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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 김상근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4 15:15
조회
902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김상근 목사

[1] 땔나무 이어 나른 학장 사모님

고등학교 시절 나는 내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여 굉장히 방황하였다. 지금쯤 와서 보면 대단한 삶을 산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내 일생을 던질 곳을 찾기 위해서 제법 실존적 고민을 심각하게 했었다. 주변의 권고가 각각이고 내 처지가 요구하는 진로도 또 다른 것이었다. 스스로의 결단 없이 나는 결국 전기공학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 학기를 다 가지 못하고 도대체 전기공학을 전공해서 무슨 꿈이나 보람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2학기 중간에 학업을 포기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 심취해 있었기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철학자 풍의 고민도 했다. 바로 그때 참으로 우연하게 『낙수 이후』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나는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거기에서 무슨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았다. 저자는 김재준 목사였다. 그 존함을 처음 접한 것이다. 그 직후 나의 형님으로부터 『주기도문 해설』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을 선물 받았다. 역시 저자는 김재준 목사였다.

이 두 책이 나를 신학생이 되게 했다. 얼굴조차 뵌 적이 없지만 그 분이 교수로 계시는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서 그 분의 가르침을 받기로 작심했다. 아직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은 없었다. 목사는 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의 힘을 묶어 이 나라 역사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일에 헌신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갖게 되었다.

입학고사의 구두시험에 들어갔다. 나는 비로소 김재준 목사님을 뵙게 된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교수님들이 죽 앉아 계셨다. 대답을 하면서 여러 번 둘러보았지만 사진에서 익힌 얼굴을 찾아내지 못했다. 고사장을 나와서 누가 김재준 목사님이냐고 물었다. 그 분은 지금 캐나다에 출장 중이셔서 안 계시다는 것이었다. 무슨 실망감 같은 것이 마음을 스쳤다.

캐나다에서 학장 김재준 목사님이 돌아오신다. 우리는 본관현관에서부터 학교의 저 입구까지 한 줄로 도열하여 서서 그분을 환영했다. 뵙고 싶었던 분이 드디어 우리 앞을 걸어올라 오신다. 풍채도 당당하고 위엄과 권위로 틀이 잡혀진 학장 선생님을 상상했었으니 우리의 상상은 상당히 빗나간 것이었다. 선배들에게 실망감을 내비쳤더니 그 어른의 별명이 ‘숯 장사’란다.

수유리 캠퍼스에 학장 공관이 있었다. 앞 쪽 창호에는 유리를 끼었지만 뒷쪽에는 넓게 편 가마니로 막아 놓은 문도 있었다. 마침 회갑이 되셔서 학교가 서둘러 잔치를 마련했고 우리 학생들은 문갑을 선사했다. 그 어른 방에 그 때까지 문갑 한 짝이 없었다. 학교에 입학한 초기에는 사모님이 누구신지 알아내지 못하였다. 사모님 연세쯤 되어 뵈는 분이 공관에 드나드시기는 하는데 그분을 사모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화계사 뒷산에서 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내려오시는 것을 너무 자주 보았고, 나무를 해서 머리로 이어 나르는 분을 학장 사모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장공으로부터 청빈을 배우고 있다.

[2] 젊은 놈이, 잘못한 것 없으면 나가서 해

1960년, 우리 학교는 소위 전기 애자 수출 횡령사건이 발생하여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교수나 학생들 모두가 두 갈래로 나뉘어 치열한 싸움판을 벌였다. 당시의 학도호국단이 지나치게 체제유지적 입장을 취한다고 본 일부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민주화와 자주화를 이슈로 내걸게 되었다. 애자사건과 맞물려 학도호국단 개혁까지 겹친 싸움이 되었다.

마침 4ㆍ19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우리 학교의 역사 어디에도 그 때의 한국신학대학의 사실을 기록한 흔적이 없다. 사실 우리 학생들은 3ㆍ15 부정선거에 격분하였지만 학교 내부 싸움에 휘말려 조직적 저항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학생의거에 참여치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4월 19일 고려대학교 학생으로부터 학생들을 데리고 혜화동 쪽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내가 받았다. 학교는 이미 앞의 사건으로 해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우리 학생들은 20일 아침 혜화동 쪽으로 갔다. 학생이랬자 몇 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선교 쯤에서 우리의 흔적은 없어졌다. 군중 속에 섞여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조직적이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수의 학생들이 시위대에 동참했다. 부상자들의 치료를 위하여 집단적으로 헌혈을 하기도 했다.

의거의 파도가 일단 지나가고 어느 정도 평온을 찾게 되었다. 우리 학교도 정신을 가다듬고 정상수업을 하게 된 날 오랜만에 전교생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장공이 설교하셨다. 설교대에 나오셔서 자꾸만 우시는 것이었다. 평소 목소리도 크지 않으셨고 발음도 분명하지 않으신 어른이 우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시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슴으로 충분히 알아들었었다.

