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현대를 그대로 호흡하는 사상가 / 안병무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5 08:53
조회
364

현대를 그대로 호흡하는 사상가


안병무(전 한신대학교 교수)


[1] 소년시절에 만난 장공


소학교 5학년 때였던가, 새로운 소도시에 이사해서 입문하게 된 교회 생활에 열중하기 시작한 나는 중학교 으레 미션계인 은진으로 가야 한다고 마음을 굳혔다. 주변에서 그 학교보다 전망이 있고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공립학교로 가도록 권했으나 나에게는 가당치도 않는 충고였다.


집안 사정이 얽혀서 나는 자의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 년을 고용소년으로 지내다가 어머니의 간곡한 배려로 일 년 늦게 진학했는데 물론 학교는 은진이었다. 그때 경쟁률은 3:1을 약간 상회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입학 자체에 대한 기쁨은 별로 없었으나 기독교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자부심을 안겨 주었다.


입학 후 신입생과 선생과의 상견례 같은 모임이 있었다. 교장은 캐나다 사람이었고 선생들은 연전과 숭전 출신이 대다수를 점했고, 두세 명의 학사 출신인 일본 유학생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 오직 유일한 미국 유학생이 소개되었는데 그가 바로 장공이었다. 그는 교목이며 영어와 성서를 담당할 것이란다. 학벌로서는 단연 최고인 셈이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이므로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왜 그리 초라할까. 한복을 입었다고 기억되는데 그것도 몸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자그마한 체구와 얼굴에 아무런 권위도 존엄성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나란히 선 선생 중에 가장 초라한 모습이었으며 또 웬일인지 맨 뒷줄 구석에 서 있었다. 그때 짓궂은 곁의 아이의 귓속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뭐야. 이 학교 소사인가?”


우리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그에게서 배워야만 했다. 채플 시간에 설교는 물론 그가 주도했는데 내게는 단 한마디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신구약을 합한 두꺼운 성서를 들고 설교를 했는데 그 성서의 사이 사이에 종이들이 무수히 끼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성서를 많이 읽는 표적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그의 설명은 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주의 집중하지 않은 탓이었을까? 그러나 나만의 경우가 아닌 듯 싶었다. 그는 소년들에게 어울리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든 것 같다. 게다가 별명이 말해주듯 그의 시선은 천장과 벽만을 쳐다보았고(천벽 선생) 단 한 번도 청중을 보는 일이 없었다. 목소리는 아주 낮고 발음은 역시 좋구나 하는 중평이었으나 교수법은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날이 갈수록 드러났다. 어린 소년들에게도 그의 성실성은 점점 깊이 인식된 탓인지 존경심이 두터워만 갔다.


그때 그는 십자군이라는 잡지를 단독으로 내고 있었다. 그런데 말 못하기로 정평이 난 그의 문장은 소년들에게도 인정될 정도가 아니라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 “간도점경”(間島點景)이라는 글은 나를 매혹케 했다. 그 중에 한 대목을 적어본다.


“여기가 용정이래서 내려 역문을 나오니 마차를 타라고 자심히 권한다. 캄캄한 밤거리를 달리는 幌馬車의 요령소리가 이국 풍경을 자아내어 길손의 마음을 애처롭게 군다. 幌馬車 지렁지렁 말굽소리 시산하이 캄캄한 밤거리를 마음 없이 달리노라. 동무여 유랑 일생이어니 어디간들 못살리”


이 학교에는 학생들의 여러 가지 활동 분야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종교부였다. 나도 여기에 가담한 탓에 매 토요일 오후에는 종교부에 속한 소수의 학생들과 더불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와 대담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종교부 회원들 중에서 주일마다 시골에 파견되어 조직된 주일학교 중심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을 성서적으로 준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때 이 모임은 다섯 농촌을 선정하고 부원들을 파견했는데 같은 미션계인 자매학교에 해당되는 명신여학교에서도 지원 파견을 했다. 그 중에 한 시골에는 초라하나마 제법 교회 건물도 장만되고 아이들 외에 십여 명의 장정들까지 참여하게 된 오늘날의 개척교회를 방불케 하는 것도 있었고 아이들 십여 명을 모아놓고 노래를 가르치고 성경이야기나 해주는 작은 모임도 있었는데 이 종교부의 장은 지금의 강원용 목사였다. 그는 나보다 상당한 나이 차이는 있었으나 만학인지라 학년으로는 두 반 위였다. 그는 달변에다가 정치력도 대단한 노학생으로 그 분위기를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그러므로 그의 언동을 탐탁케 여기지 않는 학생들은 이에 가담치 않았는데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나는 그 모임과 별도로 내가 기거하는 시골에서 그와 비슷한 모임을 가졌는데 그것이 인정되어 그 다섯 개 중의 하나가 된 셈이다.


