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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처음 만남과 마지막 만남 / 김이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4 16:03
조회
851

처음 만남과 마지막 만남

김이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川流不息淵澄取暎 化被草木賴及萬邦
祝 金二坤 敎授 學海 壯途

위의 휘호(揮毫)를 장공 선생님께서 필자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신 것은 1980년 8월, 필자가 미국 뉴욕의 유니언(Union) 신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 유학생으로 있을 때 일이다. 캐나다에 머물고 계셨던 장공 선생님께서는 유니언 신학교 근처에 있는 인터처치센타(Interchurch Center)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뉴욕을 방문하시게 되었는데, 방문 기간 동안 적절한 쉴 곳으로서 필자의 학생 아파트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이 때, 필자의 아파트에서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하고 가신 것에 대하여, 비록 그렇게 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꼭 감사의 표를 하셔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장공 선생님께서는 모든 일정이 끝나 캐나다로 돌아가시자마자 이 글을 일필휘지 쓰셔서 곧바로 제게 우송해 주셨던 것이다.

많은 제자들이 장공 선생님의 “컬리그라피”(calligraphy) 한 두점 씩은 다들 갖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 이야기가 그리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내게는 매우 기억될 만한 일이 된다는 점 때문 만이 아니라 필자에 대한 장공 선생님의 생각과 바람이 무엇인지를 잘 읽을 수 있다는 유일한 문서 자료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이 이야기를 앞세우게 된 것이다. 즉 이 사건 속에는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깊은 애정이 면면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냇물이 쉬지 않고 흘러 거대한 바다를 이루고 그 기세가 또한 만방에 미치듯이 그 기개(氣槪)가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하여 바다같이 저 넓은 학문의 세계를 압도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스승님의 기원이 절절(切切)하게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의 능력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하지 못하여 보기보다 미흡하고 또 필자의 유니언 신학교 유학시절이 유신 말기와 전두환 정부의 출범 시기와 맞물려서 장공(長空)의 족적(足跡)을 충실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따르지 못하였다는 부족한 제자의 자성(自省)이 앞을 가린다. 이렇듯, 장공의 제자들의 그 뜻 바로 계승하지 못한 죄가 천추(千秋)의 누(累)가 되어 끝없이 길고도 먼 구만리 하늘에 사무치니 죄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뒤늦게나마, 장공기념사업회에 몸담아 그 뜻 되새기며 해마다 추모의 뜻을 되새겨 보지만 이 또한 부질없어 죄스럽기만 하다.