“우리 기성인들을 용서해 달라. 너희들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용서해라. 앞으로 너희가 길거리에 나서지 않게 하마. 너희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나서겠다. 너희는 이제 공부해 달라.”

그 후 장공은 우리가 아는 대로 역사 일선에 서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보다 한 발 앞에 서셔서 악과 맞서 싸우셨다. 제자들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는 스승, 그리고 실제로 회개의 삶을 사신 스승은 지금도 우리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가르치고 계신다.

4ㆍ19 직전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학생들 사이의 싸움으로 학교수업이 안될 때였다. 어느 날 친우 김경재가 나를 기숙사 자기 방에 잡아 둔다. 영문도 모르고 머물렀는데 학생과장 박봉랑 교수님을 방까지 인도해 왔다. 밤새도록 설득을 하시는 것이었다. 학교가 수업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학장님의 상심이 얼마나 크시겠으며 그러니 날이 밝으면 학장님께 같이 가서 사과를 드리자는 강권의 말씀을 하셨다. 처음에는 완강히 버텼으나 선생님께서 하도 간절하게 부탁하시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침에 학장실로 찾아갔다. 마침 계셨다. 나는 박봉랑 교수의 뒤를 따라 함께 책상머리에 섰다. 박교수는 깊은 사죄의 말씀을 사뢰셨다. 조금 긴 말씀이셨다. 학장님은 보시고 계시던 스크랩 책에서 눈을 떼시지 않으셨다. 들으시는 것인지 아무 말도 안 들리시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박 박사님은 조금 떠시는 것 같았다. 나도 약간 떨렸다. 학장님을 그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뵙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돋보기 안경 너머로 나를 치켜 보신다.

“김군, 너는 왜 왔어?”

“저는 별로 잘 못한 일이 없는데 목사님이 가서 사과를 드리라고 하도 조르시기에 왔습니다.” 얼떨결에 드린 말씀이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누가 사과하란다고 사과하러 와? 젊은 놈이, 잘못한 것 없으면 나가서 해”

나는 나가라는 말씀은 분명하나 돌아 나오기는 했지만 순간 그게 무슨 뜻인지 혼돈이 일어났다. ‘학내 소요가 있더라도 계속해 투쟁을 하라시는 것인가? 그렇구나! 옳은 일이면 해야지 주저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의 장이신데, 따라서 정상화를 이루는 일에 급급하실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장공은 수업도 중요하게 여기셨겠지만 바르게 행동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하게 여기셨다. 어쩌면 한 시간의 수업을 더하는 것보다 행동을 위한 결강이 값질 때도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정상적인 것이 좋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비정상이 본질적 정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3] 캐나다로 떠나시던 날의 제자들

1960년 4ㆍ19 이후 장공은 학생들 앞에서 아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선언한 대로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서 역사 전면에 서셨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시기 시작하신 것은 소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운동부터였다. 나는 그 즈음 장공은 물론 전경연, 문동환 교수의 심부름을 했다.

수많은 사건이 연속되었다. 장공은 길고 험한 민주화운동의 좌수격이셨다. 언제나 조용하시고 느리셨다. 말수가 거의 없으셨다. 누구를 설득하려 하시지도 않으셨다. 그런데도 그는 운동의 핵이요 기둥이요 상징이셨다. 우리는 그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 힘을 얻었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함석헌 선생님이 같은 몫으로 서로 손을 잡고 민족을 이끄셨다.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로 떠나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민을 가신다는 소문도 떠돌아다닌다. 우리는 괴로웠다. 이런 난국에 어떻게 이 나라를 떠나실 수 있다는 말인가? 비겁한 짓 아닌가? 우리가 알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싸우라고 버리고 가시는 것인가? 어려워서 여쭈어 볼 수는 없었지만 불만과 궁금 그리고 섭섭함과 아쉬움 같은 것이 뒤범벅이 되었었다.

공항에서 작별을 했다. 여전히 무뚝뚝하셨다. 별 말씀을 안 하셨다. 왜 떠나신다거나 당부의 말씀이나 심지어 곧 돌아 오마하고 하시는 의례적인 말씀도 없으셨다. 약간 웃으시는 것 같은 표정이셨는데 그렇게도 무표정하시던 장공의 두 눈에 눈물이 잔잔히 고인다. 우리는 그저 헤어졌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스승을 잃고 각자 제 본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가졌음직한 허탈감을 지니고 공항 길을 거슬러 시내로 돌아왔다.

박형규 목사님이 노래를 부르신다. 우리는 얼른 배웠다. 물론 젊은 연인들의 노래다. 그러나 우리의 심정을 너무 잘 담고 있었던지 우리는 쉽게 배웠다.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가사를 쓰면 이런 것이다.

