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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그리스도인의 지성과 자유한 삶을 구현하신 분 / 이기영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4 17:05
조회
976

그리스도인의 지성과 자유한 삶을 구현하신 분

이기영(전남노회ㆍ은퇴목사)

[1]

내가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만난 것은 심산계곡의 요양지(전남 담양군 전북 순창군 군계지점 계곡, 일명 ‘가막골’[6ㆍ25 후 빨치산 본부였던 곳])에서였다. 그때 나는 광주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에서 폐결핵 치료를 받고 그곳에서 요양하던 중이었다. 여성숙 선생님(제중병원 의사)의 배려와 지도하에 병원 요우들에 의해 수년간 운영한 매점의 이익금으로 마련된 요양원이었다. 1961년 봄, 김재준 목사님이 이 요양원에 오셨다. 아마 일주일간을 지내셨는데 아침 산책과 명상과 독서 등으로 보내셨다. 그때 여성숙 선생님이 요양원 이름을 부탁드렸는데 평심원(平心園)이라 지어 주셨고 친히 현판에 쓰셔서 달아 주시기까지 했다(『범용기』 1권).

식사 후에 부담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일본 청산학원 유학시절의 이야기, 즉 청산학원 학풍은 매우 자유로워서 개인의 자유는 물론이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하셨다. 고학하실 때에 굶기도 많이 하셨고 어떤 때는 쌀을 물에 담그었다가 한줌씩 생식을 하면서 10여 일을 먹었노라고 회상하셨다. 그때에 정신과 총기는 더욱 맑았고 좋았다고 하셨다. 또 때로는 기숙사에서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막노동도 하셨고, 책을 잃고 무엇인가를 쓰기도 했다고 하셨다. 미국 프린스톤 신학에서는 보수신학의 메첸(G. Machen) 교수의 책들을 모조리 읽으며 근본주의 신학사상을 순례했던 이야기도 하셨다. 웨스틴 신학에서 신학연구를 본격적으로 하셨다고 감회 어린 이야기를 흥미있고 부담없이 해 주셨다. 듣는 자는 이종헌 목사(당시 한신대 1년 중퇴하고 요양중)와 나 둘이었다.

사실 나는 당시 제중병원 도서실에서 「십자군」 지를 읽었고 김재준 목사님을 마음으로 동경하고 있었다. 「십자군」 지는 내게 있어서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준 것이다. 김 목사님의 논문이며 수필식의 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다. 당시 나는 신학을 공부할 뜻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여성숙 선생님도 동석하셨는데 나는 김재준 목사님께 나의 신학수업에 대하여 말씀을 조심히 드렸다. 그때 김 목사님은 몸이 회복되면 한신대에 와서 공부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그 말씀이 새로운 기(氣)가 통하는 명령같이 들렸던 것을 고백한다.

나는 한신대에 가야겠는데 어디서 추천서를 얻지 못 했다. 그리던 중 김천배 선생님(당시 광주 YMCA총무)한테서 추천서를 받아 가지고 한신대에 갔다. 그 뒤로 나는 한신대에 입학되었고 김재준 목사님을 가까이서 다시 뵈올 수 있었다.

[2]

한신대에 입학하여 일 년간은 나의 건강을 시험도 해가면서 그런 대로 견디며 보낼 수 있었다. 김재준 목사님은 가까이 생각해 주시면서 또한 멀리서 지켜보시는 듯 했다. 나는 가끔씩 김 목사님 집을 방문하곤 하였다. 어느 날 방문했을 때 「하늘과 땅의 해후(邂逅)」라는 책을 주셨다. 이전에 「십자군」과 「사상계」 등에서 읽었던 내용도 있었지만 내겐 대부분 새로운 내용으로 열심히 읽고 생각하며 김 목사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나의 신앙형성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왔던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은 군복무를 계기로 하여 심령부흥회나 사경회 등에 열심히 참여하여 배우고 받은 신앙 양식(Style)이었다. 그때 성경을 열심히 빨간 줄을 치면서 열심히 읽었고, 새벽시간에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런 중에 신앙의 확신이 생겼고 성장하여 갔다.

다음 단계로, 병원과 요양생활을 하면서 독서를 얼마쯤 할 수 있었다. 문학전집이며 신앙서적, 성자들의 전기와 인물전기가 크게 배움이 되었고, 내적인 신앙자세 확립에 도움이 되었다. 은둔자들의 신앙양식은 은근히 동경되었고 진실해 보였고, 독신과 청빈생활이 그렇게도 매력적이던 때가 있었고 존경했다.

당시 제중병원과 그 주변에는 은둔형의 신앙인들이 넘나들었고 나는 그분들과 만나 대화도 하며 지켜보았다. 성서 공부에 열심이며 오로지 신앙만의 삶을 강조했던 무교회 신앙 그룹도 있었다. 전남과 광주주변 지역에는 은둔자들과 기인(奇人)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분들은 어울리는 보통 신앙인이 아닌 특별한 데가 있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로 특별한 부름을 받고 삶을 살아간 분들이다. 그분들은 나름대로 자유인이고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듯한 초탈한 분들이다. 아무나 쉽게 따를 수 없는 외곬의 길을 가는 분들이라 하겠다.

