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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하고 확보하신 분 / 전경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5 10:25
조회
1712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하고 확보하신 분

전경연(한신대학교 명예교수)

나는 1966년 「사상계」잡지 4월호에 난관을 뚫고 이 잡지를 존속하게 하려는 장준하 사장의 청에 의하여 “한국의 석학”이라는 연속 논단에 제1회로 “김재준론”이라는 글을 썼다. 나의 깊지 못한 그분과의 접촉을 근거로 하여 감히 이 같은 글을 썼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의 학생들은 이 글을 인상깊게 읽었던 모양으로 내게 답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 글은 주재용 박사편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1986년 발행)이란 단행본에 수록되어 누구나 찾아 읽으려면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김 박사에 대한 나의 관찰과 사귐과 인상을 쓰라는 부탁을 받고 조금 당황함을 느끼게 된다.

[1] 김재준 박사와의 첫 만남

나는 일본 동경에서 지금의 동경신학대학의 전신인 일본신학교에 재학할 때에(1940년 이래)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의 말을 통하여 조선총독부의 한국 종교단체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평양신학교의 존폐가 요란스럽게 토의되고 있다는 사실과 서울에서 새로 시작한 조선신학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소식에 의하면 새로 생기는 이 학교에는 평양신학교와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고 탄복할 만한 특징들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식량과 일용품이 지독한 결핍과 전쟁의 공포, 생활고, 여의치 못한 수업상태 등을 겪으면서 겨우 8․15 해방을 만나고 이제부터 변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가 그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나와 몇 교역자들이 합심하여, 전쟁 중에 폭격과 화재에 의하여 회당을 모두 잃고 각 교회에 신자 몇 가정만 남아서 예배드릴 곳을 찾는 사람들을 모아 동경 중앙 간다구에 있는 한국 YMCA 건물 안에서 한 교회로 합하여 한인경동교회를 발족시켰다.

나는 전쟁 중에도 한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였다. 열한 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예배드리게 된 것도 기쁜 일이었으나 일본 전국에 동경교회와 마찬가지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교회들을 한 교단으로 결성하게 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1947년에 나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입학 허락과 장학금 지급 약속을 받은 후, 여권을 받으러 서울에 왔다. 태평양전쟁은 멎었지만 한국은 말할 수 없는 무질서와 불안이 감도는 곳이었다. 일본에 갔던 한국인들의 귀국인파에 끼어 나는 일본 규슈의 하끼다 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상륙했으나, 어디 머물지도 못하고 그 길로 서울행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나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서울에 와서 일본신학교 선배이며 한국복음교회 서울교회에서 시무 하는 지동식 목사님에게로 찾아갔다. 그의 사택은 전에도 한 두 번 간 일이 있어서 쉽게 찾았다. 이분의 신세를 두 달이나 지면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여권수속을 하는 등 애를 썼다. 이때 나는 서울역 앞 조선신학교로 찾아가 송창근 박사도 만났고, 그때 김재준 박사는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경동교회가 모이는 옛 가옥 이층에서 김 박사님을 만나서, 학교와 교회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가지 담화 속에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김 목사님은 자신의 유학생활을 회고하면서 그 유학생활은 쓰리고 험한 길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여러 차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조선신학교가 겪는 풍파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들이 보낸 자료 가운데, 김 목사님이 쓰신 “현대 세계신학의 동향”이란 것과 조선신학교 학우회지 「임마누엘」이 있었다. 당시에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규의 진상을 내 나름대로 적어서 당시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총무로 일하시는 존 카벤드리 스미스 박사님에게 보냈더니 그는 매우 격한 필치로 “당신들은 안으로부터 화합하고 의좋게 고난중에 있는 동포들에게 선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진상은 그렇구나’하고 반성을 해보았다.

나는 보스톤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1952년에 박사학위를 마친 후 한 3개월 머무는 동안에 김재준 박사님의 편지를 받았다. 그 속에는 한국신학대학 이사회의 교수청빙서가 들어있었다. 내가 나의 학업에 관해서나 학위 받은 것에 대해서 보고를 드리지 않았는데 이같이 청빙서를 받고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가부를 곧 알려드려야 했겠지만, 김 박사님께 내가 귀국한 후에 작정하겠다고 써보냈다. 그 시기에 나의 「일본신학교」선배이며 서울에서 목회 하시며 연희대학(현재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계신 지동식 목사님이 편지를 통해 귀국하면 연희대학에 와서 가르쳐 달라고 여러 번 청한 일이 있었다.

