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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22회] 장공의 비평적 성서해석과 해석공동체 / 이영미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01 16:56
조회
5825

[제22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0년 5월 13일(목) 오후 5-7시

장공의 비평적 성서해석과 해석공동체

이영미 교수
(한신대학교, 구약신학)

[1] 시작하는 말

구약학자로서 장공 김재준은『성서해설』과 성서주석을 썼으며,1)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에서 구약과목을 가르쳤다.2) 한국장로교 역사에 있어서 장공은 근본주의와 문자무오설에 대한 비판과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을 강의와 논문을 통해 소개하고,3) 이를 장로교 총회가 징계함으로써 1953년 한국장로교가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로 나누어지는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4) 그리하여 기장과 한신의 비평적이고 사회참여적 신학은 장공의 축자영감설 비판과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의 적용에서 출발하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을 교과에 반영하여 가르치고 있고 학회 등의 학술적 토론 모임에서 보수적 배경의 학자들이 역사비평의 방법론에 입각한 논문을 발표하고, 진보적 학자들의 문학비평이나 최종정경비평적 성서해석을 보수적 성서읽기라고 비판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성서신학적 관점에서 김재준의 성서관과 성서해석의 방법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평가해 보는 것도 뜻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1) 김재준이 저술한 성서연구서들로는『신약성서 강해: 고린도전서』(대한기독교서회, 1949); 김재준,『성서해설』(지문각, 1963)『전집』6, 1~265;『신약주석 요한계시록』(대한기독교서회, 1969),『전집』6, 267~562 등이 있다. 2) 얼마 전 작고하신 조향록 목사(증경 총회장, 한신대학 학장)의 회고에 따르면 1940년 조선신학교에서 장공 김재준이 구약, 규나이 선생이 신약, 윤인구 원장이 이론신학(교리, 교리사) 등의 학과목을 나누어 가르쳤다. 조향록, “초기 조선신학원 시대의 장공선생님”,『장공이야기』(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97. 장공은 구약과목 이외에도 칼빈 신학과 현대 신학, 칼 바르트 신학, 기독교 윤리, 그리고 변증법적 신학 등의 폭넓은 강의를 했다고 한다. 박봉랑,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장공이야기』 40~41. 박봉랑은 장공이 “구약연구에서 예언자적 통찰을 얻었고, 조직신학의 훈련에서 전체적인 사고를, 그리고 윤리학의 훈련에서 책임적인 행동의 방향을 얻었다”고 평한다.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 42.
3) 김재준은 일본 청산학원에서는 칼 바르트의 “초원론”에 대한 논문을 썼지만 미국에서 웨스턴 신학교에서는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과 “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란 졸업 논문들을 썼다.
4) 장로회 평양신학교에서 조선신학교로 편입한 50여 명의 학생들이 김재준 박사님의 강의에 집단적인 항거운동을 일으켜 전원이 퇴학을 당했고, 다른 대부분의 재학생들이 이 항거운동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후 이단의 논의는 신학교에서 노회에서, 총회로 번져갔다.

이를 위해 아래에서는 장공의 문자무오설 비판과 구약 관련된 논문들, 그리고『성서해설』을 중심으로 장공의 성서관과 성서해석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그가 단지 성서신학의 테두리에 머물지 않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해석공동체의 현실에 응답하는 신학을 전개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장공의 ‘해석공동체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적 비평적 성서해석’은 한편으로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의 극단을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술적 관심에 머물러 지엽적인 추론에만 집착했던 역사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장공이 성서이해의 양 극단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 요인은 그의 신학이 자신의 해석공동체-한국교회와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공의 현실참여적 비평적 성서해석은 하나님의 영감을 성경 속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도록 하려는 기장과 한신의 “복음의 자유”를 실천하는 성서신학 전통을 만들어낸 귀한 유산이 되고 있다.

[2] 장공의 성서관

1) 193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현실

김재준은 한국의 장로교 역사를 1884~1935년을 유년기, 1936~45년을 시련과 수난기, 1945~60년을 분열과 혼란기, 1961년 이후를 재연합과 혁신 및 자기비판의 시기로 구분하였다.5) 이러한 구분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김재준의 신학 여정의 변화와도 일치한다.6) 특별히 1930년대 한국교회는, 장공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선교사 시대여서 선교사의 지도와 보육아래 있었다.”7) 그렇다고 이 시기에 한국적 신학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적으로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을 피력하는 견해들이 젊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고, 장로교 총회에서 이러한 비평적 성서해석이 문제로 제기되면서 시련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한국신학사에 있어서 김재준의 등장은 바로 이 시점이다.

5) 김재준, “혁신과 통합의 출발점”,『전집』7, 95(95~103); 기독교 사상 1964. 5월. 6) 강신석은 교회사적인 구분과 함께 장공의 신학구분을 축자영감설비판으로 대변되는 ‘성서의 재발견’시대(1930~50년대 초), 교권주의와 권위주의로부터의 출애굽을 시도한 ‘교회의 재발견’시대(1950~60년대 초), 기복신앙을 극복하고 사회, 역사에서의 화육을 주장하였던 ‘사회의 재발견’시대(1960~70년대 초)로 구분한다. 강신석, “한국 교회사의 맥락에서 본 김재준의 사상”, 장공사상 연구 논문집, 83~84. 한편 주재용은 한국신학사를 다음과 같이 네 시대로 구분한다: (1)선교사의 신학에 의해 지배받던 신학 식민시대(1885~1933), (2)보수와 진보주의 신학의 갈등과 투쟁의 시대(1933~1960), (3)한국의 문화, 역사 현실에서 주체적 한국신학을 형성하려는 산고기(1960~1973), (4)한국의 문화, 역사 현실에서 한국신학을 전개하려는 시기(1973~). 주재용,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김재준의 사상적 위치”,『장공사상연구 논문집』(오산: 한신대출판부, 2001), 62.
7) 김재준, “전후 한국교회 20년사 비판”,『전집』7, 301 (301~13); 기독교사상 1965. 8월.

1930년대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1932년부터 시작한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국장로교총회가 1938년 9월 굴복하였고, 교리와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교리주의와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에 철저히 종속된 때였다. 1934년 한국교회 첫 희년 예배에서 마펫(S.A. Maffet) 선교사는 40년 전 선교사가 전한 복음 그대로를 전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8)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은 교리 제일주의를 강조했는데 교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5대 원리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성경의 절대 무오”이다. 이러한 신학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근본주의이다.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 신학계에 본격적으로 문제시되어 충돌하게 된 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하고 돌아와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바탕으로 한 극단적인 성서관을 가진 박형룡에 의해 야기되었다. 이러한 보수적 선교사 중심의 신학적 분위기 속에서 진보주의 신학의 목소리는 장공의 성서의 문자무오설과 고등비평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로 인한 정면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교역자를 양성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인에게 스스로 생각하여 결단할 능력보다도 선교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강력한 정통주의 신학을 주입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주체적 신학교육을 주창하였다.

8) 주재용,『역사와 신학적 증언』(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278~280.

1934년 제23회 한국장로교총회에서 남대문교회 목사였던 김영주 목사의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과 김춘배 목사의 여권옹호 발언9)이 제소되었다. 이에 대해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연구위원회에서는 “모세의『창세기』저작을 부인하는 목사는 정확한 성서를 모독한 자인고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여권문제에 대하여는 “성서에 여자교권이 전혀 허용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서를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은 권장조례에 의하여 처리함이 가하다”는 보고를 했다. 이 보고들이 그대로 통과되어 총회가 이를 선포했다. 다음 해인 1935년 총회에서는 유형기 목사의 편집번역인『단권성경주석』이 제소되어 장로교회에서는 이를 구독하지 말 것과 장로교의 집필자10)는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결정·선언했다.

