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도토리 속에서 상수리나무를 보는 교육자 / 김경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27 11:09
조회
177

도토리 속에서 상수리나무를 보는 교육자


김경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1] 생각하지도 않았던 큰 선물을 받고


1959년 이른 봄, 춘삼월이라지만 아직도 바람은 싸늘한데, 수유리 신학대학 예배실 맨 뒷줄에 앉아 입학식에 참여한 무등산 어린 학생은 스스로 감읍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 배경으로나, 성장의 과정으로 보나 내가 복음을 위해 평생을 거룩한 제단에 바치는 사도직의 반열에 선다는 것은 기적이요, 이해할 수 없는 돌연변이 같은 은총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세 전후 청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인간적으로 말하면 너무 일찍 종교문제에 골몰하게 되었고,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령님의 인도로 신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종교적 통과제의 체험을 하고 복음서를 읽는 중에 복음의 희열로 이미 마음을 제단에 바치기로 작정한 무등산의 더벅머리 소년에게, 한국신학대학이라는 신학교육 기관과 장공 김재준 목사라는 분을 처음 소개해 준 이는, 빛고을 광주 동부교회 백영흠 목사이셨다. 그분에게서 세례를 받고, 장공 문하를 찾았다. 육신의 부모를 떠나 정신적-영적 부모를 찾아 순례길에 오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산하가 흰 눈으로 새하얗게 덮여 있고, 집이라고는 한 채도 안 보이고, 밤이면 수유지서의 호롱불만이 깜박깜박 조는 산속 수도원 같은 캠퍼스에 들어온 것이다.


나의 기억으로는 입학식 때 장공 선생은 외국에 나가 계신 듯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한 해가 지난 후인가, 봄학기가 지났을 때인가, 과묵한 인상의 한 선생이 조용히 캠퍼스를 거니셨다. 장공 선생의 걸음이 천근 같아서 그 걸음걸이 속에 그 분의 인격의 무게가 다 실려 있는 듯했다. 장공 선생은 학생들 하나하나를 자상하게 불러서 상담을 하거나 친절한 격려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없는 큰 감화 아래 있었고, 그분은 말이 없으셨지만, 모든 학생들을 다 알고 학생 하나하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기숙사 식비 걱정까지 다해 주시고 계신 것을 알았다. 훨씬 훗날 필자가 노자 『도덕경』을 읽는 중에 “천지는 편애하지 않고, 자애롭지 않다. 그래서 도리어 만물을 덕으로써 편애 없이 키운다”는 말씀을 읽게 되었을 때, 장공 선생의 인격을 두고 한 말 같음을 느꼈다.


장공 선생님은 무언의 감화를 하시는 교육자요 목회자이셨다. 필자의 성격은 못나고 수줍어 감히 선생님을 찾아가 학문과 신앙과 장래 진로에 대하여 상담을 해볼 엄두도 못 내었다. 내 기억에 현실 시간 속에서 흐르는 현실 역사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의 상관 관계가 어떤지 그 수수께끼가 도무지 풀리지 않아, 채플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장공 선생님께 여쭈처 보았던 것이 직접 말을 건네 본 유일한 기억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질문을 했는지 모르나, 2학년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고, 문제인즉 영원한 종교의 난제요 신학적 문제였던 것이다. 영원과 시간의 관계요, 본질과 현상의 관계요, 불교 원효더러 말하라 한다면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의 상관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장공은 시건방진 학생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탓하지 않으시고, 무어라고 친절하게 답해 주셨다. 무어라고 답해 주셨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말씀을 해주셔도 알아듣지 못할 정신적 연령의 때이다. 나의 인상에 오래 남은 장공 선생님의 인상은 도토리들의 그 철없는 질문 속에서 상수리 나무의 가능성을 보시고, 끝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교육자로서의 모습이다.


그 뒤 세월이 훨씬 지난 뒤에 안 일이지만, 장공 선생은 어느 시골 교회 전도사가 보내온 성탄 카드에도 일일이 답장을 촛불을 밝히고 써 보내신 분이셨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자상하지 못하고, 자상한 일에 섬세한 사람은 큰 생각을 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우주와 역사 전체를 가슴에 품고 일하시면서도, 작은 학생의 설익은 관심과 질문에, 그리고 이름 없는 시골 교회 전도사의 애틋한 사모의 정에 일일이 답서를 해주셨다. 필자도 한신에 몸담은 지 24년째가 되다 보니, 못난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제자 되는 학생과 후배들의 연하장을 많이 받는다. 일일이 답장을 하려고 애쓰지만, 막상 해보니 그 일이 쉽지 않다. 연말이 오면 나는 그 일을 능히 하셨던 장공 선생님의 그 크신 인격을 우러러 사모하면서 부족한 나의 정성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질책한다.


대학 재학중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후, 필자는 1964년 가을, 23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식은 가을 졸업생수가 적어서 봄에 하게 되었다. 졸업식이 끝난 후, 용기를 내어 장공 선생과 이우정 선생과 함께 졸업기념 사진 한 장을 현관 앞에서 찍었다. 졸업식이 끝난 후, 수유리 캠퍼스는 제자들의 세상과 목회현장으로 내어 보내시는 스승들을 쓸쓸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식이 모두 끝나고, 하객들도 어느 정도 헤어져 돌아갈 즈음에, 도서관 사서로 일하시던 장공 선생님의 따님 김혜원 선생께서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네주시면서, “아버님이 주신 거예요, 졸업을 축하해요”라고 말하였다.


