었다. 두 분은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으로 추대(1973)되어 재야민주세력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활동하였다. 끝내 ‘3선개헌’이 불법적으로 강행 통과되고 재야지도부가 거의 가택연금 상태에 이르게 되자, 장공은 민주화운동을 세계적 교회기구를 통하여 전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캐나다로 출국하여 10여 년간 그곳에서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장공과 신천옹은 1987년 1월 19일에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37)을 발표하여 나라의 ‘한국의 늙은이들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온 마음으로 국민과 사회 대표적 집단에게 탄원의 글을 발표했다. 그 글은 장공의 서거(1987. 1. 27) 직전 마지막 ‘유언’이 되었고, 신천옹도 생애말년의 개인투병 생활로 들어가게 되어 2년 후에 타계(1989. 2. 4)했으니 그 분에게도 민족에게 주는 마지막 말이 되었다. 이 마지막 유언의 글은 오늘날 읽어도 역사의 방향을 지시하는 살아 있는 글이다. 그 마지막 글에서 강조하는 ‘탄원의 글’은 정부당국자들에게, 학생들에게, 야당지도자들에게, 군인들에게, 근로자와 기업주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씨)들에게 주는 간곡한 당부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글의 핵심 정신과 요지는 다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37) 원문 전체내용은 <장공기업사업회 회보> 제12호. 18-19쪽 참조.

첫째, 현재 인류역사는 ‘힘의 철학’을 믿는 ‘낡아빠진 대국가주의 시대’와 강압통치 시대가 아니므로, 소통을 무시하는 상명하달식의 군인정치나 독재정치를 완전히 청산하고 주권재민의 민주화를 완성해야 한다. 인간존엄과 양심을 어긴 폭력 고문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둘째, 민족의 경제적 삶은 기업가와 경영전문가와 근로자들의 공생 공영의 정신에서 이뤄가야 하며 기업가 개인소유나 경영관리집단 이익이나 근로자들의 것이 아니다. 재화생산의 소득분배도 정의롭게 이뤄져야하고 기업가들의 ‘시혜품’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며, 상생하는 사회가 되도록 겸허하고 빈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 새 시대의 주인공인 학생들, 군인들, 야당정치인들, 기업인들, 노동자들은 각각 민족공동체 나라를 이뤄가는 정당한 자기 몫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라운명의 최종 책임은 국민(씨)들의 각성에 달려있다. 국민(씨)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으로서 제임무를 다해야 한다. 자유, 정의, 질서를 가져올 궁극적 힘 가진 자는 국민뿐이다. 국민이 자신의 힘을 바로 쓰는 가의 여부에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다.

위에서 요약한 내용은 그 글이 발표된 지 25년이 지난 오늘에도, 정치적 중요한 변화의 해인 2012년 한국사회와 지구촌 시민운동에서 여전히 그 의미를 더욱 갖는다. 장공과 신천옹이 20세기 한국 기독교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출현한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요 지도자임을 부정하는 자들은 그 부정하는 입장 선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빛의 자녀들’에 속한 것이 아니요 ‘어둠의 자녀들과 어둠의 권세’에 속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의 차이와 특징에도 불구하고 두 선각자들이 오늘의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에 주는 교훈을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인류문명사회와 한국사회는 철저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사회와 지구촌 문명의 ‘하나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갔음을 깊이 인지하고,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와 문화적 인간화에 진력해야 한다. 국가권력주의 잔재,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를 정당시하는 경제이론과 정책, 사회구성원간의 대립폭력을 부추기는 분리주의자들의 독선을 경계하고, 국민들(씨과 시민들)이 나라와 역사의 최종책임자임을 스스로 자각하여 참여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프랑스 혁명의 깃발에 ‘자유, 평등, 박애’가 강조되었다면 21세기 깃발엔 ‘생명, 평화, 정의’가 쓰여 있다.