9)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2,000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한 것이 모두 성서에 대한 비평이고 자유주의 신학사상이라는 이유로 제소되었다. 10) 장로교 집필자 중 채필근은 이 책이 재판될 때 자신이 쓴 부분을 빼라는 요구에 승복하고 다른 세 저자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목사는 자신들이 쓴 글에는 문제될 것이 없으나 이로 인해 교회가 소란하다는 데 대하여는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김재준의 성서관이 총회에서 문제가 되고 장로교의 분열까지 이르게 된 사건은 1947년 4월 장로회 총회에서이다. 1947년 4월 제33회 장로회 총회에 신학교 학생 51명이 연서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11) 그리고 1949년 11월 시민관에서 열렸던 제1회 장로교 청년 전국대회에서 20세기 이후의 서구의 여러 신학사조, 특별히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을 소개한 후 벌어진 질의 응답의 내용이 분열의 불씨를 점화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1952년 전쟁 중에 열린 제35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의 면직과 조선신학교 졸업생을 채용하지 않을 것을 결의함으로 끝났으며, 1953년에는 두 개의 총회가 열렸다.

11) 손세일 편,『한국 논쟁사』(청람출판사, 1978), 208~213.

2) 장공의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 비판” (1950)

김재준은『십자군』(1950년 3월)에 실린,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란 글12)에서 성서무오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는 “영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장공은 “우리가 자기의 비위에 맞는 어떤 학설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그 학설에 맞추어 보려고 억지로 애쓰는 것은 불경건한 태도임과 동시에 부진실을 초래할 것”을 지적한다. 김이곤이 지적한 데로, 장공의 비판의 핵심은 “축자영감설”이란 교리적 주장에 맞춰 성서의 권위나 무오설을 주장하는 주객전도의 사실에 대해 성서의 성격을 ‘영감설’에 의해 결정하지 말고 ‘성서의 사실’에 입각하여 성서 영감의 성질을 결정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13) 성서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이다.”14)

12) 이 글은 김재준 전집 2권에 재수록 되었으며 여기서는 전집의 쪽수로 표기한다. 김재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십자군』1950년 3월;『전집』2, 17~30. 13) 김이곤, “장공의 성서해석과 한국교회”,『장공사상연구논문집』(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138.
14) 김재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20.

성서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함에도 성서의 권위가 침해받지 않는 근거는 성서는 그 문자의 정확성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교훈의 소개”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15) 장공에게 있어서 성경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방편이므로, 성경 본문(문자)를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썼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동요시킬 요인이 되지 못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지, 그리스도와 혼동해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장공은 이러한 행위는 신조를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신앙대상적인 입장에 올려 모시고 거기에 불변의 객관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심판과 제재의 무기를 삼는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와도 같다고 지적한다.16)

15) 김재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22. 16) 김재준, “총회에 보내는 말씀”,『전집』2, 34,

3) 현대 근본주의와 성서의 축자주의

오늘날에도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은 한국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경전의 권위와 함께 절대적 신앙의 표징으로 상징될 때가 많다. 신학교에서는 더 이상 성서무오설을 고집하며 성서에 대한 비평적 언급을 이단시하지 않더라도 아직까지 문자적 성서적용을 절대적 신앙의 표시로 받아들이며 경전의 권위를 살리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서의 부분적 문자인용 등으로 대표되는 성서문자주의 혹은 축자주의는 근본주의의 현대적 형태이다.

축자영감설과 문자무오설의 논쟁은 표면상으로는 성서관의 차이인 듯 보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교리적 단일화를 강요하는 배타주의와 관용주의의 대결이라고 보여진다. 즉 교리적 단일화를 강요하는 배타주의적 종교태도와 사랑 안에서 복음의 자유를 주장하는 교리적 관용주의의 대별이다.17) 최근의 한국의 근본주의자들에게 이러한 배타주의적 태도는 교리보다는 정치적인 특징을 띠며 나타나고 있다.

17) 김재준, “건설적인 항거”,『전집』4, 359~65.

최근 근본주의에 대한 정의는 교리적 특징보다는 보다 포괄적으로 자신들의 오래된 종교, 사회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전투적 종교집단을 지칭한다.18) 카펜터는 근본주의의 특징으로 “문화적 소외(cultural alienation), 분파적 행동(sectarian behavior), 그리고 지적 침체(intellectual stagnation)를 꼽는다.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한국 근본주의자들의 전투적 행동은 최근 공격적인 해외선교19)와 물량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한국교회 대형교회들의 정치참여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자들 중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이 현실 정치에 깊게 참여하고 있다.20) 이들 근본주의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들은 선하고 다른 자들은 악하다고 믿는 것이다. 현실을 보는 눈이 이분법적이다.21) 배타주의는 분열과 대립을 낳는다.

18) Joel A. Carpenter, Revive Us Again: The Reawakening of American Fundamentalism(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4. 19) 대표적인 예가 2007년 23명이 인질로 잡히고 두 명이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선교를 들 수 있다.
20) 권진관, “민중신학과 기독교 근본주의-해석학적 차이를 찾아서”,『제2의 종교개혁과 민중신학:한별 임태수 교수 23년 근속 및 정년기념 논문집』(서울: 한들출판사, 2007), 534. 2007년 기독교 정당을 창설하려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뉴 라이트 네트워크”, “기독교 사회책임”이라는 NGO를 결성하여 정치화하고 있다.
21) 권진관, “민중신학과 기독교 근본주의-해석학적 차이를 찾아서”, 535.

이들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대형교회들은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수구적 이념에 대한 증거 구절(proof-text)로만 성서를 보는 축자주의(문자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를 옹호한다. 성구를 인용하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한가를 주장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축자주의는 세상에 없다. 선택적 축자주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제멋대로 선택한 증거 구절로 만들어내는 교리 체계나 교회의 가르침은 실상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다. 그리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믿는 성서와 내가 읽는 성서는 전혀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믿는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 동남아에 닥친 쓰나미나 미국 남부에 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자연재앙에 대해 이는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어느 대형교회 목사나, 성서의 자구를 들어 여성 목회자들에 대해 기저귀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어느 신학교의 총장이 나에게는 다른 종교인으로까지 여겨진다.

끝으로 성서의 축자영감설의 근거로 자주 제시되는 본문이 디모데후서 3:16~17인데, 이 본문의 내용을 다시 살펴 축자영감의 의미와 성서연구의 궁극적 목적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디모데 후서 3:16~17은 “모든 영감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적는다. 이 말씀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에게 성경을 왜 읽고, 왜 공부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목표는 단순히 성경의 여러 책들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선은 하나님의 영감을 찾아내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그 영감을 통해 성서의 상황과는 다른 자신의 삶의 상황 속에서 연구자나 독자,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유능하게 하고 의의 삶을 살도록 이끌기 위함이다. 성서에 대한 지식과 연구자체보다 성서를 나의 고백으로 이끌어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중요한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 장공이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면, 디모데후서는 성경연구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의 삶을 살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서는 하나님의 의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영감을 통해 인간에게 계시하신 말씀이다. 이러한 디모데후서의 하나님의 영감에 대한 이해는 성서의 진정한 권위는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하시려는 목적에 있다는 장공의 결론과도 상통한다.

[3] 장공의 비평적 성서해석

구약학자로서 장공은 조선신학교에서 구약 강의를 통해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도입하여 성서 기록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추적해 가면서 성서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찾으려 했고 동시에 저등비평(low criticism)을 통해 성서 본문 자체의 검증을 시도했다. 장공은 역사비평의 가치를 종래의 사이비적 신학자들이 자기가 추상해 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편한 데로 성경을 왜곡하는 불경건을 범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평하면서 역사비평이 “소위 우의적 해석이니 교리적 해석이니 하는 것 때문에 성경 기자의 본의가 무시를 당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22)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장공의 성서해석을 역사비평과 연관지으므로 장공의 성서해석을 살피기에 앞서 간략하게나마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22) 김재준, “성서 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전집』2, 57~66.

