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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한국신학의 초석을 놓으신 분 / 강근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4 17:59
조회
871

한국신학의 초석을 놓으신 분

강근환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1] 장공의 사상, 인격과의 만남

내가 장공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나의 신학생 시절이다. 그것도 직접적인 상면 인사를 드린 만남이 아니고 정동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던 어떤 신학강좌에 참석하게 되어 강단에 서 계신 모습을 멀리서 뵈었을 뿐이다. 그때의 인상은 나에게 기대했던 것보다는 약간 실망이었다. 그것은 강의의 신학적인 내용보다는 외모적인 느낌에서였다. 내가 다니고 있었던 서울신학교의 교장이신 이명직 목사님의, 한복을 입으시고 긴 하얀 수염을 날리며 청아한 음성으로 사근사근하게 말씀하시는, 신선과 같은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신학대학의 학장이신 이 어른의 모습은 어쩐지 궁색한 표정에 답답하게 들리는 말씀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그 당시 어찌 이 어른의 고매한 인격성과 깊은 신학사상을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인가? 피상적이었던 유치한 그 시절의 나 자신 이었음을 되돌아본다.

나와 장공과의 만남은 당초에는 인간관계에서가 아니라 학문성에서이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고 그 분의 글을 통하여 그분의 학문과 사상에 접하였고 그분의 인격과 만남을 갖게되었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가 교회사이고 더욱이 한국교회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게 되면서 장공과의 만남이 있게 되었다. 이 또한 나의 한국교회사 연구의 큰 보람이 되었다.

정작 그 분을 만나 뵙게 된 것은 이국 땅 캐나다 토론토에서였다. 우리 한국은 70년대 말 10ㆍ26사건 이후 12ㆍ12 사태를 거쳐 80년대 초에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였다가 5ㆍ18 광주 의거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기하여 군부독재 시대가 다시 열리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민주화 운동은 국내외에서 더욱 크게 고조되었다. 이 때 장공은 토론토에 체재하시면서 북미주를 중심한 국제적인 해외 민주화 운동의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계셨다.

마침 그때에 나는 학교를 휴직하고 토론토에 와서 학위 논문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상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블루어 한인연합교회에 종종 출석하곤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장공의 아파트에 종종 찾아뵙고 이런 저런 말씀을 듣게 되었다. 사모님과 나란히 앉아 조용하면서도 또박 또박 하시는 정감어린 말씀은 소박한 인간미를 마음 깊이에 닿게 하여 오래 사귄 듯한 친근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였다.

[2] 제자도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지신 분

장공은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자신의 일생을 뒤돌아보면서 자서전적인 일대기로서 『범용기(凡庸記)』를 쓰시어 탄신 80주년 기념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1년 11월 1일 밤 토론토 블루어 한인연합교회에서 장공 김재준 박사 탄신 80주년 기념 『범용기』 출판 축하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 예배의 설교를 내가 맞게 되었다. 부족한 나로서는 분에 넘치는 일이었고, 그 분과의 관계에서 나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기념적인 사건이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장공의 바울에 유사한 제자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외모로 보기에는 바울처럼 위풍당당하지 못하고 언변 또한 유창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장공의 삶은 주님께 사로잡힌 바울과 같이 일생동안 줄곧 주를 위하여 진리와 정의 그리고 자유를 위하여 싸우고 달려가신 그 것이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장공은 제자도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정통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주님의 지상 생애 동안 부름 받은 12사도의 하나는 아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의하여 부름 받은 제자됨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인 것이다. 이러한 신념하에서 그는 온갓 비방을 극복하고 사도직을 끝까지 감당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장공은 원래 한국 장로교회의 적자로서의 평양신학교 출신이 아니다.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한국 장로교회에서 시무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닥쳤고 끝내는 면직을 당한 끝에 새로운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선도하는 지도적 역할을 감당하는 공을 세웠다. 예일대학의 펠리칸 교수가 “마르틴 루터는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인이었지만 그는 그를 대적하였던 수많은 로마 가톨릭 교인보다 더한 가톨릭 교인이었다”고 말한 바와 같이 장공은 한국의 어느 장로교인보다도 더한 장로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였다고 본다. 그는 교권과 독재정권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음에도 변함없이 줄곧 제자도를 외곬으로 지키며 걸어 가셨다.

[3] 한국신학의 초석을 놓으신 분

장공은 독자적인 한국신학 수립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다. 바울 사도는 이방 선교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복음을 이방 지역에 전파하기에 필생을 다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의 주된 일은 복음을 그 당시의 그레꼬-로마 문화권에 접목시키는 복음의 토착화 작업이었다고 본다. 다른 말로 한다면 선교적 신학 작업이었다. 장공의 생애 가운데 의미 있는 일은 일제 말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뜻 있는 한국 동지들과 함께 민족 독자적인 신학교육 기관으로서 오늘의 한신대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여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던 주입식 신학교육을 탈피하고 한국신학을 도모하는 doing theology를 지향하는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로 집필을 계속하여 무수한 저작을 남기셨고, 그분의 열린 신학방법적 신학사상의 물줄기에서 마침내는 民衆神學이란 한국신학이 꽃피우게 되었다.

[4] 진리로 자유함을 소유한 분

장공의 생애는 진리로 자유함을 소유한 삶으로 보인다. 바울은 물론 불가의 무애사상의 상징적인 존재인 원효의 삶과도 같이 진리를 따라 거침도 없고 막힘도 없이 사신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급함이 없이 항상 여유롭고 속박이 없이 자유롭다. 그의 삶은 맑고 청빈하다. 높고 낮은 사람 가림 없이 편안하게 대하고 포근히 보듬는 마음 씀이다. 사람을 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그러기에 그는 인권 운동에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거리에 나서 이를 억압하는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군사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장공이 그렇게도 염원하였던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되었음에도 아직도 어수선한 현금의 세태 속에서 장공 탄신 1000주년을 맞게 되는 우리는 그분의 빈자리를 아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