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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내 가슴에 간직한 사진 한 장 / 허광섭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4 17:45
조회
910

내 가슴에 간직한 사진 한 장

허광섭
(효동교회 담임목사)

기장의 어른이며 신앙안의 큰 어른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이라는 숫자가 하나의 매듭이 되었다. 백이라는 한 다발을 묶어, 신앙과 신학을 위한 기장의 시작이 되신 어른에 대한 존경의 예로 맞이하는 기념사업이 되어야겠다. 기장인 너와 내가, 하나 된 우리가 어른의 후예고 신앙과 영과 그의 정신과 삶을 지금 내 안에 닮거나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며 백주년의 물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만남이란 사람이 세상을 살며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 중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인격적 만남일 것이다. 그 만남이 있은 후 왠지 다른 것이 중요해 내가 두 번째가 되거나, 너의 목적을 위해 내가 필요해 도와준 것이 아니라 이용당했다면 어떨까!

장공탄생 100년을 맞이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 의미를 어른께 말씀드리면 어떻게 느끼실까? 듣는 것에 훈련이 안된 나는 글을 통해 어른을 향한 내 말만 하려고 한다.

[1] 내가 거길 왜 가!

1969년 가을로 기억되는 한신 분규사건 때이다. 두 가지 사건이 뒤섞여 있었다. 첫째, 교수퇴수회에서 시작된 교수 다수의 사퇴는 학장파 교수파로 나뉘어 데모했다. 둘째, 학생회 부회장으로 학생의 두 파로 나뉨 속에서 긴급 조직된 한신캠퍼스 수습위원회 위원장으로 수유리 진흙길을 걸을라치면 옆에 함께 거닐던 변함없는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한신대 운영 자금을 위한 퇴계로 한신빌딩 매입을 위해 소나무 밭을 매각한다는 결정이 있은 후였다.

학장과의 분열과 학생과 학생의 분열은 점점 관계 단절로 변해가고 있었기에 너무도 심각했다. 나는 해결책을 위해 수유리문화 주택에 권력으로부터 감시를 받으며 자택 구금상태에 계신 장공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너무도 담백한 거실 중앙엔 각목으로 틀을 만들고 흰 옥양목으로 덮개를 만들어 쌓은 일인용 소파가 있었다. 장공 선생님의 체격이 좀 작으셨기 때문인지 소파에 앉으실 때 두 발까지 소파에 올려 놓으시고 약간 옆으로 앉으시며 내 이야기를 침묵으로 들으셨다.

열변을 토하며 어른께서 학교에 들어오셔서 학생에게 말씀 하신다면 다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말씀 드렸다. 아무 말씀 않으시고 다 들으신 장공 선생님의 답은 오직 한마디 “내가 거길 왜 가!”였다. 침묵에 밀려 댁을 나왔다.

당시 5ㆍ16으로 학장직에서 교수직에서 연령제한으로 요즘말로 퇴출되셨고 학교와 이사회도 그 어디서도 장공 선생님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없었던 것으로 안다. 교단과 학교와 후배로부터 심한 버림받음을 겪고 더구나 감금이라는 정치적 감시와 억압에 어른은 혼자였다.

거기에 학생을 대표한다는 오직 또 하나의 주장을 절대화 시켜 어른에게 세상에 나설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른이 그렇게 싫어하신 논리와 상황의 절대화를 강요했던 것이다. 분명 존경과 함께 기댈 곳을 찾았으나 어른의 가슴을 헤아려 드림이 내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그 한마디는 지금껏 삶의 화두가 되고 있다. “내가 거기에 왜 가!”

[2] 계란 한판, 수박 한통

신학교는 한국에 한신대학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나에게 한신은 충격과 함께 성장의 곳이었다. 강단에 서신 장공 선생님은 때론 젊은이처럼 뒷머리가 살짝 길고 빨강 넥타이를 묶고 강의하셨다. 요즘 같으면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구두약이 잘 발라진 구두, 그것도 뒤축이 좁은 구두를 신으셨다. 이런 모습과 비춰진 삶은 당시 나에게 도전이 되었다.

71년 9월 7일은 나의 결혼일이다. 당시 경기도 양평교회(유병찬 목사님)전도사로 있으면서 집안 어른이 되시는 삼촌(최근목 목사님)과 함께 장공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하러 댁을 찾아뵈었다. 쾌히 허락하시면서 “허 군 결혼 주레는 내가 해야지” 하셨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어린 가슴속에 두 마음이 있었다. 어른이 날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과 어른으로부터 주례를 허락받았구나 하는 감격이었다. 결혼은 서울 성남교회당을 빌려 식을 올렸다.

왠지 사치스러운 생각이 들어 신혼여행은 계획을 세우고도 그만두고 일 주일 후 사례 인사차 장공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가난한 전도사이던 어른을 찾아뵈면서도 겨우 계란 한 판과 수박 한 통을 들고 갔다. 감사의 표시였다. 가난한 전도사였을까? 마음이 가난한 전도사였을까?

후에 알고보니 장공 선생님께서는 결혼주례를 부탁한 사람에게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때 결혼식 사진을 보면 주례를 하신 장공 선생님의 얼굴이 내 키에 반이나 가려져 있다. 나의 긍지 중 하나는 장공 선생님의 주례로 내가 결혼했다는 것이다.

[3] 빚이 아니고 빛이야 (마지막 사진)

86년 1월 1일 이른 아침 예년처럼 장공 선생님께 세배 드리려 갔다. 그때 목사님 댁은 수유리 도봉산 자락 6번 버스 종점 위 연랍빌라였다. 성북교회를 담임했던 나는 주일이면 장공 김재준 목사님, 박봉랑 목사님, 전경연 목사님 앞에서 설교했던 터라 동기나 후배들은 나를 선생님들 앞에서 설교한다며 '겁나는 목사'라고 했다.

내외분께 세배를 드리고 또 한해를 기억하며 할 수 있는 말씀을 전했다. 선생님은 “설교는 두 번하면 좋아지거나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지. 빛은 빚이라 하면 안 되지, 빛은 빛이고 빚은 빚이지” 하면서 빛과 빚 발음을 지적해주셨다. 장공 선생님 말씀에 긍지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고 말씀드렸다. 어느 해와 다르게 어른을 대할 수 있고 세배드릴 수 있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들고 갔다. “선생님, 사진 한 장 찍을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리고 거실로 모시고 나와 앉으시게 하고 사진기를 움직여서 거리와 광도를 조작하면서 두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인화한 뒤 한 장의 사진이 잘 나왔다 싶어 한 뼘이나 될 것 같은 크기의 액자에 넣어 어른께 찾아뵙고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댁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붓글씨를 써주시곤 하셨기에 나에게도 글을 주셨다.

장공 선생님이 별세하신 87년, 내가 찍었던 그 사진을 윗 배경으로 장례식장 안내 포스터가 나왔을 때 그 사진이 이렇게 사용되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그 사진만 남아 있다. 그러나 내 안에는 – 읽을 수 있고 지울 수 없는, 그 어느 사진보다 분명하게 작지만 – 크신 어른 장공 선생님이 살아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