1) 역사비평의 특징과 한계

역사비평은 19세기 유럽의 인문주의, 이성주의의 부각과 함께 이성을 통한 비판적 본문 해석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성서가 지금까지 신앙 고백적 교리신학에 종속되어 증빙자료(proof-text)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성서 자체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함에 따라 비판적, 객관적 연구를 주창하면서 성서신학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다. JEDP로 대표되는 그라프-벨하우젠의 자료가설이 수립되기 이전의 역사비평의 기초들은 성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읽었던 의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에 의해 닦아졌다. 흔히 많은 이들이 역사비평을 본문 배후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과 혼동하는데 역사비평은 본문의 역사를 탐구하는 비평방법이다. 즉 역사비평은 성서자체 내의 오류와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성서가 다양한 자료로 구성되어 있으며(자료비평), 성서의 구두전승과정에서 그 다양한 양식의 전승들이 발견되고 고대 근동의 영향을 발견해 내었다(양식비평). 이러한 초기의 양식과 전승은 전승되면서 역사적 상황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어 왔고(전승사비평), 편집자에 의해 정경으로 수집, 재구성되기에 이른다(편집비평). 성경의 구두전승단계와 이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헌과의 연관성 등을 밝힘으로써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해 놓는 공헌을 하였다. 역사비평의 목적은 칼 바르트가 그의 ‘로마서 주석’ 2판 서문에서 “우리가 텍스트 저자가 된 것처럼 그렇게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요청한 것처럼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데 궁극적인 관심이 있다.

역사비평의 가장 큰 공헌은 성서자체의 역사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줌으로써 성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 점에 있다. 그럼에도 역사비평적 해석에 몇 가지 한계점을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역사비평적 해석이 객관적이고 그래서 그 해석의 결과가 “원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는,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점이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역사비평가들의 주장은 근본주의자들의 성서의 문자무오설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억측일 뿐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역사비평적 연구 내에서 기존의 연구결과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으며 새로운 대안적 해석이 제시되지만 합의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지금까지 진보적 신학 혹은 역사비평을 받아들인 많은 이들에게 성서보다 더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던 JEDP이론은 이제 그 정체성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비판되고 분해되어 버렸다. E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고 Farewell to the Yahwist?[J기자여 안녕?]라는 책이 출판될 정도로 벨하우젠이 말하는 솔로몬-다윗 시대의 궁중 신학자/서기관 J는 이제 없다. J는 포로기 혹은 포로기 이후 시대 성서 자료를 모아서 편집한 존재로 여겨진다. D법전에만 국한되었던 D기자의 역할을 오경 전체와 구경까지의 초본 저자로 확대 논의되고 있다.23)

23) 오경자료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견해들을 위해 다음을 참조하라. Van Seters, J., In Search of History, Historiography in the Ancient World and the Origins of Biblical History(London: New Haven, 1983). Nicholson, E.W., The Pentateuch in the Twentieth Century: The Legacy of Julius Wellhausen(Oxford: Clarendon Press, 1998). Thomas B. Dozeman and Konrad Schmid ed., A Farewell to the Yahwist?: The Composition of the Pentateuch in Recent European Interpretation(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6).

역사비평은 교회가 교리를 위해 성서를 ‘증빙자료(proof-text)'로 사용하는 자의적 해석에 대한 비판으로 ‘객관적’ 본문의미의 재생을 위한 서구 기독교의 노력이었다. 이로써 자의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에 쐐기를 박고 성서본문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했고, 본문의 본래적 정황과 저자의 의도에 귀를 기울이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역사비평은 교리가 아닌, 독자, 교회의 삶의 자리마저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오류를 범했다. 더러운 물을 버리다가 그 안의 아이까지 버린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비평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폰라드의 전승사비평은 그가 구약성서신학을 집필하도록 할 만큼 신학적 깊이가 풍부한 분석과 종합을 잘 이끌어낸 대표적 연구이다. 폰라드만 해도 그의 해석공동체가 뚜렷했다. 그에게 있어서 독일 교회가 있었고, 헤겔의 역사철학과 진보사상에 영향을 받아 진보하는 구속사의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신학을 형성했다. 그러나 점차 역사비평적 연구들이 교회의 해석공동체를 떠나 학문적 논의구조 속에 갇히면서 역사비평가들에게 성서는 경전으로서 그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대상이라기보다 쪼개어진 파편본문으로 분석의 대상이며, 그 기원과 형성과정을 밝히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앙고백적 의미를 묻는 것은 주관적이고, 물어서는 안 될 성서학의 질문처럼 치부되었다. 다시말해 역사비평가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했는가?”(what it meant?)만을 묻고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it means?)는 묻지 않고, 물어서는 안 되는 그 어떤 질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본문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하나의 유기체로 해석자에 의해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에코(U. Eco)는 아무리 내가 많이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언제나 텍스트에 대한 ‘내 자신’의 이해를 만날 뿐이다. 텍스트의 유일한 의미를 나는 만나지 못한다. 텍스트는 ‘열려 있다.’ 텍스트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심화된 이해를 유발시킨다고 말한다.24) 텍스트는 예술작품과 같다. 그 의미는 수용자에 의해 변한다. 텍스트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새로운 해석으로 이끈다. 그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해석자의 관점이다. 장공 역시 “성경말씀은 글씨로 쓰여진 고정된 기록이지만, 그 해석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자유로운 감동에 의하여 각자가 학적, 양심적으로 해석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해석의 자유를 피력한다.25)

24) U. Eco, Das offene Kunstwerk, Frankfurt a.M. 1973, S. 88; 테오 순더마이어, 채수일 엮어 옮김,『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오산: 한신대출판부, 1999), 112 재인용. 25) 김재준, “건설적인 항거”,『전집』4, 364.

2) 장공의 비평적 성서해석

김재준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역사”로 신약을 “성자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성취”로 보았고 성령의 역사로 “속량 사회가 누룩같이 퍼져나간다”고 보았다.26) 그는 이스라엘 민족사 속에서 예언자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 오늘 한국의 역사 현실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선포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공이 쓴 성서연구 중 히브리 예언자에 관한 글이 많다. 이를 두고 유동식은 장공이 “예언자를 연구한 구약학자로서 역사 참여의식이 강한 신학교육자”였다고 평가한다.27)

26) 김재준, “순례의 길(2)”,『전집』2, 200(197~201). 27) 유동식,『한국신학의 광맥』 207.

구약본문에 대한 장공의 저술은 주로 1930년대『신학지남』에 실린 구약학 논문들이다.28) 그 밖의 구약논문으로는 “구약성서에서 보는 사회정의의 소리”,29)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상과 인간주의”,30) “구약성서에서 남은 자 사상”,31) 등이 있다. 장공의 성서해석을 살펴보기 위해 초기 1930년대 논문들과 1960년대 출판한『성서해석』(1963)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8) 김재준,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落穗』1930년 10월 25일;『신학지남』1933년 5월호, 31~36, 전집 1, 4~12;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落穗』1933년 6월 10일;『신학지남』1933년 9월호, 43~51, 전집 1, 13~26;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落穗』1933년 3월 10일;『신학지남』1933년 11월호, 43~59, 전집 1, 27~33;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신학지남』1934년 1월호, 32~38; “새 양심의 창조”,『신학지남』1934년 5월호, 30~33; “실재의 탐구-전도서를 읽고,”『落穗』1934년 10월 5일,『신학지남』1934년 11월호, 30~39, 전집 1, 34~44; “위대한 종결-예레미야의 비통한 최후를 추모함”,『신학지남』1935년 5월호, 49~53, “위대한 종결-예레미아의 최후”,『落穗』1935년 2월 20일, 전집 1, 82~90; “선지자적 심정”,『落穗』1940년; 전집 1, 143~48. 29) 김재준, “구약성서에서 보는 사회정의의 소리”『전집』10, 85~96.
30) 김재준,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상과 인간주의”,『전집』12, 279~88.
31) 김재준, “구약성서에서 남은자 사상”,『전집』10, 181~85.