어쨌든 나는 이분들의 신앙적 삶의 스타일을 겪어가면서 나는 처음 단계의 신앙적 자세가 무색해지는 것 같고 무너졌다고 하겠다. 나는 그 당시에 성 프랜시스와 성자들의 전기를 읽으며 신앙의 모범과 청빈, 겸비, 진실, 사랑 등이 그리스도교의 중요 강령임을 확인했으며 오늘까지도 이점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셋째 단계로, 한신대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며 새로이 정립되어 갔다. 김재준 목사님은 나의 신앙과 삶의 방향을 새롭게 인도해 주신 스승임을 고백한다. 감히 그 어른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나에게 그의 고매한 인격과 학문의 글들을 읽고 배우며 영향받게 해 주시는 것 하나님의 인도로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오래 전 언제가의 나의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주신 글월에 “…남달리 이 목사를 많이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 사이를 20여년 이상 교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라고 하셨음을 기억한다. 그토록 크신 스승님, 큰일을 분망하게 하시는 중에서도 편지나 카드에 대한 답장을 놓치는 일이 없으셨다. 정성껏 필요한 격려말씀으로 적어 보내주셨다.

나는 실제로 김재준 목사님을 꿈 가운데서도 가끔 뵌다. 무엇인가 하시는 모습이며 때로는 말씀하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되는데 잊을 수가 없다. 그런 날들은 내겐 좋은 날이고 기쁘고 행복한 날들이다. 때로 나는 ‘내가 너무 철없이 김 목사님께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닌가, 또는 내가 김 목사님께 사로잡힌 것이나 아닐까’ 하고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김 목사님은 가깝게 계셔서 지도해 주시기도 하시지만, 멀리서 지켜보시며 모르는 척하시기도 하신다. 뵙고 무슨 말씀을 드리면 아무 말씀 아니하시고 듣고 계신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마디쯤 하실 때도 있다. 그 한마디의 말씀이 적중되고 마음의 결심과 용기를 일으켜 준다. 연로하신 중에 계실 때 찾아뵈었을 때는 상당히 자상하시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김재준 목사님의 자애 깊은 사랑과 돌봄을 잊을 수가 없고 사모님 또한 반드시 꼭 김 목사님을 따라서 그때그때 배려해 주셨다.

[3]

나는 대학원을 마치고 김재준 목사님이 「제3일」 지를 창간하시는 때에 상당 기간을 편집과 보급판로를 마련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당시는 나를 가족처럼 대해 주셨다. 「제3일」 지는 「십자군」 지와는 다른 의미와 성격으로, 사회 참여하시는 그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는 「십자군」 지에서 보수신앙과 교권주의자들의 무지와 시대착오적인 데 항거하여 진리를 증언하시는 모습을 배웠다. 그리고 「제3일」 지에서는 오늘의 의를 위한 고난과 억압과 역사참여에의 사명과 진실한 투쟁, 어둠의 현실에 묵시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노 투사이신 김재준 목사님을 지켜보았다.

김 목사님은 「제3일」 지 창간사에서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대로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았다. 그래서 첫날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다음날에는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악의 한계점에서 ‘됐다!’하고 개가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니다!’ 하고 무덤을 헤친다. 예수에게는 이 ‘제3일’이 있었다. 그의 생명은 다시 살아 무덤을 헤치고 영원에 작열한다. 제3일, 그것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 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 날이 없이 기독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고 피력하셨다.

창간 당시 「제3일」 지의 동인모임이 한 달에 한번 모여 편집 방향을 의논하곤 했다. 당시 기독교방송국에 상무로 일하시던 박형규 목사, 이화대학에 현영학, 서광선 교수, 고려대학의 이문영 교수, 가끔 오재식 선생 등이 주로 참여하셔서 글을 써주셨다. 어느 날 박형규 목사님이 김 목사님께 “지금도 어렵고 여건이 어려운데 어떻게 「제3일」 지를 계속 발간해 가시겠습니까?”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장공 선생님은 들리듯 마는 듯한 말로 “시작하면 다 되는 것이지 뭐, 여건이 별것이냐?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하고 하시던 말씀을 옆에서 들었다. 김 목사님께서 1974년이던가 캐나다로 본의 아닌 망명길에 오르시기까지 계속 발간하셨다.