입학 때도 쑥맥이었지만, 졸업 때도 여전히 쑥맥이었던 필자는 변변히 김혜원 선생님께 감사도 못드리고 봉투를 받아들고 귀가하였다. 물론 장공 선생님께도 ‘귀중한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다만 말 없으신 스승님의 크신 사랑과 격려를 온 몸 가득히 감지할 뿐이었다. 그 봉투 안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니 천국이 그의 것이요…”(心虛者爲福天國而基所有也)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을 쓰신 휘호 한 점과, “널리 민중을 사랑하고 어짐을 몸에 익히라”(汎愛衆而親仁)는 한 점의 귀한 붓글씨 글을 내려 주셨다. 철없는 학생이 청원하지도 않았고, 도저히 그런 귀한 선물을 받을 줄 꿈도 꾸지 못했던 학생에게 장공 선생은 평생 잊지 못할 선물로써, 평생 목사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지표를 내려 주셨던 것이다.


[2] 처음으로 올린 선생님 전상서


철없던 쑥맥 학생이 무슨 섭리의 손길에 끌려서인지 모교의 앞마당을 빗자루로 쓰는 말직의 심부름을 한 지도 13년이 되었던 1983년 2월, 필자는 벼르던 유럽 여행을 홀로 떠났다. 무슨 특별 회의가 있어서도 아니요, 연구과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관광여행은 더욱더 아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바람을 쏘이고 싶었다. 적금을 타게 된 아내에게 부탁하니 서슴없이 여비로 적금 탄 것을 내어 주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역전 근방 터키인이 경영하는 값싼 여관방에 짐을 풀고, 손규태 목사님께 전화 연락을 했다. 손규태 목사의 부인 김윤옥 선생과는 졸업 동기도 되니까 매우 반갑게 낯선 여행객을 맞아 주었다. 독일에 오는 동문들은 모두 손 목사 댁에서 지내고, 또 그런 봉사가 기쁨이고 보람이니 당장 짐을 옮기자고 우긴다. 필자는 손목사 내외의 진정한 헌신과 사랑에 감사하면서, 나까지 폐를 끼쳐 하루라도 한국에서 온 손님의 숙박이 그칠 날 없는 목사관을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정성껏 마련해 주신 저녁 대접을 받고서, 나는 손규태 목사가 캐나다에서 입수한 『범용기』 1, 2, 3권을 빌려 손에 들고 여관방에 돌아왔다.


1983년 『범용기』는 한국에 자유롭게 유포되지 못한 불온 서적(?)이어서 나는 독일 객지 여관방에서 밤을 새워 그 책을 읽었다. 읽어 갈수록, 존경하는 장공 스승님의 일본 청산학원과 미국 유학시절 고생하시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한없이 눈물이 나왔다. 세상에 둘도 없으신 우리 큰 선생님이 그토록 고생을 하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크신 뜻, 초지일관 뚜벅뚜벅 쟁기 잡은 손 뒤를 돌아보지 않으시니, 하늘이 장공을 믿고 사랑하여 크게 쓰시고 또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 팔십 평생 모진 바람 견디어 내시며, 진리의 외길을 걸으실 때, 교권주의자, 교회 정치꾼, 세상 권력자, 주위 아첨꾼들이 얼마나 선생님을 괴롭게 했던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많은 고생을 했으면서도, 그런 개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는 그동안 들려주시지 않았던 선생님의 과묵하심이 더욱더 그리웠다. 문득 선생님이 몹시 그리웠다. 홀로 유럽의 객지에 나온 여수가 겹쳤음일까? 나는 펜을 들어 처음으로 “선생님 전상서”의 긴긴 서신을 캐나다 주소로 써서 보냈다.


귀국 후, 봄 학기가 한창 진행될 때, 우여곡절을 거쳐 전달된, 편지에 대한 장공 선생님의 답서를 받게 되었다. 타자기 4쪽에 쓰신 긴 편지였고, 필자가 직접 장공으로부터 받은, 처음이요 마지막 편지였다. 그 일부를 공개한다. 선생님도 용서하시리라.


“사랑하는 김경재님,
Frankfurt에서의 편지 심부(心府)에 사무칩니다. 訓長 노릇 하던 사람은 자기 마음 깊은 데를 알아주는 後輩를 갖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孔子가 “得天下之英才而敎育之三樂”이라고 한 것도 공자의 심정과 포부를 알아줄 거라는 데서 ‘樂’이었을 것입니다…(중략)…
내가 敬宰 敎授에게 기대하는 것은 韓國은 Europe과 달라서 ‘크리스텐돔’이 아니고 復數宗敎의 나라기 때문에, 그 다채로운 在來宗敎의 누천년 묵은 토양을 개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종교 자체 내에 능성한 사람으로서는 자기 종교의 편중 때문에 학적으로 공정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世界의 빛’이라는 것이 공인되는 오늘에 있어서는 기독교적 側光 없이 세계의 學으로 등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치사회적 문제로 망명길에 오르다시피 하시고, 정치사회적 신학 주제가 초미의 관심을 끌던 그때에도, 제자의 어느 부분을 보셨는지 몰라도, 아들 같은 제자들을 후배로까지 불러 주시면서, 기장과 한신대의 종교-문화신학의 과제를 강조하신 깊은 교육자로서의 격려와 배려를 잊지 못한다.


편지 말미에 스승님은 한신의 교육기관이 양의 부피보다는 질의 충실을 기하는 산출장이 되어 주기를 당부하셨고, 교육에 임하는 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무’(無)와 ‘허’(虛)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오늘도 선생님의 편지를 처음 꺼내보면서, 여전히 쑥맥 같은 못난 제자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선생님을 우러러 본다. 필자에게 심어진 선생님의 인상은 세상 사람이 알아주든 말든지, 진실과 성실로서 초지일관 뚜벅뚜벅 복음의 밭이랑을 갈아가는 자세이다. 모든 것은 때가 되면, 하늘이 추수하실 것을 믿으면서.