(1) 1930년대 발표한 구약학 논문들

가. 신학적 논제를 다룬 글들: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1930)을 중심으로

장공은 “욥의 내세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보아 그 곡절 있는 움직임을 살펴야한다”고 말한다.32) 좀 길지만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에 대한 장공의 성서해석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을 직접 인용한다:33)

32) 김재준,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9. 33) 김재준,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9~10.

욥은 인생의 순례자다. 그의 기록은 책상 위에서 삼단논법으로 쌓아올린 논리의 전당은 아니었다. 차라리 인생의 광야에서 길 찾아 헤매는 눈물겨운 고민(苦悶)의 고백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변천이 많고 모순과 자가당착도 많은 것이다.사자(死者)의 고요한 안식을 부러워하던(3:14~19) 그가 사자의 세계인 스올의 암흑을 생각하고서는 몸부림치며 원망하였으며(10:21, 22), 스올에서 다시 나오기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다시피 한 그가(7:7~9) 하나님이 자기를 스올에서 불러낼 때를 기다리겠노라고(14:13~14)도 하였으며,하나님은 가혹한 무도덕한 이라고 원망하던 그가(9:22~24) 자기를 변호해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기도 하였다(19:24~25). 이렇게 그는 안정 없는 마음으로 이곳저곳 더듬어 헤매었다. 그러나 그의 품안에는 한 작은 나침반이 있어서 그의 나아갈 방향을 멀리 가리키고 있었으니 그 바늘의 한쪽 끝은 하나님의 의(義)를 가리키고 또 한쪽 끝은 그의 양심, 결백한 양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길을 찾아 헤매이는 동안에도 이 바늘만은 항상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리고 내 양심은 결백하다. 그런고로 이 현재의 참상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는 것이 그의 속임없는 심정이었다.

이어서 장공은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사실 욥은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하여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전통적 신앙인 음산한 스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정의감은 이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에 영혼불멸의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라는 터전에 뿌리를 박고 ‘욥의 결백한 양심에’ 그 작은 싹을 돋게 하였다. 마치 작은 상수리나무 열매가 위대한 장래의 가능성을 품고 가시덤불 속에서 그 조그마한 싹을 돋힌 것같이.34)

34) 김재준,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11~12.

이상의 욥기의 영혼불멸관에 대한 짧은 논문은 장공의 성서해석의 경향을 잘 드러낸다. 즉 장공은 본문에 들어가 본문의 정황과 문맥, 구조 등의 분석적 틀을 적용하여 본문을 분석하기보다는 자신의 논제를 전개하기 위해 성서를 인용하면서 본문이 아닌 자신의 논지를 중심으로 성서를 재구성하면서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서의 장절의 순서는 논지의 흐름에 따라 앞뒤가 바뀌어 인용된다.

나. 예언자적 소명과 현실비판: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아의 내면생활”(1933)을 중심으로

1933년 장공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아의 내면생활”(1933)과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1933) 등 예언자의 글을 썼다.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아의 내면생활”에서 김재준은 예레미야의 삶이 제도화된 율법종교에의 안위와 불의가 성행하는 야훼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장공은 우선 예레미야의 소명을 기술한 후, 예레미야의 예언과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관계를 살핀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실패(율법에의 안주와 불의의 성행)로 예레미야는 다시금 독자적인 예언의 외침을 계속해 나가게 되었음을 기술한다.

예레미야의 전기 형식을 취한 이 글은 실제로는 장공이 한국교회가 기독교에 던지는 예레미야의 말을 빌린 자신의 예언의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그는 한국교회가 율법(말씀; 성서)의 문자적 이해에 갇혀있고 사회의 불의에 응답하지 못함을 예레미야의 목소리를 빌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공의 성서해석은 본문을 분석하는 역사비평적 접근보다는 자신의 논지를 피력하기 위한 성서를 바탕으로 한 신학적 해설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의 논리 전개의 방식은 성서 예언자들의 삶을 서술하면서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 상황에 맞추어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설명을 대신하거나 보충한다. 이를 위해 경전의 본문이 장공의 논의 전개를 위한 문맥에 적절하게 재배치되고 있다. 앞선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의 논문과 동일한 서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성서해설』(1963)35)

35)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성서해설』만 분석대상으로 언급하였다.

가. 비평적 성서해석방법의 소개

장공의 성서해석에 대한 종합적인 입장은 그의 책,『성서해설』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장공은 세 가지 전통적인 성서해석의 유형을 소개한다.36) 첫째는 우의적 해석이다.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사례로 초대, 중세에 활발했던 우의적 해석을 소개하면서 이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종교적 용어가 다분히 상징적인 뜻이 있고 또 그 해석에 상상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우의적]인 해석방법에 의존한다면 학문적으로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하는 바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성서의 문서를 이용 또는 악용할 우려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그 문서의 본의가 상실될 뿐 아니라, 완전히 거짓된 의미가 그 문서 속에 주입될 수 있는 것이다.”

36) 『전집』6, 7~10.

둘째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는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가 직접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어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모든 부분이 동일하게 유익하고 가치 있다는 해석입장이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은 종교적 언어가 상징적, 은유적 표현을 지닌 경우가 많은데 이를 무시하고 문자적 적용을 할 경우 뜻하지 않은 유치한 해석의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성서의 문구 중 서로 상반되는 내용의 경우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은 성서 여기저기서 단편적인 문구를 따서 한 구절과 다른 구절을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면 성서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를 성서의 말씀처럼 도용할 위험이 있다.

셋째는 비판적 방법이다. 장공은 비판적 성서해석방법을 본문비판, 문자적 비판, 역사적 비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본문비판은 원본의 재구성을 위한 사본의 비교연구라고 한다면, 문자적 비판은 성서 원어의 본뜻, 문법적 의미, 문맥 등을 연구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역사적 비판이란 성서 각 책의 저자, 저작 연대, 저작 장소, 저작 목적 등등을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 성서 이외의 다른 문서 등에 비추어가며 역사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 가지 성서해석 방법 중 비판적 성서해석의 타당성을 역설한 뒤, 장공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과학적 연구와 해석은 그것만으로 완전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여기서 장공은 두 가지 해석학적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는 본문의 신학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를 물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그 정확한 역사적 정황 안에 자리 잡은 문서에 나타난 종교적 의미,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37) 역사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밝힌 것들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묻고, 동시에 그 본문의 의미가 자신이 살아가는 현 사회와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지금 우리에게 산 책으로 대결한다는데 그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38) 그는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의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동참자로 성서의 세계에 대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힌다.39)

37) 『전집』6, 10. 38) 『전집』6, 10.
39) 『전집』6, 10.

둘째 해석은 “동양적 견지에서 성서 사상을 보고 성서의 근본 의도를 왜곡시키는 일 없이 동양적인 각도에서 파악하는 깊은 이해와 실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40) 성서의 내용이 인간의 경험과 사상에 대한 유일한 해답인양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과거 역사에 있어서 사상적, 실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답들을 얻어 각양각색의 인생관, 세계관을 내놓았는데, 성서는 이러한 해답들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해답들은 성서의 진리에 더욱 뚜렷한 부조(浮彫)를 나타내 줄 수 있다.41)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대립되는 요소들, 가령 유일신에 대한 다신, 무신, 범신 등등의 요소들을 다만 대립시키거나, 일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가 심각하게 대립하여 그 현실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 동시에 거기서 취해지는 유일한 문제를 성서 본문에 의하여 밝혀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42) 문화적 성서해석은 “동양에 적을 가진 신학교들이 맡은 공통적인 연구과제이며 또 그만치 고귀한 특권”이라고 말한다.43)

40) 『전집』6, 22~24. 41) 『전집』6, 23.
42) 『전집』6, 23~24.
43) 『전집』6, 24.