이러한 주변적 얘기를 언급하는 것은 장공의 다른 면을 한 마디 하기 위해서다. 그는 그와 정반대 성격의 강원용을 전폭적으로 밀어 주었다. 이에 불만을 나타내는 학생들의 소리에 그는 어느 날 이렇게 반응했다. “나는 말주변도 없고 활동적이지도 못하다. 그래서 바로 나와 정반대 되는 일이나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나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한동안 부흥사인 무디에게서 배우려고 그의 글을 번역하고 그의 전기를 쓴 일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은 한때 기독교계에 선풍을 일으킨 부흥사 김익두 목사에게 비롯됐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는 평소에 말이 없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들과 마주 앉으면 눈을 아래로 깔고 방바닥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피거나 창밖을 내다보면서도 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묻는 말에는 그렇다 아니다가 분명치 않고 언제나 글쎄 라는 말로 시작돼서 뒷말이 얼버무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우유부단성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무슨 일이나 함부로 타협하지 않는데서 잘 드러났다. 그래서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어떤 어른은 나에게 그를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타입의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침묵이 그에게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단정하게 했든 것이다.


별로 학생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가 서울로 떠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서울에 가서 대학 하나를 설립할 책임을 지고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 전체에게 충격적인 사실이 됐다. 우리가 대학 선생으로 모시고 있었다는 자부심과 아쉬움에서다. 그때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전체 학생회장이었던 나는 한 학생이 나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그를 미처 몰랐다는 말과 더불어 그와 이미 깊은 관계를 가진 나의 입장을 부러워하는 듯한 표현과 함께 앞으로 잘 봐 달라기라도 하는 듯한 아첨이 섞인 제스츄어를 취하던 것을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그는 내가 3학년 초였던가, 조선신학원을 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서울로 떠난 것이다.


[2] 해방 후에 만난 장공


해방 전에는 한두 번 일본에 오가는 길에 그를 찾았을 뿐 긴 단절이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상경한 나는 먼저 장공을 찾았다. 그는 나를 ‘어른’으로 깍듯이 대해주어 대담다운 대화가 가능했다. 나는 그때 시작하다 만 철학을 계속할 생각이 없고 사회과학에 관심하면서 경제학과 사회학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말없이 수염 없는 턱만 한참 쓰다듬은 그분은 이렇게 응수했다. “내가 이제부터 새롭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면 역사 내지 역사철학을 하겠소.” 이것이 약간 나를 의아하게 했다. 그래서 “신학 하신 것을 후회하신단 말씀인가요”라고 했더니 그는 “신학을 한 덕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몰라… 그러나 신학 자체는 결국 도그마에 부딪치거나 그것에 거점을 두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이 싫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때 그는 토인비를 탐독하고 있었다.


6ㆍ25가 터졌다. 나는 몇 친구들과 더불어 무모하게 「야성」(野性)이라는 잡지를 냈다. 그것은 월간이었으나 돈이 생겨야 낼 수 있었으며 부정기물로 출간된 50면 전후의 작은 잡지였다. 그러나 그때로는 유일한 기독교 잡지였다. 얼마 후에 장공이 「십자군」을 다시 내기 시작했다. 첫 호가 나오자 장공은 그것을 자세히 읽고 격려의 편지와 금일봉을 보내왔다. 그 마음 쓰심이 어떻게 힘이 되든지. 나는 전주에 주소를 두고 그 잡지를 인쇄하기 위해 삶의 반은 부산에서 보내야 했다. 그때마다 천막집으로 된 한신을 찾아 장공을 뵙는데 그때마다 그 잡지의 내용을 소상이 읽고 평가해 주었다. 그리고 대담의 기회가 있으면 교권주의에 대한 분노가 잔잔하게 베어 나왔다. 그때만 해도 그 가슴에 교권에 의해 추방됐을 때 품은 그런 불덩어리가 속에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모사는 아니었으며 따라서 당파를 만들거나 조직을 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간직한 특유의 성실한 인간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서울대에서도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시도했든 향린에도 몇 차례 그분을 모신 일이 있다. 그는 아무리 적은 수가 모여도 착실하게 준비된 원고를 들고 말씀했다. 말씀 중에 외도(外道)는 없고 낭비도 없다. 청중의 기호에 맞추거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증거다. 어느 친구는 이름으로만 알던 그의 설교를 듣고 그 내용은 한마디로 뺄 것 없는 명문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딴 친구는 안하무인의 자세라면서 그게 바로 교만의 표시라고 했다. 그렇게 겸손한 이가 왜 교만하게 보일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서 사람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들을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내적 신념과 달리하는 행동은 용납 못한다. “속은 뻔하면서도 우매한 사람들의 어깨에 메워져 끌려 다니는 사람” “사람은 안 된 채 말주변은 좋고 시세에 대한 감수성은 빨라 인기 영합에만 몰두하더니 이제는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니 세력에라도 영합할 수밖에”, 또는 “거기 먹을 게 더 많아 보이니 지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련한 자”라는 혹평도 기억나는데 “정치적 변절자”는 장로회가 갈린 후 태도를 어정쩡하게 하는 이름 있는 어떤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내가 49년인가 50년에 학생들의 요청으로 동자든 조선신학에서 키에르케고르에 관해 몇 차례 연속 강좌를 한 일이 있는데 사무실에 들리면 매번 “어 키에르케고르 선생”이라고 불러 얼굴이 뜨거웠는데 그게 대견하다는 칭찬이었는지 “네가 뭘 안다고”하는 핀잔이었는지 어리둥절했는데 그런 것이 사람에게 교만으로 보였을까?