나는 서울 금호동 가난한 지역 천은교회 목회를 했고 교회시무 9년 만에 영국 셀리옥(Selly Oak)대학에 일 년간 유학할 수 있었다. 영국 유학기간에도 캐나다에서 속간하신 「제3일」 지를 보내 주셔서 받아 읽었다. 나는 해외에 나온 김에 미국 쪽에 가서 학업을 계속하고픈 유혹이 일어났다. 그래서 여러 곳에 연락을 하던 중에 김 목사님께도 문안을 겸해서 근황을 알려 드렸다. 김 목사님은 다음의 내용으로 답신을 보내 주셨다. “목사는 평생 학도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영어도 읽을 수 있고 보는 눈도 트였으니 이제부터 목회에 충실하면서 중단 없이 학생 노릇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기본적인 고전과 현대신학과 역사발전에 대한 신간서적 등속을 구입하여 조금씩이라도 중단 없이 읽으며 생각하노라면 학문도 성격도 풀이 자라듯 자랄 것”이라는 말씀이다(『범용기』 3권). 나는 귀국한 후에도 내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회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4]

김재준 목사님은 성서의 생동하고 자유하는 복음의 진리를 위축시키고 왜곡시키는 모든 교리와 교권적 권위에 항거하여 교회개혁의 선두에 서신 개혁자였다. 그의 교회개혁 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본질상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50년대의 「십자군」 지는 이런 그의 교회개혁 운동에 뜻을 같이하고 봉화를 든 동지들의 교회개혁 의지에 대한 표출이었다. 기장(基長)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교파 설립이나 교회 분열로 보지 않고 교회개혁 운동으로 보고 해석해야 할 과제를 남겼다. 신학적인 의미에서나 국내외적인 세계교회의 흐름에서 볼 때 정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김재준 목사님은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신학적 주류에 병진함으로써 교회 신학의 주류에 동참해야 한다는 역사적 통찰을 하시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유산인 근본주의 교리, 교파주의 관념, 또는 서구 기독교 국가주의를 단연 배격해야 함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생동하고 해방적이며 자유의 복음을 이 땅의 역사 속에 심고 실현하려는 개혁의지를 가지셨던 개혁자였다.

김재준 목사님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진리와 겸손, 충성과 사랑, 청빈과 진리 순례자로서의 사명적 삶을 본보여 주신 스승님이시다. ‘예수를 믿으면’이란 것은 지성지애(至聖至愛)하신 인격이신 그리스도, 그분을 내가 만나서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인격인 Commitment를 의미함이라고 했다. 김 목사님은 20대부터 소유의 정상이해에 대하여 고민했노라고 했다. 그는 80평생을 무소유로 지냈고 지금도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거기에서 온전한 자유를 소유했다고 했다.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를 그의 수호 성자로 모셨다. 김 목사님이 “우리는 세계교회와 병진함과 동시에 전적인 그리스도가 인간생활의 전 부문에 주가 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하신 것은 ‘역사적’이란 의미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아’ 역사적인 존재로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실존의 자아 의식이며 고백이기도 했을 것이다.

[5]

김재준 목사님은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 하시는데 이 땅에서 그의 삶의 마감까지 일관하여 충성하셨다. 그의 신앙 성격은 예언자적인 신앙 성격을 언제나 풍겨 주셨다. 예언자들의 목숨을 건 항거 정신이 그의 심오하고 예리한 지성에 불타올랐다. 그분이 전개시킨 신앙적 삶과 신학적 사상은 우리 민족과 역사의 핵심 문제들과 깊이 연관되어 표현되어 갔다. 김 목사님은 ‘기독교 2000년’에서 참인간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모색하며 역사 속에서 바른 그리스도 이해와 한국의 새 역사를 위하여 그리스도 정신을 체받아 가는 새 시대의 기독교를 모색하는 진지한 그리스도인 상 추구에의 과제를 주고 있다(「사상계」, 1964. 2).

김 목사님이 역사참여에의 발걸음을 본격적으로 내디딘 것은 1965년 굴욕적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기를 들었던 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는 범교회적 반대운동에 핵심 내용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한국민족사의 한복판에서 신앙과 신학으로 무장한 동지들을 모아 「제3일」 지를 출간하셨다. 흑암의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당시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부활,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번혁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예언자적, 개혁자적 의지에서 비롯된 삶이었다.

그렇게 보면, 김재준 목사님의 개혁자적인 삶과 신앙의 동력은 단순히 교회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신앙적 체험과 높고 심오한 지성과 완성된 높은 인격에서 풍기는 영향력과 감화력은 우리 민족과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데 쓰시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 계셨다고 확신한다. 김 목사님은 기장 교회의 선두적인 역사참여가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민족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으셨다. 그는 우리 민족사의 저변의 흐름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비추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신 분이었기에 우리 민족의 살 길은 민주화 운동에 있을 것이라는 소신에 마지막까지 신실했을 것이다. 김 목사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지성과 자유한 삶을 몸과 정신, 인격으로 구현하여 주신 분이다. 그의 깊은 신앙체험의 표현과 개혁정신 의지, 그리고 민주화와 인간 존엄에 대한 열정과 사랑 등을 우리 기장인들에게 특별히 역사적 유산으로 길이 계승 발전시켜야 할 과제로 남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