나. 성서의 문서들 소개

장공의『성서해설』은 구약만 따로 분리하지 않고 구약과 신약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성서를 한권의 경전으로 다룬다. 성서의 역사와 지리적 배경을 소개(27~49)한 후, 장공은 구약성서의 내용을 소개하는데(49~158), 이때 각 책의 순서를 개신교 성경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히브리 성경(MT)의 순서를 따라 소개한다. 당시 뿐만 아니라 히브리 성경의 순서(토라/예언서(역사서, 문서예언서)/성문서)로 성서의 각 책들을 소개하는 한국의 성서개론서는 장공의 성서해설이 유일한 책이 아닌가 싶다. 장공이 성서의 책들을 히브리 성경의 순서에 따라 소개하는 것은 그 순서가 대체로 이 문서들이 성서에 편입된 연대순에 따랐기 때문이다. 각 책을 소개할 때도 장공의 역사비평적 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는 성서의 자료들을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소개하고 있으며, 여기서 연대기는 역사비평적 분석결과에 따른다. 그리고 각 책들을 소개하면서 먼저 그 문서들이 전승되고, 수집, 편집된 역사적 정황을 먼저 소개한다.

구약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가 끝난 후, 장공은 중간시대의 정황(159~62)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항목은 그가 구약과 신약의 역사적 연속성을 논증하는데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중간기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간략하게 끝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 번째 신약성서의 항목에서 장공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예수의 생애와 교훈 등을 서론적으로 소개한 후(163~94), 신약의 문서들을 소개한다(194~261).

끝으로 전체적 결론(261~63)에서 장공은 도드(C.H. Dodd)를 인용하면서 성서는 “계시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계시로서의 역사다”고 밝히면서 성서의 역사이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역사의 청사진은 회개를 전제로 한 개방적 여정이며, 역사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고 밝힌다.44) 이러한 성서는 현대에 있어서 혼돈의 시대, “사랑과 참과 정의 안에서 이루어질 대화해(大和解)”를 위한 지표가 되며, 성서가 증언하는 창조주와 구원주의 계시와 더불어 인간의 책임을 촉구하고 있다는 말로 결론 짓는다.

44) 『전집』6, 262.

『성서해설』은 이전의 장공의 성서해석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지만 성서 66권의 방대한 분량을 짧은 지면에 소개하면서 서두에서 밝혀놓은 성서해석의 방향을 성서책을 소개하는데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장공의 구약연구논문에서 그가 해석방법론으로 제시한 ‘동양적 견지에서 성서사상을 보고 성서의 근본 의미를 들춰내는 작업’을 글을 통해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45)

45) 김재준, “기독교와 문화”『새생명』1966. 3월;『전집』7, 401~406은 이러한 접근의 한 예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3) 장공의 성서해석의 특징들

장공의 성서해석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가 발견된다. 첫째, 그의 성서해석방법은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의 접근과는 다르다.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이 본문의 의미를 들춰내려는 목적으로 본문을 분석하는 반면, 장공의 성서해석은 본문 자체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관심보다는 해석자의 논지를 전개하는데 본문의 신학적 해설이 보충자료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본문을 재구성하면서 역사비평적 연구의 결과들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46) 역사비평의 접근 방식을 본문해석에 적용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의 성서해석은 비평적 성격을 띤다. 그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논의를 전개하지만 이러한 재배치와 인용이 몰역사적이고 문맥을 무시한 우의적 해석의 우를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46) 가령, 김재준은 예레미야가 요시야 종교개혁에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를 질문하면서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찬동했으리라는 이유를 네 가지 제시한다: 1)요시야 종교개혁의 반 바알종교정책이 예레미야의 예언정신과 부응한다. 2)요시야에 대한 높은 찬사(22:15, 16). 3)621~608년까지 그가 비교적 침묵을 지킨 것. 4)개혁운동의 중심인물인 샤반일가가 그에게 바친 꾸준한 충성(36:10~20). 이런 이유로 장공은 예레미야가 결코 개혁운동을 공공연하게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찬의를 표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전집』1, 17) 그는 이어서 그러나 “예레미아가 개혁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가 그저 정부나 제사장의 지휘를 받아 일개의 사환처럼 움직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그의 성격상으로 보든지 그의 에언자적 권위로 보든지 결코 합당치 못한 결단인 까닭이다. 생각건대 이때에 그는 예언자의 권위로 이 운동에 대한 여호와의 시인을 선언하고 그윽이 그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전집』1, 18)

둘째, 장공의 성서해석은 해석적이고 주관적이다. 또한 고백적이다. 장공이 예레미야의 생애와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이해하는데 그의 예언자로서의 고뇌와 현실참여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높이 평가하려는 분명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장공은 그의 해석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바로 보는 예레미야의 삶과 그를 통한 현실에서의 교훈을 예레미야서의 구절들을 통해 전달하는데 관심이 있다. 자신의 신학적 해설을 열거하고 그에 상응하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에 대한 본문적 전거를 마련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런 접근은 비평적이라기보다는 고백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셋째, 장공의 성서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함은 장공이 구약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향한 예언으로, 신약은 이의 성취로 보는 구속사적 시각을 늘 견지하면서 예언자의 해석을 마무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아의 내면생활”에서도 역시 장공은 논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이리하여 불순한 의식적 국가적 종교는 도의적 영적개인적 종교로 정화되어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다. 우리는 이제 신의 영원한 경륜을 찬미함과 동시에 불세출의 대예언자 예레미야의 일생을 앙모하여 마지 않는다.47)

47) 『전집』1, 26.

김이곤 역시 장공의 성서관이 구속사적이고 기독론적임을 지적한다. 장공은 이스라엘 고난사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가 담겨있는 성서 전서로 읽게 해 주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고난사를 구속사로 읽을 수 있게 하는 고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으로 본다. 김이곤은 나아가 장공에게 있어서 구약과 신약을 잇는 고리는 ‘고난받는 종’이라고 설명한다.48) 장공의 해석이 구속사적이고 기독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은 아모스에 관한 그의 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는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 마지막도 “이제 우리는 이 불의로 가득찬 세대에 있어서 이 의의 예언자의 용기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이 예언자의 의를 이루어주신 그리스도의 의만을 선포하며 그를 위하여 투쟁하며 또 생명을 버림이 마땅할 것인가 한다”고 글을 끝맺고 있다.49)

48) 김이곤, “장공의 성서해석과 한국교회”, 146~47. 49) 『전집』1, 26.

3) 장공의 현실참여적 비평적 성서해석에 대한 평가

1930년대 한국의 보수주의적 선교사 신학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한국 기독교를 향해, 한국 신학교의 강단에서 ‘고등비평’과 신정통주의 신학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일 자체가 가히 예언자적 용기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공의 예언자적 행동이 선포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준 진보적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조선신학교의 위대함을 함께 높이 평가됨이 마땅하다. 장공 김재준의 고등비평의 소개가 그 해석공동체로부터 수용되지 못하였더라면 역사비평적 성서신학의 선구자인 장공이란 거목은 그 씨앗부터 싹을 트지 못했을 것이다. 혹자가 기장의 왜소한 규모를 안타까워하면서 한신에서 역사비평을 가르쳤기 때문에 실천신학이 발전하지 못했다거나 교회에 봉사하지 못하는 성서학 전통을 만들어냈다는 공공연한 지적은 한신이 지금까지 한국의 성서학의 선두를 지키며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고 생명살림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성서해석의 전통을 지켜온 것에 대한 정면도전이며 전통을 무시한 발언이다. 장공은 “신학교는 교회에 전적으로 봉사하는 ‘성직자’를 양성한다. 그러나 신학교는 ‘목사양성소’라는 직업학교에 머무를 수는 없다. 신학교는 신학 ‘사상’을 다루는 ‘학’의 전당이기 때문이다.”50) 신학사상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세계교회의 학자들이 공개연구하고 공개토론하기도 하면서 세계와의 대화를 필요로 하며, 정치·경제·문화·종교 등 각양 생활부문에서 전문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신학 수립에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50) “교회와 신학교육”,『전집』 8, 58(58~60).