[3] 민주전선에서 본 장공


긴 유학(遊學)에서 돌아오자 한ㆍ일 국교 정상화 싸움이 시작됐다. 그것이 아마 장공의 사회참여의 시작이리라. 그는 “나는 4ㆍ19가 터질 때까지도 정치의식은 없었어”라고 하셨다. “정치성이 있는 글도 몇 편 썼으나 쓰라니 원론적인 것을 쓴 것뿐이야”고 하셨다. 그러나 반일(反日)운동을 계기로 계속 원로로서 대표의 한 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공을 함석헌 선생과 더불어 운동권으로 끌어들인 데는 장준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나도 그에게 끌려나간 것이다. 하여간 그 덕으로 새로운 장에서 장공을 자주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운동가는 아니었다. 함 선생이 그랬듯이 단지 그 길이 옳으니까, 그리고 후배들이 필요로 하니까 응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한번은 민주운동의 ‘무용담’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고 오히려 그가 피동적으로 끌려 다닌 에피소드를 수식 없이 얘기하시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여러 번 저들과 부딪치면서 독재와 불의와의 싸움의 당위성은 신념화되어 실제로 움직이는 후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되었다.


겹친 사정으로 캐나다에 이주하게 됐다. 그때 그는 이미 그리스도교에만 갇힌 이가 아닌 한국의 지도자로 영접받았고 그의 뜻도 자유롭게 폈다. 70년 말인가 독일교회 후원으로 재독 한국사람이 국내문제를 위한 토론회를 갖기로 하고 뜻밖에 장공과 나를 강사로 초청했다. 선우 학원이라는 재미 교수도 장공을 동반해 왔다. 그것을 국내 구미를 연결하여 어떤 조직체를 만드는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모임에서 그리고 끝난 후 손규태 목사 댁에서 함께 지나면서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은 그 동안 사상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한 노인이 아니라 현대를 그대로 호흡하는 사상가였다. 그는 나에게 정중한 존대어를 쓰며 두서없는 나의 말에 연거푸 동의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거듭 쫓겨나고 감옥에도 끌려갔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내가 쓴 잡문들을 여럿 기억하여 하찮은 한 제자가 몸둘 바를 모르게 했다. 외지에서 그 짧은 재회가 왜 그리도 따스하고 행복했을까.


만년에 귀국하실 때 참 기뻤다. 나도 은퇴를 2년 앞두고 학교에 복직하여 그를 학교에서 종종 만나고 새해 첫날은 식구들과 함께 그에게 세배를 드리고 틈나는 대로 그를 찾았다. 그때마다 그는 그렇게 반가워했다. 그는 쉬지 않고 미발표의 원고를 손질하는 한편 새로운 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한국 사람이 오랫동안 자기 역사를 형성해 온데는 어떤 원동력이 있었을 텐데 그게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일이다. 그는 정말 일생의 구도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장기철 씨가 계기를 만들어 주었지만 만년에 함석헌, 이병린 씨와 함께 정기적으로 모여 앉아 공부를 하든 모습은 정말 회한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나도 우연히 한두 번 참여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세계사에 이런 노(老)아카데미가 또 있었으랴 하는 생각과 더불어 나도 비록 외양으로라도 저렇게 살다 죽어야지라는 다짐을 하게 했다.


그가 타계하신 후 첫 장공 기념 강연회의 첫 강연을 한 영광을 차지했을 때 정해준 제목 탓이긴 했으나 왜 한신대에서 낸 그의 장공 전집에만 의존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선생만한 제자가 없다고 하는데 한신에 그를 넘는 인물이 나올까? 나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