[2] 50년대의 김재준 박사-약진과 확신의 수행의 시기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맥아더 장군이 사령관에서 해직된 다음에 전선에서는 더 치열한 전쟁이 진행되는 때에 나는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 도착하여 나의 일한 곳을 작정해야 하였다. 귀국하는 도중에 일본 동경에서 이룬 새 가정을 이끌고 처량한 조국의 광야에서 나의 일할 방향을 확립해야 하였다.

김재준 목사님, 정대위 학감, 김종대 이사장 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여러분의 간곡한 권면에 의하여 나는 한신에서 일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부산에 와서 여러 사람에게서 제의를 받았으므로 사실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를 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이같이 한신과 인연을 맺게 되기 며칠 전에 대구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 박사의 제명과 그를 동조하는 현직 목사들을 배제한다는 결의가 있었다고 한다. 강원용 목사는 이 총회 석상에서 이제 ‘십년 후에 보자’고 고별의 연설을 했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등교한 한신 교사는 부산 남부민동 언덕에 학생들과 교수님들의 지극한 노고로, 군수 물자를 넣었던 통에서 얻은 널판으로 건축된 넓은 강당인 홀과 작은 다락의 교무실로 되어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천막으로 된 기숙사와 천막 교실들이 소위 캠퍼스라고 하는 것의 전부였다. 신학교의 온 가족들은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출애굽의 민족처럼 단합하고 희망에 넘쳐 있었다. 이미 김정준 교수, 박봉랑 목사 등이 유학으로 떠난 후여서, 가르칠 사람들이 부족하였다. 거기에 서남동 교수와 내가 함께 취임하게 되어 전진하는 표를 나타내었다.

김재준 목사님은 그 전쟁 가운데서 어떤 경로로 나오는지 모를 잡지「十字軍」을 그 개인의 책임으로 출간하고 계셨다. 그분과의 정다운 사귐은 아직 가지지 못하였으나 이 문필 사업에 협력하려고 작정하고 몇 가지 투고를 하였다. 영국의 맹인 시인 조지 마테슨의 신앙시를 몇 편 번역한 것과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이라는 연속물을 쓰게 되었다. 「십자군」 잡지는 목회하는 분들에게 신학적 소품, 세계 소식과 함께 빗발치는 한신에 대한 비난과 신신학이란 공격들에 대응하는 문필을 실었다. 나의 글들이 그 분투에 큰 응원병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신신학이 칼빈의 신학을 업고 나온다고 보이면 반대자들의 편벽된 인식이 완화될 수도 있고 실제 그런 효과를 내었다고 생각된다. 이 연속 기술은 그 후 2년 이상 계속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게 있어서는 이것이 『칼빈의 생애와 신학사상』이라는 단행본의 탄생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골로새의 이단과 현대교회”라는 성서연구도 여러 번 나눠 게재하였다.

서울로 수복한 후에 나는 학우회를 격려하여 단순한 수필이나 논설이 아니라 신학연구지의 역할을 하는 학우회지를 엮기를 권하였다. 그래서 「한국신학대학 학보」라는 표제로 연구지가 나오게 되었다. 김재준 박사는 그후 자주 강조한 구호인 “학에 충실하라”는 창간호 축사를 써주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신학교가 참으로 신 ‘학’을 하는 진리탐구의 전당이라는 것보다도 하나의 직업훈련소와 같이 다루어지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해융 보는 현상이다. 당장 위기에 직면해 있는 조급한 심정으로서는 그런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나, 그래도 그렇게만 나간다는 것은 결코 ‘대계’(大計)를 위한 교육자의 태도가 아니다. 구미제국에서 다년간 학업을 닦고 귀국한 모 일본인이 귀국소감을 말 한데 보면, 구미 특히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정말 ‘학문’을 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현학’(衒學)으로 되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독일에 있을 때 어떤 독일 평교인이 그에게 ‘미국에는 헬라어, 히브리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목사가 있다는데 참말입니까?’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김재준 박사님은 한신이 참으로 ‘학’을 진지하게 닦는 도장이 되기를 원했다. 더욱이 당시의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 신학방식을 거부하고 획득한 자유정신은 학문하는데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의 남용은 사도 바울도 경고했듯이(고전 6:12-10:24)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 하면 도움보다는 폐해를 가져온다. 학의 자유란 것이 세계 신학사조의 어떤 것이든 읽고 소개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신조와 성서안의 진리의 진수들을 버릴 자유는 없다.

김 박사님은 한신이 수유리 캠퍼스에 옮기게 된 것을 한신의 제3의 시대의 시작이라고 일컬었다. 그만큼 한신에 관련된 사람들은 지난 시기에 억압과 비방과 침체 속에서 출구를 모색하던 중 이제 그 역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고 전망하게 되었다. 한국의 교계도 한신을 괄목하고 관망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더 학구적이 되며, 그들의 좁은 진출 지역을 넓히려고 애를 썼다. 그 중에서도 한신의 선배들이 개척해 놓은 군목의 길이 좋은 일터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아울러 다른 선교의 문을 넓히려 애썼다.