우리의 처음 만남은 촌부의 소박한 꿈을 만드는 일과성 의식(儀式)에서였다. 필자가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유리의 한국신학대학에 입학의 문을 두드렸을 때, 아마도 그런 일이 그 뒤로는 없었든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잘 나가든 기업체인 “삼성물산”에서 자회사의 제일모직을 선전하는 상업선전의 한 일환으로 양복 한 벌 만들 만한 제일모직 옷감을 전국 각 대학의 수석 입학자에게 상품용 선물로 나눠 주던 일이 있었다. 참 좋은 질긴 옷감이었다. 그 옷감으로 대학제복을 만들어 입고 대학 4년 졸업할 때까지 단벌신사로 대학을 끝마쳤으니까 가난한 신학생에게는 일종의 신의 은총이나 다름 없었다. 그 때 장공 선생님은 학장 취임 초의 가슴설렘의 시기를 맞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어느 날 아침 채플(당시 둘째 수업 시간은 채플 시간이었다)에 느닷없이 김재준 학장님이 예배시간 광고 시간에 큼직한 “제일모직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와서 수석 입학자에게 시상을 하신다면서 “김이곤 나와”라고 하시었다. 당시의 필자 모습을 선배인 김대선 목사(현재 전주 신흥교회 담임 목사)는 전혀 기대 이하의 촌뜨기 모습이었다고 전해 주고 있는데, 장공 선생님은 단상에 오른 필자에게 미완성 문장의 매우 짧고 쬐끄만 목소리로(수사적 언어가 전혀 없이) 불쑥 그 제일모직 상자 하나만 쑥 내미시면서 “이거 제일모직…”하시었다. 정확한 기억으로는 그 순간 교수님 몇 분이 겸연스럽게 웃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의 만남이 장공 선생님과 필자의 첫 인격적 만남이었다고 하겠는데, 어린 마음에, 이 일이 나의 학창 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로 남게 되었고, 그 제일모직 상자를 내미시든 장공 선생님의 모습, 저토록 유명한 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역시 고지식한 촌부의 모습 그대로였던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그 소박한 인상이 아직도 내게는 되돌아가 보고픈 그 그리운 신학의 고향이다. 이 기억은 또한 수유리 캠퍼스에 봄이 올 때면 언제나 떠올리게 되는 가슴 설레게 하는 학창시절의 추억이다. 해마다 설이 되어 세배를 갈 때면 늘 나는 그 때의 그 “짧고 쬐끄만 목소리”를 듣는다. 아마도 해마다 설 때면 걸러 뛰지 못하고 꼬박 꼬박 우이동을 찾아 간 이유는 이 추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은 한양 대학교 병원 병실 침대 위에서 이루어 졌다. 전혀, 환자가 아니시었다. 임종을 맞기 위한 입원이라서 병실에서 뵙게 될 장공 선생님의 예상모습은 산소 호흡기를 코에 꽂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충격적일 정도로, 장공 선생님의 이 때의 모습은 전혀 환자가 아닌, 이른 바, 건강한 분이 복잡하고 피곤한 직장을 피하여 잠시 병원으로 피신하여 쉬러 오신 분의 모습과 같았다. 물론, 그 날 뒤 이삼일이 되었을 즈음에 일반적 예상대로 소천(召天) 받으시었지만, 이 날의 만남도 또한 처음의 만남 이상으로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 매우 인상 깊은 만남이었다.

이 날도 늘 하시는 어법으로 “이고니(=이곤이) 왔어?”하시면서 병문안을 맞으셨는데, 언제나 그러셨듯이, 재담(才談)으로 문병객을 맞으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을 예상하고 입원하신 분 답지 않게 죽음 앞에서 참으로 초연하게 결코 자세를 흐트러뜨림 없이 담담한 모습으로 말씀하시었던 그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던 모습은 ‘일종의 유언(遺言)의 형식으로 이 보잘 것 없이 부족한 내게 “학교일”을 부탁하시던 모습이다. 신학교가 종합화된 이후 맞는 위기를 누구보다 절감하고 계셨던 분이셨기 때문이었다. “신학교육 잘 부탁해. 일반학부와 신학부 사이에 있는 갈등, 부끄러운 일이니 잘 극복해 주기를 바래”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오른 손인지 왼 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아마 오른 손?), 나의 오른 손 손바닥의 손금과 일치하셔서(막쥔 손바닥이셔서) 손을 좀 더 오래 쥐고 선생님의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 본 기억이 생생하다.

장공 선생님은 1986년경(?), 종합대학이 된 학교가 재정곤란에 직면하여 수유리 캠퍼스 매각 문제 논쟁으로 시끄러웠을 때, 명동 세종호텔에서 열린 ‘수유리 교지 매각 청문회’에 오셔서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가 종합화에 실패하고 신학교가 따로 떨어져 나오게 된 일을 예로 들면서 ‘김 추기경이 명동성당을 파는 일이 있다 하여도 수유리 캠퍼스는 팔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시고 수유리 교지 매각을 강력하게 반대하시었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 판단이 옳았는지는 역사가에게 맡겨 둘 일이지만, 학교에 대한 진실한 애정만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로, 소인배들과는 다르셨다(!!).

죽음을 예정해 놓고 입원하신 자의 모습으로서는 너무 건강하시고 그 자세가 너무 곧고 그 언어가 너무 분명하셔서 마치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다시 쓴 두 계명 돌판을 들고 하산할 때의 그 광채난 모세의 얼굴이 연상되었다. 그 두 돌판이 장공선생님의 손을 통하여 아직도 우리 손에 넘겨져 있으니 장공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우리 후학들에게 넘겨진 그 신학교육의 사명이 더욱 새로워져야 하겠다. 이렇게 하여, 장공 선생님과의 나의 마지막 만남은 신학교육의 계승이라는 뜻깊은 전통의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