바닷가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의 미소까지 그렸지마는
아 -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장공을 떠나보낸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펐던가! 그리고 과연 무엇을 생각하셨던가를 알 수 없어 얼마나 우리가 괴로웠던가! 장공의 마음은 무엇인가!

[4] 기장성이란 것은 확실히 있습니다.

1982년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의 직을 맡게 되었다. 내 설계에는 없던 뜻밖의 일이었다.

캐나다에 계셨던 장공에게 보고의 서신을 드렸다. 그 후에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보고를 드렸다. 필요한 경우에 하교하시는 글을 자세하게 적어 보내 주셨다. 글마다에 기장과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뜻이 넘쳐 있었다.

“기장이 30주년을 맞이한다니 하느님 은혜 망극합니다. ‘기장성’이란 것은 확실히 있습니다. 없다면 하느님께서 따로 세워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는 ‘게토’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겸손하게 교회와 사회와 세계를 섬기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중략) 형편 닿는 대로 장공은 귀국하렵니다. 여기서는 너무 편한 팔자인 것 같아서 하느님께 죄송해 집니다. (중략)
귀국하여 그립던 고국산천을 (중략)
그 동안에 38선이라도 트이면 방랑범위가 넓어지기도 하겠지요. 꿈 같은 얘기 외다.”

참으로 10년 만에 김포공항에서 장공을 맞이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출영 하셨다. 우리는 다시 감격스럽게 만났다. 어느새 80 노인이 되셨다.

장공이 오셨으니 당국이 긴장하고 또 회유도 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수렁에 밀어 넣으려고도 할 것이 분명했다. 여러 분들이 상의하여 이우정 선생님과 나에게 장공을 보필하는 책임을 지라 했다. 장공에게도 말씀을 드렸다. 장공은 참으로 어린아이처럼 일일이 물으셨다. 정부기관 인사나 정치인 그리고 정보기관 인사 등 교회나 친지가 아닌 경우의 접촉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결재(?)를 받으셨다.

당신이 실수를 하시면 주변에 미칠 영향을 크게 염려하신 것이다. 또 제자들이 지어주는 밥을 잡수시고 싶으신 응석 같은 것도 있으셨던 것 같다. 제자를 다 큰 제자로 대해 주시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장공은 큰 스승이시다.

1983년 기장 총회는 위기감이 돌았다. 그 여름에 있었던 WCC 총회에서 강원용 목사께서 의장 중의 한 분으로 선출되실 것인데 박형규 목사 등이 방해하여 좌절되었다는 인식이 한쪽에 있었다. 정치노선의 차이가 약간 있다고 하여 자기 교단 선배의 의장진출을 방해하는 것은 교단을 해친 행위라고 규탄했다. 박형규 목사 등 교단의 주류 그룹의 전횡을 이번 기회에 단단히 교정해야 하겠다는 으름장이 번뜩였다. 물론 나는 주류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선 강 목사님을 찾아갔다. 상당한 부분이 오해되고 있다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말씀을 드렸다. 강 목사님은 납득하지 않으셨다. 내가 드린 말씀을 받아들이시지 않으셔도 좋으니 WCC 보고 시간에 강 목사님이 총회 장소에 나오시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만약 나오시거나 또 무언가 말씀을 하시면 혹시 우리 교단이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고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강 목사님은 그 시간에 나와야 하겠고 꼭 말씀을 하시겠다고 우기신다. 물론 교단이 갈라지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노력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일단 발언대에 서시면 자제가 어렵기도 하려니와 강 목사님의 의장 낙선을 애석해 하는 분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위기였다. 한 밤 중에 수유리 장공 댁을 찾았다. 사연을 말씀 드리고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으니 총회 장소에 함께 가셔서 앞자리에 앉아 계셔 주셔야 하겠다고 부탁드렸다. 한참 생각하시다가 그러마고 대답하신다. 됐다 싶었다. 장공이 앉아만 계셔도 피차에 절제를 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장공을 모시고 총회 회의장으로 갔다. 앞자리에 모셨다. 상황은 내 예상과 기대대로 였다. 장공의 권위와 위엄으로 위기를 무사히 넘긴 것이다. 위기가 지는 것을 확인하셨던지 슬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가신다. 지금 우리를 크게 묶어주는 큰 틀을 우리는 잃었다. 그러나 장공의 뜻이 우리를 여전히 묶어주고 있다.

1987년 민주투쟁의 고비에서 장공은 소천 하셨다. 그러나 그는 결국 대통령직선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 보셨다. 어느 날 내게 만약 직선제가 되어 선거에 임하게 되면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짧으나 명료한 이유도 말씀하셨다. 물론 지칭하신 사람을 지금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장공은 선택이 분명했다. 냉소적이거나 양비론의 점잖은 놀음을 거부하셨다. 언제나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하는 행동하시는 스승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