장공은 “신학의 자료가 주로 성경이라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은 해석을 요하는 것이므로 신학이 일률적일 수는 없다. 그 해석이 인지의 발달과 사회의 변천에 따라 유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신학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요, 신학자는 부단히 새로운 학(학)의 사람이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신학교에는 학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51)고 강조한다. 비판적 성서해석의 신학교육이 잘못이 있었다면, 역사비평을 해석공동체의 정황과 접목시키지 못한 후학들의 게으름에 있는 것이지 역사비평을 가르친 것이 잘못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구분해야할 것이다. 장공은 일찍이 이러한 괴리의 가능성을 우려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너무 인본주의와 자연주의에 영합한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1940년 조선신학교의 설립 당시 발표된 5개 조항의 교육이념에서 성경 연구에 있어서는 현 비판학을 소개하되 그것은 성경 연구의 예비지식으로 이를 채택할 것을 표명함으로써 역사비평 자체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가 성서 텍스트 연구에 있어서 학문적 비판 연구를 충분히 받아들이되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극단적 비판학을 경계하는 성숙한 지혜, 신학교육의 목적을 교회 봉사에 두어야함을 강조하여 성서비평과 해석공동체의 연관성을 주장하고 있다.

51) “교회와 신학교육”, 59.

[4] 장공과 해석공동체

서구 역사비평가들의 많은 사람들은 초기의 역사비평가들처럼 해석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은 채 연구실에서 혹은 신학교 강단에서의 성서분석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논리는 논리의 변증을 위해 구축되었고 이로써 공동체에서 유리된 편협한 분석 결과들이 마치 우매한 독자는 알지 못하는 현학자들의 객관적 발견인 것처럼 포장되어 유일한 타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구약신학 수업을 하면서 한 번도 구약성서는 들쳐보지 않은 채 구약학자들의 비평이론만 토론하는 모습은 성서연구가 해석공동체가 없는 개별 신학자들의 학문적 습작의 희생이 된 한 예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장공은 해석공동체와 분리된 학문적 유희로서의 성서연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생활종교), 역사적 고난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고자(주체적 참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공동체를 향한 신학을 성서를 통해 펼치는 신학자였다. 장공의 해석공동체는 사회참여적 신앙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으로 장공에게 있어서 성서는 그의 신학의 기초로 늘 인용되었고, 그의 성구의 활용은 성서를 꿰뚫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권위있는 문서를 이용해서 자신의 논거의 근거로 삼는 일은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설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설교에서 가장 권위있는 경전, 성경을 근거로 새로운 상황에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설교이다. 구약의 대표적 설교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에서도 이러한 성서의 재해석과 재적용을 통한 새로운 복음(율법)을 선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예로 유대인 학자 레빈슨은 신명기 저자가 중앙제의화에 따른 종교 상황의 변화로 유월절의 의미를 어떻게 재해석, 변형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52) 그럼에도 본문만 인용을 해놓고 설교자가 할 말을 본문에 근거하지도 않은 채, 그리고 심지어는 본문을 왜곡하면서 자신의 논리에 꿰맞추고 새로이 글을 쓰는 경우도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고백적이고 상황적 성서해석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늘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우리는 그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검증해 주는 잣대는 해석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 즉 해석의 관점이다. 장공에게 있어서 성서의 말씀이 선포되고 실현되는 해석공동체는 한국사회의 역사에 참여하고 응답하는 한국교회였다.

52) 레빈슨,『신명기의 법혁신과 해석학』이영미 옮김(오산: 한신대출판부, 2009).

1) 장공의 해석공동체로서의 사회참여적 신앙공동체

장공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역사적으로 교회가 세속을 지배한 적고 있었고(중세), 세속이 교회를 지배한 적도 있었지만(문예부흥 이후), 지금은 세속이 교회를 역습하여 총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때라고 평가하고 지금이야말로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해야 할 때임을 강조하였다.53) 그는 교회는 “수직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수평적인 사람끼리의 사랑이 십자로 어울린 교차점에 불타는 성애(聖愛)의 공동사회다”고 말한다.54)

53) 김재준,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전집』1, 239~47. 54) 김재준,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239.

장공은 교회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1)교회는 산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천적(天的)생명으로, 이 생명은 인간 생활 속에, 역사 안에 이루어지는 구체적 생명체이다. 2)교회는 하나다. 즉 교회는 통일성을 가진다. 여기서 통일성은 조직이나 의식이나 신앙고백의 획일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성’이다. 3) 교회는 거룩하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활동영역이기 때문이다. 4)교회는 세계적이다(公會性). 그리스도의 사업은 결코 민족적, 지방적, 계급적인 것이 아니다(골 3:11). 5)교회는 사도적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메신저들이며, 그 메시지를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맡은 것이 교회이다.55)

55) 김재준, “그리스도 교회의 기본적 성격”,『십자군』1952. 4월;『전집』2, 215~221,

이러한 교회의 이해 속에서 장공은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타계적이고, 보수적이며, 개인적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56) 한국교회는 이러한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한 갱신운동을 펼쳐야 하는데 장공은 이를 ‘종교 생활’에서 ‘생활 종교’로의 전환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신학은 이러한 ‘생활 종교’를 밑받침해 주기 위해 자체의 혁신이 필요하다. 즉 신자와 세상, 교회와 사회, 기독교와 타종교 등의 관계가 신학적으로 재검토 되고 재천명 되어야 한다.57)

56) 김재준, “한국교회의 선교적, 사회적 사명”『전집』2, 131~44. 57) 김재준, “생활 종교를 지향하는 교회의 갱신”,『세계와 선교』1965. 11월;『전집』7, 333~35.

장공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교회는 전체로서의 사회를 상대로 증거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전개되는 산업사회와 몰락하는 농업사회의 산업 붕괴를 함께 구제하는’ 역할을 교회가 담당할 것을 촉구한다.58) 한국교회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정의에 용감해야 하며, 역사적 책임을 느끼고 역사적 사건들에 대하여 기독교적 비판이 있어야 한다. 또한 불의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든지 묵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땅에 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59) 그에게 있어서 한국 기독교의 사명은 두 가지, 인간화, 즉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사회화, 즉 사랑으로의 인간관계 회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민주화란 정치적 의미보다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며 그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사랑 실천에 있다.60) 이러한 인간화와 사회화를 신앙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공동체의 형성을 장공은 추구하면서 자신의 신학의 해석학적 근거로 삼고 있다.

58) 김재준, “교회와 세계”『에큐메니칼』1966. 4;『전집』7, 414(407~15). 59) 김재준, “불의에 대한 투쟁도 신앙이다”,『사상계』1967년;『전집』8, 12~19.
60) 『전집』9, 381.

2) 장공의 현실 참여적 신학

장공의 해석공동체(교회와 사회) 이해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헌신적 참여는 그의 성서해석이 역사비평의 객관적, 학구적 접근을 뛰어넘어 현실 참여적 신학하기로 이끈다. 이제 장공은 본문을 해석하는 성서학자로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예언자가 되어 스스로가 한국 교회 전통을 만들어가는 본문(text)이 된다.