「한국신학대학 학보」는 그 동안 다섯 권이나 발행됐고 김 박사에게는 이 시기가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십자군」이 호를 거듭했고 기독교서회를 통하여 논설들은 물론 스팬의 『목사학』, 투루불러드의 『가정생활의 재건』, 하크니스의 『윤리학』등의 단행본 번역이 그분을 통해 출판되었다. 이것들 보다 이전에 그는 문교부 도서 장려 기획에 의한 맥킨토쉬의 『현대신학의 제형』(1953)을 내었었는데, 그는 이 책을 자신의 가장 좋은 번역서라고 추천한다. 이것은 현대 신학자중의 칼 바르트, 부룬너 등 몇 사람의 사상 해설서이다.

1950년대는 김 박사에게 가장 약진과 확신 수행의 시기였는데, 이 시기의 종장에 가서 김 박사는 한국신학대학 학장 취임식을 가졌다. 1959년 9월 22일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왜 새삼스럽게 학장 취임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다. 명실 공히 그는 한신의 정신적 지주요 조선신학원 원장도 맡았었고 부학장의 직위도 가졌었고 한신과 기장의 지도 세력이었는데 사실 학장취임이라는 것은 여분의 일 같았다. 원장 또는 학장으로 김대현 장로, 유인구 목사, 송창근 박사 다음에 함태영 목사 등이 역임하였고 김 박사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만의 거물 학장 밑에서 학교의 재정과 운영이 말로는 이사회의 책임 아래에 있다고 하나 처리되기는 서무과장의 손으로 되고 있었다.

[3] 소용돌이와 탁류

그런데 김 박사가 학장에 취임하고 수유리로 옮겨서부터 학교의 재정 규모가 커지고 학교장, 이사장의 인장을 자유로 사용하던 사람들의 대담하고 불성실한 행위가 점점 노출되어 학교는 큰 소용돌이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 밖으로부터 오는 풍파를 받아넘기며 영웅스럽게 이겨 나가시는 김재준 박사님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이 무렵에 학교가 빠져 들어간 내부의 물결은 그야말로 세기말적이고 치욕적인 탁류였다. 우리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의 현황에 대해서 슬픔을 금하지 못했다.

수유리 교정으로 옮긴 후 학교의 제정규모의 확대에 반비례하여 수입원이 없다는 곤경에 허덕이게 되었다. 변변치 않은 급료지불은 여러 달을 거르기도 했고 학교운영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무과장인 조선출 목사가 학교 경리부에 기재되지 않은 가불금을 지출한다든지, 이사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은 남의 채무의 인수가 그의 수하의 방재황 씨의 소행이라고 전가시키는 매우 복잡한 경리적 비리를 당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 책임소재와 회계 정리가 문제되었다. 그래서 총회와 기장 지도층이 참가하여 진상을 규명하려 애썼다. 경리책임자를 두둔하려니 김재준 학장에게 책임이 물어졌으나 도저히 해결되지 않아서 학장은 세 번이나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는 수리되지 않았고 학교 관련자들 모두가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 교수단은 그 진상을 밝히는 “학장사임서 제출경위에 관한 해명서”라는 상세한 증빙과 계산을 모아서 의견을 진술한 40페이지의 인쇄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때 김 학장은 친히 창립 당시에 거주하고 고생하던 연고지들과 6.25사변 당시에 피신해 지내던 곳, 또 동자동 언덕의 옛 교사 지역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침울한 마음을 달래었다고 한다. 옆에서 그를 모시고 있는 교수들의 심정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4] 기장 50회 총회에서 부치는 글

이 풍파가 가라앉을 무렵, 제3공화국의 공무원 은퇴연령단축 정책에 의하여 김 박사는 1962년 62세로 정년 퇴임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칸트철학의 대가였고 『순수이성비판』의 번역자였던 한 철학교수는 표창 받는 자리에서 메달을 받고, 자기는 이제다 되었구나 하고 탄식 했다고 한다.

사람은 그 업적이 알려지고 못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 받을 수록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하겠다. 김 박사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세찬 시련에 거듭 정신을 가다듬어 그 흔적을 몸에 정중히 간직하곤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음 해에 나의 한신대 근속 10주년 기념으로, 내게 시편 1편을 서예로 써 주었다. 나는 이것을 족자로 만들어 간직하고 있다.