민주주의 3대 원리 중 ‘국민의 정치’가 온전히 실현되기 전에는 사이비 민주주의 사회가 전개된다는 것을 경험하였기에, 한국 사회는 시민의 정치참여를 극대화하는 민주화운동 시대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참여적 민주주의 시민운동의 본질은 민주공화국으로서의 국가의 주권과 권위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에 기초한 ‘정치민주화’와 헌법 제119조에 기초한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분배, 안정, 독과점 시장지배 권력의 남용방지, 경제활동 주체간의 공생공영을 핵심정신으로 하는 ‘경제민주화’의 실현에 있다. 이 이념의 실천을 위하여 정치경제적 법 규정으로만은 안 되고 그 철학적 당위성과 문명사적 시급성을 각성시키는 장공과 신천옹의 ‘삶의 영성철학’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 개신교 교회지도자들과 신도들의 일대 각성을 특히 촉구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향한 두 선각자의 진지한 경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낡아빠진 지난날의 교리주의, 교권주의, 교파주의, 개교회중심주의, 물량숭배적 기독교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환골탈퇴 하라는 것이다. 둘째, 개신교의 발생배경 자체가 근대 중산계층을 기본으로 했던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여 다시 갈릴리복음으로 돌아가라는 것과 근대 서구사회를 키워온 ‘자본주의적 발전 진보논리’가 예수의 원초적 가르침에 위배됨을 자각하라는 요청이다. 불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제도에서 축적한 피 묻은 재화(財貨)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정화하기 전에 함부로 거룩한 제단에 바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남발하지 말라는 예언자정신에서의 충고와 가난한 자와 억울하여 눈물 흘리는 자와 소외된 자를 시혜와 동정의 관점에서 접근하려 말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녀들로 생각하라는 당부이다.

셋째, 인류문명이 위기시대 혹은 근본적 가치관의 변화를 촉구하는 ‘역사 카이로스’에 임했음을 각성하여 문명가치론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립하라고 촉구하신다. 생태학적 영성의 함양, 과학과 종교와 예술의 화해, 종교 문화 인종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과 협동, 양이 아닌 질 중심적 가치관, 무한경쟁이 아닌 상생의 삶 철학, 그리고 보다 절제되고 검소한 라이프 스타일 추구 등을 ‘지속가능한 문명’과 종교의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강사약력]

숨밭 김경재(金敬宰) 목사 www.soombat.org 출생 전남 광주 출생(1940)

연구 한국신학대학(신학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신학석사),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문학석사), 미국 듀뷱대학교 신학원(S.T.M), 미국 클레아몬트 대학원 종교학과(박사과정), 화란 우트레흐트대학교(Utrecht Univ.)에서 학위 취득(Ph.D)

저술 「폴 틸리히 신학연구」(1987),「해석학과 종교신학」(1994),「김재준 평전」(2001),「이름없는 하느님」(2002),「아레오바고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2005),「삭개오 의 기쁨」(2011),「함석헌의 종교시 탐구」(2012)

학문활동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정년은퇴(2005), 한국 문화신학회 회장 엮임,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 원장(비상근) 엮임, 씨알사상연구원 원장(현재)

교회봉사 덕림교회(전도사), 복지교회(전도목사), 은평교회(전도목사), 은진교회(전도목사), 경동교회(협동목사), 삭개오작은교회(전도목사)

<참고서적>

김재준,「범용기」,「김재준전집」제13-16권(한신대출판부, 1992) 김재준 / 장공기념사업회편,「장공 김재준 논문 선집」(한신대출판부, 2001)
장공기념사업회 편,「장공사상연구논문집」(한신대출판부, 2001)
장공기념사업회 편,「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한신대출판부, 2006)
김경재,「김재준 평전」(삼인, 2001)
함석헌,「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전집」제1권(한길사, 1983)
함석헌,「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함석헌 전집」제4권(한길사, 1983)
노명식,「함석헌 다시 읽기」,「노명식 전집」제4권, (책과함께, 2011)
함석헌 기념사업회 엮음,「함석헌 사상을 찾아서」(삼인, 2001)
이치석,「씨알 함석헌 평전」(시대의 창, 2005)
김성수,「함석헌 평전」, 개정판(삼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