1960년대 이후 장공은 성서학자라기보다 행동하는 신학자로 장공은 한일수교 반대 운동을 비롯해서, 대통령의 삼선개헌, 전두환 정권의 유신헌법, 광주사건, 인권탄압, 군사투쟁 등에 항거하면서 새로운 길을 걷는다. 그는 자신이 4.19 학생민주화운동 이전에 스스로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61) 박봉랑은 이러한 장공의 현실 참여는 “말씀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통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본질적인 사고와 원리적 판단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62) 유동식은 장공을 “장공은 예언자를 연구한 구약학자로서 역사의식에 투철한 교육자였다. 따라서 불의의 역사적 현실에 직면해서는 과감히 예언자적 역할을 담당했다”63)고 평가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1972), ‘삼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위원장’(1973), ‘민주수호협의회 공동의장’(1973) 등을 맡아 정의를 위한 실천을 하였다. 해외에서도 ‘북미주 한국 인권수호협의회 의장’(1975),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 연합 위원장’(1978) 등을 맡아가며 활동했다. 본격적인 사회참여를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장공은 성서학자로서의 성서해석보다는 한국사회의 사회, 정치적 상황에 응답하는 신학을 전개한다.

61) 안병무는 장공이 “나는 4.19가 터질 때까지도 정치의식은 없었어”, “정치성이 있는 글도 몇 편 썼으나 쓰라니 원론적인 것을 쓴 것 뿐이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한다. 안병무, “현대를 그대로 호흡하는 사상가”,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장공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3『장공이야기』(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345. 62) 박봉랑,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장공이야기』, 43.
63) 유동식, “장공의 백조의 노래”,『장공이야기』, 360.

[5] 끝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장공의 성서관과 성서해석을 통해 필자는 장공의 성서해석을 ‘사회참여적 비평적 성서해석’이라고 평가하였다. 글을 마치면서 성서해석가로서 뿐만 아니라 신학자로서의 장공의 성서이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 복음과 신앙의 자유를 확보해 준 한국교회의 예언자

성서신학사에 있어서 아니 한국신학사에 있어서 장공의 공로는 무엇보다 “교권시대의 권위와 조직체가 다수라는 힘으로 신학의 표현을 통제하고 신앙고백을 위협할 때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타당성을 증언하여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 확보한” 일이다.64) “이다”를 “이다”고 말한 그의 예언자적 용기가 오늘날의 비판적 학문의 자유를 담보한 한신이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성서이해와 신학은 극단적인 근본주의의 성서무오설이나 지나치게 인본주의와 자연주의에 영합한 자유주의 신학의 편협한 해석을 넘어서 실천을 통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 정신에 입각한 신학수립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64) 전경연,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하고 확보하신 분”,『장공이야기』, 372.

장공이 그의 신학과 성서풀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복음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함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인격적인 복음신앙”을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으로 사귐을 가지는 때 나를 정죄할 사람도 없으며 나를 정죄할 법도 없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신앙대상으로 삼는 때에는 나는 그 ‘통’ 속에 갇혀서 잘못하면 통조림이 되고 만다. 어느 정도 변치 않을는지 모르나 생명은 없어진다.”65) 박봉랑 역시 장공의 신학은 “자유의 신학”이라 평한다. “그의[장공의]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이며, 여기서 응답의 자유와 자유 안에서의 책임이 따랐다. 그의 자유는 그가 즐겨 쓴 대로 ‘예수 그리스도’ 때의 속박 속에 있는 자유이다.”66)

65) 김재준, “복음의 자유를 확보하라!”, 5. 66) 박봉랑,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 43.

그는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종의 멍에’를 지게 만드는 요인을 “성경문자주의, 율법주의, 정통신학, 분리주의” 등을 뽑고 있다.67) 성경문자주의와 율법주의는 본문의 자구 그대로를 지키려고 애쓰면서 본문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릴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정통신학은 신학적 전통이 인격적 신앙의 고백으로 되지 못하고 과거에서 내려온 관습적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한데 불가할 경우를 경계하며 이를 역사비평적 해석을 통해 재해석하고 있다. 분리주의는 성서의 근본정신을 실현하는데 주인이 되는 민중과 섞이지 못하고 회당의 상좌와 거리에서 인사를 받는 교만함을 경계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67) 김재준, “복음의 자유를 확보하라!”, 5.

자유에 대한 장공의 개방성은 한신대학교(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의 건학정신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밝힌 건학 정신의 첫 번째는 “우리는 신앙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점이다. 이는 장공의 성서관과 비평적 성서해석의 저변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복음의 자유확보를 위한 외침의 메아리이다. 또한 그가 보수적 한국기독교 상황에서 역사비평의 현대신학을 학자적 양심과 소신을 통해 소개한 것 역시 “우리는 신학교육에 있어서 세계 석학들의 제 학설을 공정하게 소개하며 조선 교회의 신학수준을 세계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두 번째 건학정신에 반영되어 있다.68)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하면서 천명한 선언서에도 ‘복음의 자유’와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지도 이념으로 제시되기도 하였다.69)

68) 김재준, “신학교육에의 출범”,『전집』18, 183~84. 69) 선언서의 첫째 조항과 둘째 조항은 다음과 같다: 1)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세움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새역사 40주년 기념문집』(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 1993), 70.

자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적 태도와 끊임없는 비판적인 대화를 기반으로 성취될 수 있다. 장공은 한국교회가 진정, 신학을 하려면 날로 발전하는 새 신학에 자기를 개방하여 진지하고도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하고 자기가 신에 대한 학문을 한다는 의미에서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주장하는 신학이 직접 신이 발표한 학문일 줄로 착각해서 그것으로 남을 심판해서는 안 됨을 경고한다. 이는 어이없는 우상화이며 그걸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우상숭배자가 되고 만다. 또한 그는 신학 자체에 대한 개방적이고 상대적인 태도를 강조한다. 그는 한국의 신학이 ‘다원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신학태도’로 돌아오는 개혁을 이루어야 함을 주장한다.70) 장공 스스로도 보수, 진보의 딱지를 넘어서서 자기의 학적 소신에 충실하면서도 전통적 신앙의 소신에 충실하고 있다. 보수적 진보, 진보적 보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흔히 회색주의자로 치부되어 양쪽에서 비판받기 쉽지만 장공이 여기서 예외가 되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이 이 둘의 조화를 잘 이루어내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70) 김재준, “신학과 교회개혁으로 새 인간상 부활”,『전집』9, 365.

2) 비평적이면서 고백적인 현실참여의 성서해석을 펼친 신학자

장공의 성서해석은 비평적으로 성서를 읽으면서도 본문의 분석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역사적, 상황적 성서 읽기를 통해 자신의 신학적 논제를 전개해 나가는 신학적 해석을 전개하였다. 성서전공자로서 장공의 성서해석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1) 역사비평을 넘어선 현실참여적 성서해석

장공의 성서이해와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의 소개는 한 편에서는 교리를 위한 자의적, 문자적 해석에 성서를 묶어두는 교리적 감옥에서 성서를 해방시켜 주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성서를 해석공동체로부터 분리시켜 학문적 대상으로 삼으려는 비역사적 성서해석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즉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현장인 삶 속에서 성서의 의미를 재발견함으로써 그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의 본질을 주창한다. 성서의 기초 위에서 교회는 교권주의, 계파주의를 극복하고 자신의 교리를 강압하고 변호하기 위한 배타적 성서문자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장공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비판적 성찰과 함께 성찰적 실천을 실천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글과 삶이 힘 있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성서해석가로서의 장공에게 남는 아쉬움은 그가 성서본문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너무 간과한 채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성구의 인용에 그치고 있는 점이다. 물론 당시 역사비평 연구의 자료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못하고 장공 자신이 행정을 담당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응답 등으로 여유도 없었던 점이 있었지만 그의 유학과 전통문화에 대한 식견이 성서해석을 통해 후학들에게 한국적 성서해석의 표본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은 여전히 남는다.