1965년 기장총회는 김 박사에게 총회장이 명예를 안겨드렸다. 그는 기독교장로회의 50회 총회에 부치는 글에서 한 네 가지의 총회에 대한 훈계를 하고 있다. 이것은 본교 연구지「신학연구」의 제9집에 실려있다. 첫째로 기장교회가 다른 여러 교파와 함께 선교하는 가운데 그 특징이 무엇인지 가리지 못하는데 이르렀고 또 현실에 급급하여 소속 목사님들이 제나름으로 선교하고 있을 때, 김 박사가 준 가장 뚜렷한 특징은 ‘고난받는 교회’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든 나쁘든 하나의 전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통에 기초하여 성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이 ‘전통’이란 것은 역사적으로 흐르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학문적으로 철저화하고 성서신학의 현대적 조류를 따라 세계적인 공헌을 하는 신학이 될 것과 현대적 문제를 신앙에 맞게 해명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는 총회 본관을 건립하여서 교인들이나 교역자들이 찾아갈 ‘고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넷째로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한 분파로서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지금은 서로 반성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장로교 교파들 사이에 교류를 확대하고 ‘장로연맹’을 결성하려는 조직 단계에 들어갔으니, 교파간의 ‘화해’의 봉사자로서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있다.

[5] 정의의 소리, 비탄의 소리, 그리스도적 훈계

1970년대에 들어가서 그리스도교의 대 정부 마찰이 심해짐에 따라 김 박사의 모든 관심은 기장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와 민주화라는 데 쏠렸던 것 같다. 1970년 9월에 창간한 「제3일」은 매우 넓은 범위의 필진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실리는 글들은 시국에 대해서 한마디씩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실었다.

「제3일」의 신학적 경향을 김 박사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신학적 견해에 엄격성을 보유하려고 애쓴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캐나다로 떠나면서 편집을 내게 맡겨서 한동안 내가 일했지만, 관련된 사람들의 불평을 많이 샀다. 그때에 많이 활용된 신학이 몰트만의 신학이었다. 그때에 굽이친 한국교회의 사상적 물결은 비상한 초급성을 띤 것이었고 「제3일」 잡지 자체도 무슨 항구적인 목표나 경제적 사상적 기반이 튼튼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항간에 떠도는 정의의 소리, 비탄의 소리, 그리스도적인 훈계의 소리 등이 그 안에 수록되고 인쇄되어 정당한 대금도 받지 못한 채 반포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언론의 현상이었다. 이 「제3일」 지는 김 박사가 캐나다에 두 번째로 가셔서 다시 돌아올 희망이 적은 1974년쯤 폐간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재준 박사는 목사요, 신학교수요, 교회목회자이며, 또 한국교단의 정신적 지도자요, 신학대학 학장이며 그리스도교 문필의 개척자였다. 그분의 따뜻한 목회자적인 심정과 많은 교계의 인사들과의 친분이 편지해 주듯이 남의 일을 잘 돌봐주시고 언제나 와서 강연과 예배를 인도해 달라며 사양치 않고 응해주시는 분이었다. 더욱이 학생들의 소그룹이 청하더라도 사양치 않고 가서 강연을 해주셨다. 어떤 때에는 결혼식에 오시기로 약속되었는데 가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날 아침에 아무 연락이 없어서 아마 연기되었나 싶어 못 가셨다고 들었다. 우리가 그분을 회상하는 것은 그가 만능의 지도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공로로 기억해야 할 것은 교권시대의 권위와 조직체가 다수라는 힘으로 신학의 표현을 통제하고 신앙고백을 위협할 때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타당성을 증언하여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 확보한 일이겠다. 그 다음으로 열거할 것은 그는 그리스도교 문필의 개척자요, 그 모범을 보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의 많은 분량의 글은 언제나 분출하는 심령의 샘과 같이, 일생의 전폭에 걸쳐 쉬지 않고 쓰신 것이다. 그는 캐나다에 가서도 「제3일」 지를 속간하고 많은 글을 남겼고 마지막 귀국 후에도 많이 쓰셨다.

우리는 그의 생애와 글들을 이 같은 의미에서 거듭 읽고 음미해야 하겠다. 그러나 신학이 수립되기 위해서는 이런 원심력 외에 구심력과 배타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이치를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김 박사는 성서본문을 사랑하여 성서 개설과 성서 주석을 썼다. 칼빈의 신학을 가르치셨고 칼빈의 전통을 사랑했다. 또 개혁교회의 정신을 배우는데 힘썼으며 바르트 신학을 늘 추천하였다. 또한 기장 교회가 ‘장로교회’인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장로연맹’을 결성하기를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