성경의 권위를 문자무오설에서 찾거나 성경의 의미에 대한 객관성을 역사비평을 통해 제시할 수 있다는 독단주의는 해석공동체를 무시하고서는 공허한 주장으로 메아리칠 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특정 역사적 시기 어느 신앙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위한 총체적인 집합서란 특징을 지닌 문서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시대를 공유하던 신앙공동체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시대를 달리하는 신앙공동체들은 자기 이해를 달리한다. 때로는 그 이해관계가 상충하기도 한다. 이때 성경자체가 특정 공동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문서라면 성경을 그 자체로 권위 있는 문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의 최종형태에서의 해석학적 작업을 파헤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즉 최종 성서본문의 신학적 의도를 파헤치고 그 신학적 의도가 현 신앙공동체에 던져주는 의미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감을 경험하고 현재화할 수 있어야 한다. 현 신앙공동체는 과거 성서의 문헌을 도출한 신앙공동체를 신봉하고 그들의 신학적 관점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을 삶의 지표로 삼기 때문에 과거 정경을 형성한 신앙공동체의 신학적 해석을 선택적으로 취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서해석은 본문의 배경, 의도를 본문 안에서 찾기보다 해석학적 의도를 엿보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소통이 집단에 의한 강요나 일방적인 지식 전달로 이루어질 수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이제 ‘주의’ ‘00론’의 담론을 대중을 향해 연설하고 호소, 선동하던 시대는 지났다. 모든 개인이 왁자지껄 소통을 통해 하나의 담론을 형성해 가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청중이 수동적 정보를 수집하던 시대에서 능동적 정보 수집자로 변한 것이다. 가난하니까, 약자이니까라는 보편적 근거는 더 이상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노동운동의 노동자들은 단순히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 동조를 얻게 되는 시기는 지나고 그들이 내거는 구체적인 이슈와 주장에 대한 설득력과 그에 대한 공감이 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게 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주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참여적 성서해석과 신학적 재구성은 이러한 소통의 신학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2) 학문적 성서해석을 넘어선 말씀 실천을 통한 신학하기

요즘은 박사들이 넓을 박자가 아니라 코박을 박자를 써서 자기가 전공한 분야에서 그것도 자신이 논문을 쓴 주제 이외에는 잘 모른다고들 한탄하지만 장공 김재준은 구약학자이면서도 성서연구를 넘어서, 박봉랑의 말대로 “그의 신학의 범위는 성서신학, 조직신학, 종교철학, 종교학, 기독교 윤리, 삶의 영역 전체를 포함한다”71) 그야말로 ‘박(博)사’였다.

71) 박봉랑,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 48.

장공은 한국교회와 사회가 보여주는 1)복음을 문자무오설에 가두어 바리새적 책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위험, 2)몰역사적이고 타계주의적 신앙, 3)물량주의적 성장론에 빠진 세속화의 위험 등의 고질적 폐해72)에 도전하면서 역사적이고 사회 참여적 복음전파를 역설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신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하나님의 선교신학,’ ‘사건의 신학,’ ‘민중신학’ 등은 김재준의 현실참여적 신학의 가지라고 할 수 있다.73) 전경연은 장공이 “1970년대에 들어가서 그리스도교의 대 정부 마찰이 심해짐에 따라 김 박사의 모든 관심은 기장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와 민주화라는데 쏠렸던 것 같다”고 평가한다.74)

72) 김경재,『김재준 평전』(삼인, 2001), 157~61. 73) 주재용,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김재준의 사상적 위치”, 79.
74) 전경연,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하고 확보하신 분”,『장공이야기』, 371.

장공의 신학은 사회정치적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장공에게 사회참여 역시 생활종교인으로서의 신앙고백적 응답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주제는 1980년대 들어오면서 장공의 주된 관심은 ‘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로 집중된다. 그는 한국 역사의 그리스도화를 주장했었지만75) 이를 넘어선 전 우주의 그리스도화를 염원했다.

75) “우리는 이제 한국을 우리의 소재로 받았다. 우리는 한국 역사 안에 그리스도의 속량 역사를 조성하여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의 천국 역사로 변질시키는 업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크리스천은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 역사로 변질시켜 진정한 자유와 정의와 화평으로 성격화한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유동식, “장공의 백조의 노래”, 359, 361 재인용.

장공의 성서해석이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해석을 넘어 우주적 그리스도화를 염원한다면 구속사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해석이 하나님 중심으로 승화될 필요가 있다. 한 예로 안식일 본문에 관한 성서해석에서 장공은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뜻이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보다는 안식일이 각 시기별 어떻게 다르게 이해되어 왔고 그 해석학적 배경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수용하고 재해석한다면 우리는 좀 더 폭넓은 우주적 하나님, 그리스도를 본문 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장공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적 사유는 그리스도 사건은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 계시의 한 사건이라는 민중신학의 주장을 장공은 어떻게 수용할까 잠시 생각해 보게 한다.

3) 생명살림의 사랑공동체를 통한 계승

복음과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한 선구자의 투쟁으로 한신과 기장은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위한 사회참여적, 정의옹호적 학문을 펼칠 수 있었다. 포스트모던 신학의 전개이후 가장 많이 회자되는 질문 중의 하나가 해석의 자유의 범위이다. 즉 우리가 해석의 자유를 주창할 때,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면서도 하나의 신앙전통으로 묶일 수 있는 신앙공동체의 공통기반이란 없는 것이고 해석의 자유만 존재하는 것인가?하는 질문이다.

필자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해석의 자유는 해석의 기준이 되는 공동체의 이념, 이상, 종교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의 신앙에 기초를 둔 자유이다. 다시 말하면 해석의 자유는 “생명살림”이라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다. 우리가 성서의 문자에서 혹은 글 사이사이의 여백에서 읽어내고 의지하는 것은 그 본문이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구원사역을 어떻게 드러내며 그를 통해 독자(신앙인)들을 독려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실천과 그에 대한 헌신을 고백하는 해석공동체, 신앙공동체에 기반을 둔 성서해석이 참된 성서의 권위를 실현하고 그 안의 하나님의 영감의 권위를 최대화시키는 성서읽기를 실천하는 자이다. 장공의 성서해석의 힘은 그러한 하나님의 의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그의 성서관과 해석은 이단이란 비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근거가 되어 주었고 이후 민중신학을 비롯한 억눌린, 소외된 자들 즉 하나님의 의가 어긋남을 경험하는 자들을 위한 신학을 한신이 실천하고 만들어 나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김재준은 교회의 분열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밝힌 글, “편지에 대신하여”에서 자신을 바울과 비유하면서, “저[바울]가 신학교육에 공헌이 있느냐? 나도 그러하다. 사면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노회도 교회도 외면하고 지나갈 때 주의 막대기가 나를 붙드셨도다. 내 설령 마지막 숨을 내쉬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수백 명 후진을 생각하고 하늘의 별을 세일 수 있음을 자랑하리라”고 적고 있다. 신학교육을 담당하는 필자는 장공의 성서관과 성서해석을 살피면서 무엇보다 그 분의 예언자적 용기와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적 삶,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언제나 가벼운 차림으로 달려갈 준비가 된 청빈한 삶을 배운다. 신학자로서 지식의 무게에 눌려 자칫 마음 문을 닫고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도록 늘 깨어 자아성찰하고, 목사후보생들을 교육하는 자로서, 삶의 진솔함을 잃지 말아야 하겠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신학과 삶을 교감할 수 있었던 천지 김재준 선생님께서 미세한 음성으로 “자기의 학적 소신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고 들려주시는 말씀을 등불삼아 정진하리라 다짐하며 귀한 발제의 기회를 주신 長空기념사업회에 감사드리며 발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